5화(5,320자)

새 도장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오후 세 시⁠, 안치실은 지하 1층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공기가 한 겹 차가워지고 소독약 냄새가 짙어졌다⁠. 복도 벽에 「⁠입관 17⁠:00 특1호실 금판술님⁠」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미송이 종이 앞에서 혈압계 가방을 어깨에 메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의 등급을 두고 장례식장 직원과 한바탕 하고 내려온 참이었다⁠.

“⁠언니가 맨 아래 칸 골랐다며⁠.⁠”

“⁠아버지는 작업복 세 벌로 사신 분이야⁠.⁠”

“⁠그래도 마지막 옷이다⁠. 언니는 늘 그렇다⁠. 언니 생각이 맞으면 남 생각은 안 물어봐⁠.⁠”

미송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냉장 설비가 웅웅거리는 소리 위로 미송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송의 혈압계 가방을 들어 주려 했고⁠, 미송이 가방을 홱 당겼다⁠.

“⁠아버지 쓰러지시고 세 해 동안 언니 몇 번 왔노⁠? 일 년에 두 번⁠. 설하고 추석⁠. 내는 대구에서 안동까지 한 달에 두 번 왔다⁠. 혈압약 바꾸고⁠, 혈전약 맞추고⁠, 낙강병원 신경과 교수한테 전화하고⁠. 그동안 언니는 경주 어디 무덤 파고 있었다⁠.⁠”

“⁠고분이야⁠.⁠”

“⁠무덤이나 고분이나⁠!⁠”

미송은 무덤 소리를 하고 나서 스스로 우스웠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과 울음이 한 얼굴에서 서로 밀었다⁠. 미송은 결국 웃음을 삼키고 벽에 기댔다⁠.

“⁠태구가 우리 채헌이 등록금 두 해를 대 줬다⁠. 간호사 월급으로는 의대 등록금이 안 된다⁠. 채헌이 아빠는 한 푼도 안 보내고⁠. 태구가 누나 걱정 말라고⁠, 형제가 그런 거 하라고 있는 거라고⁠. 그런 태구가 가짜 유언장을 만들었다꼬⁠? 언니는 증거도 없이 흙만 보고 그런 소리 하는 거다⁠.⁠”

“⁠증거를 찾는 중이야⁠.⁠”

“⁠찾아서 뭐 할 건데⁠? 태구 감옥 보낼 거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미송은 벽에서 등을 뗐다⁠.

“⁠하나만 물어볼게⁠. 아버지 도장⁠, 언니 본 적 있나⁠? 새 거⁠.⁠”

“⁠아니⁠.⁠”

“⁠나는 봤다⁠. 2024년 1월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 응급실에서 아버지 양복 웃옷을 내가 받았다⁠. 안주머니에 늘 있던 상아 도장이 없더라⁠. 구급대원이 옷을 자르면서 떨어졌는지⁠, 누가 주웠는지 끝내 못 찾았다⁠. 2월에 형부가 시내 인장사에서 새로 파 왔다⁠. 은행 일 보려면 도장이 있어야 한다꼬⁠. 그 뒤로 형부가 맡아 뒀다⁠. 아버지 손에는 한 번도 안 갔다⁠.⁠”

“⁠한 번도⁠?⁠”

“⁠아버지가 도장 달라 카시면 형부가 필요한 서류를 들고 와서 같이 찍었다⁠. 그거는 내가 병원에서 몇 번 봤다⁠.⁠”

미송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사월에 형부랑 태구가 밤에 병실에 한 번 다녀갔다 카더라⁠. 야간 간호사가 그러던데⁠, 무슨 일인지는 모른다⁠. 나는 그 주에 낮 근무였다⁠.⁠”

미송이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복도에 남아 벽의 종이를 보았다⁠. 「⁠입관 17⁠:00⁠」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

빈소로 올라오니 문상객 줄에 흰 머리의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시내에서 솔빛문구를 하는 노인이었다⁠. 아버지의 바둑 친구였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에는 풍산까지 바둑판을 들고 찾아가 왼손으로 돌을 놓는 아버지와 한 판에 세 시간씩 두었다고 했다⁠.

노인은 절을 하고 나서 나를 붙잡았다⁠.

“⁠판술이가 왼손으로 바둑을 두는데⁠, 돌을 놓을 때마다 판 귀퉁이를 다 쓸고 다녔다⁠. 왼손잡이 바둑은 그래⁠. 그래도 집 계산은 나보다 빨랐다⁠.⁠”

나는 노인을 상주 휴게실로 모셨다⁠.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고리 안에서 태구의 봉투를 꺼냈다⁠. 종이는 펴지 않고⁠, 봉투째 노인 손에 쥐여 주었다⁠.

“⁠이 종이⁠, 어디 물건인지 아세요⁠?⁠”

노인은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꺼내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그다음 형광등에 비춰 들었다⁠. 미색 한지 안쪽에 연한 솔잎 무늬가 비쳤다⁠. 종이를 뜰 때 넣는 무늬였다⁠.

“⁠솔빛 한지 편지지⁠. 전주 공방 거다⁠. 우리 가게가 안동에서 혼자 받는다⁠.⁠”

“⁠언제부터 나온 거예요⁠?⁠”

“⁠솔잎 무늬는 재작년 봄부터다⁠. 2025년⁠. 그 전에는 매화 무늬였다⁠. 솔잎으로 바꾼 해에 공방 사장이 와서 우리 가게 이름하고 같다고 우리부터 줬다⁠.⁠”

노인은 종이를 형광등에서 내리며 아래쪽 귀퉁이를 다시 비췄다⁠.

“⁠봐라⁠. 솔잎 세 가닥이 한 묶음이다⁠. 매화 무늬 때는 이런 게 없었다⁠.⁠”

2023년 9월 2일이라고 적힌 종이가⁠, 2025년 봄에 처음 나온 종이였다⁠. 흙으로 치면 신라 무덤에서 플라스틱 숟가락이 나온 것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물었다⁠.

“⁠이 편지지⁠, 최근에 사 간 사람 기억나세요⁠?⁠”

“⁠한 권에 만 이천 원이라 잘 안 나간다⁠. 사월에 하나 나갔다⁠.⁠”

노인이 나를 보았다⁠.

“⁠너거 사위가 사 갔다⁠. 은행 다니던 사위⁠. 편지지 한 권하고 연필 한 자루⁠. 요새 누가 연필을 사 가나 싶어서 기억한다⁠.⁠”

*

식당 구석 상에서는 어머니와 하소옥이 마주 앉아 육개장을 먹고 있었다⁠. 둘 다 상복 차림이었다⁠. 하청 사장들은 두 사람의 상을 피해 멀찍이 돌아다녔고⁠, 도우미들도 두 사람 앞에는 반찬 접시만 놓고 얼른 물러났다⁠. 국그릇 두 개에서 김이 똑같이 올라갔다⁠. 나는 노인을 배웅하고 돌아오다가 두 사람 옆 상에 앉았다⁠. 어머니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에 대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육개장이가⁠, 고깃국이가⁠. 고사리가 울고 가겠다⁠.⁠”

“⁠토란대를 안 넣었네요⁠.⁠”

하소옥이 국물을 맛보고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가 숟가락을 멈췄다⁠.

“⁠니 국수 장사 했다 캤제⁠?⁠”

“⁠이십 년 했어요⁠. 풍산 장터 앞에서요⁠.⁠”

“⁠육수는 뭘로 냈노⁠?⁠”

“⁠멸치하고 디포리요⁠. 겨울엔 사골 조금⁠.⁠”

“⁠디포리 넣는 집이 잘한다⁠.⁠”

어머니는 다시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가 내려놓았다⁠. 장례식장 육개장 앞에서 열세 해 전 갈라선 아내와 아홉 해를 같이 산 여자가 국물 맛으로 한편이 되었다⁠. 하청 사장 하나가 지나가다 두 사람을 보고 국그릇을 든 채 방향을 틀었다⁠.

“⁠세 해 동안 그 사람 오줌 받을 때 욕했제⁠?⁠”

“⁠처음엔 하셨어요⁠. 나중엔 미안하다 하셨어요⁠.⁠”

“⁠미안하다 캤다꼬⁠? 판술이가⁠?⁠”

“⁠네⁠.⁠”

“⁠내한테는 사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하던 말이다⁠.⁠”

어머니가 숟가락을 상에 내려놓았다⁠. 숟가락이 상에 닿는 소리가 작았다⁠. 어머니는 하소옥의 손을 보지 않고 국그릇을 보며 물었다⁠.

“⁠세 해 동안 돈은 받았나⁠?⁠”

“⁠생활비는 주셨어요⁠. 간병비는 안 받았어요⁠.⁠”

“⁠와⁠?⁠”

“⁠같이 사는 사람이 무슨 간병비를 받아요⁠?⁠”

“⁠바보⁠.⁠”

어머니는 한마디를 던지고 고개를 돌렸다⁠. 진주 귀걸이가 흔들렸다⁠. 하소옥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옆 상에서 두 사람이 남긴 국그릇을 보았다⁠. 아버지는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빚졌고⁠, 하소옥에게 세 해 치 품삯을 빚졌다⁠. 빚은 갚을 사람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받을 사람이 남은 사람들 사이를 떠돌 뿐이다⁠.

*

다섯 시 이십 분 전⁠, 장례식장 주차장 범곤의 차 안이었다⁠. 에어컨을 틀어 놓았는데 차 안이 더웠다⁠. 범곤은 운전석에서 핸들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차는 서 있는데 운전하는 사람처럼⁠.

“⁠사억이야⁠.⁠”

범곤이 먼저 말했다⁠.

“⁠퇴직금 이억에⁠, 대구 아파트 담보로 이억⁠. 영천 상가 분양이었어⁠. 시행사가 이 년 만에 부도났어⁠. 상가는 기초만 파 놓고 멈췄고⁠.⁠”

“⁠아파트 담보는 언제 잡았어요⁠?⁠”

“⁠이 년 전⁠.⁠”

“⁠내 이름도 들어간 아파트예요⁠.⁠”

“⁠당신 인감은 안 썼어⁠. 내 지분만 잡았어⁠. 그거라도 지키려고⁠.⁠”

범곤의 손이 핸들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서른두 해 동안 저 손이 고객 앞에서 서류를 넘기고⁠, 내 앞에서 김치 통을 열고⁠, 아이를 안았다⁠. 아이는 지금 캐나다에 있었다⁠.

“⁠태구가 칠 퍼센트 주면 다 갚아⁠. 이자도 갚고 아파트도 지키고⁠. 선희야⁠, 나 예순이야⁠. 다시 시작할 나이가 아니야⁠.⁠”

“⁠그래서 아버지 도장을 썼어요⁠?⁠”

범곤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문방구 영감님이 당신이 사월에 솔잎 편지지 한 권하고 연필을 사 갔대요⁠. 태구 유언장이 솔잎 편지지에 쓰여 있어요⁠. 2023년이라고 적힌 종이가 2025년에 나온 종이예요⁠.⁠”

차 안이 조용했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 났다⁠. 범곤은 핸들에서 손을 떼고 돋보기를 꺼내 썼다가 다시 벗었다⁠. 할 말을 찾는 손이었다⁠.

“⁠편지지는 태구가 사 오라고 해서 사다 줬어⁠. 장인어른 병실에 놓고 쓰신다고⁠. 그게 다야⁠.⁠”

“⁠연필은요⁠?⁠”

“⁠연필은 내가 쓰려고⁠.⁠”

“⁠당신 연필 안 쓰잖아요⁠. 서른두 해 동안 한 번도⁠.⁠”

범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차 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들어오자 범곤이 내 팔을 잡았다⁠.

“⁠태구 편에만 서 줘⁠. 그거면 다 끝나⁠.⁠”

“⁠발인 끝나고 우리 얘기 따로 해요⁠.⁠”

“⁠무슨 얘기를 따로 해⁠?⁠”

“⁠우리 얘기요⁠.⁠”

범곤이 내 팔을 놓았다⁠. 예순 살 남자가 운전석에서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나는 차 문을 닫았다⁠.

*

다섯 시⁠, 입관실은 하얀 타일 방이었다⁠. 염습을 마친 아버지가 삼베 수의를 입고 누워 있었다⁠. 맨 아래 칸 수의였다⁠. 미송이 수의를 보고 나를 한 번 흘겨보더니⁠, 아버지 얼굴을 보고 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례 지도사가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 드리라고 했다⁠. 재묵이 먼저 다가갔다가 무섭다며 뒤로 물러섰고⁠, 어머니가 재묵의 등을 떠밀었다⁠. 재묵은 결국 아버지 발목을 잡고 울었다⁠. 태구는 아버지 오른손을 잡았다⁠. 오른손은 세 해 동안 굽은 채로 굳어 있었다⁠. 손가락이 안쪽으로 말려 주먹도 아니고 편 손도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왼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엄지로 손가락 마디를 쓸다가 가운뎃손가락 첫 마디에서 멈췄다⁠. 딱딱하게 솟은 굳은살이 있었다⁠. 볼펜이 닿는 자리였다⁠. 연필을 오래 쥔 아이들 손가락에 생기는 자리⁠, 발굴 일지를 삼십 년 쓴 내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있는 자리⁠. 아버지의 굳은살은 왼손에 있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은 매끈했다⁠. 세 해 동안 한 번도 펜을 쥐지 않은 손이었다⁠.

하소옥이 입관실 문 옆에 상복을 입고 서 있었다⁠. 어머니가 하소옥을 손짓으로 불렀다⁠. 하소옥은 머뭇거리다 다가와 아버지 왼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내 손 옆이었다⁠. 하소옥의 손끝이 굳은살을 한 번 쓸고 지나갔다⁠.

“⁠아침마다 이 손에 볼펜 쥐여 드렸어요⁠. 이 자리에 반창고 붙여 드리면 떼시고⁠.⁠”

태구가 오른손을 놓았다⁠. 오른손이 굽은 채로 수의 위에 내려앉았다⁠. 태구는 굽은 손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입관실을 먼저 나갔다⁠.

*

입관이 끝나고 빈소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범곤이 내 옆을 지나쳤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범곤은 상주 휴게실 옆⁠, 태구가 따로 쓰는 작은 방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복도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았다⁠. 정수기는 작은 방 문 바로 옆이었다⁠. 물이 차는 동안 문틈으로 범곤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은행 창구 목소리가 아니었다⁠.

“⁠처형이 편지지를 알아⁠. 문방구 영감이 다 불었어⁠. 도장 얘기도 곧 나와⁠.⁠”

태구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종이컵이 넘쳐 손등으로 찬물이 흘렀다⁠. 나는 물을 버리고 빈 컵을 구겨 쥐었다⁠. 저고리 안 두 봉투 중 하나가 나를 향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것인지 알았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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