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74자)

둘째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정오에 빈소로 돌아오니 식당 입구에 접이식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갈색 종이봉투가 피라미드처럼 쌓였고⁠, 봉투마다 동그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재묵 로스터리 · 드립백 · 위로의 한 잔⁠」 스티커 귀퉁이에 큐아르 코드가 찍혀 있었다⁠. 탁자 뒤에서 재묵이 문상객에게 봉투를 두 개씩 쥐여 주며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먼 길 오셨는데 커피라도 한 잔 하이소⁠. 아⁠, 돈 안 받습니다⁠. 맛있으시면 코드 한 번만 찍어 주시고⁠.⁠”

재묵은 쉰넷이었다⁠. 서울 연남동과 망원동에서 커피 가게를 차례로 열었다가 차례로 닫았다⁠. 가게를 닫을 때마다 볶은 원두가 남았고⁠, 남은 원두는 드립백이 되어 명절마다 우리 집 현관에 상자째 왔다⁠. 아버지 빈소에도 왔다⁠. 상자 넷이었다⁠.

“⁠누나⁠!⁠”

재묵이 탁자를 돌아 나와 나를 끌어안았다⁠. 버스에서 밤을 샌 냄새와 원두 냄새가 같이 났다⁠. 재묵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 있다가 떨어지며 코를 훌쩍였다⁠.

“⁠아버지 얼굴 봤나⁠?⁠”

“⁠어제 안치실에서⁠.⁠”

“⁠나는 아직 못 봤다⁠. 무서버서⁠.⁠”

“⁠입관 때 봐⁠. 오늘 다섯 시⁠.⁠”

재묵은 고개를 끄덕이고 드립백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에티오피아 · 꽃향 · 산미 높음⁠」 나는 봉투를 상복 소매에 넣었다⁠. 식당 안쪽 상에 범곤이 앉아 있었다⁠. 나를 보고 일어나려다 도로 앉았다⁠.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은행 본점 누군가와 통화하는 시늉을 했다⁠. 범곤의 휴대전화 화면은 꺼져 있었다⁠.

*

장례식장 뒷마당 흡연 구역은 철제 재떨이 하나와 플라스틱 의자 셋이 전부였다⁠. 재묵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은 붙이지 않았다⁠. 커피 가게를 처음 열던 해에 끊은 담배라고 했다⁠. 입에 물고 있으면 생각이 정리된다고⁠.

“⁠태구가 삼억 준대⁠.⁠”

“⁠뭐를⁠?⁠”

“⁠내 몫⁠. 아버지 회사 주식이랑 땅이랑⁠, 상속받을 거 전부⁠. 이사회 끝나고 바로 현금으로⁠.⁠”

재묵은 안주머니에서 접힌 A4 용지를 꺼냈다⁠. 「⁠상속분 양도 약정서⁠」 금목토건 전무 이름으로 뽑은 서류였다⁠. 양도인 칸에 재묵의 이름이 이미 타자로 쳐져 있었고⁠, 금액 칸에 「⁠금 삼억 원정⁠」이 적혀 있었다⁠. 서명란만 비어 있었다⁠.

“⁠니 몫이 얼만지는 알고 파는 거야⁠?⁠”

“⁠모른다⁠. 누나는 아나⁠?⁠”

“⁠나도 몰라⁠. 그러니까 모르는 걸 왜 지금 파냐고⁠?⁠”

“⁠연남동 가게 빚이 일억 이천이다⁠. 이번 달 말까지 안 갚으면 집 보증금에 압류 들어온다⁠. 누나⁠, 모르는 거 기다리다가 아는 거 날아간다⁠.⁠”

재묵이 불 안 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돌렸다⁠. 손톱 밑에 원두 기름이 까맣게 배어 있었다⁠.

“⁠태구 유언장이 진짜면 어차피 회사는 태구 거다⁠. 그래도 자식은 유류분이라고 법이 정한 몫의 반은 받는다며⁠. 태구가 그거까지 쳐서 삼억 주겠다는 거다⁠. 형제끼리 법원 가서 싸우는 것보다 낫다 아이가⁠.⁠”

“⁠태구 유언장이 가짜면⁠?⁠”

재묵이 담배를 떨어뜨렸다⁠. 주워서 다시 입에 물었다⁠.

“⁠누나⁠, 그거 무슨 소리고⁠?⁠”

나는 풍산에서 본 것을 말했다⁠. 주소⁠, 연습장⁠, 요양보호사의 기록⁠. 범곤이 4월에 은행에 유언장을 냈다는 것⁠. 재묵은 처음에는 고개를 저었고⁠, 범곤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젓던 것을 멈췄다⁠.

“⁠형부가 사월에⁠?⁠”

“⁠응⁠.⁠”

“⁠사월 십일이다⁠.⁠”

“⁠뭐가⁠?⁠”

재묵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신저를 열었다⁠. 엄지로 한참 밀어 올렸다⁠. 화면에 범곤의 이름이 떴다⁠.

「⁠2027⁠.04⁠.10 오후 11⁠:52 범곤⁠: 처남⁠, 장인어른이 유언 쓰셨네⁠. 회사는 태구가 맡기로⁠. 처남 몫은 태구가 섭섭지 않게 챙긴다고 하니 걱정 말고⁠. 사진 보내니 혼자만 봐⁠」

문자 아래에 회색 네모가 있었다⁠. 「⁠사진 · 보관 기간이 지났습니다⁠」

“⁠사진은 안 열린다⁠. 그때 한 번 보고 말았다⁠. 아버지 글씨더라⁠. 반듯한 거⁠.⁠”

“⁠날짜는 봤어⁠?⁠”

“⁠날짜를 누가 보노⁠. 아버지 글씨에 회사는 태구 거라 카이까네⁠, 아 그렇구나 했지⁠.⁠”

재묵은 범곤의 문자를 받고 한 달 동안 아버지께 전화를 한 번도 안 했다고 했다⁠. 회사가 태구 거라는데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겠냐고⁠. 재묵이 담배를 재떨이에 꽂았다⁠. 불 안 붙인 담배가 재 위에 꼿꼿이 박혔다⁠.

“⁠누나⁠, 각서 쓰지 말라는 거제⁠?⁠”

“⁠이사회 끝날 때까지만⁠.⁠”

“⁠이사회 끝나면 늦다⁠.⁠”

“⁠그래도⁠.⁠”

재묵은 대답하지 않고 약정서를 도로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안주머니 위로 손바닥을 한 번 눌렀다⁠.

*

범곤은 식당 구석 상에서 편육 접시를 앞에 두고 있었다⁠. 젓가락은 접시 옆에 가지런했고 편육은 한 점도 줄지 않았다⁠. 벽 텔레비전에서 낮 뉴스가 흘러나왔다⁠. 「⁠한국은행 기준금리 동결⁠… 건설 업계 “⁠버티기 한계⁠”⁠」 범곤은 화면을 보는 척하다가 내가 맞은편에 앉자 젓가락을 집었다⁠.

“⁠어디 갔다 왔어⁠? 태구가 아침부터 누나 찾았어⁠.⁠”

“⁠풍산이요⁠. 여보⁠, 사월 십일 밤에 재묵이한테 사진 보냈어요⁠?⁠”

범곤의 젓가락이 편육 위에서 멈췄다⁠. 돋보기를 벗어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았다⁠. 은행 창구에서 어려운 고객을 만나면 하던 동작이었다⁠. 돋보기를 벗으면 상대 얼굴이 흐려지고⁠, 흐린 얼굴 앞에서는 말이 부드럽게 나온다고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처남 걱정할까 봐 보낸 거야⁠. 장인어른이 회사는 태구한테 맡기신다고 하셨으니까⁠.⁠”

“⁠사진은 어디서 났어요⁠?⁠”

“⁠태구가 보내 줬지⁠.⁠”

“⁠사월 십일이면 아버지가 7층에 입원해 계실 때예요⁠. 아버지가 병원에서 유언장을 쓰셨어요⁠?⁠”

“⁠2023년에 쓰신 거라니까⁠. 태구가 금고에서 꺼내서 나한테 보여 준 거고⁠.⁠”

“⁠그럼 왜 하필 아버지 입원하신 날 밤에 꺼냈는데요⁠?⁠”

“⁠선희야⁠.⁠”

범곤이 목소리를 낮췄다⁠. 옆 상의 하청 사장들이 고개를 돌렸다가 도로 돌렸다⁠.

“⁠은행 심사가 그 주에 있었어⁠. 날짜 맞춘 거 아니야⁠. 당신은 우연이 겹치면 다 누가 묻어 놓은 걸로 보더라⁠. 땅을 너무 오래 팠어⁠.⁠”

범곤의 휴대전화가 상 위에서 떨었다⁠. 화면에 「⁠엄학선 과장(⁠시청⁠)⁠」이 떴다⁠. 범곤은 화면을 엎어 놓았다⁠. 휴대전화는 엎어진 채로 세 번 더 떨었다⁠. 범곤은 받지 않았고⁠, 나는 은행을 나온 지 다섯 해 된 사외이사에게 시청 도시계획과장이 왜 점심시간에 전화를 거는지 묻지 않았다⁠. 물으면 범곤은 또 우연이라고 할 사람이었다⁠.

“⁠이사회 끝나고 얘기해요⁠, 우리⁠.⁠”

“⁠무슨 얘기⁠?⁠”

“⁠사억이요⁠.⁠”

범곤의 얼굴이 하얘졌다⁠. 편육 한 점이 젓가락 끝에서 떨어져 새우젓 종지에 빠졌다⁠.

*

오후 한 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내렸다⁠. 일흔아홉⁠, 대구에서 혼자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검은 원피스에 진주 귀걸이를 하고⁠, 지팡이를 짚는 대신 우산처럼 팔에 걸고 있었다⁠. 미송이 달려가 팔을 잡자 어머니가 팔을 뺐다⁠.

“⁠내 다리 멀쩡하다⁠. 지팡이는 미송이 니 보라고 들고 온 기다⁠. 안 들고 오면 니가 잔소리하잖아⁠.⁠”

상조 팀장이 어머니를 보고 얼어붙었다⁠. 장례 절차에 열세 해 전 갈라선 아내의 자리는 없었다⁠. 상주석 옆에 앉혀야 할지⁠, 문상객 줄에 세워야 할지⁠. 팀장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팀장의 망설임을 단번에 잘랐다⁠.

“⁠나는 문상 온 사람이다⁠. 줄 서께⁠.⁠”

어머니는 문상객 줄 맨 뒤에 붙었다가⁠, 차례가 오자 지팡이를 미송에게 맡기고 제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향을 하나 꽂고⁠, 절은 한 번만 했다⁠. 두 번째 절을 기다리던 태구가 고개를 들자 어머니가 말했다⁠.

“⁠한 번이면 됐다⁠. 두 번은 살아 있을 때 실컷 했다⁠.⁠”

식당에서 누가 웃음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렸다⁠. 재묵이었다⁠.

*

어머니는 식당에서 하소옥을 찾아냈다⁠. 하소옥은 새벽에 빈소에서 나온 뒤로 식당 맨 구석 상에서 육개장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도우미들 손이 모자라자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어머니가 하소옥 앞으로 다가갔다⁠. 하소옥이 쟁반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니가 하소옥이가⁠?⁠”

“⁠예⁠.⁠”

식당이 조용해졌다⁠. 하청 사장들이 수저를 든 채 멈췄다⁠. 태구가 상주석에서 일어나 식당 입구까지 나왔다⁠. 어머니가 하소옥의 손에서 쟁반을 받아 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조 팀장을 불렀다⁠.

“⁠팀장님⁠, 상복 하나 더 가지고 오이소⁠.⁠”

“⁠예⁠? 누구⁠…⁠…⁠.⁠”

“⁠이 사람⁠. 삼 년 똥 받아 낸 사람이다⁠.⁠”

“⁠어머니⁠.⁠”

태구가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췄는데 식당 전체가 들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유언장 들고 와서 땅을 다 가져가겠답니다⁠.⁠”

“⁠땅은 땅이고 상복은 상복이다⁠. 니 아버지 똥 니가 한 번이라도 받았나⁠?⁠”

태구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태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팀장이 상복을 가지고 왔고⁠, 어머니가 직접 하소옥의 카디건을 벗기고 저고리를 입혔다⁠. 고름을 매어 주는 손이 빨랐다⁠. 사십 년 동안 자식 넷의 교복 단추를 채운 손이었다⁠. 하소옥은 어머니가 고름을 다 맬 때까지 숨을 쉬지 않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고맙습니다⁠.⁠”

“⁠고마울 거 없다⁠. 내가 할 일을 니가 했다⁠.⁠”

*

오후 두 시 반⁠, 어머니와 나만 제단 앞에 남았다⁠. 어머니는 영정을 한참 보다가 내 저고리 앞섶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두 봉투가 종이 소리를 냈다⁠.

“⁠거기 든 기가⁠?⁠”

“⁠네⁠.⁠”

“⁠어느 기 진짜고⁠?⁠”

“⁠아직 몰라요⁠.⁠”

“⁠니는 흙을 파니까 알겠지⁠.⁠”

어머니는 영정 앞 국화 한 송이를 바로 꽂았다⁠. 비스듬히 꽂힌 것이 어머니 눈에 거슬렸다⁠. 꽃대를 바로 세우며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풍산 땅 말이다⁠.⁠”

“⁠네⁠.⁠”

“⁠이혼할 때 니 아버지가 그 땅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라 카더라⁠. 물려받은 땅은 나눌 재산에 안 들어간다꼬⁠. 내는 그 땅을 니 아버지가 돈 주고 산 걸 똑똑히 안다⁠. 1987년이다⁠. 내 계 탄 돈도 들어갔다⁠. 근데 서류가 없더라⁠. 등기소에서 떼 온 거로는 언제 누구한테 샀는지가 안 나오고⁠, 계약서는 니 아버지가 없다 카고⁠. 변호사가 서류 없으면 못 이긴다 카데⁠.⁠”

어머니가 국화에서 손을 뗐다⁠.

“⁠그 서류가 어디 갔는지 내는 아직도 궁금하다⁠.⁠”

어머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식당으로 갔다⁠. 미송이 혈압계를 들고 쫓아갔다⁠.

나는 제단 앞에 혼자 무릎을 꿇었다⁠. 저고리 안에서 두 봉투가 가슴을 눌렀다⁠.

2014년 3월이었다⁠. 아버지가 대구 우리 아파트에 왔다⁠. 밤 열 시였고⁠, 갈색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봉투 안에 1987년 풍산 과수원 매매 계약서와 잔금 영수증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봉투를 탁자에 놓고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이것만 좀 맡아 달라고 했다⁠. 니 엄마가 저 땅까지 가져가면 회사가 넘어간다고⁠. 회사가 넘어가면 직원들 밥줄이 끊긴다고⁠.

나는 봉투를 받았다⁠. 안방 장롱 맨 아래 칸⁠, 겨울 이불 밑에 넣었다⁠. 어머니의 변호사가 전화로 물었을 때⁠, 아버지가 풍산 땅 서류를 맡긴 적이 없다고 답했다⁠. 어머니는 풍산 땅을 뺀 재산의 일부만 받고 아버지와 갈라섰다⁠.

봉투는 지금도 대구 장롱 겨울 이불 밑에 있다⁠. 열세 해 동안 겨울이 열세 번 왔고⁠, 나는 겨울 이불을 한 번도 꺼내 덮지 않았다⁠. 범곤이 추위를 타서 이불을 찾을 때마다 다른 이불을 꺼내 주었다⁠. 하소옥이 유언장을 이불 밑에 넣었다는 말을 새벽에 들었을 때⁠, 나는 하소옥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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