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58자)

여섯 시 이사회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접객실 상 네 개가 한 줄로 붙어 있었다⁠. 상 위에 흰 종이가 깔렸고⁠, 종이 위에 생수병과 이사회 자료가 자리마다 놓였다⁠. 「⁠금목토건 주식회사 임시 이사회 · 2027⁠. 5⁠. 13⁠. 06⁠:00 · 장소 낙강병원 장례식장 2층 접객실⁠」 장례식장 접객실에서 이사회를 연 회사는 금목토건이 처음일 것이다⁠. 벽에 붙은 「⁠음식물 반입 금지⁠」 종이 아래에 은행 지점장이 사 온 떡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 머리에 태구가 앉았다⁠. 의장 자리였다⁠. 왼쪽으로 전무⁠, 범곤⁠, 그리고 비어 있는 의자 하나⁠. 오른쪽에 새솔은행 안동지점장과 엄학선⁠. 벽 쪽 의자에 도윤구가 팔짱을 끼고 앉았다⁠. 재묵은 들어오자마자 접객실 구석의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이사회는 커피 없이 못 한다고 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내가 액자를 안고 들어서자 지점장이 일어났다가 앉았다⁠. 태구는 일어나지 않았다⁠.

“⁠상속인 자격으로 왔어⁠. 아버지 주식은 아직 우리 넷 거니까⁠.⁠”

“⁠앉아라⁠.⁠”

태구가 비어 있는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나는 앉지 않고 의자 옆에 액자를 세웠다⁠. 미송과 하소옥이 내 뒤 벽에 붙어 섰고⁠, 권 법무사가 문 옆 의자에 앉았다⁠.

전무가 목을 가다듬고 안건을 읽었다⁠. 「⁠제1호 의안⁠, 대표이사 선임의 건⁠. 제2호 의안⁠, 풍산 일반산업단지 사업 관련 토지 담보 제공 승인의 건⁠.⁠」 지점장이 이어 받았다⁠. 담보로 잡을 풍산 땅은 고인의 개인 소유이고⁠, 은행은 4월에 받은 유언장 사본과 상속인들의 동의를 근거로 담보를 설정하려 한다고⁠. 오늘 아침 아홉 시까지 서류가 본점에 올라가야 대출이 산다고⁠.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지점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재묵이 주전자 앞에서 손을 들었다⁠.

“⁠저도요⁠.⁠”

*

나는 액자 뒤판을 열었다⁠. 기념사 원고 석 장과 태구의 유언장을 상 위에 나란히 펼쳤다⁠. 두 문서 옆에 하소옥의 유언장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하나씩 놓았다⁠. 왼손 연습장⁠, 마 씨의 요양 기록 사진⁠, 미송이 떼 온 응급실 기록과 간호 기록⁠, 하도급 계약서 도장 사진⁠, 재묵의 휴대전화 속 4월 10일 사진⁠, 범곤의 글러브박스에서 꺼낸 4월 9일 종이⁠, 남색 벨벳 주머니의 새 도장⁠, 아버지 휴대전화⁠.

상 위가 발굴 현장의 유물 판처럼 되었다⁠. 지점장이 생수병을 옆으로 치웠다⁠.

“⁠주소부터요⁠.⁠”

나는 태구의 유언장 주소 줄을 짚었다⁠. 2023년 9월 2일에 쓴 종이에 아버지가 2024년 3월에야 옮긴 풍산 주소가 있다⁠. 연습장에서 풍산 주소는 2024년 5월에 처음 나온다⁠.

“⁠종이요⁠.⁠”

솔잎 무늬를 형광등에 비쳐 보였다⁠. 2025년 봄에 처음 나온 편지지⁠. 문방구 노인이 기억하는 대로⁠, 4월에 범곤이 같은 편지지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사 갔다⁠.

“⁠도장⁠.⁠”

하도급 계약서 사진 속 깨진 귀퉁이와 유언장의 매끈한 테두리를 나란히 놓고⁠, 벨벳 주머니에서 새 도장을 꺼내 옆에 굴렸다⁠. 도장이 상 위를 반 바퀴 구르다 멈췄다⁠. 지점장이 도장 바닥을 들여다보고 유언장의 도장과 맞대 보았다⁠. 은행원은 도장을 오래 본 사람이었다⁠. 지점장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날짜⁠.⁠”

재묵의 휴대전화 화면을 상 가운데 놓았다⁠. 병실 시트 위 같은 유언장⁠, 「⁠2027년 4월 9일⁠」⁠, 도장 없는 이름⁠. 미송이 아침에 찍은 사진을 옆에 띄웠다⁠. 원본 날짜 「⁠3⁠」 밑의 「⁠7⁠」⁠, 「⁠9⁠」 밑의 「⁠4⁠」⁠, 「⁠2⁠」 밑의 「⁠9⁠」⁠, 숫자 주변의 일어난 종이 결⁠.

“⁠손등⁠.⁠”

간호 기록 출력물과 4월 9일 종이를 함께 놓았다⁠. 「⁠보호자가 손등 잡고 있음⁠. 환자 상지 회수 시도⁠, 고개 저음⁠.⁠」 그리고 「⁠금판⁠」 두 글자와 종이 밖으로 내달린 선⁠.

“⁠그리고 이거요⁠.⁠”

기념사 원고 세 번째 장과 유언장을 겹쳐 들고 접객실 창으로 갔다⁠. 아침 해가 정면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두 장을 창유리에 대자 「⁠회사는 태구가 끌고 간다⁠」가 하나로 포개졌다⁠. 엄학선이 의자에서 일어나 창으로 다가왔다가⁠, 포개진 글자를 보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확대경을 지점장에게 건넸다⁠. 획 밑의 흑연⁠, 높이가 다른 글자⁠, 끝 획 중간에 뭉친 잉크⁠.

“⁠사람 글씨는 같은 글자를 두 번 써도 안 포개져요⁠. 이 문장은 아버지가 한 번 쓰셨고⁠, 누가 한 번 더 따라 그렸어요⁠.⁠”

마지막으로 아버지 휴대전화를 상 가운데 놓고 영상을 틀었다⁠. 소리를 키웠다⁠. 「⁠2027년 3월 16일⁠. 나 금판술이다⁠. 풍산 상리 214번지⁠.⁠」 접객실이 조용해졌다⁠. 「⁠풍산은 담보로 못 잡는다⁠. 하청 돈은 옥동 사옥 팔아서 줘라⁠.⁠」 나는 영상을 아버지가 볼펜을 쥐는 데서 멈췄다⁠. 선희야⁠, 하는 대목은 틀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를 부른 대목은 이사회에 내놓을 것이 못 되었다⁠.

“⁠하소옥 씨 유언장은 연습장과 같은 손이고⁠, 마 씨가 그날 아침 열 시에 옆에 있었고⁠, 체온은 삼십육 도 팔 분이었고⁠, 응급실은 밤 아홉 시 십 분이었어요⁠. 쓰는 장면이 영상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어요⁠.⁠”

권 법무사가 문 옆에서 한마디 보탰다⁠.

“⁠영상은 받는 사람이 찍어서 그것만으로 유언은 못 된다⁠. 그래도 자필 유언장이 진짜라는 걸 받치는 데는 이보다 나은 게 드물다⁠.⁠”

*

범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다가 무릎이 상 모서리에 부딪혔다⁠. 생수병 하나가 쓰러졌고⁠, 범곤은 생수병을 세우지 않았다⁠.

“⁠도장은 제가 찍었습니다⁠.⁠”

지점장이 범곤을 보았다⁠. 범곤과 지점장은 같은 은행에서 이십 년을 일한 사이였다⁠.

“⁠4월 20일⁠, 장인어른 퇴원하시던 날입니다⁠. 장인어른이 뒷좌석에서 주무실 때 제 차 앞자리에서 찍었습니다⁠. 장인어른은 모르셨습니다⁠. 날짜는 그 전에 태구가 고쳐 왔고요⁠. 3월 18일 공증사무소 전화도 제가 받았습니다⁠. 가족이 정리한다고 취소했습니다⁠.⁠”

“⁠형부⁠.⁠”

미송이 벽에서 한 걸음 나왔다⁠.

“⁠사억 때문입니다⁠. 칠 퍼센트면 갚을 수 있었습니다⁠.⁠”

범곤은 나를 보지 않았다⁠. 지점장을 보며 말했다⁠. 은행 창구 목소리가 아니었다⁠. 서른두 해 동안 내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범곤은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상 위에 내려놓았다⁠.

“⁠사외이사 사임하겠습니다⁠. 오늘 날짜로⁠.⁠”

범곤이 접객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재묵이 주전자 불을 껐다⁠. 물이 다 끓어 주전자가 딸깍 소리를 냈다⁠.

*

태구는 범곤이 나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장 자리에서 상 위의 유물들을 하나씩 보았다⁠. 4월 9일 종이 앞에서 오래 멈췄다⁠. 태구가 손을 뻗어 종이를 집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누나⁠.⁠”

“⁠응⁠.⁠”

“⁠누나 말 다 맞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태구가 일어났다⁠. 의장 자리에서 일어나니 키가 컸다⁠. 아버지보다 컸다⁠.

“⁠누나가 이기면 뭐가 남노⁠? 은행 돈 안 나온다⁠. 고시 엎어진다⁠. 도윤구 사장님 회사 반이 이번 달에 문 닫는다⁠. 컨테이너 백사십 명이 넉 달 치를 못 받는다⁠. 직원 여든 명 월급이 다음 달부터 밀린다⁠. 아버지가 영상에서 하신 말씀 들었제⁠? 회사는 태구가 하던 대로 해라⁠. 아버지도 회사는 내가 하라 카셨다⁠. 내가 한 거는 아버지가 입으로 하신 말을 아버지 글씨로 옮긴 거다⁠. 그 대가로 이백이십 명이 길에 나앉는 게 맞나⁠?⁠”

도윤구가 팔짱을 풀었다⁠.

“⁠큰따님⁠, 대표님 말씀이 맞심더⁠. 우리는 회장님 글씨가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심더⁠. 돈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입니더⁠.⁠”

엄학선이 안경을 고쳐 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태구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은행 돈은 안 나온다⁠. 고시는 엎어진다⁠. 백사십 명은 기다려야 한다⁠. 태구가 진 짐은 진짜였다⁠. 다만 태구가 고른 길이 아버지가 막으려던 길이었다⁠.

“⁠아버지가 하신 말 끝까지 들었어⁠?⁠”

나는 휴대전화를 다시 들어 영상을 조금 앞으로 돌렸다⁠. 「⁠풍산은 담보로 못 잡는다⁠. 하청 돈은 옥동 사옥 팔아서 줘라⁠.⁠」

“⁠아버지는 하청 돈을 갚으라고 하셨어⁠. 풍산을 잡히지 말고⁠. 니한테 회사를 하던 대로 하라고 하신 건⁠, 빚을 내서 키우지 말고 있는 걸로 갚으라는 말이었어⁠.⁠”

엄학선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류 가방을 닫는 소리가 컸다⁠.

“⁠시청은 고시를 미루겠습니다⁠. 땅 주인 동의가 없는 산단은 고시할 수 없습니다⁠. 원칙대로⁠.⁠”

“⁠과장님⁠, 공장 두 개는요⁠?⁠”

도윤구가 물었다⁠. 산단이 서면 하청 일감이 몇 해 치는 생길 판이었다⁠.

“⁠구미로 가겠지요⁠. 아니면 다른 땅을 찾겠지요⁠. 저도 찾아보겠습니다⁠.⁠”

엄학선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안경을 벗은 얼굴이 생각보다 늙어 보였다⁠. 쉰여섯⁠, 안동에서 나고 자라 안동시청에서 서른 해를 일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엄학선은 안경을 다시 쓰고 영정이 있는 빈소 쪽 벽을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방향이었다⁠. 그리고 비서를 데리고 나갔다⁠. 처남의 논 이야기는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않아도 엄학선의 등이 알고 있었다⁠.

지점장이 서류 가방에서 계산기를 꺼냈다⁠. 은행원은 계산기를 들면 말이 줄었다⁠.

“⁠옥동 옛 사옥⁠, 작년 감정가가 오십이억입니다⁠. 하청 미지급금이 삼십일억이고요⁠. 급매로 팔아도 하청은 다 나갑니다⁠. 대신 산단 사업은 접으셔야 합니다⁠.⁠”

도윤구가 지점장의 계산기를 넘겨다보았다⁠. 숫자를 확인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팔짱을 다시 끼지 않았다⁠.

*

하소옥이 벽에서 나왔다⁠. 태구 앞 상 끝까지 와서 고개를 숙였다⁠.

“⁠태구 씨⁠, 저 풍산은 못 잡혀요⁠. 아버님이 그러라고 주신 땅이 아니에요⁠. 그런데 아랫과수원⁠, 길 건너 큰길가 쪽 칠천 평은 팔게요⁠. 사옥 팔고 모자라는 거⁠, 직원분들 월급 밀리는 거⁠, 거기서 메워요⁠. 뒷산 선산하고 집하고 윗과수원만 있으면 저는 돼요⁠.⁠”

“⁠아주머니⁠.⁠”

“⁠아버님이 하청 돈 갚으라고 하셨잖아요⁠. 아버님 빚이면 아버님 땅에서 갚아야지요⁠.⁠”

태구가 하소옥을 보았다⁠. 사흘 동안 한 번도 하소옥을 똑바로 보지 않았던 태구였다⁠. 태구는 상 위에 놓인 제 유언장을 내려다보았다⁠. 굵고 반듯한 글씨⁠. 기념사를 따라 그린 글씨⁠.

태구가 유언장을 집어 들었다⁠. 접지 않고 두 손으로 들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제1호⁠, 제2호 의안 둘 다 내리겠습니다⁠.⁠”

전무가 펜을 떨어뜨렸다⁠. 태구는 전무를 보지 않았다⁠.

“⁠이거 내가 썼다⁠, 누나⁠. 4월 9일 밤에 아버지 손 잡고 쓰다가 안 돼서⁠, 그 밤에 형부 차 안에서 기념사 원고 펴 놓고 연필로 따라 그렸다⁠. 원고에 없는 글자는 아버지 결재 서류에서 따 왔다⁠. 날짜는 은행 변호사가 쓰러지신 뒤 날짜면 안 받아 준다 캐서 열흘 뒤에 고쳤다⁠. 법원에 누나가 내라⁠. 둘 다⁠.⁠”

나는 유언장을 받았다⁠. 종이가 가벼웠다⁠. 사흘 동안 저고리 안에서 가슴을 누르던 무게가 이만큼이었다⁠.

“⁠하나만 부탁하자⁠.⁠”

“⁠말해⁠.⁠”

“⁠운구는 내가 들게 해 줘라⁠. 아버지 마지막 길⁠. 그거 끝나면 내가 경찰서 간다⁠. 내 발로⁠.⁠”

태구가 의장 자리를 비워 두고 접객실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도윤구 사장님⁠, 레미콘은 길 막는 데 쓰지 마이소⁠. 아버지 가시는 길에 줄 서 주이소⁠.⁠”

문이 닫혔다⁠. 접객실 창으로 아침 해가 상 위의 유물들을 비췄다⁠. 깨진 도장 사진⁠, 매끈한 새 도장⁠, 「⁠금판⁠」 두 글자⁠. 재묵이 다 끓은 주전자를 들고 와 종이컵에 물을 부었다⁠. 드립백 하나가 컵 위에 얹혀 있었다⁠. 아무도 마시지 않았는데 커피 냄새가 접객실을 채웠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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