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62자)

베낀 글씨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새벽 다섯 시⁠, 식당 창밖이 회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버지 휴대전화의 배터리는 재묵의 충전기에 꽂혀 사십일 퍼센트까지 올라 있었다⁠. 잠금 화면의 사과꽃이 새벽빛에 연분홍으로 보였다⁠.

나는 상 위에 세 가지를 나란히 놓았다⁠. 왼손 연습장 맨 위 공책⁠, 하소옥의 유언장⁠, 그리고 아버지 휴대전화⁠. 연습장을 폈다⁠. 2024년 5월부터 한 장에 열두 번⁠, 열다섯 번씩 쓴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 214번지⁠」 하소옥의 유언장 주소 줄에도 「⁠214번지⁠」가 있었다⁠.

어머니는 택시 문 앞에서 말했다⁠. 처음 산 땅 번지⁠, 여섯 자리 하라 카면 번지를 두 번 붙이더라⁠. 하소옥은 박자를 기억했다⁠. 톡⁠, 톡⁠, 톡⁠, 쉬고⁠, 톡⁠, 톡⁠, 톡⁠.

“⁠누나⁠, 한 번 남았다⁠. 다섯 번째 틀리면 잠긴다⁠.⁠”

재묵이 침을 삼켰다⁠. 미송이 혈압계를 품에 안았다⁠. 하소옥은 상 끝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기도하는 손이 아니라 국수 반죽을 치대기 전에 손을 모으는 모양이었다⁠.

나는 왼손 검지로 눌렀다⁠. 아버지처럼 셋을 누르고 쉬었다⁠. 2⁠, 1⁠, 4⁠. 쉬고⁠. 2⁠, 1⁠, 4⁠.

화면이 떨리지 않았다⁠. 사과꽃이 위로 밀려 올라가고 바탕 화면이 떴다⁠. 바탕 화면 사진은 풍산 과수원 집 부엌이었다⁠. 식탁 위에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힌 연습장이 펼쳐져 있었다⁠.

재묵이 소리를 지르려다 제 입을 막았다⁠. 미송이 하소옥의 손을 잡았다⁠. 하소옥은 바탕 화면의 연습장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

사진첩에는 사진이 많지 않았다⁠. 과수원의 사과꽃⁠, 누렁이⁠, 마 씨가 찍어 준 연습장⁠, 식탁 위 죽 그릇⁠. 2027년 3월 16일 오전 열 시 십사 분에 찍은 영상이 하나 있었다⁠. 길이는 사십일 분⁠.

재생 단추를 눌렀다⁠. 화면이 흔들리다가 멈췄다⁠. 부엌 식탁이 위에서 내려다보였다⁠. 휴대전화는 냉장고 위에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회색 카디건⁠, 오른팔은 무릎 위에 굽혀 놓았고⁠, 왼손에 검은 볼펜을 쥐었다⁠. 식탁 위에 흰 줄 공책을 뜯은 종이가 놓였고⁠, 종이 왼쪽 위 귀퉁이를 하소옥의 검지가 누르고 있었다⁠. 하소옥의 손 말고는 아무도 종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 화면 밖에서 마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천천히 하이소⁠.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냉장고 위의 휴대전화를 보았다⁠. 아버지의 눈이 화면 밖으로 나와 우리를 보았다⁠.

“⁠2027년 3월 16일⁠. 나 금판술이다⁠. 풍산 상리 214번지⁠.⁠”

목소리가 느렸다⁠. 뇌졸중 뒤로 발음이 뭉개졌는데⁠, 날짜와 이름과 번지는 또렷했다⁠. 세 해 동안 연습장에 쓴 말이었다⁠.

“⁠풍산 집하고 과수원은 소옥이 준다⁠. 회사는 태구가 하던 대로 해라⁠. 풍산은 담보로 못 잡는다⁠. 하청 돈은 옥동 사옥 팔아서 줘라⁠.⁠”

아버지가 잠깐 쉬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선희야⁠.⁠”

식당에서 숨소리가 끊겼다⁠. 재묵도 미송도 하소옥도 나를 보았다⁠. 나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니는 흙 밑에 있는 거 다 봐라⁠. 그라고 니 엄마한테 봉투 돌려줘라⁠.⁠”

아버지가 볼펜을 고쳐 쥐었다⁠. 고개를 숙이고 종이에 첫 글자를 썼다⁠. 왼손 손날이 쓴 글자 위를 지나갔다⁠. 영상은 사십 분 동안 아버지가 글씨를 쓰는 소리만 담았다⁠.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 숨소리⁠, 가끔 마 씨가 커피를 젓는 소리⁠. 삼십팔 분째에 아버지가 인주에 왼손 엄지를 눌렀고⁠, 종이 위에 엄지를 찍었다⁠. 하소옥이 귀퉁이에서 손가락을 뗐다⁠. 아버지가 종이를 들어 냉장고 위 휴대전화를 향해 보였다⁠. 하소옥의 유언장이었다⁠. 내 저고리 안에 있는 종이였다⁠.

영상이 끝났다⁠. 바탕 화면의 연습장이 다시 떴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재묵이 먼저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재묵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미송은 하소옥을 끌어안았다⁠. 하소옥은 미송의 어깨 너머로 휴대전화를 보며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아버님⁠. 나는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덮었다⁠. 휴대전화가 체온보다 뜨거웠다⁠.

아버지는 3월 16일 아침에 이미 알고 있었다⁠. 맏딸이 열세 해 전 이불 밑에 무엇을 묻었는지⁠.

*

다섯 시 이십 분⁠, 빈소 입구의 이젤 앞에 섰다⁠. 기념사 원고 액자가 사흘 내내 같은 자리에 있었다⁠. 액자 뒤판의 고정쇠 네 개를 엄지로 돌려 열었다⁠. 줄 쳐진 종이 석 장이 나왔다⁠. 아버지가 2023년 9월 2일 기념식 단상에서 읽은 원고였다⁠. 오른손으로 쓴 굵은 글씨⁠.

빈소 복도 끝에 동쪽으로 난 창이 있었다⁠. 해가 막 산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원고 세 번째 장을 창유리에 대고⁠, 원고 위에 태구의 유언장을 겹쳤다⁠. 한지는 얇았다⁠. 새벽 햇빛이 두 장을 한꺼번에 뚫고 들어왔다⁠.

「⁠회사는 태구가 끌고 간다⁠」

원고 세 번째 장 끝 줄과 유언장 둘째 줄의 같은 문장이⁠, 두 장을 겹치자 하나로 포개졌다⁠. 「⁠회⁠」의 ㅎ 꼭지 기울기⁠, 「⁠사⁠」의 ㅅ 두 획이 만나는 자리⁠, 「⁠태⁠」의 ㅌ 가운데 가로획이 오른쪽으로 삐친 끝⁠, 「⁠간⁠」의 ㄴ 받침이 아래로 처진 모양⁠. 한 획도 어긋나지 않았다⁠. 글자 사이 간격도 같았다⁠.

권 법무사가 말했다⁠. 사람 글씨는 같은 글자를 열 번 써도 열 번 다 조금씩 다르다⁠. 아버지가 기념식 원고를 쓴 날과 유언장을 쓴 날이 같았다고 해도⁠, 두 번 쓴 글씨가 포개질 수는 없었다⁠. 이 문장은 한 번 쓰였고⁠, 한 번 더 따라 그려졌다⁠.

「⁠금판술⁠」도 원고 첫 장 맨 아래 서명과 포개졌다⁠. 「⁠금목토건⁠」은 원고 첫 장 둘째 줄과 포개졌다⁠.

다른 글자들은 포개지지 않았다⁠. 「⁠막내⁠」 「⁠물려준다⁠」 「⁠모든 땅⁠」은 원고 어디에도 없는 말이었다⁠. 나는 원고를 떼고 유언장만 창에 대고 확대경으로 보았다⁠. 「⁠막내⁠」의 글자 키가 「⁠회사는⁠」보다 한 뼘의 십분의 일쯤 작았다⁠. 「⁠물려준다⁠」는 줄의 바닥선이 위로 떠 있었다⁠. 포개진 글자와 포개지지 않은 글자가 한 줄 안에서 높이가 달랐다⁠. 원고에서 따 온 글자와⁠, 결재 서류 같은 다른 종이에서 따 온 글자를 한 장에 이어 붙인 자리였다⁠. 흙으로 치면 다른 구덩이에서 퍼 온 흙으로 한 층을 메웠다⁠. 흙빛이 한 뼘마다 달랐다⁠.

확대경을 획 가장자리에 바짝 댔다⁠. 「⁠끌고⁠」의 ㄲ 두 번째 ㄱ 꺾이는 자리에서 볼펜 잉크가 살짝 비켜 간 데가 있었다⁠. 비켜 간 자리 밑에 잿빛 선이 보였다⁠. 반짝이는 회색⁠. 연필 흑연이었다⁠. 볼펜 획 밑에 연필 선이 먼저 있었다⁠. 「⁠태구⁠」의 ㄱ 끝에도⁠, 「⁠판⁠」의 ㅍ 아래 가로획에도⁠. 지우개로 문질렀는지 대부분 사라졌는데⁠, 볼펜이 덮지 못한 몇 군데에 흑연이 반짝였다⁠. 새벽 햇빛을 비스듬히 받으면 더 잘 보였다⁠.

문방구 노인이 말했다⁠. 사월에 너거 사위가 편지지 한 권하고 연필 한 자루를 사 갔다⁠. 요새 누가 연필을 사 가나 싶어서 기억한다⁠.

“⁠언니⁠, 그대로 있어라⁠.⁠”

미송이 언제 왔는지 내 뒤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재묵과 권 법무사도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법무사님이 그랬다⁠. 법원 가기 전에 지금 모양 그대로 찍어 두라꼬⁠. 검인 받을 때까지 누가 손대면 끝이라꼬⁠.⁠”

미송이 사진을 찍었다⁠. 겹친 두 장을 한 번⁠, 확대경을 댄 흑연 자리를 한 번⁠, 「⁠막내⁠」와 「⁠회사는⁠」의 높이 차이를 한 번⁠. 재묵이 도우려고 창 앞으로 다가왔다가 재묵의 그림자가 종이를 덮었다⁠. 햇빛이 사라지자 포개진 글자도 흐려졌다⁠.

“⁠오빠⁠, 비켜라⁠. 해 가린다⁠.⁠”

“⁠내가 해를 가릴 만큼 크나⁠?⁠”

“⁠아까 형부 폰 뺏을 때는 크다고 자랑하더니⁠.⁠”

재묵이 몸을 옆으로 비켰다⁠. 햇빛이 다시 들어와 두 장을 뚫었다⁠. 권 법무사가 확대경을 빌려 흑연 자리를 들여다보고 오래 숨을 내쉬었다⁠.

“⁠감정인이 보면 하루면 쓴다⁠. 베껴 그린 글씨는 획이 느리다⁠. 볼펜이 망설인 자리마다 잉크가 고인다⁠. 판술이 글씨는 빨랐다⁠. 결재할 때 보면 서명이 한 획이었다⁠.⁠”

권 법무사가 확대경을 내게 돌려주며 원고 첫 장의 서명을 손톱으로 짚었다⁠. 아버지의 「⁠금판술⁠」은 끝 획이 길게 날아가 있었다⁠. 유언장의 「⁠금판술⁠」은 같은 모양이었는데 끝 획 중간에 잉크가 콩알만 하게 뭉쳐 있었다⁠. 날아가던 획이 한 번 멈춘 자리였다⁠.

*

“⁠큰따님⁠, 이른 시간에 나와 계시네요⁠.⁠”

엄학선이었다⁠. 다섯 시 사십 분⁠, 엘리베이터에서 비서와 함께 내렸다⁠. 이사회에 참관인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새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단히 매고⁠, 손에 서류 가방을 들었다⁠. 내 손에 들린 원고와 유언장을 보고⁠, 열린 액자를 보았다⁠.

“⁠그건 회장님 기념사 아닙니까⁠?⁠”

“⁠네⁠.⁠”

엄학선이 복도 창 앞으로 다가왔다⁠. 햇빛이 엄학선의 안경에 반사되었다⁠.

“⁠큰따님⁠, 시청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풍산 뒷산 선산 자리는 산단 경계에서 빼 드리겠습니다⁠. 장지는 그대로 쓰시고⁠. 경계선 하나 고치는 건 고시 전이라 어렵지 않습니다⁠. 대신 이사회에서 그 종이를 꺼내지 말아 주십시오⁠. 은행은 오늘 담보가 들어와야 움직입니다⁠.⁠”

“⁠경계선을 과장님이 고치세요⁠?⁠”

“⁠고시 전에는 협의로 됩니다⁠.⁠”

“⁠처남 논도 협의로 넣으셨어요⁠?⁠”

엄학선의 얼굴에서 정중함이 한 꺼풀 벗겨졌다⁠. 비서가 엄학선의 팔꿈치를 살짝 당겼다⁠.

“⁠큰따님은 제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모르십니다⁠.⁠”

“⁠아마 압니다⁠. 젊은 사람 천 명⁠. 진짜라고 생각해요⁠. 처남 논도 진짜고요⁠. 두 개가 한 지도에 있어서 문제인 거죠⁠.⁠”

범곤이 식당에서 나왔다⁠. 밤새 쓴 돋보기를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고⁠, 엄학선 뒤에 섰다⁠. 범곤은 엄학선을 보지 않고 나를 보았다⁠.

“⁠선희야⁠, 그거 이사회에서 꺼내면 끝이야⁠. 태구도⁠, 나도⁠, 우리 집도⁠.⁠”

“⁠알아요⁠.⁠”

“⁠알면서⁠.⁠”

“⁠당신이 4월에 문방구에서 사 간 연필이 이 종이 밑에 있어요⁠.⁠”

범곤이 입을 닫았다⁠. 엄학선이 범곤을 돌아보았다⁠. 처음 듣는 얼굴이었다⁠. 엄학선은 서류 가방을 고쳐 쥐고 한 걸음 물러섰다⁠.

“⁠저는 참관만 하겠습니다⁠. 시청은 원칙대로 고시하겠습니다⁠. 땅 주인이 누가 되든⁠.⁠”

엄학선이 접객실로 먼저 들어갔다⁠. 원칙이라는 말을 엄학선은 처남 논 이야기 뒤에야 꺼냈다⁠.

*

다섯 시 오십팔 분⁠, 2층 접객실 문 앞이었다⁠. 문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 서류 넘기는 소리⁠, 은행 지점장의 헛기침이 들렸다⁠. 하청 협의회장 도윤구가 문 옆에 서 있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레미콘 이야기를 하던 목소리와 다른 얼굴이었다⁠.

나는 기념사 원고를 액자에 도로 넣지 않았다⁠. 원고 석 장과 태구의 유언장을 빈 액자에 겹쳐 끼우고 뒤판을 닫았다⁠. 액자를 가슴에 안았다⁠. 저고리 안에는 하소옥의 유언장이 있었다⁠. 상복 치마 주머니에는 아버지 휴대전화가⁠, 핸드백에는 범곤의 차에서 꺼낸 4월 9일 종이와 새 도장이 들어 있었다⁠.

재묵이 복도 끝에서 눈을 비비며 걸어왔다⁠. 미송이 하소옥의 팔을 잡고 따라왔다⁠. 권 법무사가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뒤에 붙었다⁠.

“⁠누나⁠, 같이 들어간다⁠.⁠”

“⁠주주도 이사도 아닌 사람은 못 들어가⁠.⁠”

“⁠상속인은 들어간다⁠. 아버지 주식 아직 우리 넷 거다⁠.⁠”

재묵이 권 법무사를 돌아보았다⁠. 권 법무사가 박하사탕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시였다⁠. 나는 액자를 안은 채 접객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가 차가웠고⁠, 문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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