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64자)

손등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새벽 네 시의 빈소는 향 냄새가 가장 짙었다⁠. 문상객이 없으니 향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천장에 고였다⁠. 제단 앞에 상주 둘이 남았다⁠. 나와 태구였다⁠. 재묵은 식당 상에 엎드려 잠들었고⁠, 미송은 7층에 올라간 뒤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하소옥은 휴게실 소파에서 어머니가 개어 놓은 카디건을 덮고 누워 있었다⁠.

향 세 대가 거의 다 탔다⁠. 태구가 새 향을 꺼내 들었고⁠, 나도 새 향을 꺼냈다⁠. 둘이 동시에 라이터를 켰다⁠. 불이 두 개였다⁠. 태구가 제 라이터를 껐다⁠. 나는 내 불로 태구의 향에 먼저 불을 붙이고⁠, 내 향에 붙였다⁠. 향 여섯 대가 향로에 꽂혔다⁠. 상조 팀장이 세 대씩만 꽂으라고 했는데 여섯 대였다⁠. 연기가 두 배로 올라갔다⁠.

“⁠아버지 숨 막히시겠다⁠.⁠”

태구가 말했다⁠.

“⁠아버지는 연기 좋아하셨어⁠. 현장에서 담배 연기 속에서 사셨잖아⁠.⁠”

“⁠담배는 끊으셨다⁠. 2017년에⁠. 내가 끊게 했다⁠.⁠”

“⁠어떻게⁠?⁠”

“⁠아버지 회장실 재떨이를 다 갖다 버렸다⁠. 열한 개⁠.⁠”

“⁠열한 개⁠?⁠”

“⁠아버지가 숨겨 둔 거까지⁠. 금고 안에도 하나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태구도 코로 숨을 내쉬었다⁠. 향 연기가 영정 앞에서 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태구가 태어났을 때 나는 여덟 살이었다⁠. 어머니가 동생을 낳고 몸조리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공사장에 다녔고⁠, 나는 강보에 싼 태구를 등에 업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다⁠. 굴착기 소리에 태구가 울면 나는 흙더미 뒤로 가서 엉덩이를 두드렸다⁠. 태구는 공사장 소리를 자장가로 듣고 자랐다⁠.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은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누나⁠.⁠”

“⁠응⁠.⁠”

“⁠엄마한테 미안하다⁠.⁠”

“⁠나한테도⁠?⁠”

“⁠누나한테는 안 미안하다⁠.⁠”

태구는 향로를 보며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향로의 재를 젓가락으로 골랐다⁠.

*

네 시 이십오 분⁠, 엘리베이터에서 미송이 내렸다⁠. 뒤에 연분홍 간호복을 입은 여자가 따라왔다⁠. 서른 중반⁠, 목에 청진기를 걸고 있었다⁠. 간호복 위에 검은 카디건을 걸쳤는데 카디건이 짧아 분홍 소매가 삐져나왔다⁠.

“⁠7층 야간 이효서 간호사⁠. 휴게 시간 십오 분 빼서 내려왔다⁠.⁠”

효서는 영정 앞에 향을 꽂고 절을 한 번 했다⁠. 간호사들은 빈소에서 절을 한 번만 한다고 미송이 낮게 말했다⁠. 병원에서 돌아가신 분이 너무 많아서 다 두 번 하면 무릎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효서가 일어나 태구를 보았다⁠. 태구를 알아본 얼굴이었다⁠.

“⁠회장님 아드님이시죠⁠. 4월에 뵈었어요⁠.⁠”

태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효서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병원 간호 기록을 열람하는 화면은 아니었다⁠. 그건 병원 밖으로 들고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대신 미송이 가족 자격으로 신청해 떼 온 간호 기록 출력물을 효서가 짚었다⁠.

「⁠2027⁠.04⁠.09 23⁠:40 712호⁠. 보호자 2인(⁠아들⁠, 사위⁠) 면회 중⁠. 환자 침상 식탁에서 서류 작성 시도 관찰⁠. 환자 우측 마비 상지에 필기구 쥐여 있음⁠, 보호자가 손등 잡고 있음⁠. 환자 ‘⁠어⁠, 어⁠’ 발성하며 상지 회수 시도⁠, 고개 저음⁠. 혈압 172/98⁠. 보호자에게 중단 요청함⁠. 23⁠:55 환자 안정⁠.⁠」

미송이 출력물을 쥔 손을 떨었다⁠. 효서가 기록 옆에 서서 말했다⁠. 차분했다⁠. 인계할 때의 목소리였다⁠.

“⁠열한 시 사십 분 라운딩이었어요⁠. 712호 문을 열었는데 불이 꺼져 있고 휴대전화 불만 켜져 있었어요⁠. 아드님이 침대 옆에 서서 회장님 오른손을 잡고 계셨어요⁠. 회장님 오른손은 마비라 손가락이 안으로 말려 있잖아요⁠.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넣고⁠, 아드님이 손등을 위에서 덮어 잡고 종이 위로 움직이고 계셨어요⁠. 사위분은 식탁 건너편에서 종이 귀퉁이를 누르고 휴대전화 불을 비추고 계셨고요⁠.⁠”

“⁠…⁠…⁠.⁠”

“⁠회장님이 ‘⁠어⁠, 어⁠’ 하시면서 팔을 빼려고 하셨어요⁠. 고개를 저으셨어요⁠. 제가 보호자분 뭐 하세요⁠, 했더니 아드님이 아버지가 쓰고 싶어 하셔서요⁠, 하셨어요⁠. 혈압을 쟀더니 백칠십이였어요⁠. 중단해 달라고 말씀드렸고⁠, 사위분이 종이를 접어서 양복 안주머니에 넣으셨어요⁠. 종이에는 글자 두 개 정도가 비뚤게 있었고 긴 선이 하나 종이 밖으로 나가 있었어요⁠.⁠”

*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태구가 말했다⁠. 처음으로 효서를 똑바로 보았다⁠.

“⁠간호사님이 문을 열기 전에⁠. 내가 아버지 이거 쓰실랍니까⁠, 했더니 끄덕이셨다⁠. 쓰고 싶으셨는데 손이 안 따라 줘서 잡아 드렸다⁠. 그게 무슨 죄입니까⁠?⁠”

“⁠끄덕이신 건 제가 못 봤어요⁠. 제가 본 건 저으시는 거였어요⁠.⁠”

효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차분한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리고 회장님은 오른손을 못 쓰세요⁠. 그건 아드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왼손으로 쓰시는 거 저도 봤어요⁠. 식판에 놓인 물컵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주셨어요⁠. 왼손으로⁠. 저 잘했다고⁠.⁠”

“⁠왼손⁠.⁠”

태구가 ‘⁠왼손⁠’을 받아 되뇌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다시 한 번 들이쉬었다⁠. 미송이 태구에게 다가가 혈압계를 감으려다 손을 내렸다⁠.

“⁠왼손으로는 소옥 씨한테 써 주셨다⁠. 풍산 땅 다⁠. 그 손으로 아들한테는 한 줄도 안 써 주셨다⁠.⁠”

태구가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떨렸다⁠.

“⁠2월에 담보 서류 들고 갔을 때 아버지가 왼손으로 내 서류를 밀어내셨다⁠. 그 손으로⁠. 십 년 동안 회사를 지킨 아들한테⁠. 3월에는 소옥 씨한테 땅을 써 주셨다는 얘기를 형부한테 들었다⁠. 공증까지 하신다고⁠. 그래서 4월 9일에 병실에 갔다⁠. 아버지가 기념식 때 마이크 잡고 하신 말씀⁠, 그거 한 줄만 써 주시라고⁠. 오른손으로⁠. 옛날 손으로⁠.⁠”

“⁠태구야⁠.⁠”

“⁠아버지 오른손이 뜨거웠다⁠, 누나⁠.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데 손가락이 안 펴지더라⁠. 내가 하나씩 폈다⁠. 펴 드리면 다시 오그라들고⁠. 손등을 잡고 금 자를 쓰는데 아버지가 손을 빼셨다⁠. 볼펜이 종이 밖으로 쭉 나갔다⁠. 그 선이 아버지 대답이었다⁠.⁠”

태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복 바지 무릎이 향로 받침대에 닿았다⁠. 효서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휴게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저는 올라가 봐야 해요⁠. 법원이든 경찰이든 부르시면 갈게요⁠. 기록대로 말할게요⁠.⁠”

효서가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미송이 따라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효서가 말했다⁠.

“⁠회장님이 그날 밤 제가 나갈 때 왼손으로 제 손목을 잡으셨어요⁠. 뭐라고 하셨는데 못 알아들었어요⁠. 아침에 하소옥 님이 오시자마자 휴대전화부터 찾으셨대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4월 10일 아침 일곱 시 십이 분⁠, 아버지는 왼손 엄지로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 나는 트렌치 바닥에 있었다⁠.

*

나는 태구 옆 바닥에 앉았다⁠. 상복 치마가 향로 받침대 밑으로 밀려 들어갔다⁠. 둘이 나란히 앉으니 영정이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태구야⁠, 컨테이너에서 발톱 깎던 아저씨가 밤에 문상 왔었어⁠. 2월에 아버지가 휠체어 타고 컨테이너에 오셨대⁠. 풍산에는 공장 못 짓게 하겠다고⁠, 하청 돈은 옥동 옛 사옥을 팔아서라도 주겠다고 하셨대⁠.⁠”

태구가 고개를 들었다⁠.

“⁠옥동 사옥⁠?⁠”

“⁠소옥 씨한테도 하신 말이 있어⁠. 니가 풍산 잡히고 산단 하면 은행 빚이 삼백억이 넘는다고⁠. 시청 말만 믿고 들어갔다가 고시가 엎어지면 회사가 통째로 넘어간다고⁠. 사십 년 동안 그렇게 넘어간 회사를 열 개도 넘게 봤다고⁠.⁠”

“⁠그걸 왜 나한테는 안 하셨는데⁠.⁠”

“⁠니가 들었으면 안 했을 거니까⁠.⁠”

태구가 입을 다물었다⁠. 향 연기가 우리 둘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아버지는 니를 막은 게 아니야⁠. 니가 아버지처럼 되는 걸 막으신 거지⁠. 남의 땅 묶어서 빚으로 회사 키우던 아버지 말이야⁠. 그래서 풍산을 니가 못 여는 사람한테 주셨어⁠.⁠”

“⁠그걸 누나가 어떻게 아노⁠?⁠”

“⁠아버지가 나한테 2014년에 봉투를 맡기셨으니까⁠. 어떻게 회사를 지키는지 나는 봤어⁠.⁠”

태구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짧고 마른 웃음이었다⁠.

“⁠우리 둘 다 아버지 땅 서류 들고 장난친 사람이네⁠.⁠”

“⁠응⁠.⁠”

“⁠누나는 열세 해 걸렸고⁠, 나는 한 달 걸렸고⁠.⁠”

태구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털지 않았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네 시 삼십오 분⁠.

“⁠여섯 시에 보자⁠, 누나⁠.⁠”

*

네 시 사십 분⁠, 장례식장 주차장은 아직 어두웠다⁠. 동쪽 하늘만 묽게 밝아 오고 있었다⁠. 범곤의 회색 세단은 주차장 맨 끝에 있었다⁠. 범곤은 식당 구석 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돋보기를 쓴 채였다⁠. 나는 내 차 열쇠 꾸러미에서 범곤 차의 보조 열쇠를 찾았다⁠. 결혼하고 서른두 해⁠, 범곤 차가 다섯 번 바뀌는 동안 보조 열쇠는 늘 내 꾸러미에 있었다⁠. 범곤이 열쇠를 잃어버릴 때마다 내가 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렸다⁠. 차 안에서 범곤의 스킨 냄새가 났다⁠. 서른두 해 동안 같은 스킨이었다⁠. 결혼 첫해 생일에 내가 사 준 스킨을 범곤은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바꿀 줄을 몰랐다⁠.

조수석 앞 글러브박스를 열었다⁠. 차량 등록증⁠, 보험 서류⁠, 손 소독제⁠, 박하사탕 봉지⁠. 권 법무사가 밤새 나눠 준 박하사탕이었다⁠. 박하사탕 밑에 남색 벨벳 도장 주머니가 있었다⁠. 주머니 끈을 풀자 상아색 플라스틱 도장이 굴러 나왔다⁠. 손에 쥐니 가벼웠다⁠. 아버지가 가벼워서 못 쓰겠다고 했다는 도장이었다⁠. 도장 바닥을 휴대전화 불빛에 비췄다⁠. 「⁠金判述⁠」 테두리가 매끈했다⁠.

범곤은 도장이 집 서랍에 있다고 했다⁠.

도장 주머니 밑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 네 번 접힌 미색 한지였다⁠. 펴자 솔잎 무늬가 휴대전화 불빛에 비쳤다⁠. 종이 왼쪽 위에 파란 볼펜으로 글자 두 개가 있었다⁠. 「⁠금판⁠」 글자라고 하기 어려웠다⁠. 「⁠금⁠」의 ㄱ은 두 번 꺾였고 ㅡ는 물결처럼 휘었고 ㅁ은 닫히지 않았다⁠. 「⁠판⁠」의 ㅍ은 위아래 가로획이 엇갈렸다⁠. 「⁠판⁠」의 ㄴ 받침에서 긴 선 하나가 시작되어 종이 오른쪽 아래 귀퉁이까지 대각선으로 내달린 뒤 종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선 끝에 볼펜 끝이 종이를 찢은 자국이 있었다⁠.

확대경을 댔다⁠. 획마다 잉크가 고이다 끊기다 했다⁠. 한 사람의 손이 쓰는 글씨는 힘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 이 글씨는 힘이 두 방향이었다⁠. 위에서 누르는 힘과 밑에서 빠져나가려는 힘⁠. 획의 가장자리가 두 겹으로 흔들렸다⁠. 왼손 연습장의 떨림과도 달랐다⁠. 연습장의 떨림은 한 사람이 혼자 떨린 것이었고⁠, 이 종이의 떨림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데로 가려다 생겼다⁠.

종이 아래쪽 여백에 연필로 숫자가 작게 적혀 있었다⁠. 범곤의 글씨였다⁠. 은행에서 삼십 년 동안 숫자를 적던 반듯한 글씨⁠. 「⁠4/9⁠」

나는 종이를 다시 접지 않고 펼친 채 들었다⁠. 동쪽 하늘이 조금 더 밝아졌다⁠. 주차장 가로등이 꺼졌다⁠. 장례식장 2층 식당 창으로 범곤이 상에서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돋보기를 벗고⁠, 창밖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범곤은 자기 차의 글러브박스가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범곤은 일어나지 않았다⁠. 돋보기를 다시 쓰고⁠, 상 위에 이마를 내려놓았다⁠. 식당 창으로 범곤의 정수리만 보였다⁠. 숱이 빠진 정수리였다⁠. 은행을 나오던 해부터 나는 범곤의 머리를 집에서 잘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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