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20자)

이천십사 년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재묵의 가방에서는 충전기가 일곱 개 나왔다⁠. 커피 그라인더 충전기⁠, 저울 충전기⁠, 블루투스 스피커 충전기⁠, 그리고 휴대전화 충전기가 종류별로 넷⁠. 재묵은 하나씩 아버지 휴대전화에 대 보다가 네 번째가 맞자 손뼉을 쳤다⁠. 화면에 번개 모양이 떴다⁠. 배터리 십이 퍼센트가 십삼 퍼센트로 올랐다⁠.

새벽 세 시⁠, 식당 구석 상에 아버지 휴대전화를 가운데 두고 나와 재묵과 미송이 둘러앉았다⁠. 하소옥은 상 끝에 앉아 두 손을 무릎에 모았다⁠. 잠금 화면의 사과꽃이 형광등 밑에서 하얗게 빛났다⁠. 숫자 여섯 칸⁠.

“⁠다섯 번 틀리면 일 분 잠기고⁠, 그다음은 더 길어진다⁠. 열 번 넘게 틀리면 초기화되는 폰도 있다⁠.⁠”

미송이 경고했다⁠. 병원에서 환자 보호자들의 휴대전화를 여러 번 열어 준 사람의 경고였다⁠.

“⁠아버지 생일부터⁠.⁠”

재묵이 말했다⁠. 아버지는 1945년 8월 17일생이었다⁠. 「⁠450817⁠」 화면이 좌우로 떨렸다⁠. 틀렸다⁠.

“⁠회사 창립일⁠.⁠”

1979년 3월 2일⁠. 「⁠790302⁠」 화면이 떨렸다⁠.

“⁠엄마 생일⁠.⁠”

미송이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어머니 생일을 눌렀다⁠. 화면이 떨렸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123456⁠.⁠”

재묵이 말했다⁠. 미송이 재묵의 팔을 때렸다⁠.

“⁠아버지가 그렇게 단순하겠나⁠?⁠”

“⁠단순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우리 가게 포스기 비밀번호가 1234였다⁠.⁠”

“⁠그래서 가게가 망했지⁠.⁠”

“⁠가게는 월세 때문에 망했다⁠.⁠”

나는 「⁠123456⁠」을 눌렀다⁠. 화면이 떨렸다⁠. 네 번째였다⁠. 하소옥이 상 끝에서 숨을 들이켰다⁠. 나는 휴대전화를 엎었다⁠. 한 번 더 틀리면 잠긴다⁠. 잠기면 기다려야 하고⁠, 기다리다 보면 여섯 시가 온다⁠. 화면 대신 아버지를 알아야 했다⁠. 쉰일곱 해 동안 딸로 산 사람이 아버지의 여섯 자리를 몰랐다⁠.

“⁠아버님이 누르실 때요⁠.⁠”

하소옥이 상 끝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두 하소옥을 보았다⁠.

“⁠저는 고개를 돌렸는데⁠, 소리는 들렸어요⁠. 왼손 엄지로 천천히 누르셨어요⁠. 톡⁠, 톡⁠, 톡⁠. 그리고 조금 쉬셨다가 다시 톡⁠, 톡⁠, 톡⁠. 꼭 세 번 누르고 쉬셨어요⁠. 노래 박자처럼요⁠.⁠”

“⁠세 개⁠, 세 개⁠.⁠”

미송이 손가락을 접으며 따라 했다⁠. 숫자 셋을 두 번⁠. 아버지는 여섯 자리를 둘로 나눠 눌렀다⁠. 같은 숫자 셋을 두 번 누르는 사람이라면 쉬는 자리가 생긴다⁠. 나는 박자까지 생각하고 멈췄다⁠. 무엇을 두 번 눌렀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

세 시 이십 분⁠, 상주 휴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공손했다⁠. 땅 주인을 만날 때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하나 들으셔야 할 게 있어서요⁠.⁠”

나는 식당에서 일어났다⁠. 휴게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어머니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태구가 소파 앞 방석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머니가 하소옥의 개어 놓은 카디건을 무릎에 덮고 있었다⁠.

“⁠태구야⁠.⁠”

내가 부르자 태구가 돌아보았다⁠. 눈이 붉었다⁠. 잠을 못 잔 붉음과 다른 붉음이었다⁠.

“⁠누나도 들어와라⁠. 누나 얘기니까⁠.⁠”

“⁠무슨 얘기고⁠?⁠”

어머니가 물었다⁠. 잠이 덜 깬 목소리가 금세 또렷해졌다⁠. 태구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 2014년에 아버지랑 이혼하실 때 풍산 땅 말입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땅이라 해서 어머니 몫에서 빠졌지예⁠.⁠”

“⁠그랬지⁠.⁠”

“⁠아버지가 1987년에 산 땅입니다⁠. 매매 계약서랑 잔금 영수증이 있었습니다⁠. 이혼 소송 할 때 아버지가 그 서류를 대구에 가지고 가서 누나한테 맡겼습니다⁠. 누나가 그걸 숨겼고⁠, 어머니 변호사가 물었을 때 모른다고 했습니다⁠.⁠”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문 밖에서 재묵과 미송의 발소리가 멈췄다⁠.

“⁠아버지가 2015년에 술 드시고 저한테 그러셨습니다⁠. 느그 누나가 내를 살렸다꼬⁠. 서류 하나 숨겨서 회사를 살렸다꼬⁠. 저는 그 말을 십이 년 동안 아무한테도 안 했습니다⁠.⁠”

태구가 나를 보았다⁠.

“⁠누나는 지금 아버지 유언장 들고 정의로운 척하는데⁠, 누나도 아버지 땅 서류 숨긴 사람이다⁠. 유언장 숨기면 결격이라면서⁠? 누나는 엄마 몫을 숨겼다⁠.⁠”

*

어머니는 태구를 보지 않았다⁠. 나를 보았다⁠. 카디건을 덮은 무릎 위에서 두 손을 포개고 있었다⁠.

“⁠참말이가⁠?⁠”

“⁠네⁠.⁠”

나는 휴게실 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재묵과 미송을 밖에 두었다⁠. 어머니 앞 바닥에 앉았다⁠. 상복 치마가 바닥에 퍼졌다⁠.

“⁠2014년 3월에 아버지가 대구 집에 오셨어요⁠. 밤 열 시에⁠. 갈색 봉투를 주시면서 맡아 달라고 하셨어요⁠. 엄마가 풍산 땅까지 가져가면 회사가 넘어간다고⁠. 직원들 밥줄이 끊긴다고⁠. 저는 봉투를 받았어요⁠. 장롱 맨 아래 칸 겨울 이불 밑에 넣었어요⁠. 엄마 변호사님이 전화했을 때 모른다고 했어요⁠.⁠”

“⁠와 그랬노⁠?⁠”

“⁠아버지가 우셨어요⁠. 아버지가 우는 거 처음 봤어요⁠.⁠”

“⁠그래서⁠.⁠”

“⁠그래서 받았어요⁠. 그리고 엄마한테 열세 해 동안 말 안 했어요⁠. 봉투는 지금도 이불 밑에 있어요⁠.⁠”

나는 변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덧붙일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울었다는 것도 변명이었다⁠.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 눈물을 꺼내는 순간 알았다⁠.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었다⁠. 카디건의 보풀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뜯었다⁠. 보풀이 바닥에 떨어졌다⁠.

“⁠니 그때 몇 살이었노⁠?⁠”

“⁠마흔넷이요⁠.⁠”

“⁠마흔넷이면 알 나이다⁠.⁠”

“⁠네⁠.⁠”

“⁠내 그 뒤로 세 해를 반야월 임대 아파트 열세 평에서 살았다⁠. 받은 돈으로 니 아버지 회사 지분 일부하고 옥동 아파트 반을 받았는데⁠, 지분은 팔 데가 없고 아파트는 니 아버지 회사 대출에 잡혀 있었다⁠. 손에 쥔 돈이 없더라⁠. 결혼반지 팔고⁠, 니 외할머니 비녀 팔고⁠, 미송이 채헌이 백일 반지 사 줄라꼬 남겨 둔 금 한 돈은 못 팔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조금도 높아지지 않았다⁠. 날씨 이야기를 하듯⁠, 반찬 이야기를 하듯⁠.

“⁠풍산 땅이 그때 들어왔으면 내가 열세 평에서 안 살았을 기다⁠. 니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내가 사십 년 전부터 알았다⁠. 그런데 니는⁠.⁠”

어머니가 말을 멈췄다⁠. 보풀을 뜯던 손가락도 멈췄다⁠.

“⁠니는 내 딸 아이가⁠?⁠”

“⁠엄마⁠, 봉투 드릴게요⁠. 발인 끝나면 대구 가서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법원에 가셔도 되고⁠, 저를 고소하셔도 돼요⁠.⁠”

“⁠줘서 뭐 할 기고⁠?⁠”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그 땅은 이제 소옥이 거라며⁠. 니 아버지가 그래 써 놨다며⁠. 열세 해 전 서류 들고 내가 소옥이한테 가서 땅 내놔라 카까⁠? 삼 년 똥 받아 낸 사람한테⁠?⁠”

“⁠…⁠…⁠.⁠”

“⁠니는 늘 이렇다⁠. 잘못한 걸 알면 바로 갚을라 칸다⁠. 갚으면 끝나는 줄 안다⁠. 니 아버지가 니한테 봉투 맡길 때도 그랬을 기다⁠. 이것만 맡아 주면 끝난다꼬⁠.⁠”

어머니는 손가락에 붙은 보풀을 털었다⁠.

“⁠갚는다꼬 끝나는 기 아이다⁠. 갚으면 또 다른 데가 빈다⁠.⁠”

어머니는 카디건을 개어 소파 팔걸이에 올려놓았다⁠. 하소옥이 걸쳐 둔 자리 그대로였다⁠. 그리고 일어나 지팡이를 찾아 팔에 걸었다⁠.

“⁠엄마⁠.⁠”

“⁠내 갈란다⁠.⁠”

“⁠엄마⁠, 발인 보셔야죠⁠.⁠”

“⁠발인은 니 아버지 보내는 기고⁠, 내는 니 아버지 열세 해 전에 보냈다⁠.⁠”

*

새벽 네 시⁠, 장례식장 정문 앞에 콜택시가 왔다⁠. 재묵이 불렀다⁠. 어머니는 대구까지 간다고 했다⁠. 미송이 따라가겠다고 했고⁠, 어머니가 미송을 말렸다⁠.

“⁠니는 니 아버지 옆에 있어라⁠. 혈압계 들고⁠.⁠”

미송이 울면서 혈압계를 어머니 핸드백에 밀어 넣었다⁠. 어머니는 혈압계를 도로 꺼내 미송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택시 뒷문을 열다가 멈췄다⁠. 나를 돌아보지 않고 택시 지붕을 보며 말했다⁠.

“⁠니 아버지 휴대전화 못 열고 있다 카데⁠.⁠”

“⁠…⁠…⁠.⁠”

“⁠재묵이가 그러더라⁠. 비밀번호를 모른다꼬⁠.⁠”

어머니가 택시 지붕에 손을 얹었다⁠.

“⁠그 사람은 평생 땅 번지로 했다⁠. 은행 비밀번호도⁠, 회사 금고도⁠, 대문 열쇠 번호도⁠. 처음 산 땅 번지⁠. 여섯 자리 하라 카면 번지를 두 번 붙이더라⁠. 내 생일로는 한 번도 안 했다⁠.⁠”

“⁠처음 산 땅이요⁠?⁠”

“⁠풍산이다⁠. 1987년⁠. 내 계 탄 돈 들어간 땅⁠.⁠”

어머니는 택시에 올랐다⁠. 문이 닫혔다⁠. 택시가 정문을 빠져나가 시내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서 있었다⁠. 미송이 내 옆에서 혈압계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재묵은 택시가 떠난 자리를 오래 보다가 내 팔을 붙잡았다⁠.

“⁠누나⁠.⁠”

“⁠응⁠.⁠”

“⁠엄마가 비밀번호 알려 줬다⁠.⁠”

“⁠응⁠.⁠”

“⁠그러니까 엄마는 누나를 버리고 간 게 아니다⁠.⁠”

재묵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구가 정문 유리문 안쪽에 서 있었다⁠.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재묵이 찢은 약정서 조각을 쥐고 있었을 주머니였다⁠. 태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유리문을 밀고 한 걸음 나왔다⁠.

“⁠누나가 파면 나도 판다⁠. 누나만 삽 있는 거 아니다⁠.⁠”

태구는 한마디만 던지고 돌아서서 빈소로 올라갔다⁠. 유리문이 천천히 닫히며 태구의 등을 두 번 비췄다⁠.

미송이 혈압계를 내려놓고 나를 보았다⁠. 눈가가 젖어 있었는데 목소리는 마른 소리였다⁠.

“⁠언니⁠.⁠”

“⁠응⁠.⁠”

“⁠아까 낮에 언니가 수의 맨 아래 칸 골랐을 때⁠, 내가 뭐라 캤노⁠. 언니는 언니 생각이 맞으면 남 생각은 안 물어본다꼬⁠.⁠”

“⁠응⁠.⁠”

“⁠언니 그때도 엄마 생각은 안 물어봤네⁠. 아버지 생각만 물어봤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송이 고개를 저었다⁠. 끄덕이지 말라는 듯이⁠.

“⁠내는 채헌이 백일 반지 사 줄라고 엄마가 금 한 돈 남겨 둔 거 알았다⁠. 엄마가 그 금 들고 와서⁠, 미송아 이거는 못 팔겠더라 카면서 내 손에 쥐여 줬다⁠. 그때 엄마가 열세 평에 사는 줄 알면서도⁠, 내는 엄마 집에 잘 안 갔다⁠. 좁다고⁠. 언니만 그런 거 아니다⁠.⁠”

미송이 혈압계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재묵이 둘 사이에 끼어 앉아 양팔로 둘의 어깨를 감쌌다⁠. 재묵의 팔이 무거웠다⁠.

“⁠우리 넷 다 엄마한테 빚졌다⁠. 나는 가게 차릴 때 엄마 임대 아파트 보증금 빼 달라 캤다⁠. 엄마가 빼 줬다⁠.⁠”

“⁠오빠 그거 갚았나⁠?⁠”

“⁠아직⁠.⁠”

미송이 재묵의 팔을 꼬집었다⁠. 재묵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고⁠, 정문 경비원이 고개를 내밀었다가 상복 셋을 보고 도로 들어갔다⁠. 세 남매가 정문 앞에서 웃었다⁠. 웃음 끝에 미송이 코를 풀었다⁠.

나는 정문 앞 계단에 앉았다⁠. 상복 치마가 새벽 이슬에 젖었다⁠. 저고리 안 두 봉투가 무릎과 가슴 사이에서 접혔다⁠. 아버지는 1987년에 풍산 땅을 샀고⁠, 어머니의 곗돈이 땅값에 들어갔다⁠. 2014년에 나는 풍산 땅의 서류를 겨울 이불 밑에 묻었다⁠. 2027년 3월에 아버지는 풍산 땅을 하소옥에게 주었다⁠. 같은 땅을 두고 세 번 묻고 세 번 꺼냈다⁠. 이번에 꺼내는 사람이 나였다⁠. 계단 밑에서 뒷마당 고양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왼쪽 귀 끝이 잘린 회색 고양이였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고⁠, 소매에서 낮에 재묵이 준 드립백 하나만 나왔다⁠. 「⁠에티오피아 · 꽃향 · 산미 높음⁠」 고양이는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돌렸다⁠.

1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