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35자) · 일 미터 사십
이름
두 시의 일기 · 유하람
그날 밤 나는 셌다. 일기장 이 년치를 처음부터 넘기면서 그 사람이 나온 날에 연필로 점을 찍었다. 육백구십사. 그 사람 노트에서 내가 나온 날은 그 사람이 마지막 장에 적어 두었다. 칠백십이. 열여덟 날 차이. 그 열여덟 날은 내가 두시에 가지 않은 날이었다. 휴대폰 캘린더를 이 년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씩 맞춰 봤다. 재작년 십일월 이십칠일, 아버지 수술. 작년 삼월 이십일, 부산 출판사. 작년 유월 사일부터 사흘, 마감. 한 번은 그냥 비가 너무 와서 안 나갔다. 그날 그 사람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 창가 왼쪽 비었음. 우산 없어서 안 온 듯. 오늘은 조용했다. 나는 그 줄에서 오래 멈췄다. 우산이 없었던 게 맞았다. 그 사람은 그날들에도 적었다. 오늘은 조용했다고. 나는 새벽 세 시에 일기를 폈다. 오늘 칸에 뭐라고 쓸지 삼십 분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썼다.
7월 21일. 셈이 틀렸다. 내가 더 많이 적은 줄 알았다.
다음 날 나는 두 시에 갔다. 두 시 정각에. 이 년 만에 처음으로 사 분 일찍 나섰고, 골목 끝에서 사 분을 서서 기다렸다가, 정각에 턱을 넘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손목시계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웃는 것을 본 것은 이 년 동안 다섯 번째였다. 네 번은 일기에 적어 두었다.
나는 내 자리에 가지 않았다. 가운데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이 년 동안 비어 있던 자리. 창가 왼쪽과 오른쪽 사이, 정확히 한가운데. 그 사람과 나 사이가 이 미터 팔십에서 일 미터 사십이 되었다. 그 사람이 노트북을 덮었다.
“정후예요. 도정후.”
“은오요. 성은 안 알려 드릴래요.”
“왜요?”
“이 년 동안 제 성을 안 알고도 잘 적으셨잖아요.”
그 사람이 웃었다. 여섯 번째. 사장님이 커피를 가져왔다. 내 아메리카노와 그 사람 아이스라테. 사장님은 두 잔을 가운데 탁자에 나란히 놓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행주를 한 번 접었다가 폈다. 나는 첫 모금을 마셨다. 쓴맛이 혀뿌리까지 갔다가 오래 남았다. 두 번째 모금을 기다리는 동안 그 사람도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우유가 많아서 쓴맛이 없는 커피. 이 년 동안 저 사람은 쓴 것을 한 번도 안 마셨다. 그것도 일기에 있다.
“진단이요.”
내가 말했다. 그 사람은 라테 잔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얼음이 녹으면서 잔 바깥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 사람은 얼음을 씹지 않는다. 녹을 때까지 기다린다. 내 일기에 칠월 십사일에 적은 것이다.
“저는 구조기술사 사무소에서 일해요. 건물 점검. 금 간 데 재고, 기울기 재고, 콘크리트 두드려 보고. 이 건물 정밀안전진단을 저희 사무소가 맡았어요. 반기훈 씨가 맡겼어요. 팔월 십일일에 들어가요.”
“그 진단이 뭘 하는 건데요.”
“등급을 매겨요. A부터 E까지. D나 E가 나오면 이 건물은 위험하다는 게 서류로 남아요. 그러면 재건축할 이유가 서요. 반기훈 씨 입장에서는 법으로도, 은행으로도.”
“C가 나오면요.”
“보수해서 쓰면 된다는 거죠.”
“그럼 사장님은요.”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알았다. 십 년 넘은 가게는 갱신 청구가 안 된다고 반기훈이 말했다. C가 나와도 건물주가 나가라면 나가야 한다. 다만 재건축이라는 이유가 무너지면, 건물주는 다른 이유를 대야 한다. 그리고 사장님에게는 버틸 이유가 하나 생긴다.
“그러니까 정후 씨가 쓰는 한 줄에 여기가 끝나는 거네요.”
“제가 쓰는 건 숫자예요.”
“숫자는 누가 적어요.”
“제가요.”
“그럼 정후 씨가 쓰는 거죠.”
그 사람이 나를 봤다. 처음으로 똑바로. 이 년 동안 우리는 대각선으로만 서로를 봤다. 옆얼굴과 옆얼굴. 정면은 처음이었다. 그 사람 눈 밑에 작은 흉터가 있었다. 이 년 동안 몰랐다. 왼쪽 눈 밑이라 내 자리에서는 안 보였다.
“은오 씨는 번역하시잖아요.”
“알아요?”
“노트에 적었어요. 원서 제목 보여서요.”
“그래서요.”
“원문이 나쁘면 나쁘게 옮기세요, 좋게 옮기세요?”
“있는 대로 옮기죠.”
“저도 있는 대로 적어요. 이 건물 서른일곱 살이에요. 천구백팔십구 년 준공. 벽돌조. 뒤쪽 벽에 금이 두 줄 있고, 이 층 바닥이 조금 처졌어요. 있는 대로 적으면 D가 나올 수도 있어요. 제가 좋게 적으면 그건 제가 옮긴 게 아니라 제가 쓴 거예요.”
사장님이 카운터에서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평소보다 조금 셌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사람 말이 맞았다. 원문을 고쳐 옮기는 번역가는 번역가가 아니다. 십 년 동안 그렇게 믿고 일했다. 그 믿음이 이 탁자 위에서 내 편이 아니었다.
“그럼 반기훈 씨가 왜 정후 씨 사무소에 맡겼는지는 알아요?”
그 사람의 손이 잔에서 떨어졌다.
“우리 소장님이 D를 잘 써 줘서요.”
그 말은 조용했다. 두 시의 조용함 속에서 너무 잘 들렸다. 사장님이 카운터에서 잔을 닦다가 멈췄다. 에어컨이 한 번 덜컹 소리를 냈다.
“그런데 정후 씨는 그 사무소에 다니고요.”
“네.”
“그리고 이 년 동안 여기 앉아 있었고요.”
“네.”
“알고 있었어요? 반기훈이 이 건물 산 거.”
“석 달 전에요. 소장님이 이 주소를 불렀을 때 알았어요. 제가 이 년 앉은 데라는 거.”
“석 달 동안 말 안 했네요.”
“누구한테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한테. 우리는 석 달 전에 말을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제까지도. 그 사람은 석 달 동안 이 창가 오른쪽에 앉아서, 창가 왼쪽 사람을 적고, 자기가 이 건물에 매길 등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나는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두 시의 가게에 크게 울렸다. 가방을 들었다. 커피는 반도 안 마셨다. 두 번째 모금의 산미까지 가지도 못했다.
“은오 씨.”
“오늘은 조용하게 있을게요. 저기서.”
나는 창가 왼쪽 내 자리로 돌아갔다. 가운데 자리가 다시 비었다. 이 미터 팔십. 오후 내내 나는 그 사람 옆얼굴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고 하니까 오히려 그 사람이 뭘 하는지 다 들렸다. 라테 잔을 받침에 내려놓는 소리, 얼음이 녹아서 잔 안에서 한 번 무너지는 소리, 볼펜 뚜껑을 딸깍거리다가 멈추는 소리. 이 년 동안 나는 눈으로 적었다. 그날은 귀로 적었다. 적지는 않았다. 일기장은 가방에 넣어 둔 채였다. 대신 원고를 봤다. 빗속에서 기다리던 여자가 드디어 입을 여는 장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이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오지 않았어요. 나는 그 문장을 네 번 고쳐 옮겼다. 네 번 다 원문보다 다정했다. 다 지웠다.
다섯 시에 나는 밖으로 나갔다. 걸어야 했다. 옆 한결문구에 들어갔다. 가게 안은 연필 깎은 냄새와 먼지 냄새와 여름 종이 냄새가 났다. 구 영감님이 부채를 부치며 계산대에 앉아 있었다. 일흔여섯. 이 골목에서 사십 년 문구점을 했다. 이 년 동안 나는 이 집에서 A5 노트를 스물몇 권 샀다. 검은색만.
“아가씨, 검은 거 떨어졌는데.”
“남색은요.”
“남색은 있지. 남색 사 가는 총각이 하나 있어서 들여놔.”
“그 총각, 몇 권 사 갔어요?”
영감님이 부채를 멈췄다. 계산대 밑에서 외상 장부 같은 것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세 봐야 알지. 이 년에 서른 권은 될걸. 두 달에 한 번은 자도 사 가. 쇠 줄자. 그거 잘 안 팔리는 건데.”
“자를 왜 그렇게 사요?”
“잃어버린대. 턱에서 재다가 떨어뜨려서 하수구로 들어간대.”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턱. 영감님이 부채로 두시 쪽을 가리켰다.
“그 집 턱 말이야. 재작년에 두시 사장님이 거기서 넘어졌잖어. 쟁반 들고. 손목에 금 갔지. 그다음부터 그 총각이 두 달마다 쭈그리고 앉아서 재. 비 오는 날에도.”
“왜요?”
“몰라. 물어봤더니 올라오나 가라앉나 본대. 그게 무슨 소린지 나도 몰라.”
영감님은 그러다 목소리를 낮췄다. 가게 안에 우리 둘뿐인데도.
“근데 아가씨, 그 반 사장이 나한테도 왔어. 이사비 준대. 삼천. 나는 받을라고.”
“영감님은 여기 사십 년이잖아요.”
“그러니께. 사십 년 했으면 됐지. 아들이 받으래.”
영감님은 부채로 천장을 한 번 가리켰다.
“그리고 그 반 사장, 내가 그 아버지를 알어. 반 영감. 이 건물 원래 그 집 거였어. 팔구 년에 그 양반이 올린 거여. 그러다 십몇 년 전에 빚 때문에 팔았지. 그걸 아들이 올봄에 도로 샀다는 거여. 빚을 내서.”
“도로요?”
“그러니께 이자 내러 온다는 거지. 아버지 건물을 은행 돈으로 찾아왔으니.”
영감님은 남색 노트 한 권을 봉투에 넣다가 나를 봤다.
“이 년 동안 검은 것만 사 가더니.”
“검은 게 없다면서요.”
“그렇지. 없지.”
영감님은 그렇게 말하고 뭔가 아는 얼굴로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돈을 냈다. 영감님은 거스름돈을 동전까지 세어 손바닥에 올려 주면서 한 번 더 말했다. 영감님 손바닥은 종이에 베인 자국투성이였다. 사십 년 동안 봉투를 접은 손이었다.
“근데 두시는 안 되지. 거긴 열두 해밖에 안 됐어.”
열두 해밖에. 나는 그 말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사십 년 앞에서 열두 해는 짧다. 법 앞에서는 길다. 십 년이 넘어서 보호를 못 받는다. 같은 열두 해가 누구 앞에 서느냐에 따라 길어졌다 짧아졌다.
두시로 돌아왔을 때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 턱을 넘으려는데 그 사람이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 은색 줄자. 턱 모서리에 줄자 끝을 걸고 보도블록까지 당겼다. 딸깍. 한 번 재고, 감고, 다시 쟀다. 그러고는 손등에 볼펜으로 숫자를 적었다.
22.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봤다. 들킨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기다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 년 동안 잰 게 있긴 해요.”
그 사람이 말했다.
“한 가지. 이것만.”
손등의 22가 땀에 조금 번져 있었다. 나는 그 숫자를 봤다. 그리고 그 사람 옆에, 턱 위에 쪼그려 앉았다. 뜨거운 보도블록이 샌들 밑창을 데웠다. 여름 저녁 해가 턱 모서리에 금처럼 걸려 있었다. 턱 모서리는 닳아서 둥글었다. 이 년 동안 내가 넘은 자리가 거기 있었다. 둥근 데를 손끝으로 쓸어 봤다. 까끌했다. 여섯 시 십오 분까지 이십오 분 남아 있었다.
“설명해 주세요. 두 시는 아니지만.”
그 사람이 줄자를 다시 당겼다. 이번에는 내 손에 끝을 쥐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