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11자) · 흰 봉투 둘

세 번째는 묻는다

오해는 두 번 반복된다 · 유하람

도현은 대답하기 전에 불을 켜지 않았다. 여름은 그게 고마웠다. 불을 켜면 얼굴이 다 보인다. 가로등 빛만으로도 충분했다.

“폐관 정리입니다.”

도현은 문가에 선 채로 말했다.

“분관을 닫되, 조용히 닫는 겁니다. 민원 안 나게, 자료 반출 계획 세우고, 인력 재배치하고, 부지 활용안까지 써서 구월 말에 올리는 보고서. 그게 제가 여기 온 이유였습니다. 오 과장님이 그렇게 보냈고, 잘하면 본청 팀장 자리를 준다고 했습니다.”

여름은 손에 쥔 종이 받침을 폈다가 접었다. 준비한 판단이 목구멍까지 와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고, 처음부터 그랬다고. 그 문장을 삼키는 데 숨이 한 번 들었다.

“그래서요.”

“안 썼습니다.”

도현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문서 파일 하나를 열어 여름 쪽으로 내밀었다. 여름은 일어나서 받았다. 「매곡분관 기능 조정 방안(초안).」 목차만 있는 문서였다. 현황, 이용 추이, 향토자료 분류안. 분류안 아래 소제목 셋. 보존, 디지털 보관, 정리. 「정리」 아래는 비어 있었다. 파일 수정 날짜는 칠월 둘째 주 목요일이었다. 그 뒤로 열린 적이 없었다.

“칠월에 목차를 썼고, 거기서 멈췄습니다. 대신 오늘 이걸 냈습니다.”

도현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매곡분관 존치 근거.」 여름은 첫 장을 가로등 빛에 비춰 읽었다. 첫 줄이 마을버스 7번 막차였다. 21시 30분, 실제 출발 21시 28분. 민지가 말하던 그 문서였다.

“오늘 본청에서 배 위원장을 만났습니다. 부지는 새봄문화개발로 가게 돼 있고, 대표는 위원장 처남입니다. 제가 그걸 말했더니 위원장이 그래서요, 하더군요. 그리고 저는 십이월 일일자로 본청 지하 서고로 갑니다. 심사 끝나고.”

여름은 봉투를 든 채로 서 있었다. 판단 대신 다른 것이 올라왔다. 질문이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름은 그중 제일 작은 것부터 골랐다.

“왜 말 안 하셨어요. 처음부터.”

“처음에는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면 선생님이 믿을 것 같지 않았고요. 그다음에는.”

도현은 거기서 멈췄다.

“그다음에는요.”

“그다음에는 부탁받은 게 하나 있어서, 그거 말하지 않으려다 이것도 같이 말을 못 했습니다.”

“누가 뭘 부탁했는데요.”

“그건 지금도 말 못 합니다. 약속이라서요.”

여름은 그 대답을 한참 들었다. 말 못 한다고 말하는 사람. 숨기는 걸 숨기지 않는 사람. 여름은 그 사람이 누구에게 그 약속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소매를 걷어붙이는 사람. 재봉틀 앞에 앉아 있는 사람. 여름은 묻지 않았다. 이번에는 묻지 않는 것이 묻는 것보다 나았다.

여름은 봉투를 책상에 놓고, 그 옆에 자기 봉투를 놓았다. 흰 봉투 둘이 나란히 놓였다. 폐관 결정 시. 매곡분관 존치 근거.

“이건 석 달 전에 쓴 거예요. 폐관 결정 나면 그만두려고.”

“압니다.”

“어떻게요.”

“정 선생님이요. 사서가 그만둔다고, 둘이 싸워서.”

여름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정 선생의 기울기가 이번에는 한 치도 기울지 않았다.

“지난 금요일에 하나 더 판단했어요. 세 번째로. 관장님이 처음부터 문 닫으러 왔다고. 스티커 떼 준 것도, 편지 이백 통도 다 연착륙이라고.”

“틀리지 않았습니다. 절반은.”

“절반은 틀렸잖아요.”

“네.”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이번엔.”

여름은 의자에 도로 앉았다. 짧은 다리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종이 받침을 다리 밑에 다시 괴었다. 의자가 반듯해졌다.

“팔 년 동안 한 번도 먼저 안 물었어요. 물어보면 대답이 오고, 대답이 오면 판단을 고쳐야 되니까.”

도현이 창가 쪽으로 걸어왔다.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지 않고, 선 채로 창밖을 봤다. 정류장이 보였다. 아홉 시 반이 지나 비어 있었다.

“고치셨습니까?”

“고치는 중이에요.”

둘은 한참 그렇게 있었다. 가로등이 한 번 깜박였다. 여름은 책상 위 봉투 두 개를 봤다. 하나는 떠나려고 쓴 것이고, 하나는 남으려고 쓴 것이었다. 둘 다 흰 봉투였고, 크기도 같았다. 여름은 자기 봉투를 집어 가방에 넣지 않고, 도현의 봉투 아래에 끼웠다. 두 봉투가 한 겹이 되었다.

그다음 날부터 둘은 싸우는 방법을 바꿨다. 서로가 아니라 한 방향으로.

폐관 심사 규정에는 주민 의견 진술 자리가 하나 있었다. 주민 오십 명 서명이 붙은 의견서를 내면 심사장에서 주민 대표가 오 분 동안 말할 수 있다. 여름은 팔 년 동안 그 조항을 알았고,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오십 명을 모을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이틀이 걸렸다. 시월 첫 토요일 아침, 여름과 도현과 어머니가 매곡동 골목에 섰다. 서명판은 어머니가 들었다. 1998년에 쓰던 것과 같은 모양의 나무 판이었다. 어머니가 수선집 창고에서 꺼내 왔다. 모서리가 닳아서 둥글었다.

첫 대문 앞에서 어머니가 도현을 돌아봤다.

“네가 두드려. 너는 목소리가 커.”

도현은 서른여섯 살이었다. 주먹을 쥐고 잠깐 망설였다가, 대문을 두 번 두드렸다. 쾅, 쾅. 안에서 개가 짖고, 사람이 나왔다. 여름은 그 옆에서 볼펜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매만 걷어붙였다.

토요일에 서른한 명, 일요일에 스물여섯 명. 쉰일곱 명이었다. 일요일 저녁 마지막 대문 앞에서 도현이 주먹을 내리며 말했다. 「아이스크림은 없습니까.」 어머니가 웃었다. 여름이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어머니는 골목 끝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세 개 샀다. 여름은 그 셈을 따지지 않았다. 열 명에 하나면 다섯 개여야 했다.

계약서 초안은 시월 둘째 주 화요일에 3층으로 걸어 들어왔다.

곽정일이 시정 확인 재실사를 핑계로 다시 왔다. 이번에는 비서 없이 혼자였고, 베이지색 재킷 대신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자료실 문을 열자마자 박 여사와 마주쳤다. 박 여사는 문집 상자를 끌어안고 곽정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스티커 붙이던 양반이네.”

“아니, 어르신, 그건 실사라고—”

“1974년에 내 반에 곽씨 하나 있었는데. 곽정일이 너냐?”

곽정일은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1974년에 열 살도 안 됐다고. 박 여사는 믿지 않았다. 문집을 펼쳐 한 사람 한 사람 짚으며 「이 코가 네 코 아니냐」를 따지기 시작했다. 김 할아버지가 옆에서 거들었다. 윤 기사님이 스캐너 셔터를 누르며 「곽가 코는 다 저렇게 생겼어」 하고 한마디 보탰다. 곽정일은 그 소란을 피해 서가 끝으로 물러나다가, 창가 책상 위에 손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 지퍼가 반쯤 열려 있었고, 투명 파일 하나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여름은 그 파일을 봤다. 맨 위 장 제목이 보였다. 「매곡 복합문화시설 위탁 운영 협약서(안).」

박 여사가 곽정일의 팔을 붙들고 문집 쪽으로 끌고 갔다. 「이리 와 봐, 얘가 너 짝꿍이야.」 곽정일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박 여사 손아귀가 초등학교 교사 삼십 년의 손아귀였다.

여름은 창가로 갔다. 파일을 꺼내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지퍼 사이로 보이는 장을 찍었다. 손이 떨렸다. 두 장째에서 초점이 나갔다. 다시 찍었다. 셋째 장까지는 파일을 한 장씩 손끝으로 밀어서 찍었다. 부지 무상 사용 이십 년. 이동도서관 세 대 위탁 포함. 위탁 운영비 연 칠억. 셋째 장 맨 아래 협약 당사자란에 새봄문화개발 곽정일, 그리고 참관란에 도시건설위원회 위원장 배문수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날짜 칸은 비어 있었다. 심사 다음 주 월요일이 연필로 적혀 있었다.

박 여사가 곽정일을 놓아주었다. 곽정일은 손가방을 낚아채 지퍼를 끝까지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재실사는 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등산화 소리가 요란했다.

박 여사가 돋보기를 벗으며 여름에게 윙크를 했다. 여름은 그 윙크를 못 본 척했다. 못 본 척하는 손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그날 오후 여름은 감사관실에 전화를 걸었다. 이정훈 감사관은 두 번째 신호에 받았다. 여름이 사진 세 장을 보내겠다고 하자, 감사관은 잠깐 말이 없다가 물었다.

“어떻게 찍으셨습니까?”

“가방이 열려 있었습니다. 제가 열지는 않았습니다. 파일은 한 장씩 밀어서 넘겼고요.”

“그건 경위서 감입니다. 선생님 앞으로.”

“압니다.”

“그래도 보내시겠습니까?”

“보내겠습니다.”

감사관은 받았다. 받고 나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명단 건하고 같이 보겠습니다.”

여름은 그날 저녁 경위서 양식을 내려받았다. 사유란에 무엇을 쓸지 한참 생각했다. 결국 사실만 썼다. 가방이 열려 있었다. 제가 열지 않았다. 세 장을 찍었다. 사유란 맨 끝에 한 줄을 더 쓰려다가 지웠다. 「1974년 졸업 문집 덕분입니다.」 지우고 나서 경위서를 출력했다. 서명란에 이름을 쓰는 손이 이번에는 떨리지 않았다. 도현이 옆 책상에서 자기 경위서를 쓰고 있었다. 명단 건. 둘은 서로의 경위서를 읽지 않았다. 다 쓰고 나서 결재함에 나란히 넣었다.

시월 셋째 주부터 금요일 막차 탑승자는 서른을 넘었다. 구 사장은 차액 청구를 멈췄다. 문자로 「이제 흑자」라고만 보냈다. 넷째 주에는 윤 기사님이 조수석 뒤 첫 좌석에 앉아, 기사에게 매곡동 골목 지름길을 하나씩 가르쳤다. 막차는 이 분 늦게 들어왔다.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십일월 사 일 오후 네 시, 3층 칠판의 숫자가 사천백팔십이 되었다. 마지막 한 점은 여름의 어머니가 올렸다. 1998년 분관 설립 서명부 원본 첫 장. 대표 발의자 한미숙. 어머니는 자기 이름이 적힌 장을 받침대에 올리고 셔터를 눌렀다. 번쩍. 그리고 돋보기를 벗었다.

“다 했다.”

3층에 있던 열한 명이 박수를 쳤다. 김 할아버지는 박수를 치다 말고 평판 스캐너 유리를 소매로 한 번 닦았다. 석 달 동안 날마다 닦던 유리였다. 담요 든 할머니가 담요를 흔들었다. 도현은 계단참에서 계수기를 눌렀다. 딸깍. 여름은 칠판에 숫자를 고쳐 쓰고, 그 아래에 날짜를 적었다. 심사까지 아흐레였다.

어머니가 여름 옆으로 와서 칠판을 올려다봤다.

“엄마는 앞줄이었네.”

여름이 말했다. 사진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알아들었다.

“응.”

“나는 뒷줄이었고.”

“응.”

어머니는 칠판 지우개를 집어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네가 앞줄 해.”

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어머니 소매를 걷어 주었다. 반쯤 내려와 있었다. 걷어 주는 손이 어머니 손처럼 빨랐다. 둘 다 그걸 알았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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