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30자)
열하나
망한 게임 튜토리얼 마을의 촌장 NPC로 빙의했다 · 장연무
북문 문턱은 돌 한 장 높이였다. 나는 왼손에 지팡이를 쥐고 이 문턱 위에 섰다. 문턱 바깥으로 몸이 기울면 고블린 쪽으로 넘어지고, 안쪽으로 기울면 창날 쪽으로 넘어질 자리였다.
“들이자는 거죠.”
대장장이가 등 뒤에서 말했다.
“열하나면 빵이 하루에 여덟 개 더 들어요. 지금 남은 걸로는 엿새가 닷새가 돼요.”
베르타가 말했다. 셈을 먼저 했다. 늘 그랬다.
“숲에 도토리 있다.”
단추가 말했다.
“동쪽 숲 늑대 굴 아래쪽. 떡갈나무 많은 데. 버섯도 있다. 칡뿌리도. 굴에서 다들 거기 가서 주워 먹었다. 늑대 깨기 전에는.”
“게임에 그런 거 없었는데.”
내가 말했다. 정말 없었다. 동쪽 숲에서 주울 수 있는 것은 늑대 가죽과 늑대 이빨뿐이었다. 나무는 배경이었다. 떡갈나무가 떡갈나무인지도 나는 몰랐다.
“그건 니네 화면 얘기고.”
단추가 말했다. 노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단추는 이 말을 짚돌이에게서 들었고, 짚돌이는 노미에게서 들었다. 말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서 고블린 입으로 나왔다.
나는 돌아서서 창날들을 보았다.
“빵은 베르타 씨가 정하고, 일은 일하는 사람이 정해요. 그럼 문은 문 지키는 사람이 정해야죠.”
사람들의 눈이 노미에게 갔다. 노미는 창을 쥔 채 한참 고블린들을 보았다. 업힌 늙은 고블린, 귀가 찢어진 것, 내 무릎께의 어린것. 노미의 입술이 움직였다가 멈췄다. 열세 해 동안 이 입이 한 말은 한 줄이었다.
“들어와라.”
노미가 창끝을 하늘로 세웠다.
“북쪽은 위험하다.”
고블린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짚돌이가 성벽 위에서 막대 두 개를 부딪쳤다. 노미는 웃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북쪽 들판에는 쿠르곤이 있었다.
*
이날 낮 고블린들은 노미와 창을 든 사람 다섯을 따라 동쪽 숲에 들어갔다. 늑대가 나오는 자리를 피해 단추가 길을 잡았다. 이들은 해 질 녘에 자루 셋을 지고 돌아왔다. 도토리가 둘, 버섯과 칡뿌리가 하나였다.
닭 할머니가 도토리 자루를 열어 보고 혀를 찼다.
“이거 그냥 먹으면 떫어서 못 먹어. 물에 우려야지. 가루 내서 사흘은 우려야 해.”
“할머니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몰라. 손이 알아.”
할머니는 정말 몰랐다. 게임에서 닭이 도망갔다는 말만 했다. 그런데 도토리를 바위에 깨는 손이 망설이지 않았다. 열세 해 동안 어떤 손으로 그려져 있었는지, 누가 할머니에게 그런 손을 그려 넣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것을 화면에서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고블린 어린것 하나가 할머니 옆에 쪼그려 앉아 깬 도토리를 줍다가 「키에엑」 하고 울었다. 이 어린것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우는 거 아니야. 할머니가 우려서 줄게. 기다려, 임마.”
어린것이 다시 울었다.
「키에엑, 할머니.」
할머니가 손을 멈췄다. 어린것은 다시 「키에엑」만 했다. 한 마디가 들어갔다 나왔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이 머리를 한 번 더 툭 쳤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약했다. 이날 밤 할머니는 깬 도토리를 자루째 빨래터 개울물에 담가 두고, 어린것을 데리고 가서 자루 끈을 돌에 묶는 법을 보여 주었다.
칡뿌리는 이날 밤 바로 구웠다. 버섯은 단추가 하나하나 골라냈다. 먹으면 죽는 것과 아닌 것이 있다고 했다. 이 둘을 어떻게 가르는지 단추는 설명하지 못했다. 굴에서 먹고 죽은 것을 봤다고만 했다.
베르타는 이날 저녁 빵을 나누면서 셈을 다시 했다. 엿새가 닷새가 되는 대신 엿새 반이 되었다.
성벽 쪽은 그렇게 조용하지 않았다. 숲에 가지 않은 고블린 다섯이 바위터에서 돌을 날랐는데, 오후에 농부가 그중 하나의 손에서 돌을 빼앗았다. 이 돌은 자기가 먼저 봤다고 했다. 고블린은 이 돌을 자기가 먼저 들었다고 했다. 둘은 돌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농부는 쇠스랑을 쥐었고, 고블린은 이를 드러냈다. 둘레의 사람들과 고블린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편을 갈라 섰다.
나는 거기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일을 정하는 것은 이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목수가 정했다. 목수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돌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무게를 달아 보고, 땅에 내려놓았다.
“이건 모퉁이 밑돌감이야. 혼자 못 들어. 둘이 들어.”
농부와 고블린이 동시에 목수를 보았다.
“너는 키가 작으니까 밑을 받치고, 너는 키가 크니까 위를 잡아. 둘이 들면 반나절에 모퉁이 하나 놓는다. 혼자 들면 둘 다 허리 나간다.”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보다가 돌의 위와 아래를 잡았다. 둘이 들자 돌은 정말 들렸다. 농부는 성벽 모퉁이까지 가는 동안 한 번도 고블린을 보지 않았고, 고블린은 한 번도 농부를 보지 않았다. 돌을 내려놓고 나서 농부가 말했다. 다리 짧은 게 허리는 세네. 고블린이 대답했다. 키 큰 게 손은 느리네. 이날 해 질 때까지 둘은 이 모퉁이에 돌 아홉 개를 같이 놓았다. 말은 이 두 마디가 다였다.
저녁에 남쪽 다리에 갔다. 모리의 네 번째 줄과 여섯 번째 줄이 또 바뀌어 있었다. 고블린들이 들어왔다는 얘기를 누군가 농부에게 하고 간 모양이었다.
「고블린 굴은 위험해요. 근데 고블린은 들어와요. 준비가 되면 떠나세요!」
모리는 활짝 웃으며 이 줄을 했다. 나는 이 앞에 서서 한참 웃었다. 늙은 목이 갈라졌다. 이 주 들어 처음 웃었다.
*
밤에 단추와 열하나에게서 굴 사정을 들었다. 나는 연습장 말뚝 옆에 앉고, 이들은 짚돌이를 둘러싸고 앉았다. 고블린들은 짚 냄새를 좋아했다.
굴의 고블린은 백이 넘었다. 늑대가 스물 남짓. 들판의 뿔토끼는 다 잡았고, 밀은 이삭이 덜 차서 먹으면 배가 아팠다. 쿠르곤은 밤마다 보스의 방에 앉아 아직 깨어나지 않은 고블린들에게 대답했고, 낮에는 센 것들부터 먹였다. 약한 것들은 맨 끝이었다.
“왕은 뭐 먹는데?”
짚돌이가 물었다.
“왕은 맨 끝의 앞. 우리보다 하나 앞.”
단추가 말했다. 늙은 고블린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마르는 거 봤다. 너희 촌장보다 마른다.”
나는 쿠르곤의 갈비뼈를 떠올렸다. 둑 위에서 쿠르곤은 허벅지에 감은 가죽 말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갈비뼈가 고블린 마흔과 똑같이 드러나 있었다.
“눈 오는 밤에 온다. 왕이 그랬다. 첫눈. 눈 오면 늑대 발자국이 안 보이고, 너희는 추워서 문 닫고 들어간다고. 그리고 남쪽에서 잡아 온 인간은 보스의 방에 있다. 안 죽였다. 왕은 그거 들고 올 거다.”
“뭐랑 바꾸려고?”
단추가 열하나를 둘러보았다.
“우리.”
*
쿠르곤은 첫눈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이때 북문 옆 초소에 노미와 함께 있었다. 노미는 창을 무릎에 눕히고 앉아 있었다. 굳었던 무릎이 이제 조금 굽었다.
“아침에 왜 나한테 물었냐? 문.”
“나는 정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내가 정하면 계산으로 정해요. 열하나면 빵 여덟 개, 도토리 자루 셋. 그런 걸로.”
“나는 뭐로 정했는데?”
“북쪽은 위험하다.”
노미가 처음으로 웃었다. 입꼬리가 아니라 어깨가 먼저 흔들렸다.
“그건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말이다.”
“그러니까요. 그 말로 정했잖아요.”
이때 들판에서 횃불이 일어났다. 자정이었다. 횃불은 하나씩 늘어 마흔에서 멈췄고, 북문 앞 들판에 반달 모양으로 늘어섰다. 나는 노미 옆에서 북문 위로 올라갔다. 목수가 문 옆 돌담에 디딤돌을 박아 두어서, 굽지 않는 무릎으로도 지팡이를 짚고 오를 수 있었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니 쿠르곤이 맨 앞에 서 있었다. 이 옆에 고블린 둘이 사내 하나의 양팔을 잡고 있었다. 남쪽 길에서 끌려간 사람이었다. 떠나던 날 등에 지고 갔던 냄비는 없었다. 얼굴이 부어 한쪽 눈이 감겨 있었다. 살아 있었다. 성벽 위의 나를 알아보고 입을 벌렸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두 번 움직였다. 촌장님, 이었는지 배고파요, 였는지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촌장.”
쿠르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나 가져왔다. 열하나 내놔. 우리 것들.”
“그 애들은 굶어서 왔어.”
“알아. 그러니까 내놔. 굶는 건 우리 굴에서 굶는다.”
등 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끌려간 사람은 이 마을 사람이었다. 열세 해 동안 같은 골목을 걸었다. 고블린 열하나는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 이 셈은 누구나 금방 했다.
베르타가 내 옆으로 올라왔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끌려간 사내의 부은 얼굴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에게가 아니라 성벽 위의 사람들에게.
“사람 하나를 고블린 열하나랑 바꾸면, 다음엔 둘을 잡아 와요. 그다음엔 넷이요. 남쪽 길에 고블린 스물 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셈도 맞았다.
쿠르곤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았다. 북문 아래 성벽 틈 쪽을 향해 말했다. 고블린 열하나가 웅크리고 있는 연습장 쪽이었다.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둑 위에서 나에게 하던 목소리가 아니라, 밤마다 보스의 방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들에게 대답하던 목소리였다.
“막내. 이리 와. 왕이 밥 준다. 키에엑 하지 말고. 왕 말로 해. 우리 말로.”
연습장 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고블린 어린것 둘이 일어섰다. 이들의 말은 쿠르곤의 말로 되어 있었다. 쿠르곤이 깨운 것들이었다. 깨어난 말이 자기를 깨운 목소리 쪽으로 몸을 끌었다.
단추가 이 둘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성벽 틈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왕! 그거 이제 안 먹힘!”
쿠르곤이 말을 멈췄다.
“밥 준다는 거, 왕이 맨날 하던 말이잖아. 근데 맨날 센 놈들부터 먹였잖아. 우리는 맨 끝이었잖아. 여기는 할머니가 도토리 우려 준다. 사흘 걸린대. 그래도 준대. 인정?”
단추의 말은 짚돌이의 말이었고, 짚돌이의 말은 내 말이었다. 이 말이 고블린 입에서 쿠르곤에게로 갔다.
쿠르곤은 한참 동안 단추를 보았다. 단추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 말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았다. 열세 해 동안 이 말투로 들어와서 쿠르곤을 치고 간 사람들의 말이었다. 이제 쿠르곤의 고블린이 이 말을 했다.
“애꾸.”
쿠르곤이 말했다. 웃음기가 없었다.
애꾸가 앞으로 나왔다. 뼈 지팡이 대신 활을 들고 있었다. 화살촉에 기름 먹인 헝겊이 감겨 있었다. 고블린 하나가 횃불을 내밀었고, 헝겊에 불이 붙었다. 애꾸가 시위를 당겼다. 외눈이 성벽 틈의 단추를 겨누었다.
「불의 정령이여!」
애꾸의 대사였다. 이 대사와 함께 불화살이 날았다.
나는 성벽 위에서 이것을 보았다. 불화살은 단추에게 가지 않았다. 단추 앞에 무언가가 통 하고 뛰어올랐다. 짚 팔을 벌리고, 짚 가슴을 내밀고. 늑대에게 뜯겨 반쯤 줄어든 몸이었다.
“아 이건 내 전—”
화살이 짚돌이의 가슴에 박혔다. 기름 먹인 헝겊의 불이 마른 짚으로 옮겨 붙는 데는 숨 한 번이 걸리지 않았다. 불은 가슴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머리로 올라갔다. 짚 타는 냄새가 성벽 위까지 확 끼쳤다.
짚돌이가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허수아비 목소리는 떨 줄을 몰랐는데, 이 비명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