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83자)

둑

망한 게임 튜토리얼 마을의 촌장 NPC로 빙의했다 · 장연무

애꾸의 불덩이와 경비병의 창끝 사이에는 한 뼘이 있었다⁠. 짚돌이는 이 한 뼘에서 가장 먼 자리⁠, 경비병의 등 뒤로 숨어 짚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둘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불덩이의 열기가 왼뺨을 데웠다⁠.

“⁠내일 해 뜰 때 간다⁠.⁠”

애꾸의 외눈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혼자⁠.⁠”

“⁠혼자⁠.⁠”

불덩이가 지팡이 끝에서 쪼그라들어 꺼졌다⁠. 애꾸는 고블린 다섯을 데리고 들판 쪽 어둠으로 물러났다⁠. 경비병의 창끝은 이들이 둑을 넘어갈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혼자 가지 마라⁠.⁠”

경비병이 말했다⁠. 대사가 아니라 내 얼굴을 보고 한 말이었다⁠. 마지막 마디가 바뀐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였다⁠. 나와 짚돌이가 북문 앞에 쪼그려 앉아 번갈아 대답하는 동안 경비병의 대사는 마디마디 무너졌고⁠, 자정 무렵 경비병은 창을 문기둥에 기대 놓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가⁠… 안 굽혀진다⁠.⁠”

열세 해를 같은 자리에 서 있던 다리였다⁠. 무릎이 굳어 있었다⁠. 나는 이 무릎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경비병은 창을 끌어다 무릎 위에 눕혔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어 보았다가 놓았다⁠.

“⁠나⁠, 이거 한 번도 안 휘둘러 봤다⁠.⁠”

“⁠게임에서 경비병은 무적이었어요⁠. 무슨 몬스터든 한 방이었어요⁠. 초보들이 일부러 몬스터 끌고 와서 경비병 앞에 버렸어요⁠.⁠”

“⁠그건 화면 얘기고⁠.⁠”

경비병이 나를 보았다⁠. 서른쯤 된 얼굴에 열세 해 치 햇볕이 그을려 있었다⁠.

“⁠나는 서 있기만 했다⁠. 북쪽은 위험하다고 하면서⁠, 북쪽에서 뭐가 오는지 한 번도 안 봤다⁠. 그저께 그 큰 거 들어올 때 처음 봤다⁠.⁠”

“⁠이름 있어요⁠?⁠”

“⁠노미⁠. 문 옆에 붙은 패에 적혀 있었다⁠. 아무도 안 읽었지만⁠.⁠”

“⁠노미 씨⁠, 내일 나 혼자 가요⁠. 그게 약속이에요⁠.⁠”

“⁠둑 밑까지만 간다⁠. 그 위로는 안 올라간다⁠. 그것도 약속이다⁠.⁠”

*

해가 뜨기 전에 우리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갔다⁠. 노미는 굳은 무릎으로 창을 지팡이 삼아 걸었고⁠, 나는 진짜 지팡이를 짚었다⁠. 둘이 나란히 걸으니 하나는 오른쪽으로⁠, 하나는 왼쪽으로 기울어서 짚돌이가 뒤에서 보고 말했다⁠. 촌장님이랑 누나 같이 걸으면 사람 인 자예요⁠.

들판은 사흘 사이에 다른 땅이 되어 있었다⁠. 밀밭 가운데가 짓밟혀 길이 났고⁠, 뿔토끼 굴 입구마다 고블린이 판 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모닥불 자리가 열 군데 넘게 까맣게 남았다⁠. 뼈와 털이 이 둘레에 흩어져 있었다⁠.

개울이 바위산 쪽으로 굽어 드는 자리에 둑이 있었다⁠. 고블린들은 개울 바닥의 돌을 끌어다 쌓고⁠, 이 사이를 통나무와 진흙으로 메웠다⁠. 둑 위쪽에 물이 차올라 작은 못이 되어 있었고⁠, 아래쪽 개울 바닥은 하얗게 말라 갈라지기 시작했다⁠. 고블린 마흔이 사흘 밤 만에 쌓은 둑이었다⁠. 나는 이 둑을 보고 우리 돌담 마흔 걸음을 떠올렸다⁠.

쿠르곤은 둑 위에 앉아 있었다⁠. 왼 허벅지에 짐승 가죽을 감았고⁠, 가죽 위로 검붉은 것이 배어 나왔다⁠. 나를 보자 이 다리를 둑 아래로 늘어뜨렸다⁠. 일어나지 않았다⁠.

노미가 둑 밑에서 멈췄다⁠. 창을 땅에 꽂고 섰다⁠. 열세 해 동안 북문 옆에 서던 모양 그대로였다⁠. 나는 혼자 둑의 비탈을 올라갔다⁠. 진흙이 지팡이를 삼켰다가 놓아주지 않아서⁠,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지팡이를 비틀어 뽑아야 했다⁠. 고블린들이 둑 양쪽에서 구경했다⁠. 누가 크크 웃었고⁠, 누가 막타 막타 하고 손뼉을 쳤다⁠.

“⁠물은 준다⁠.⁠”

쿠르곤이 말했다⁠.

“⁠대신 들판⁠. 밀밭이랑 뿔토끼 굴이랑 개울 이쪽까지 다⁠. 너희는 그 돌담 안에서 살아⁠.⁠”

“⁠들판 없으면 우리가 굶어⁠.⁠”

“⁠우리는 지금 굶어⁠.⁠”

쿠르곤이 손을 들어 둑 아래 들판을 쓸었다⁠. 고블린 마흔이 이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들은 다 말라 있었다⁠. 갈비뼈가 가죽 아래로 하나하나 셀 수 있게 드러났다⁠.

“⁠그리고 하나 더⁠.⁠”

쿠르곤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두 걸음 앞에 서⁠. 거기 서서⁠, 그 대사 한 마디도 하지 마⁠. 물리쳐 주게⁠. 그거 안 하면 둑 연다⁠. 하면 겨울까지 이대로다⁠.⁠”

“⁠그게 무슨 값이야⁠?⁠”

“⁠내 값⁠.⁠”

*

나는 두 걸음 앞에 섰다⁠. 입이 열렸다⁠.

「⁠어서 오게⁠, 젊은이⁠. 새싹마을에 온 것을 환영하네⁠.⁠」

쿠르곤은 이 대사를 가만히 들었다⁠. 첫 줄은 건 값에 들어 있지 않았다⁠. 이 다음이 문제였다⁠. 혀뿌리에서 다음 마디가 밀려 올라왔다⁠. 북쪽⁠, 굴의⁠, 고블린⁠, 왕을⁠. 나는 어금니 사이에 혀끝을 넣고 깨물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깨물었다⁠. 입 안에 쇠 맛이 고였다⁠.

“⁠미안하다⁠, 또 왔다⁠.⁠”

쿠르곤이 말했다⁠. 내 눈을 보면서⁠.

“⁠그거 너지⁠?⁠”

입을 열면 대사가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피가 턱으로 흘렀다⁠.

“⁠알아⁠. 그저께 문 앞에서 너 들어와 할 때 알았다⁠. 그놈도 방에 들어오면 꼭 한마디 하고 쳤다⁠. 다른 놈들은 그냥 쳤는데⁠.⁠”

쿠르곤이 웃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혀를 깨문 채 듣는 쿠르곤의 말은 하나하나 멀리서 오는 것처럼 들렸다⁠.

“⁠그놈은 밤에도 왔다⁠. 새벽에도 왔다⁠. 같은 박자로⁠. 미안하다⁠, 또 왔다⁠. 친다⁠. 나 눕는다⁠. 삼십 분⁠. 일어난다⁠. 미안하다⁠, 또 왔다⁠. 나중엔 그 말이 들리면 아프기도 전에 아팠다⁠.⁠”

턱이 떨렸다⁠. 혀가 이 사이에서 저 혼자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렸다⁠. 무게중심이 지팡이 쪽으로 쏠렸고⁠, 진흙에 박힌 지팡이 끝이 조금씩 미끄러졌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천 번 하면서 한 번도 안 멈추더라⁠. 그게 제일 웃겼다⁠.⁠”

목구멍에서 「⁠북⁠」 소리가 반쯤 올라왔다⁠. 나는 숨을 멈췄다⁠. 쿠르곤이 이 소리를 들었다⁠. 노란 눈이 내 입술 위에 멈췄다⁠.

쿠르곤은 한참 그렇게 보다가 손을 내렸다⁠.

“⁠됐다⁠. 열어⁠.⁠”

고블린 둘이 둑 가운데 통나무에 밧줄을 걸어 당겼다⁠. 진흙이 터지는 소리가 났고⁠, 못에 고였던 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마른 개울 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젖었다⁠. 둑 밑에 서 있던 노미가 물을 피해 비탈로 뛰어올랐다⁠. 무릎이 굳은 다리로 뛰는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비탈에 엎어졌다가 창을 짚고 일어났다⁠.

나는 그제야 입을 벌려 피를 뱉었다⁠.

“⁠이건 물 얘기다⁠.⁠”

쿠르곤이 둑 위에서 일어섰다⁠. 허벅지에 감은 가죽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눈 오기 전에 마을 먹는다⁠. 그건 그대로다⁠. 그 다리 짧은 놈은 가져⁠. 우리 하나 덜 먹으니까⁠.⁠”

*

물은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 빨래터에 닿았다⁠. 우물 두레박 줄은 저녁에 원래 길이로 돌아왔다⁠.

들판 얘기는 내가 하기도 전에 마을에 퍼져 있었다⁠. 노미가 말했고⁠, 노미는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밀밭은 우리 거였어요⁠.⁠”

농부가 우물가에서 말했다⁠. 쇠스랑을 쥐고 있었다⁠. 열세 해 동안 이 밀밭으로 걸어간 다리였다⁠.

“⁠이제 이삭이 차는데요⁠. 게임에선 안 자라던 게 이제 자라는데요⁠. 한 달이면 벤다고요⁠.⁠”

“⁠물 없으면 사흘이에요⁠. 밀은 한 달이고요⁠.⁠”

“⁠그래도 물어는 봤어야죠⁠. 촌장이면⁠.⁠”

베르타는 우물가에 오지 않았다⁠. 잡화점에서 바구니의 빵을 다시 갈랐다⁠. 일한 사람에게 하나이던 것이 하나에서 사분의 일이 떨어져 나갔다⁠. 깨어나지 않은 사람 몫인 반쪽은 그대로였다⁠. 가게 문에 서서 이 바구니를 들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말했다⁠.

“⁠들판 값이에요⁠. 촌장님이 치르신⁠.⁠”

연습장 말뚝에 묶인 단추에게 쿠르곤의 말을 전한 것은 나였다⁠. 왕이 너를 가지라고 했다고⁠. 하나 덜 먹으니까⁠.

단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묶인 손목을 비틀어 보다가 그만두었다⁠.

“⁠왕이 나 버렸네⁠. 크크⁠.⁠”

웃는 소리였는데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지팡이 끝으로 단추의 손목 매듭을 풀었다⁠. 깨어난 사람들이 뒤에서 웅성거렸다⁠. 우물가 아저씨가 쇠스랑을 고쳐 쥐었다⁠. 단추는 풀린 손목을 문지르며 일어나 부은 다리로 한 번 휘청하더니⁠, 사람들을 보지 않고 베르타의 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일하면 빵 준다며⁠.⁠”

베르타가 계산대 너머로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단추의 머리는 계산대 높이에 겨우 닿았다⁠.

“⁠뭘 할 줄 아는데요⁠?⁠”

“⁠돌 나른다⁠. 굴에서 맨날 돌 날랐다⁠. 다리는 짧아도 등은 세다⁠.⁠”

이날 오후 단추는 바위터에서 성벽 금까지 돌을 열한 번 날랐다⁠. 자기 몸통만 한 돌을 등에 얹고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을 쳤다⁠. 사람들은 처음엔 단추가 지나갈 때마다 길을 비켰고⁠, 다섯 번째쯤부터는 비키지 않았다⁠. 저녁에 베르타는 단추의 손바닥에 빵 사분의 삼을 올려놓았다⁠. 남들과 같은 몫이었다⁠.

*

오후에 노미는 연습장에 갔다⁠. 짚돌이가 말뚝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누나⁠, 자세는 좋은데 딜이 약해요⁠.⁠”

“⁠딜이 뭐냐⁠?⁠”

“⁠세기요⁠. 세게⁠. 그리고 선딜이 너무 길어요⁠.⁠”

“⁠선딜은 뭐냐⁠?⁠”

“⁠찌르기 전에 숨을 너무 오래 쉬어요⁠. 그 사이에 고블린이 세 번 찔러요⁠.⁠”

노미는 창을 들고 짚돌이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숨을 쉬고⁠, 또 쉬었다⁠. 창끝이 짚돌이 가슴 앞에서 떨리다가 멈췄다⁠.

“⁠못 하겠다⁠. 너는 말을 하잖냐⁠.⁠”

“⁠나 십삼 년 동안 말하면서 맞았어요⁠. 공격 버튼을 눌러 저를 때려 보세요⁠. 다들 잘 때렸어요⁠.⁠”

“⁠그 사람들은 네가 말하는 줄 몰랐다⁠.⁠”

짚돌이가 막대 팔을 벌렸다⁠.

“⁠지금은 내가 때려 달라고 하는 거잖아요⁠. 내 말로⁠. 그럼 된 거 아님⁠?⁠”

노미는 숨을 한 번만 쉬었다⁠. 창이 나갔다⁠. 창날이 짚돌이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한 뼘 빠져나왔다⁠. 짚돌이는 창에 꿰인 채로 고개를 숙여 제 가슴을 보았다⁠.

“⁠오⁠. 크리 터졌다⁠.⁠”

급소에 제대로 들어갔다는 게임 말이었다⁠.

노미가 창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짚돌이가 창을 꽂은 채로 통통 뛰어 노미를 따라갔다⁠.

“⁠아니 괜찮아요⁠, 짚이에요⁠. 빼 주세요⁠. 근데 방금 그거 진짜 좋았어요⁠. 선딜 없었어요⁠.⁠”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었다⁠. 노미만 웃지 않았다⁠. 노미는 짚돌이 가슴에서 창을 뽑아 들고⁠, 이 창날을 오래 보았다⁠. 짚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사람이면 죽었다⁠.⁠”

“⁠고블린이면요⁠. 사람 말고⁠.⁠”

이날 해 질 때까지 노미는 짚돌이를 서른 번 찔렀다⁠. 짚돌이는 가슴 쪽 짚이 성글어져 저녁에는 바람이 이 사이로 지나갔다⁠.

*

해가 지기 직전 닭 할머니가 연습장으로 뛰어왔다⁠. 숨이 차서 말을 두 번 끊었다⁠.

“⁠남쪽 다리요⁠. 사람들이 짐 쌌어요⁠.⁠”

남쪽 다리 끝에 모리가 서 있었다⁠. 이 앞에 여섯이 서 있었다⁠. 이불 보따리와 냄비와 빈 자루를 등에 졌다⁠. 농부가 맨 앞이었다⁠. 뒤에 이마에 돌을 맞았던 젊은 여자가 있었고⁠, 이마의 상처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

모리가 활짝 웃으며 마지막 줄을 했다⁠. 농부의 대사는 그사이 반쯤 바뀌어 있었다⁠. 사흘 동안 사람들이 이 앞에 와서 불평을 쏟고 갔다⁠.

「⁠축하해요⁠! 이제 들판은 없어요⁠, 넓은 세상으로 떠나세요⁠!⁠」

모리가 다리 너머를 손으로 가리켰다⁠. 열세 해 동안 수십만 명을 그쪽으로 보낸 손짓이었다⁠. 농부가 이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보따리 끈을 고쳐 멨다⁠. 농부의 발이 다리 첫 판자에 올라섰다⁠.

나는 다리 어귀에 지팡이를 짚고 섰다⁠. 여섯이 일제히 나를 보았다⁠. 농부가 판자 위에서 멈추지 않고 말했다⁠.

“⁠촌장님이 들판을 줬잖아요⁠. 우리는 넓은 세상으로 갈게요⁠. 안내원도 가라는데요⁠.⁠”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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