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81자)
돈이 모자라네요
망한 게임 튜토리얼 마을의 촌장 NPC로 빙의했다 · 장연무
지팡이가 고랑 너머 흙을 짚었고, 내 몸은 이 지팡이를 따라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굽지 않는 왼 무릎이 버팀목처럼 땅에 박혔다가 꺾였다. 나는 옆으로 쓰러져 첫 고랑의 진흙에 반쯤 묻혔다. 밀 줄기가 뺨을 긁었고, 흙탕물이 귀로 들어왔다.
고블린들이 웃었다. 모닥불 쪽에서 누가 손뼉을 쳤다.
“들어왔네.”
애꾸가 고랑을 따라 걸어왔다. 뼈 지팡이가 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약속은 지킨다. 왕이 그랬다. 우리는 대사를 지킨다고. 저건 가져가. 이건 어제 그 초보 몫이고.”
뼈 지팡이가 내려왔다. 그리고 짚 소리가 났다.
짚돌이가 내 위에 엎어져 있었다. 둑에서 통통 뛰어 내려와, 고랑으로 몸을 날렸다. 뼈 지팡이가 짚돌이의 등판에 박혔다가 튕겨 나왔다. 짚 부스러기가 내 얼굴로 쏟아졌다.
“아, 이건 내 전문이지.”
애꾸가 다시 내리쳤다. 짚돌이가 다시 받았다. 세 번째에 짚돌이는 몸을 비틀어 등 대신 가슴으로 받았다.
“가슴 쪽이 짚이 더 두꺼워요. 십삼 년 맞아 보면 알아.”
애꾸의 외눈이 짚돌이를 내려다보았다. 짚돌이는 뼈 지팡이를 거두고 모닥불 쪽으로 돌아갔다. 지겨워진 얼굴이었다. 고블린 둘이 농부의 팔을 놓았고, 농부는 놓이자마자 다시 밀밭으로 걸으려 했다. 짚돌이가 막대 다리를 농부의 발목에 걸어 붙잡았다.
나는 진흙에서 혼자 일어나지 못했다. 짚돌이가 막대기 팔을 내 겨드랑이에 넣고 몸 전체로 들어 올렸다. 오른 어깨가 욱신거렸다. 고랑에 박힐 때 그쪽으로 떨어졌다.
*
농부는 마을로 데려와도 들판으로 돌아가려 했다. 북문에서 한 번, 광장에서 두 번, 몸을 돌려 정해진 길로 걸어 나갔다. 결국 우물가 아저씨가 빨랫줄을 가져와 농부의 허리를 우물 기둥에 묶었다. 농부는 줄이 팽팽해진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했다. 밤새 이 발소리가 광장 돌바닥을 두드렸다.
나와 짚돌이는 번갈아 농부에게 대답했다. 짚돌이의 대사는 「올해 밀은 잘될 거예요」 하나였다. 새벽에 짚돌이는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허리의 빨랫줄을 내려다보았다.
“배고파요. 근데 나 왜 묶여 있어요? 실화냐?”
깨어난 사람이 열하나가 되었다. 열하나가 다 배가 고팠다. 그리고 내 손에는 은화가 한 닢도 없었다.
*
잡화점 문을 열자 베르타가 말했다.
「어서 와요, 새싹 잡화점이에요.」
“돈 없어요. 그래도 왔어요.”
「천천히 골라 봐요.」
“고를 게 없어요. 빵이 일흔 개뿐인데 마을이 백 명이에요.”
「돈이 모자라네요.」
“그러니까요.”
이날 나는 계산대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베르타의 네 줄에 대답했다. 정해진 대사가 넷이면 바뀔 마디도 그만큼 많았다. 짚돌이가 교대로 대답했고, 깨어난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끼어들었다. 베르타의 대사는 마디마다 엉뚱한 입에서 온 말로 갈아 끼워졌다.
「어서 와요, 새싹 배고프네 잡화점이에요.」
「천천히 골라, 임마.」
「돈이 모자라네요, 실화냐!」
닭 할머니가 이걸 듣고 바닥에 주저앉아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러다 베르타의 눈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대사가 반쯤 바뀌었을 때부터, 할머니의 눈은 계산대 앞의 나를 따라 움직였다. 정해진 자리가 아니라 내 얼굴을, 내 손을, 지팡이를 쥔 내 오른손을 보았다.
해가 기울 무렵 마지막 마디가 바뀌었다. 베르타는 계산대에 두 손을 짚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열세 해 만에 처음 쉬는 숨처럼 길었다.
“당신, 촌장 아니죠.”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짚돌이가 짚 끝을 세웠다.
“촌장님은 지팡이를 왼손에 쥐었어요. 굽지 않는 다리 쪽으로. 당신은 오른손에 쥐고 다리를 끌어요. 그리고 촌장님은 임마 같은 말 안 해요.”
“열세 해 동안 다 봤어요?”
“광장 건너편에 서서 매일 봤죠. 깨어 있지 않았어도 눈은 떠 있었으니까.”
베르타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유저죠. 물약 백 개씩 사 가고 한 번도 고맙다는 말 안 하던.”
나는 지팡이를 왼손으로 옮겨 쥐어 보았다. 몸이 그쪽으로 훨씬 덜 기울었다. 촌장은 열세 해 동안 이렇게 서 있었다. 나는 이것을 화면으로 수천 번 보고도 몰랐다.
“맞아요. 유저예요. 안에 든 건.”
*
베르타는 빵을 내주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요. 일한 사람이 먹어요.”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일을 못 해요. 걷기만 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깨어난 다음에 먹어요.”
“그 전에 굶어 죽어요.”
“빵이 일흔하고 몇 개예요. 백 명한테 나누면 이틀이에요. 일하는 스무 명한테 나누면 열흘이에요. 열흘 안에 밭을 다시 일구든 들판을 되찾든 하겠죠. 당신 계산은 어떻게 나와요?”
내 계산도 같았다. 나는 이 계산이 맞는 게 싫었다. 게임에서 나는 늘 이런 셈을 했다. 물약 몇 개를 쓰고 몇 개를 남길지, 어느 몬스터를 먼저 잡고 어느 몬스터를 버릴지. 이 셈에서 버리는 것은 늘 화면 속 숫자였다.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 몫은 내 몫에서 떼요.”
“촌장님 몫은 하루 빵 하나예요. 반은 떼도 돼요. 나머지는 당신이 일해서 벌어요.”
“촌장이 일을 해요?”
베르타가 처음으로 웃었다. 입꼬리만 조금 올라갔다.
“유저 양반, 당신은 촌장이 아니라면서요.”
나는 일을 찾았다. 내가 아는 것은 게임뿐이었다. 튜토리얼에는 숨은 퀘스트가 하나 있었다. 촌장 집 뒤 장독대에서 세 번째 항아리를 조사하면 「낡은 항아리」가 나오고, 이걸 잡화점에 가져가면 은화 다섯 닢을 받았다. 초보 대부분은 모르고 지나갔다.
장독대에는 항아리가 다섯 개 있었다. 나는 세 번째 뚜껑을 지팡이로 밀어 열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에는 소금물에 절인 무가 가득했다. 아이템이 아니라 진짜 무였다. 열세 해를 묵은 것인지 어제 담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짚돌이가 막대 끝으로 하나를 찍어 냄새를 맡더니, 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에게 내밀었다. 짰다. 먹을 수 있었다.
“은화 다섯 닢짜리 항아리예요.”
베르타는 무 한 조각을 씹어 보고 계산대 뒤 선반에 항아리를 올렸다.
“다섯 닢은 안 되고, 빵 세 개.”
“게임에서는 다섯 닢이었는데.”
“그 게임 끝났다면서요.”
다른 항아리 넷은 비어 있었다. 숨은 퀘스트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이날 오후 남쪽 다리까지 걸어갔다. 마을 사람들이 몇 번이나 물었기 때문이었다. 왜 다리를 건너 떠나지 않느냐고. 다리 끝의 모리가 나를 보고 웃었다.
「새싹마을에 오신 걸 환영해요! 먼저 광장의 촌장인데 인사드리세요!」
어젯밤 내가 한 말이 베르타의 두 번째 줄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다리 너머 길은 숲을 지나 다음 지역 항구 도시까지 이어졌다. 게임에서는 말을 타고 사 분이 걸렸고, 걸으면 꼬박 이틀이었다. 이 도시의 NPC도 깨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낯선 마을 백 명을 먹일 빵은 거기에도 없었다. 길목에는 산적 몬스터가 다섯 무리 있었다. 이 무리들이 아직 열다섯 걸음을 세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날 밤 나는 무 항아리 값으로 받은 빵 세 개와 내 몫 반 개를 들고 정해진 길을 도는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깨어나지 않은 사람은 여든이 넘었다. 빵 세 개 반을 여든으로 나누면 한 사람에게 엄지손가락만 한 조각이 돌아갔다. 나는 아이를 업은 여자의 입에 빵을 세 조각 넣고, 이 등의 아이에게 두 조각을 넣었다. 등불지기의 입에 한 조각, 우물가를 도는 늙은 목수에게 한 조각. 걸음을 따라가며 입술에 대면 입이 열렸고, 씹고, 삼키고, 다음 걸음을 디뎠다. 아무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열세 해 동안 나도 이 사람들에게 한 번도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스물두 번째 사람 앞에서 빵이 떨어졌다. 이 사람은 내 빈손 앞을 정해진 걸음으로 지나갔다.
*
불은 자정이 넘어서 났다.
잡화점 뒤에는 밀가루 포대와 말린 고기를 쌓아 두는 작은 창고가 있었다. 게임에서는 문이 그려진 벽이었다. 고블린들은 마을 뒤쪽 울타리 판자를 뜯고 들어와 이 문에 기름 먹인 횃불을 던지고 나갔다. 나는 등불지기가 「밤길 조심하세요」를 외치는 소리 사이로 판자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고, 촌장 집 언덕을 다 내려왔을 때 이미 창고 지붕이 붉었다.
“물! 우물에서 줄로 서요!”
깨어난 열둘이 우물과 창고 사이에 늘어섰다. 두레박이 손에서 손으로 넘어갔다.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불타는 창고 옆을 정해진 걸음으로 지나갔다. 한 사람은 불똥이 어깨에 떨어져 옷이 그을리는데도 걸음을 바꾸지 않았다. 내가 지팡이로 어깨를 두드려 불똥을 털었다.
짚돌이는 창고 열 걸음 앞에서 굳어 있었다. 짚이 하나하나 곤두서 몸이 두 배로 부풀어 보였다.
“나 불은 안 돼요. 불은 진짜 안 돼. 어제 옆에 걔가….”
“들어가지 마. 거기 있어.”
“있을게요. 진짜 있을게요.”
짚돌이는 말과 달리 한 발씩 뒷걸음질 쳐서 결국 우물 뒤로 숨었다.
베르타는 줄에 서지 않았다. 앞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불붙은 창고 문으로 곧장 들어가, 밀가루 포대 하나를 끌어안고 나왔다. 앞치마 자락에 불이 붙어 있었다. 우물가 아저씨가 두레박 물을 베르타의 등에 끼얹었다. 포대를 내려놓고 다시 들어가려 했다. 내가 지팡이를 베르타 앞에 가로로 들어 막았다. 늙은 팔이 떨렸고, 밀면 나는 넘어질 판이었다.
“거기 하나 더 있어요.”
“지붕 내려앉아요.”
베르타는 내 지팡이를 내려다보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음 두레박을 받아 들었다.
창고 지붕이 무너질 때 울타리 너머 어둠에서 고블린 목소리가 들렸다. 플레이어들이 쿠르곤을 잡고 나서 채팅에 치던 말이었다.
“다음엔 네 마을을 불태우겠다. 크크. 이번엔 진짜.”
*
새벽에 베르타가 탄 포대를 하나씩 끌어내 세었다. 밀가루 절반이 재가 되었고, 말린 고기는 다섯 줄이 남았다. 빵은 가게 안에 있어서 살았다. 숯이 된 문짝을 발로 밀어 넘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촌장 집으로 올라가 어깨를 문지르며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이 늙어서인지 마음이 늙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창호지를 하얗게 물들일 즈음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하나가 아니었다.
문을 열자 마당에 깨어난 사람들이 서 있었다. 밤사이 일곱이 더 깨어나 열아홉이었다. 맨 앞에 베르타가 있었다. 베르타의 손에 창고에서 타다 만 밧줄 한 타래가 들려 있었다. 끝이 그을려 까맸다.
“쿠르곤이 원하는 건 촌장이에요. 어젯밤 고블린들이 그렇게 말했대요. 촌장만 내놓으면 된다고.”
“그건 고블린 말이에요. 쿠르곤은 촌장을 마지막에 죽인다고 했어요. 마을이 다 탄 다음에.”
“그건 당신 말이죠.”
베르타가 밧줄을 풀었다. 그을린 끝이 마당 흙에 끌렸다. 뒤에 선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이 밧줄을 보았다. 우물가 아저씨가, 닭 할머니가, 어젯밤 빨랫줄에 묶여 있던 농부가. 다들 내 말투로 배가 고프다고 하던 얼굴들이었다.
“오늘이 세 번째 밤이에요, 유저 양반. 해 지면 당신을 북문에 세울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룻밤을 벌어요.”
베르타가 밧줄 고리를 내 앞에 들어 올렸다. 내가 서 있는 문지방에서 두 걸음 앞이었다. 내 입이 먼저 열리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