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67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망한 게임 튜토리얼 마을의 촌장 NPC로 빙의했다 · 장연무

나는 무릎이 꺾인 채 쿠르곤의 횃불 앞에 있었고⁠, 등 뒤에서 짚돌이의 짚이 내 목덜미를 찔렀다⁠. 몸무게를 지팡이 하나에 다 싣고 있어서⁠, 쿠르곤이 쇠뭉치로 지팡이만 차 내면 나는 불 속으로 엎어질 자리였다⁠.

“⁠유저다⁠.⁠”

내 목소리는 늙어 있었는데⁠, 말은 서른셋이었다⁠.

“⁠이 몸은 촌장이고⁠, 안에 든 건 너를 잡으러 그 굴에 들어가던 사람이야⁠. 수천 번 들어갔다⁠. 세다가 나도 그만뒀어⁠.⁠”

쿠르곤은 한참 나를 들여다보았다⁠. 횃불이 내 수염 끝을 그슬리다 물러났다⁠. 허리를 펴고⁠, 잘린 귀를 손톱으로 긁으며 웃었다⁠.

“⁠유저가 촌장 안에 들었네⁠. 막타 치던 손이 지팡이를 쥐었어⁠.⁠”

보스에게 마지막 한 방을 넣는 것을 우리는 막타라고 했다⁠. 이 말이 고블린 왕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태울 거면 나를 태워⁠. 이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했지⁠. 저기 서서⁠, 초보한테 북쪽으로 가라고만 했지⁠.⁠”

쿠르곤이 횃불을 거두었다⁠.

“⁠너는 마지막에 죽어⁠. 다 타는 거 보고⁠. 그게 맞지⁠.⁠”

쿠르곤은 연습장 울타리 부러진 틈으로 걸어 나갔다⁠. 고블린 셋이 뒤를 따르며 창 자루로 울타리 판자를 하나씩 두드렸다⁠. 장난이었다⁠. 북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 개울이 있었고⁠, 개울가 빨래터에는 아낙 하나가 밤에도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게임에서 아낙은 늘 거기 있었다⁠. 밤에도 낮에도 같은 빨래를 두드렸다⁠.

「⁠빨래가 안 마르네요⁠.⁠」

아낙이 말하며 방망이를 들었다⁠. 맨 뒤의 고블린이 이 손짓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창이 날아갔다⁠. 짧게 끝났다⁠. 방망이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쿠르곤은 뒤를 보지 않았다⁠.

“⁠경험치 하나⁠.⁠”

고블린이 그렇게 말하고 깔깔 웃었다⁠. 이 말도 우리 말이었다⁠.

*

내가 빨래터에 닿았을 때 아낙은 개울에 반쯤 엎드려 있었다⁠. 물살이 앞치마 자락을 끌어당겼다가 놓았다⁠. 나는 무릎을 꿇을 수가 없어서 지팡이에 매달린 채 허리만 숙였고⁠, 이 자세로 아낙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빨래가 안 마르네요⁠.⁠」

입술이 그렇게 움직였다⁠. 소리가 거의 없었다⁠. 개울물에 붉은 것이 풀려 나가는 동안 아낙은 두 번 더 같은 말을 했고⁠, 세 번째는 끝을 맺지 못했다⁠.

나는 이 자리에 서서 새벽을 기다렸다⁠. 게임에서 NPC는 죽지 않았다⁠. 몬스터는 죽고 나서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같은 자리에 다시 생겼다⁠. 쿠르곤도 삼십 분이면 보스의 방 한가운데에 다시 서 있었다⁠. 그러니까 기다리면 된다고⁠, 나는 그렇게 계산했다⁠.

동쪽 숲 위가 하얘졌다⁠. 닭이 울었다⁠. 등불지기가 등불을 끄고 집으로 들어갔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나와 정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낙은 개울가에 그대로 있었다⁠. 물에 젖은 앞치마가 굳어 갔다⁠.

밭으로 가는 농부 하나가 빨래터 옆을 지났다⁠. 농부는 아낙 앞에서 걸음을 반 박자 늦췄다가⁠, 정해진 대로 몸을 비켜 아낙을 돌아갔다⁠. 뒤에 오던 아이 업은 여자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양으로 비켜 갔다⁠. 길 한가운데 놓인 바위를 비키듯이⁠.

서버가 꺼진 세상에서는 아무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짚돌이는 이 아침에 깨어났다⁠.

빨래터에서 돌아온 뒤⁠, 나는 연습장 말뚝 앞에 지팡이를 꽂고 밤새 짚돌이의 대사에 대답했다⁠. 할 말이 떨어지면 아무 말이나 했다⁠. 내가 이 연습장에서 처음 나무 검을 휘두른 날⁠, 공격 버튼이 어디 있는지 몰라 십 분 동안 이 앞에서 뛰기만 한 얘기까지 했다⁠. 한 마디씩 바뀌었다⁠. 해가 지붕 위로 올라왔을 때 짚돌이의 대사에는 원래 마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 실화냐⁠?⁠”

짚돌이가 말했다⁠. 이번에는 대사가 아니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되지 않았다⁠.

짚돌이는 몸을 비틀었다⁠. 말뚝에 꽂힌 등판이 삐걱거렸고⁠, 짚이 우두둑 뜯기는 소리가 났다⁠. 짚돌이는 두 팔 대신 박힌 막대기를 휘저으며 말뚝에서 제 몸을 뽑아냈다⁠. 그리고 땅에 떨어졌다⁠. 다리가 없었다⁠. 허수아비 아랫도리는 말뚝에 꽂는 막대 하나였다⁠.

“⁠다리가 없네⁠. 이거 실화냐⁠? 임마⁠.⁠”

“⁠그 임마는 나한테서 배운 거야⁠.⁠”

“⁠인정⁠.⁠”

짚돌이는 막대 하나로 땅을 짚고 통⁠, 통⁠, 뛰어 보았다⁠. 세 번째에 엎어졌다⁠. 엎어진 채로 웃었는데⁠, 짚 몸에서 나는 웃음은 마른 잎을 비비는 소리였다⁠.

나는 짚돌이에게 빨래터 얘기를 했다⁠. 짚돌이는 한참 대답하지 않다가 막대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삽 어디 있어요⁠?⁠”

우리는 아낙을 빨래터 위 언덕에 묻었다⁠. 삽질은 거의 짚돌이가 했다⁠. 막대기 팔에 삽 자루를 끼우고 몸 전체로 흙을 퍼냈는데⁠, 한 삽 뜰 때마다 몸이 통 하고 뛰었다⁠. 나는 무릎이 안 굽어 흙을 덮을 수도 없었다⁠. 지팡이 끝으로 흙을 밀었다⁠.

짚돌이가 봉분을 다 다지고 말했다⁠.

“⁠나 때리던 애들은 다 다시 일어났는데⁠.⁠”

내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짚돌이는 덜렁거리는 단추 눈을 막대 끝으로 꾹 눌러 제자리에 박았다⁠.

*

계산은 이 다음에 했다⁠. 깨어나지 않은 사람은 정해진 길을 걷는다⁠. 고블린이 이 길 위에 있어도 걷는다⁠. 배가 고파도 스스로 먹지 않는다⁠. 살리려면 깨워야 했다⁠.

정오까지 나와 짚돌이는 광장을 돌며 대사가 한 줄뿐인 사람들부터 붙잡았다⁠. 짧은 대사는 빨리 바뀌었다⁠. 그런데 바뀐 마디는 꼭 대답한 쪽 입에서 나왔다⁠.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좋긴⁠. 어젯밤에 사람이 죽었어요⁠.⁠”

「⁠오늘도 날씨가 죽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짚돌이가 대답한 우물가 아저씨는 해가 기울 무렵 깨어나서 첫마디로 “⁠와 개배고프네⁠”라고 했다⁠. 내가 대답한 닭 키우는 할머니는 “⁠닭이 또 도망갔어요⁠, 실화냐⁠”라고 했다⁠. 내가 한 말이 남의 입에서 돌아오는 것을 들을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깨어난 사람들은 나를 촌장님이라 불렀고⁠, 내 말투로 배가 고프다고 했다⁠.

해가 서쪽 안개 위로 내려갈 때까지 일곱이 깨어났다⁠. 짚돌이까지 여덟이었다⁠. 마을에는 백 명이 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쿠르곤의 고블린이 쓰고 버린 창을 주워 우물가 돌에 기대 두고⁠, 우물 둘레에 둘러앉은 여덟의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다들 내 얼굴만 보고 있었다⁠. 촌장이니까 먹을 것을 내놓으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쿠르곤이 부순 내 캐릭터 자리로 가서 돌 틈에 박힌 은화를 지팡이 끝으로 하나씩 긁어냈다⁠. 열두 닢이었다⁠.

잡화점의 베르타는 어젯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은화를 계산대에 한 닢씩 놓았고⁠, 한 닢에 「⁠초보자의 빵⁠」 하나를 내주었다⁠. 손바닥만 한 갈색 빵이었다⁠. 게임에서 이 빵은 체력을 조금 채워 주는 아이템이었고⁠, 상점 선반에서 아무리 사도 줄지 않았다⁠. 나는 열두 개를 받아 들고 선반을 보았다⁠. 빵이 빠진 자리가 그대로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선반을 세었다⁠. 빵이 일흔 남짓⁠, 사과 두 바구니⁠, 말린 고기 서른 줄⁠, 물약 병이 마흔⁠. 백 명 넘는 마을이 이것으로 며칠을 갈지는 세어 볼 필요도 없었다⁠.

빵 열두 개는 깨어난 여덟이 하나씩 먹었다⁠. 우물가 아저씨는 빵을 반으로 갈라 냄새부터 맡았고⁠, 닭 할머니는 한입 베어 물고 울었다⁠. 열세 해 만에 처음 먹는 빵이었다⁠. 남은 넷을 들고 나는 광장을 걷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아이를 업고 정해진 길을 도는 여자에게 빵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받지 않았다⁠. 손에 쥐여 주자 손가락이 빵을 쥔 채로 그대로 걸었다⁠. 나는 할머니의 걸음을 따라가며 빵을 뜯어 입술에 댔다⁠. 입이 열리고⁠, 씹고⁠, 삼켰다⁠. 걸음은 한 번도 늦춰지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광장을 두 바퀴 도는 동안 빵 하나를 다 먹였다⁠. 등에 업힌 아이도 같은 얼굴로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이거 백 명 다 하려면 해 지겠는데요⁠.⁠”

짚돌이가 말했다⁠.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그리고 촌장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우물가 아저씨가 빵 부스러기를 털며 끼어들었다⁠. 아저씨의 말투는 반쯤 짚돌이였다⁠.

“⁠촌장님 대사가 고블린 왕을 물리쳐 주게잖아요⁠. 근데 왜 아무도 물리치러 안 가요⁠? 그 말 듣고 다들 갔던데⁠.⁠”

깨어난 여덟이 일제히 나를 보았다⁠. 나는 지팡이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이 마을에서 고블린 왕을 물리치러 간 사람은 전부 남쪽 다리 너머에서 온 유저였다⁠. 그리고 유저는 이제 나 하나였고⁠, 나는 열 걸음에 한 번씩 넘어질 뻔했다⁠.

*

해가 지기 직전⁠, 우물가 아저씨가 뛰어왔다⁠. 북쪽 들판에 고블린이 있다고 했다⁠.

새싹마을의 밀밭은 북문 밖 들판에 있었다⁠. 밀밭 둑 너머로 개울이 흐르고⁠, 개울 건너 덤불에는 뿔토끼 굴이 있었다⁠. 초보들이 첫 퀘스트로 뿔토끼 다섯 마리를 잡던 자리였다⁠. 이 들판 한가운데 고블린 열댓이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었다⁠. 꼬챙이에 뿔토끼가 꿰여 돌아갔고⁠, 기름 타는 냄새가 둑까지 왔다⁠.

모닥불 옆에 한쪽 눈에 가죽 띠를 두른 늙은 고블린이 섰다⁠. 짐승 뼈를 엮은 지팡이를 짚었다⁠. 게임에서 「⁠고블린 주술사⁠」로 나오던 몬스터였다⁠. 정해진 대사는 「⁠불의 정령이여⁠!⁠」 하나였고⁠, 이 대사를 외치면서 작은 불덩이를 던졌다⁠. 초보들은 이 고블린을 애꾸라고 불렀다⁠.

밀밭으로 가는 농부가 북문을 나서고 있었다⁠. 깨어나지 않은 농부였다⁠. 낫을 들고 정해진 길로 둑을 내려갔다⁠.

“⁠아저씨⁠, 멈춰요⁠!⁠”

짚돌이가 통통 뛰어 따라가 농부의 바짓가랑이를 막대로 걸었다⁠. 농부는 넘어졌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같은 길을 다시 걸었다⁠.

애꾸가 고개를 들었다⁠. 고블린 둘이 창을 들고 일어나 고랑을 따라 걸어 나와 농부의 양팔을 잡았다⁠. 농부는 팔을 잡힌 채로도 정해진 걸음을 계속 걸으려 했다⁠. 발이 허공을 디뎠다⁠.

나는 십 년 동안 외운 것을 머릿속에서 넘겼다⁠. 고블린 졸개는 들판 밖으로 열다섯 걸음 넘게 쫓아오지 않는다⁠. 주술사는 불덩이를 던지고 나면 삼 초 동안 멈춘다⁠. 쿠르곤은 체력이 반으로 줄면 땅을 세 번 내리찍는다⁠. 하나도 쓸 데가 없었다⁠. 어젯밤 쿠르곤은 굴에서 마을 광장까지 걸어왔고⁠, 고블린들은 이미 둑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들은 더는 열다섯 걸음을 세지 않았다⁠.

나는 둑 위에 지팡이를 꽂았다⁠. 젖은 흙이 지팡이 끝을 반 뼘쯤 삼켰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몸은 비탈에서 가장 위험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나는 고랑으로 굴렀다⁠.

“⁠그 사람 놔줘⁠.⁠”

애꾸가 외눈으로 나를 보았다⁠. 애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쿠르곤의 말투였고⁠, 쿠르곤의 말투는 우리 말이었다⁠.

“⁠촌장 떴다⁠. 크크⁠. 이 들판은 이제 왕 거야⁠. 뿔토끼도 왕 거고⁠. 너희가 십 년 동안 여기서 경험치 다 빨아먹었잖아⁠.⁠”

“⁠그 사람은 뿔토끼가 아니야⁠.⁠”

“⁠이것도 경험치야⁠. 어제 빨래하던 거랑 똑같이⁠.⁠”

농부의 발이 여전히 허공을 디뎠다⁠. 애꾸가 뼈 지팡이로 고랑을 가리켰다⁠. 둑 아래⁠, 밀밭이 시작되는 첫 고랑이었다⁠.

“⁠데려가고 싶으면 촌장이 들어와⁠. 들판 안으로⁠. 네 발로⁠.⁠”

짚돌이가 내 옆에서 짚을 곤두세웠다⁠. 등 뒤의 북문에서 깨어난 여덟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둑의 비탈을 내려다보았다⁠. 고랑까지는 내 걸음으로 여섯 걸음이었고⁠, 비탈은 젖어 있었다⁠.

나는 지팡이를 뽑아 고랑 너머 흙에 짚었다⁠. 몸무게가 앞으로 쏟아졌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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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귤까는중2026.10.26· 2화

    서버가 꺼졌는데 NPC들은 왜 계속 살아 있어요?

    • 장연무작가2026.10.27

      그건 촌장도 몰라요. 아는 건 이제 죽으면 다시 안 일어난다는 것 하나입니다.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 망한 게임 튜토리얼 마을의 촌장 NPC로 빙의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