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33자)
첫눈
망한 게임 튜토리얼 마을의 촌장 NPC로 빙의했다 · 장연무
밀밭 한가운데 십자 말뚝이 하나 서 있었다. 게임에서는 허수아비가 걸려 있던 밭의 장식이었다. 고블린들이 이 짚을 뜯어 굴의 잠자리에 깔아서, 막대만 남아 있었다. 쿠르곤은 나를 거기 묶었다. 등을 말뚝에 대고, 묶인 손목을 가로 막대에 걸었다. 얼굴은 마을 쪽이었다.
“여기 서서 봐. 허수아비처럼.”
쿠르곤이 내 뺨을 손톱으로 툭 쳤다.
“공격 버튼을 눌러 저를 때려 보세요. 그거 해 봐.”
나는 하지 않았다. 쿠르곤은 웃지 않고 돌아섰다. 고블린 하나가 내 앞에 남았다. 보스의 방에서 쿠르곤 앞에 쪼그려 「키에엑」을 하던 이 어린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깨어났다고 했다. 쿠르곤은 제 키보다 긴 창을 쥐고 내 앞 두 걸음에 섰다. 이 거리를 몰랐다.
「어서 오게, 젊은이. 새싹마을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내 입이 말했다. 파수 고블린이 눈을 끔뻑였다.
*
들판 저편에서 횃불 백이 성벽으로 밀려갔다. 늑대들이 이 양옆을 달렸다. 눈은 그새 발목까지 쌓여 들판이 하얬다.
나는 처음에 웃음이 났다. 마을 쪽이 깜깜했다. 베르타가 내 말을 기억하고 등잔을 다 껐다. 고블린은 밤눈이 어둡다. 그런데 웃음은 금방 멎었다. 하얀 들판 위에서 성벽이 검은 띠로 또렷했다. 성벽 위에 선 사람들의 머리가 하나하나 검게 보였다. 눈이 땅을 밝혔다. 횃불이 없어도 고블린들은 하얀 바탕 위의 검은 것을 보았다. 사흘째 밤에 통했던 수는 첫눈 위에서 통하지 않았다.
화살이 성벽 위로 날았다. 횃불이 돌담 너머로 던져졌다. 동쪽 모퉁이, 목수가 새로 쌓게 한 모퉁이에 늑대들이 몰렸다. 모퉁이는 이제 어깨 높이였다. 늑대들은 뛰어오르다 미끄러졌다. 이 위로 창날이 내려왔다.
내 앞의 파수가 그쪽을 보다가 나를 보았다. 파수는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두 걸음 앞으로 왔다. 내 입이 또 열렸다.
「북쪽 굴의 고블린 왕을 물리쳐 주게. 그놈 때문에 마을이 편할 날이 없다네.」
파수가 창을 고쳐 쥐었다. 저 말은 쿠르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라는 것을 쿠르곤도 알았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이것을 생각했다. 열흘 넘게 나는 이 대사를 깨물어 막기만 했다. 대답한 적은 없었다. 마을의 모든 대사는 누군가 사람의 말로 대답하면 한 마디씩 바뀌었다. 짚돌이도, 베르타도, 노미도, 쿠르곤도. 그런데 이 몸의 대사에는 열세 해 동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유저들은 수락 버튼을 눌렀다. 나도 눌렀다. 마흔일곱 번.
“아니.”
나는 내 입에게 대답했다. 소리 내어.
“안 물리쳐. 그놈도 배고파. 그놈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편할 날이 없었어. 열세 해 동안 초보들 북쪽으로 보낸 거 우리잖아.”
파수가 나를 이상한 얼굴로 보았다. 파수는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와서 섰다. 이게 파수의 일이었다. 파수가 와서 설 때마다 내 입은 대사를 했고, 나는 대답했다.
「북쪽 굴의 고블린 왕을 물리쳐 주게. 그놈도 배고파.」
「북쪽 굴의 고블린 왕을 들여 주게. 그놈도 배고파.」
이 사이에 나는 들여 주자고 대답했다. 노미가 고블린 열하나에게 들어와라 하고 창끝을 세우던 아침을 떠올리면서. 이 말이 그대로 대사 안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에 대사의 꼬리가 바뀌었다. 네 번째에 가운데가 바뀌었다. 성벽 쪽에서 비명이 올라왔다. 동쪽 모퉁이에 불이 붙었다.
“너 이름 있어?”
나는 파수에게 물었다. 파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쿠르곤에게서 받은 말로.
“미안하다. 또 왔다.”
“아니. 이제 안 와. 아무도 그 방에 안 와. 다시는.”
파수가 이 말을 오래 씹듯이 입을 우물거렸다. 쿠르곤이 파수를 깨운 지 하루였다. 쿠르곤의 말과 내 말이 이 작은 머리 안에서 한 마디씩 자리를 다투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문 안에 할머니가 있어. 도토리를 사흘 우려서 줘. 너희 왕은 맨 끝의 앞에서 먹지. 너는 맨 끝이고.”
“…맨 끝.”
“문 안에서는 맨 끝이 없어. 다 같이 사분의 삼.”
파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분의 삼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도 파수는 창날을 들어 내 손목의 밧줄을 끊었다. 밧줄이 끊기자 나는 말뚝에서 미끄러져 눈 위에 엎어졌다. 지팡이가 없었다. 쿠르곤이 굴에서 빼앗아 갔다.
파수가 창을 거꾸로 내밀었다. 자루 쪽이었다.
*
들판을 건너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모른다. 눈 밑에 고랑이 숨어 있었다. 창 자루를 왼손에 쥐고, 굽지 않는 다리를 끌고, 오른다리로 디뎠다. 세 박자는 눈 위에서 자꾸 엉켰다. 나는 세 번 넘어졌다. 세 번째에는 얼굴이 눈에 박혔다. 차가워서 이가 시렸다. 파수가 내 겨드랑이를 잡아 올렸다. 짚돌이가 고랑에서 나를 들어 올리던 자세와 똑같았다.
들판 중간에서 작은 그림자 둘이 우리를 앞질러 성벽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고블린, 하나는 사람이었다. 다리가 짧은 고블린이 사람의 손을 끌고 있었다. 단추였다. 보스의 방 뒤로 난 틈, 빨리 깨려는 사람들만 알던 이 길로 끌려간 사내를 데리고 나왔다. 고블린은 이 틈을 처음부터 알았다. 이들의 굴이었다.
북문에 닿았을 때 문은 반쯤 부서져 있었다. 쿠르곤이 쇠뭉치로 문짝을 내리치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 노미가 창으로 문틈을 막고 있었다. 노미의 창이 쿠르곤의 쇠뭉치에 맞아 휘었다. 대장장이가 만든 창이었다. 휘어도 부러지지 않았다.
쿠르곤 뒤로 고블린 쉰쯤이 문을 둘러쌌다. 나머지는 동쪽 모퉁이에 붙어 있었다. 이들은 다 말라 있었다. 굴에서 내 빵 부스러기를 넘겨받던 손들이었다.
나는 쿠르곤과 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창 자루를 눈 위에 짚었다. 몸이 앞으로 쏟아지려 했다. 쿠르곤이 쇠뭉치를 멈췄다.
“묶어 뒀는데.”
“파수가 풀어 줬어.”
쿠르곤의 노란 눈이 내 뒤의 어린 파수에게 갔다. 파수가 움찔했지만 내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쿠르곤이 두 걸음 앞으로 왔다. 일부러 이 자리에 섰다. 보스의 방에서처럼.
「어서 오게, 젊은이. 새싹마을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내 입이 말했다. 나는 막지 않았다. 다음 대사가 올라왔다. 나는 막지 않았다.
「북쪽 굴의 고블린 왕을 들여 주게. 그놈도 배고프다네. 편할 날이 없었던 건 우리 탓이라네.」
쿠르곤이 쇠뭉치를 든 채 굳었다.
쿠르곤은 이 대사를 수만 번 들었다. 마디 하나하나를 알았다. 어느 마디가 바뀌었는지 나보다 먼저 알았다. 쿠르곤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쿠르곤의 말은 늘 플레이어의 말이었다. 이 말 가운데 이런 것은 없었다.
“네 몸이.”
“내가 대답했어. 처음으로. 열세 해 동안 아무도 안 한 거.”
“…계산이냐?”
“아니. 그냥 대답.”
*
문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성벽을 내려와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동쪽 모퉁이의 불이 번졌고, 누군가 모퉁이가 뚫렸다고 외쳤다. 남쪽 다리로 가자는 외침이 따라왔다. 넓은 세상으로.
이 사람들 앞에 초록 조끼가 서 있었다. 깃털 꽂은 모자가 불빛에 붉었다. 모리였다. 남쪽 다리 끝에서 열세 해를 서 있던 안내원이 마을 한가운데, 광장에 서 있었다. 모리는 다리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이날 밤 처음 떠났다.
모리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늘 남쪽을 가리키던 손이었다. 이 손이 북쪽을, 성벽을 가리켰다.
“가지 마세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내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쪽엔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열세 해 동안 수십만 명을 보냈는데 아무도 안 돌아왔어요. 넓은 세상 같은 거 없어요. 여기가 넓은 세상이에요. 성벽은 이쪽이에요. 제가 안내할게요. 그게 제 일이에요!”
모리의 말은 어느 한 사람의 말투가 아니었다. 열흘 동안 이 앞에 와서 불평하고 웃고 대답하고 간 마을 사람 모두의 말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남쪽으로 달리던 사람들이 멈췄다. 맨 앞의 농부가 쇠스랑을 쥐고 돌아섰다. 그리고 모리가 가리키는 쪽으로 걸었다.
*
쿠르곤 뒤에 선 고블린들이 이 목소리를 들었다. 성벽 위에서 단추가 소리쳤다. 이 옆에 열하나가 서 있었다. 닭 할머니가 도토리 죽 냄비를 들고 이 옆에 서 있었다. 김이 났다. 단추가 냄비를 가리켰다.
“사흘 우린 거다! 다 같이 사분의 삼! 인정?”
고블린 하나가 창을 눈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은 쿠르곤을 보지 않고 쿠르곤 옆을 지나 부서진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노미가 창을 세워 길을 비켰다. 문을 지키는 사람이 정했다. 들어와라. 쉰 가운데 스물여섯이 들어왔다. 늙은 것과 어린 것과 다리를 저는 것들이 먼저였다.
쿠르곤은 이것을 막지 않았다. 나를 보았다. 그리고 쇠뭉치를 들어 올렸다. 나를 향해서였다. 내가 마지막에 죽는다는 쿠르곤의 약속은 마을이 다 탄 뒤였다. 마을은 타지 않았다. 약속이 어긋났다.
노미의 휜 창이 부서진 문틈으로 나왔다. 숨은 한 번이었다. 창날이 쿠르곤의 어깨에 박혔다. 쇠뭉치가 쿠르곤의 손에서 빠져 눈 위에 떨어졌다. 대장장이가 망치를 들고 문 밖으로 나왔다. 뒤로 창을 든 사람들이, 맨 뒤로 창을 든 고블린들이 나왔다.
쿠르곤은 어깨에서 창을 뽑았다. 피가 눈 위에 검게 번졌다. 이 창을 노미의 발 앞에 던지고, 남은 고블린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여든이 안 되었다. 늑대들은 동쪽 모퉁이에서 반이 쓰러졌다.
“서쪽.”
쿠르곤이 말했다. 굴 쪽이 아니었다. 굴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
문 안으로 들어온 고블린 가운데 하나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내 지팡이였다. 굴에서 쿠르곤이 빼앗아 이 고블린에게 들려 두었다고 했다. 왼쪽으로 굽은 손잡이가 내 손바닥에 돌아왔다. 나는 파수가 준 창 자루를 파수에게 돌려주었다.
광장은 연기투성이였다. 동쪽 모퉁이 옆 집 두 채가 지붕까지 탔다. 성벽 위에서 사람 둘이 화살에 맞아 죽었고, 단추와 함께 싸우던 고블린 셋이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 베르타는 우물가에서 그을린 두 손으로 도토리 죽을 퍼 주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스물여섯 앞에 그릇이 놓였다. 나를 보고 국자를 멈추지 않았다.
“다 같이 사분의 삼, 당신이 약속했죠.”
“단추가 했어요.”
“단추한테 그 말 가르친 게 누군데요.”
베르타는 국자로 내 가슴을 한 번 가리켰다.
“그건 당신 몫에서 떼요. 당분간 당신은 반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타는 다음 그릇을 채웠다. 그릇을 받은 어린 고블린이 「키에엑」 대신 말했다. 할머니. 닭 할머니가 냄비 옆에서 돌아보았다.
*
나는 이들이 성벽 바깥을 돌아 서쪽으로 가는 것을 연습장에서 보았다. 연습장 울타리는 마을 서쪽 끝이었고, 이 너머로 능선이 보였다. 능선 뒤는 회색 안개였다. 눈 오는 밤에도 안개는 하얗지 않고 회색이었다.
쿠르곤은 능선 위에서 멈췄다. 안개가 쿠르곤의 등 뒤 한 걸음에 있었다. 돌아서서 연습장 쪽을 보았다. 말뚝에 꽂힌 반쪽짜리 짚돌이와, 이 옆에 지팡이를 짚고 선 나를.
“촌장.”
목소리가 눈 위를 건너왔다.
“안개 안에 뭐 있는지, 너 알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면서 말 안 했네. 처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