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296자)
업데이트 예정
망한 게임 튜토리얼 마을의 촌장 NPC로 빙의했다 · 장연무
쿠르곤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능선 위에서 한 번 더 연습장 쪽을 보고, 안개로 등을 돌렸다. 고블린 여든이 뒤를 따랐고, 늑대들이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회색 안개는 이들을 삼키고 나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횃불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게임에서 이 안개는 벽이었다. 캐릭터가 부딪치면 더 걸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다리만 움직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연습장 울타리를 짚고 오래 서 있었다. 짚돌이가 말뚝 위에서 말했다.
“촌장님, 저기 뭐 있는데요?”
“나중에.”
“그거 매번 나중이던데.”
반쪽이 된 짚돌이는 이 말을 하고 눈 덮인 말뚝 위에서 졸았다. 허수아비가 조는 것을 나는 이날 처음 보았다.
*
눈은 사흘 동안 왔다가 그쳤다. 우리는 이 사흘 동안 죽은 사람들을 묻었다. 빨래터 위 언덕, 아낙과 우물가 아저씨 옆이었다. 사람 둘, 고블린 셋. 고블린들은 자기들 죽은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굴에서는 죽은 것이 다시 생겼고, 서버가 꺼진 뒤 죽은 것들은 굴 밖 비탈에 버렸다고 했다. 닭 할머니가 고블린 어린것들에게 흙을 덮는 법을 보여 주었다. 어린것 하나가 무덤 위에 납작한 돌을 올렸다. 우물가 아저씨 무덤 위의 돌을 보고 따라 했다.
나흘째 날 우리는 들판에 나갔다. 고블린과 사람이 섞여서. 밀은 이삭이 고개를 숙인 채 눈에 덮여 있었다. 그대로 두면 썩었다. 농부가 낫을 들었고, 키 작은 고블린들이 눈을 털었다. 밀밭 둑에서 나는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젖은 고랑에 들어가면 넘어졌다. 대신 나는 깨어나지 않은 마지막 사람들에게 대답했다. 밀밭으로 가는 길이 정해진 농사꾼 셋이 아직 남아 있었다. 셋은 이날 낫을 든 채 깨어났다. 셋 다 첫마디로 춥다고 했다.
밀을 털고 남은 밀대는 목수가 단으로 묶어 연습장으로 가져갔다.
이 저녁 대장간에서 팡, 팡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일제히 대장간 쪽을 보았다. 몇은 나를 보았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대장간으로 갔다.
대장장이는 모루 앞에서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창날이 아니었다. 넓적하고 굽은 쇠, 문짝을 다는 돌쩌귀였다. 부서진 북문에 달 것이라고 했다. 대장장이의 손바닥에는 아직 새살이 분홍빛으로 올라오는 중이었고, 망치를 쥐기 전에 이 손에 천을 감았다. 열 번 두드리면 한 번 쉬었다. 쉴 때마다 물을 마셨다.
“누가 시켰어요?”
“아무도.”
대장장이는 망치를 내려놓고 달궈진 쇠를 물통에 넣었다. 치익 소리가 났다.
“내가 정했다. 문짝이 없으면 노미가 밤새 서 있어야 하니까. 쉬엄쉬엄 하면 사흘이다.”
나를 보지 않고 다음 쇠를 화덕에 넣었다. 나는 이 쉬엄쉬엄을 한동안 듣고 서 있다가 돌아 나왔다. 팡, 팡, 그리고 쉬는 소리. 이 박자는 이틀 동안 듣던 박자와 달랐다.
*
짚돌이를 다시 엮는 데 하루가 걸렸다. 목수가 막대 뼈대를 손보고, 베르타가 바늘로 짚 다발을 묶었다. 바느질을 할 줄 알았다. 이것도 손이 알았다.
새 짚은 금빛이었다. 옛 짚은 열세 해 비바람에 잿빛이었다. 다 엮고 나니 짚돌이는 왼쪽이 금빛, 오른쪽이 잿빛인 허수아비가 되었다. 말뚝에서 몸을 뽑아 땅에 섰다. 무게가 돌아와서, 말뚝 없이 섰다. 새 왼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신상이네. 와. 이거 색 안 맞는 거 실화냐?”
“짚이 그것밖에 없어.”
“아뇨, 좋아요. 반반이 낫죠. 반은 옛날 거, 반은 새 거.”
녹은 단추 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짚돌이가 이 자리를 막대 끝으로 긁적였다. 옆에서 단추가 팔짱을 끼고 보다가 말했다.
“그거 내 이름 떼 가려는 거면 안 된다.”
“너 단추 아니잖아. 너는 고블린이잖아.”
“그럼 너는 허수아비 아니냐?”
“나는 짚돌이인데.”
“나도 단추인데.”
베르타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옷에 다는 진짜 단추였다. 가게 선반에서 열세 해 동안 팔리지 않은 「낡은 단추」였다. 게임에서는 아무 쓸모 없는 잡동사니였다. 베르타는 이것을 짚돌이 얼굴 빈자리에 꿰매 주었다. 짚돌이는 새 눈으로 단추를 보았다. 단추는 고개를 돌렸다. 귀 끝이 붉었다.
*
이날 저녁 우물가에서 머릿수를 세었다. 세어 보자고 한 사람은 베르타였다. 빵 나누려면 알아야 한다고 했다.
깨어난 사람이 아흔다섯. 깨어나지 않은 사람이 열둘. 고블린 서른여섯. 백마흔셋이었다. 서버가 꺼진 첫날 밤, 내가 우물가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깨어 있던 것은 나 하나였다.
빵은 바닥났다. 대신 도토리가 자루로 열둘, 눈 밑에서 거둔 밀이 포대로 스물, 칡뿌리와 마른 버섯, 그리고 굴 아래 늑대 다섯 마리 고기가 있었다. 베르타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셈을 했다. 그리고 봄까지라고 했다. 아껴 먹으면.
“봄이 오긴 와요?”
닭 할머니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게임의 새싹마을에는 봄도 겨울도 없었다. 서버가 꺼진 다음 날 잎이 물들었고, 열흘 만에 눈이 왔다. 이 세상의 계절이 얼마나 긴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
이날 밤 나는 연습장에서 베르타와 노미에게 털어놓았다. 둘만 불렀다. 문을 지키는 사람과 빵을 나누는 사람.
“스물다섯 살 때 이 게임 회사에서 일했어요. 정식 직원은 아니고 계약직 테스터. 두 해. 그때 회사가 서쪽 땅을 만들고 있었어요. 지금 저 안개 자리요. 새싹마을보다 몇 배 큰 땅이었어요. 그 땅 한가운데 커다란 게 하나 자고 있었어요. 개발 문서에는 「서쪽 땅의 주인」이라고만 적혀 있었어요. 쿠르곤 같은 보스였는데, 쿠르곤이 한 번에 죽는 초보 보스라면 그건 마흔 명이 한꺼번에 덤벼야 하는 보스였어요.”
“그거랑 얘기했어요?”
베르타가 물었다.
“테스터들이 매일 그 앞에 가서 대사를 확인했어요. 그것도 대사가 있었거든요. 대사가 제대로 나오는지, 글자가 깨지지 않는지. 확인하면서 채팅을 쳤어요. 테스트, 테스트, 응답하라. 버그를 찾으면 미안, 또 버그. 열한 명이 두 해 동안. 그중에 제일 많이 친 게 나였어요. 나는 밤에도 남아서 했어요.”
노미가 창을 무릎 위에 눕혔다.
“그럼 그것도 네 말투겠다.”
“반쯤은요.”
“나머지 반은?”
“다른 열 명. 그리고 이제는 쿠르곤.”
연습장에 바람이 불었다. 짚돌이가 말뚝 없이 연습장 가운데 서서 금빛 짚을 흔들었다.
“서쪽 땅은 열리지 않았어요. 회사가 확장을 취소했고, 우리 열한 명은 그 주에 다 잘렸어요. 그 땅은 지도에서 회색으로 칠해졌어요. 업데이트 예정. 그 뒤로 서비스가 끝나는 날까지 그 글씨만 떠 있었어요.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아는 건 우리 열한 명뿐이었고, 나는 그게 깨어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아무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쿠르곤이 갔네요.”
베르타가 말했다.
“쿠르곤은 약속 하나는 끝까지 붙드는 놈이에요. 그리고 밤마다 대답해 주는 걸 할 줄 알아요.”
베르타는 오래 말이 없었다. 나를 보고 말했다. 처음 깨어나던 날 계산대 너머에서 하던 눈이었다.
“처음부터 알았죠. 안개 안에 뭐 있는지.”
“네.”
“말 안 했죠.”
“네. 말하면 다들 안개만 볼 것 같아서요. 눈앞에 쿠르곤이 있는데.”
“계산이네요.”
“네.”
베르타가 일어나 앞치마를 털었다.
“내일 성벽 닫는 날이에요. 당신 반쪽 몫은 그대로예요.”
*
성벽은 다음 날 정오에 닫혔다. 서쪽 연습장 뒤, 마지막 돌을 목수와 농부와 고블린 하나가 같이 들어 올렸다. 이레 전 바위터에서 농부와 돌 하나를 두고 다투던 바로 이 고블린이었다. 돌이 자리에 들어가자 마을 둘레가 처음으로 끊긴 데 없이 이어졌다. 어깨 높이였다. 게임의 울타리보다 낮은 데도 있었다. 그래도 부서지는 울타리가 아니라 우리가 쌓은 돌이었다.
모리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농부는 이제 남쪽 다리에 서 있지 않았다. 마을 어디든 사람이 모이는 데 가서 안내를 했다. 농부의 안내는 늘 조금씩 엉망이었다.
“새싹마을 성벽이 닫혔어요! 이제 넓은 세상으로… 아니, 그냥 여기 계세요! 점심은 도토리예요! 촌장님께는 인사 안 하셔도 돼요!”
사람들이 웃었다. 고블린들도 웃었다. 이들의 웃음은 아직 크크였다. 나는 성벽 아래에서 지팡이를 짚고 웃었다. 늙은 목은 아직도 웃음을 기침처럼 냈다.
웃음이 멎은 것은 노미가 창을 세웠을 때였다.
“서쪽.”
*
안개에서 무언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하나였다. 능선을 넘어, 눈 덮인 비탈을 천천히 내려왔다. 등이 굽고, 뼈를 엮은 지팡이를 짚었다. 한쪽 눈에 가죽 띠를 둘렀다. 애꾸였다.
애꾸는 다른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녹슨 쇠 왕관이었다. 쿠르곤의 머리 위에 있던 이것이 애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애꾸는 이것을 쓰지 않았다. 앞으로 내밀고 걸었다. 바치러 오는 것처럼.
나는 연습장 옆 디딤돌을 짚고 서쪽 성벽 위로 올라갔다. 노미가 내 왼쪽, 베르타가 오른쪽에 섰다. 짚돌이가 아래에서 통통 뛰었다. 단추가 성벽 틈에 매달려 애꾸를 보다가 이를 드러냈다. 애꾸 뒤로 아무것도 따라 나오지 않았다. 다만 능선 위의 안개 가장자리가 숨을 쉬듯 한 뼘 앞으로 나왔다가 물러났다. 열세 해 동안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회색이었다.
애꾸는 성벽 두 걸음 아래에서 멈췄다. 고개를 들어 성벽 위의 나를 보았다. 외눈이 나에게 와서 멈췄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테스트. 테스트.”
목소리가 애꾸의 목소리였다. 말은 애꾸의 말이 아니었다. 쿠르곤의 말도 아니었다.
“새싹마을 촌장, 응답하라.”
등줄기가 얼었다. 여덟 해 전, 회사 지하 테스트실에서 새벽 세 시에 내가 치던 줄이었다. 띄어쓰기까지 같았다. 노미가 창을 쥔 손에 힘을 주는 소리가 났다.
“쿠르곤은?”
내가 물었다. 애꾸가 왕관을 조금 들어 올렸다.
“왕은 주인한테 대답해 줬다. 밤마다. 주인은 대답을 많이 받았다. 왕 말도. 옛날 말도.”
애꾸는 왕관을 성벽 아래 눈 위에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녹슨 쇠가 눈을 녹이며 조금 가라앉았다.
“서쪽 땅의 주인이 깨어났다. 업데이트를 시작한다. 첫 마을부터.”
“첫 마을이 여기야?”
“여기. 튜토리얼.”
애꾸가 말했다. 이 단어를 고블린 입으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뼈 지팡이로 성벽을 한 번 가리키고, 다시 나를 가리켰다.
“주인이 찾는다. 처음 대답해 준 것. 밤에도 남아서 대답해 준 것.”
애꾸의 외눈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소규한.”
성벽 위가 조용해졌다. 베르타가 나를 돌아보았다. 노미도 돌아보았다. 성벽 아래에서 짚돌이가 뛰다가 멈췄다. 보름 동안 이 마을에서 나는 촌장이었고, 유저 양반이었고, 촌장님이었다. 이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말한 적이 없었다.
“테스터 소규한. 응답하라.”
애꾸가 한 번 더 말했다. 내 입술이 저 혼자 움직이려 했다. 이번에는 촌장의 대사가 아니었다. 여덟 해 전 테스트실에서 이 줄 아래에 늘 이어 치던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