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448자)

계약하는 날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부엌에서 된장 끓는 냄새가 손님방 문틈으로 들어왔다⁠. 우영칠은 눈을 뜨기 전에 냄새부터 맡았다⁠. 멸치를 먼저 우리고 된장을 체에 걸러 푸는 냄새였다⁠. 서른두 해 동안 아침마다 맡던 냄새가 용인 집에서 처음으로 났다⁠. 5월 15일 토요일 새벽 여섯 시였다⁠.

영칠은 이마에서 돋보기를 찾아 내려 쓰고 손님방에서 나왔다⁠. 부엌은 비어 있었다⁠. 영란은 벌써 마당에 나가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뚝배기가 두 개 있었다⁠. 큰 뚝배기는 비어 있었고⁠, 작은 뚝배기에는 된장국이 반쯤 남아 뚜껑이 덮여 있었다⁠. 뚜껑 위에 메모지 한 장이 얹혀 있었다⁠. 「⁠먹든지⁠」

영칠은 메모지를 오래 보았다⁠. 먹으라는 말도 아니고 먹지 말라는 말도 아니었다⁠. 영칠은 국을 데우지 않고 식은 채로 떠먹었다⁠. 두부가 네모반듯하게 썰려 있었다⁠. 서른두 해 동안 두부는 늘 이 크기였다⁠. 영칠은 두부 크기를 오늘 처음 눈여겨보았다⁠.

옷장에서 양복을 꺼냈다⁠. 퇴직하던 날 입은 진회색 양복이었다⁠. 넥타이는 부장 승진 때 영란이 사 준 남색 넥타이였다⁠. 매듭을 짓는 데 동영상을 두 번 돌려 봐야 했다⁠. 손가락이 넥타이 매는 법을 잊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매듭을 조이자 목이 조였다⁠. 영칠은 매듭을 반 뼘 느슨하게 풀었다⁠.

창밖 마당에서 영란이 상추를 뜯고 있었다⁠. 밀짚모자 챙이 오르내릴 때마다 소쿠리에 상추가 쌓였다⁠. 담 밑의 장미 줄기가 벽돌 두 단을 넘어 세 번째 단 자리까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영칠은 아직 세 번째 단을 쌓지 않았다⁠.

아홉 시 반⁠, 영칠은 양복 차림으로 대문을 나가다가 바로 붙잡혔다⁠. 6호 할머니가 강아지 줄을 쥔 채 영칠을 위아래로 훑었다⁠.

“⁠7호 양반⁠, 어디 장가가요⁠?⁠”

“⁠계약하러 갑니다⁠.⁠”

“⁠장가도 계약이지 뭐⁠.⁠”

할머니는 혼자 웃으며 지나갔다⁠. 강아지가 영칠의 구두 냄새를 맡고 재채기를 했다⁠. 영칠은 구두코를 내려다보았다⁠. 지난주 퇴비에 빠졌던 등산화 대신 구두를 신었는데도 강아지는 무언가를 맡았다⁠.

8호 대문 앞에서 도기백이 우편함을 열고 있었다⁠. 기백은 영칠의 양복을 보고 우편물을 쥔 채 손을 멈췄다⁠. 지난주 밤에 담을 사이에 두고 나눈 말이 두 사람 사이에 아직 남아 있었다⁠.

“⁠형님⁠, 넥타이가 반 뼘 풀렸습니다⁠.⁠”

“⁠일부러 푼 거요⁠. 목이 조여서⁠.⁠”

“⁠오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계약하러 가오⁠.⁠”

영칠은 기백의 말을 자르고 걸었다⁠. 열 걸음쯤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백은 아직 우편함 앞에서 영칠을 보고 있었다⁠. 영칠은 넥타이 매듭을 쥐었다가 놓고 다시 걸었다⁠. 느티나무 그늘을 지나는 동안 넥타이가 바람에 한 번 뒤집혔다⁠.

*

열 시⁠, 단지 입구 상가의 느티울 부동산 문을 열자 모기향 냄새와 믹스커피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봉옥단이 책상 서랍에서 도장 인주를 꺼내 놓고 있었다⁠. 벽에는 「⁠느티울 전원마을 시세표⁠」가 손글씨로 붙어 있었고⁠, 7호 칸 옆에 빨간 펜으로 「⁠급⁠」이라는 글자가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젊은 부부가 먼저 와 있었다⁠. 남편은 서른 중반으로⁠, 깃이 해진 남방을 입고 무릎에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아내는 서류 봉투를 꼭 쥐고 있었다⁠. 여섯 살 딸아이는 구석 탁자에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다⁠. 빨간 크레파스가 거의 닳아 있었다⁠.

“⁠부장님⁠, 일찍 오셨네⁠. 넥타이까지 매시고⁠.⁠”

“⁠계약은 계약이니까⁠.⁠”

영칠은 부부 맞은편에 앉았다⁠. 회장이 계약서 두 장을 탁자에 펼쳤다⁠. 영칠은 돋보기를 고쳐 쓰고 한 줄씩 읽었다⁠. 건재상 영업 부장 시절 거래처 계약서를 읽던 버릇대로 손가락으로 줄을 짚었다⁠. 매매 대금 오억⁠, 계약금 오천만 원⁠, 잔금은 7월 15일⁠.

“⁠집 자랑 좀 해도 되겠소⁠?⁠”

젊은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 고를 때 내가 해 드는 시간을 사흘 동안 쟀소⁠.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마당에 해가 안 빠져⁠. 남향 중에서도 정남향이오⁠. 겨울에 보일러 덜 돌아가요⁠. 수도관은 땅속 일 미터 이십까지 묻었고⁠. 내가 건자재를 삼십 년 했어⁠. 벽체 단열재도 내가 골랐소⁠.⁠”

“⁠어머⁠, 그래서 집이 따뜻했구나⁠.⁠”

젊은 아내가 처음으로 웃었다⁠. 영칠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영칠은 용인 집을 산 지 여덟 해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집 자랑을 했다⁠. 자랑을 듣는 사람이 집을 사 가는 사람이었다⁠.

부동산 문이 덜컥 열렸다⁠. 영란이 앞치마를 두른 채 들어왔다⁠. 손에 흙이 묻어 있었고 밀짚모자는 벗어 들었다⁠. 흰머리 섞인 단발이 땀에 이마에 붙어 있었다⁠. 회장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따⁠, 사모님⁠. 앉으시오⁠, 커피 한잔⁠.⁠”

“⁠커피는 됐어요⁠.⁠”

영란은 영칠 옆에 앉지 않았다⁠. 탁자 끝에 선 채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내 서른두 해 마당을 당신이 판다고요⁠?⁠”

“⁠내 서른두 해 월급으로 산 집이야⁠.⁠”

“⁠그 월급으로 서른두 해 밥 해 먹인 건 누군데요⁠.⁠”

“⁠지금 그 얘기 할 자리 아니야⁠.⁠”

영란은 영칠 대신 젊은 부부를 보았다⁠. 목소리가 깍듯해졌다⁠.

“⁠사시기 전에 말씀드릴 게 있어요⁠. 밤에 고라니가 내려와서 상추를 다 뜯어 먹어요⁠. 그물 안 치면 아침에 밑동만 남아요⁠. 겨울에는 바깥 수도가 얼어요⁠. 작년 1월에 두 번 터졌어요⁠. 그리고 옆집 담 때문에 싸움이 좀 있어요⁠.⁠”

“⁠고라니요⁠?⁠”

아이가 크레파스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커져 있었다⁠.

“⁠엄마⁠, 고라니 와⁠? 진짜 고라니⁠?⁠”

“⁠진짜 고라니야⁠. 밤에 와서 상추 먹고 가⁠.⁠”

영란이 아이에게 대답했다⁠.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엄마 팔에 매달렸다⁠. 젊은 아내가 웃으며 영란을 보았다⁠.

“⁠사모님⁠, 다 괜찮아요⁠. 저희 애가 그 마당을 너무 좋아해요⁠. 서울 전셋집이 반지하라서요⁠. 애가 해를 못 봐서 비염이 심해요⁠. 마당에서 상추 냄새 맡더니 처음으로 코를 안 훌쩍였어요⁠.⁠”

회장이 볼펜 끝으로 계약서 맨 밑을 톡톡 두드렸다⁠.

“⁠그라믄 특약 하나 넣읍시다⁠. 고라니 출몰은 하자로 보지 아니한다⁠.⁠”

회장이 소리 내어 읽으며 특약 칸에 한 줄을 적었다⁠. 젊은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고⁠, 영칠도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칠은 얼른 헛기침으로 덮었다⁠. 계약서에 고라니가 들어간 것은 서른 해 계약서를 읽은 영칠도 처음이었다⁠.

영란은 웃지 않았다⁠. 아이가 탁자로 와서 크레파스 그림을 영란에게 내밀었다⁠. 빨간 덩어리들이 담 위에 줄지어 있었다⁠. 장미였다⁠.

“⁠할머니 집 장미예요⁠. 이사 가면 제가 물 줄게요⁠.⁠”

영란은 그림을 받아 들었다⁠. 손에 묻은 흙이 종이에 묻었다⁠. 회장이 목소리를 낮춰 영란에게 말했다⁠.

“⁠사모님⁠, 마음은 알겠는디⁠, 명의자가 아니라서 도장 찍을 자리도 없어라⁠. 부장님이 찍으시믄 끝이요⁠.⁠”

영란은 그림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부동산 구석의 낡은 소파에 가서 앉았다⁠.

“⁠끝날 때까지 볼게요⁠.⁠”

영칠은 영란을 돌아보지 않았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인감도장을 꺼냈다⁠. 붉은 인주에 도장을 꾹 눌렀다가 계약서 매도인 자리에 찍었다⁠. 한 장⁠, 또 한 장⁠. 도장을 뗄 때 종이가 쩍 소리를 내며 따라 올라왔다⁠.

젊은 남편이 휴대전화로 이체했다⁠. 영칠의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 「⁠입금 오천만 원 · 계약금⁠」 영칠은 화면을 끄지 않고 탁자 위에 엎어 놓았다⁠.

“⁠잔금 날까지 마당 잘 부탁드립니다⁠.⁠”

젊은 남편이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내도 따라 숙였다⁠. 아이는 영란에게 손을 흔들었다⁠. 세 사람이 나가고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 회장은 수수료 영수증을 쓰다가 영칠과 영란을 번갈아 보고⁠, 탕비실로 들어가 커피포트를 켰다⁠. 물 끓는 소리가 커졌지만 탕비실 문은 반만 닫혀 있었다⁠.

부동산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 영칠은 계약서를 반으로 접었다가 도로 폈다⁠. 영란은 소파에 앉아 앞치마 주머니에서 그림을 꺼내 무릎 위에 펴고 손바닥으로 구김을 쓸었다⁠. 흙 자국이 빨간 장미 위로 번졌다⁠.

“⁠점심은⁠?⁠”

영칠이 먼저 말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목이 다시 조였다⁠.

“⁠상추 뜯어 놨어요⁠. 된장도 남았고요⁠.⁠”

“⁠먹든지⁠, 하는 거냐⁠?⁠”

“⁠먹든지⁠, 하는 거예요⁠.⁠”

영란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영칠은 이 대화를 서른두 해 동안 몇 번이나 했는지 헤아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

열한 시 사십 분⁠, 부동산 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보담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한 손에 휴대전화⁠, 한 손에 하얀 봉투를 쥐고 있었다⁠.

“⁠아빠⁠! 고속도로에서 사고 나서 한 시간 섰어⁠. 계약했어⁠?⁠”

“⁠했다⁠.⁠”

보담은 탁자 위의 계약서를 보고⁠, 엎어 놓은 아빠의 휴대전화를 보고⁠, 구석 소파의 엄마를 보았다⁠. 엄마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크레파스 그림 한 귀퉁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보담은 아빠 옆에 털썩 앉았다⁠. 계약하는 날 아빠 옆에 앉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한 시간 늦게 지켰다⁠.

“⁠아빠⁠, 말해⁠. 안 하면 내가 해⁠.⁠”

“⁠보담아⁠.⁠”

“⁠엄마한테 말 안 하겠다고 한 거⁠, 계약하기 전까지만이었어⁠. 이제 도장 찍었잖아⁠.⁠”

보담은 일어나 하얀 봉투를 들고 소파로 갔다⁠. 봉투를 엄마 무릎 위에 놓았다⁠. 영란이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앞치마 주머니를 더듬어 돋보기를 찾았다⁠. 영란의 돋보기는 영칠과 달리 늘 주머니에 있었다⁠. 영란은 종이를 끝까지 읽었다⁠. 대출 금액 칸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억이요⁠?⁠”

영칠은 대답하지 않았다⁠. 탕비실의 커피포트가 딸깍 꺼졌다⁠. 모기향 연기가 형광등 밑에서 가늘게 꼬였다⁠.

“⁠이 아파트 대출⁠, 당신 퇴직할 때 다 갚았잖아요⁠. 케이크 앞에서 빚 하나 없다고 했잖아요⁠.⁠”

“⁠갚았었어⁠.⁠”

“⁠그런데요⁠.⁠”

영칠은 넥타이 매듭에 손을 댔다⁠. 반 뼘 느슨하게 했던 매듭을 한 뼘 더 풀었다⁠. 목이 조금 편해졌다⁠. 편해진 목으로 말이 나왔다⁠.

“⁠총무 알지⁠. 광성고 21회 총무⁠. 우리 결혼식 사회 본 놈⁠.⁠”

“⁠알아요⁠.⁠”

“⁠재작년 가을에 오리고기 식당 낸다고 했어⁠. 목 좋은 자리 났다고⁠. 은행은 나이 많다고 대출을 안 해 준대⁠. 친구 좋다는 게 뭐냐고 하더라⁠. 퇴직금에서 일억 오천을 빌려줬다⁠.⁠”

영란은 종이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보담이 엄마 옆에 앉았다⁠.

“⁠가게는 석 달 만에 닫았어⁠. 총무는 다음 달부터 연락이 끊겼고⁠. 퇴직금으로 메우려던 노후 자금 구멍을 서울 집 담보로 대출 받아서 막았다⁠. 연금 들어오면 이자 내면 된다고 생각했지⁠. 연금으로는 이자가 안 되더라⁠. 석 달 전부터 밀렸다⁠.⁠”

영칠은 엎어 두었던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돋보기를 쓰고 화면을 넘겼다⁠. 동창 단톡방 「⁠광성고 21회⁠」를 열어 탁자 위에 놓았다⁠. 아침 꽃 사진들 사이에 회색 글씨 한 줄이 끼어 있었다⁠. 「⁠총무님이 나갔습니다⁠.⁠」 날짜는 어제였다⁠.

“⁠그래서 이 집을 판 거야⁠. 급매로⁠. 잔금 받으면 대출 갚고 남는 걸로 서울 집에서 둘이 살면 돼⁠. 네 엄마가 돌아오면⁠.⁠”

영칠은 영란을 처음으로 똑바로 보았다⁠. 영란은 무릎 위의 종이를 보고 있었다⁠.

“⁠내가 서른두 해 식구를 먹였어⁠. 새벽 여섯 시에 나가서 밤 열한 시에 들어와서⁠. 그거 하나로 버텼어⁠. 이번에는 내가 못 먹이게 됐다⁠. 그 말을 어떻게 해⁠.⁠”

영칠의 목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부동산 안에는 모기향 타는 소리만 났다⁠. 탕비실 문틈으로 회장의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영란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크레파스 그림이 조금 더 빠져나와⁠, 빨간 장미 한 덩어리가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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