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03자)

어버이날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카네이션 바구니에서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도기백은 바구니를 식탁에 올려놓고 코를 꽃잎에 바짝 댔다⁠. 풀 비린내가 조금⁠, 포장지 비닐 냄새가 조금이었다⁠. 카네이션은 원래 향이 약한 꽃이었다⁠. 대전 화원에서 어버이날 바구니를 만들 때 순향은 꼭 프리지아 두 송이를 카네이션 사이에 꽂았다⁠. 향이 없는 꽃은 받는 사람이 금방 잊는다고 했다⁠. 기백은 바구니를 돌려 보았다⁠. 프리지아는 없었다⁠.

5월 8일 토요일 아침⁠, 아들 내외가 수지에서 건너왔다⁠. 며느리는 부엌에서 미역국을 데웠고 아들은 거실 창가에 서서 담 너머 7호를 내다보았다⁠. 돌담 위에 붉은 벽돌이 두 단 올라가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7호 마당에서는 흙손으로 벽돌 틈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출렁이는 두 단째를 고치는 소리였다⁠.

“⁠아버지⁠, 저 담이 아버지 때문에 올라가는 거예요⁠?⁠”

“⁠형님 담이다⁠. 형님 마음이지⁠.⁠”

“⁠형님이요⁠?⁠”

아들이 돌아보았다⁠. 기백은 카네이션 바구니의 리본을 매만졌다⁠.

“⁠예순셋이시니까 형님이지⁠.⁠”

“⁠아버지⁠, 진지하게 말씀드릴게요⁠.⁠”

아들은 회사에서 쓰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기백이 싫어하는 목소리였다⁠. 순향이 살아 있을 때는 아들이 이 목소리를 쓰면 순향이 등을 찰싹 때렸다⁠.

“⁠회장님한테 들었는데⁠, 저 집 아저씨가 집을 판대요⁠. 아주머니는 안 팔려고 하고요⁠. 그러다 소송 가면⁠, 아버지가 증인으로 불려 가요⁠. 옆집 남자라고요⁠. 법원 다니시면 혈압 올라요⁠.⁠”

“⁠나는 상추 칭찬밖에 안 했다⁠.⁠”

“⁠그게 문제라니까요⁠.⁠”

부엌에서 며느리가 국그릇을 들고 나왔다⁠. 며느리는 남편 등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순향이 치던 자리와 같은 자리였다⁠.

“⁠어버이날에 아버님한테 잔소리하지 마⁠. 아버님⁠, 국 드세요⁠.⁠”

기백은 국을 떠먹으며 며느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역국은 싱거웠다⁠. 순향의 미역국도 싱거웠다⁠. 아들은 국을 먹는 내내 창밖의 담을 보았다⁠.

*

열한 시⁠, 아들 내외가 돌아가고 기백은 마당에서 토분을 정리했다⁠. 담 너머에서 헛기침이 났다⁠. 우영칠이 분홍 고무장갑을 낀 채 담 앞에 와 있었다⁠.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선생⁠, 이거 뭐라고 써 있소⁠?⁠”

영칠이 화면을 담 너머로 내밀었다⁠. 기백은 몸을 숙여 들여다보았다⁠. 빵집 케이크 교환권이었다⁠. 「⁠카네이션 케이크 1개 · 보담 님이 보낸 선물 · 유효기간 2027⁠.06⁠.07⁠」

“⁠따님이 케이크를 보내셨네요⁠. 빵집 가서 이 화면 보여 주면 줍니다⁠.⁠”

“⁠어느 빵집⁠?⁠”

“⁠면 소재지 큰길에 있는 빵집이요⁠. 간판에 밀 이삭 그려진 데⁠.⁠”

“⁠…돋보기를 집에 놓고 나와서⁠.⁠”

영칠의 이마 위에 돋보기가 얹혀 있었다⁠. 기백은 돋보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영칠이 휴대전화를 거둬 들이며 화면을 엄지로 두드렸다⁠. 딸에게 답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엄지가 화면 한 자리를 여러 번 눌렀다⁠.

“⁠형님⁠, 지금 뭘 보내셨어요⁠?⁠”

“⁠고맙다고 엄지 하나 보냈소⁠.⁠”

기백은 화면을 넘겨다보았다⁠. 대화창에 엄지 이모티콘이 사십 개쯤 줄지어 있었다⁠. 영칠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보다가 이마의 돋보기를 발견하고 내려 썼다⁠. 엄지 사십 개가 한꺼번에 보였다⁠. 영칠은 휴대전화를 등 뒤로 감췄다⁠.

“⁠많이 고마운 거요⁠.⁠”

“⁠예⁠. 따님도 아실 겁니다⁠.⁠”

7호 현관문이 열리고 영란이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영란의 휴대전화에도 같은 케이크 교환권이 와 있을 것이었다⁠. 보담은 엄마와 아빠에게 케이크를 한 개씩 따로 보냈다⁠. 반으로 나눠 먹으라고 하나만 보내지 않았다⁠.

열두 시 반⁠, 기백은 면 소재지 큰길의 빵집에서 단팥빵 두 개를 골랐다⁠. 버터 냄새와 설탕 탄 냄새가 가게 안에 가득했다⁠. 계산대 앞에 익숙한 등산 조끼가 있었다⁠. 영칠이 휴대전화 화면을 점원 얼굴 앞에 바짝 들이밀고 있었다⁠.

“⁠이거 주시오⁠. 카네이션 케이크⁠.⁠”

“⁠네⁠, 바코드 찍어 드릴게요⁠. 조금만 멀리요⁠, 손님⁠.⁠”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울렸다⁠. 영란이 밀짚모자를 벗어 들고 들어왔다⁠. 영란의 휴대전화에도 같은 화면이 떠 있었다⁠. 영란은 계산대 앞의 영칠을 보고 걸음을 멈췄고⁠, 영칠은 고개를 돌려 영란을 보고 휴대전화를 내렸다⁠. 진열대 옆의 기백은 단팥빵 봉지를 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점원이 두 사람의 화면을 번갈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어머⁠, 같은 분이 보내신 거네요⁠. 두 분 같이 오셨으면 두 개 말고 큰 걸로 하나 바꿔 드릴까요⁠? 차액은 안 받을게요⁠.⁠”

“⁠아니요⁠.⁠”

“⁠아니오⁠.⁠”

두 사람의 대답이 한 박자에 겹쳤다⁠. 점원이 눈을 끔뻑였다⁠. 영칠이 먼저 케이크 상자를 받아 들고 나갔고⁠, 영란은 영칠의 차가 떠난 뒤에 자기 상자를 받았다⁠. 기백은 단팥빵을 계산하면서⁠, 박자가 맞는 대답을 마흔 해 만에 처음 들었다고 생각했다⁠. 노래 교실에서는 늘 두 마디씩 어긋났다⁠.

*

오후 두 시⁠, 공동 텃밭 열여덟 번째 고랑이 기백의 몫이었다⁠. 이사 오고 나서 늦게 분양받은 탓에 퇴비 더미 바로 옆이었다⁠. 바로 옆 열일곱 번째 고랑이 영란의 감자 고랑이었다⁠. 감자 잎이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영란은 오늘 기백의 고랑에 고추 모종을 심으러 왔다⁠. 영란의 마당 고추 이랑이 계분 거름에 너무 기름져져서 남는 모종을 옮겨 심을 자리가 필요했다⁠. 영란이 모종을 들고 기백이 지주대를 박았다⁠. 지주대는 기백이 대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끝마다 순향의 글씨로 「⁠고추⁠」 「⁠가지⁠」 「⁠토마토⁠」라고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상추 다 뜯었어요⁠. 첫물⁠.⁠”

영란이 모종 뿌리를 구덩이에 앉히며 말했다⁠. 흙을 덮는 손이 조금 빨라졌다⁠.

“⁠그러니까 이제 물을게요⁠.⁠”

기백은 지주대를 박던 망치를 내려놓았다⁠. 퇴비 더미의 김이 고랑 위로 흘러왔다⁠.

“⁠왜 말도 없이 갔어요⁠? 편지 한 장 없이⁠.⁠”

“⁠1988년 2월에 입대했어요⁠. 일병 달았을 때 아버지 화원이 넘어갔어요⁠. 빚이 집까지 넘어갔고요⁠. 휴가를 나갔더니 어머니가 대전역 앞 여관방에 계셨어요⁠.⁠”

기백은 장갑 낀 손으로 흙덩이를 부쉈다⁠. 부서진 흙에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제대하고 바로 대전 내려가서 남의 화원에서 일했어요⁠. 그때 소리샘 후배한테 들었어요⁠. 영란 씨가 졸업하고 출판사 들어갔다고⁠. 나는 빚 진 화원집 아들이었고요⁠. 연락하면 영란 씨가 기다린다고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안 했어요⁠.⁠”

“⁠그건 내가 정할 일이었어요⁠.⁠”

영란의 목소리는 낮았다⁠. 깍듯하지도 않았고 날카롭지도 않았다⁠. 고추 모종 하나를 쥔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기다릴지 말지⁠, 내가 정할 일이었다고요⁠. 선배가 혼자 정했어요⁠. 나는 마흔 해 동안 내가 뭘 잘못했나 했어요⁠.⁠”

“⁠알아요⁠.⁠”

“⁠모르잖아요⁠. 마흔 해 동안 한 번도 안 물어봤으니까⁠.⁠”

기백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지주대 끝의 순향 글씨를 보았다⁠. 「⁠고추⁠」 영란이 모종을 구덩이에 꾹 눌러 심고 나서 갑자기 웃었다⁠. 짧고 마른 웃음이었다⁠.

“⁠웃기네요⁠.⁠”

“⁠뭐가요⁠?⁠”

“⁠나도 똑같이 했어요⁠. 영칠 씨한테 안 묻고 식탁에 종이 한 장 올렸어요⁠. 오늘부터 졸혼합니다⁠. 서른두 해를 종이 한 장으로 정했어요⁠. 나는 선배를 마흔 해 동안 미워하면서 선배처럼 했네요⁠.⁠”

영란은 흙 묻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마에 흙이 한 줄 그어졌다⁠. 기백은 이번에는 가리키지 않았다⁠.

*

고랑 끝에서 삽이 땅을 찍는 소리가 났다⁠. 영칠이 등산 조끼 차림에 삽을 들고 서 있었다⁠. 분홍 장갑은 벗고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추 심는다길래 도우러 왔소⁠.⁠”

영칠은 열일곱 번째 고랑과 열여덟 번째 고랑 사이 좁은 둑으로 들어왔다⁠. 둑이 좁아서 한 발씩 게걸음으로 걸었다⁠. 영칠은 기백의 고랑에 심긴 고추 모종을 보고⁠, 지주대를 보고⁠, 영란을 보았다⁠.

“⁠선생⁠, 내 집사람 고추 심는 데 왜 선생 손이 들어가오⁠?⁠”

기백은 일어났다⁠. 일어나자 영칠의 정수리가 기백의 턱에 닿았다⁠. 남의 집 일에는 끼지 않는다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기백은 혀끝의 말을 삼켰다⁠.

“⁠형님⁠, 이 고랑은 제 고랑입니다⁠.⁠”

“⁠뭐요⁠?⁠”

“⁠열여덟 번째 고랑은 제 고랑이고⁠, 영란 씨가 모종 자리를 빌린 겁니다⁠. 지주대도 제 겁니다⁠. 형님이 도우시려면 저쪽 열일곱 번째 고랑 감자를 북돋아 주세요⁠. 거기는 영란 씨 고랑입니다⁠.⁠”

텃밭이 조용해졌다⁠. 다른 고랑의 호미 소리가 다 멈췄다⁠. 6호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이쪽을 보았다⁠. 영칠은 삽자루를 꽉 쥐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말 한마디 없이 군대 간 사람이 고랑 경계는 잘 따지네⁠.⁠”

“⁠예⁠. 늦게 배웠습니다⁠.⁠”

영칠이 한 발 물러났다⁠. 둑이 좁았다⁠. 등산화 뒤꿈치가 퇴비 더미 가장자리를 밟았다⁠. 김이 오르는 깻묵 퇴비가 신발 밑에서 미끄러졌다⁠. 영칠은 삽을 쥔 채 뒤로 넘어가 퇴비 더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다들 숨을 참았다⁠. 영칠은 퇴비 위에 앉은 채 삽을 무릎에 가로놓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제일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크고 탁한 웃음이었다⁠.

“⁠어버이날에 거름 방석이네⁠.⁠”

6호 할머니가 따라 웃었다⁠. 영란이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떨었다⁠. 기백은 손을 내밀었다⁠. 영칠은 기백의 손을 한참 보다가 잡지 않고⁠, 삽을 지팡이 삼아 혼자 일어났다⁠. 바지 엉덩이에 퇴비가 동그랗게 묻어 있었다⁠. 영칠은 엉덩이를 털지 않고 열일곱 번째 고랑으로 가서 감자 북을 주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 단지 단톡방에 12호 아주머니의 글이 올라왔다⁠. 「⁠7호 바깥양반 감자 북 잘 주시네요⁠~ 어버이날 효자 감자 나오겠어요^^⁠」 사진은 없었다⁠. 회장은 글 밑에 아무것도 달지 않았다⁠. 회장이 조용한 단톡방은 기백이 이사 온 뒤로 처음이었다⁠.

*

밤 열 시⁠, 기백은 현관 앞 계단에 앉아 새 기타 줄을 감았다⁠. 쇠줄을 감을 때마다 손끝이 찡했다⁠. 줄 여섯 개를 다 매고 첫 줄을 퉁기자 마흔 해 만에 제대로 된 소리가 났다⁠. 줄을 고르는 사이 담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7호 마당 의자에 영칠이 앉아 있었다⁠. 담이 두 단 높아졌어도 소리는 그대로 넘어왔다⁠.

“⁠예⁠, 우영칠입니다⁠. 이자 두 달 밀린 거 압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계약금 들어오면 바로 넣겠습니다⁠. 아니요⁠, 집사람은 모릅니다⁠. 집사람한테는 연락하지 마세요⁠. 예⁠, 예⁠.⁠”

통화가 끊겼다⁠. 영칠은 휴대전화를 무릎에 내려놓고 한참 앉아 있었다⁠. 기백은 기타 줄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떼지 못했다⁠. 손가락을 떼면 줄이 울릴 것이었다⁠.

영칠이 고개를 돌렸다⁠. 8호 현관 등 밑에 앉은 기백이 보였을 것이다⁠. 영칠이 의자에서 일어나 담 앞으로 왔다⁠. 기백도 기타를 내려놓고 담 앞으로 갔다⁠. 두 사람 사이에 돌담과 벽돌 두 단과 장미 줄기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장미 잎 냄새가 났다⁠.

“⁠들었소⁠?⁠”

“⁠들었습니다⁠.⁠”

“⁠집사람한테 말하면⁠, 선생 집 쪽으로 벽돌을 열 단 더 쌓아 버리겠소⁠.⁠”

“⁠제가 말 안 해도⁠, 형님이 하셔야 할 말입니다⁠.⁠”

영칠의 숨이 거칠어졌다⁠. 파스 냄새가 담을 넘어왔다⁠.

“⁠선생은 마흔 해 전에 말 한마디 안 하고 갔다면서⁠. 그런 사람이 나더러 말하라고 하오⁠?⁠”

“⁠그래서 압니다⁠.⁠”

기백은 담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벽돌의 시멘트가 아직 덜 말라 손바닥에 서늘하게 닿았다⁠.

“⁠말 안 하면⁠, 마흔 해 갑니다⁠.⁠”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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