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71자)

가족 회의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현관문을 열자 라면 스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프 냄새 밑에 쉰 수건 냄새가 깔려 있었고⁠, 맨 밑바닥에 파스의 박하 냄새가 눌어붙어 있었다⁠. 우보담은 신발을 벗다 말고 숨을 참았다⁠. 5월 1일 토요일⁠, 근로자의 날 아침 아홉 시였다⁠. 서울 상계동 아파트 702호에 사람이 산 지 두 달이 안 됐는데 집에서는 혼자 산 지 십 년 된 냄새가 났다⁠.

아빠는 금요일 밤 용인으로 내려갔다⁠. 주말 경비 근무였다⁠. 보담은 엄마가 시킨 대로 고무장갑부터 꼈다⁠.

싱크대에는 냄비가 다섯 개 쌓여 있었다⁠. 다섯 개 전부 라면 국물 자국이 띠처럼 둘려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라면 열두 봉지가 냉장실 맨 위 칸에 누워 있었다⁠. 라면을 왜 냉장고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계란 두 알⁠, 소주 한 병⁠, 엄마가 3월에 담가 두고 간 묵은지 한 통이 나머지였다⁠. 냉장고 문짝에 노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물 조금씩⁠」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

“⁠물을 조금씩 뭐 하라는 거야⁠?⁠”

혼잣말을 하면서 보담은 냄비를 불렸다⁠. 욕실 세탁 바구니를 비우다 맨 밑에서 소매가 누렇게 탄 와이셔츠를 찾았다⁠. 다리미 바닥 모양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보담은 셔츠를 펼쳐 들고 한참 서 있었다⁠. 아빠가 셔츠를 다렸다는 사실과 다리다 태웠다는 사실과 태운 셔츠를 맨 밑에 숨겼다는 사실이 차례로 들어왔다⁠. 숨긴 대목에서 웃음이 났다가⁠, 웃음이 금방 꺼졌다⁠.

휴대전화에 동영상 채널 알림이 떴다⁠. 「⁠부모님 황혼 이혼⁠, 자녀가 꼭 챙길 다섯 가지⁠」 지난주에 엄마 일로 한 번 검색했을 뿐이었다⁠. 보담은 알림을 밀어 지웠다⁠.

쓰레기봉투 두 개를 들고 일 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우편함을 열었다⁠. 전단지 사이로 은행 봉투 세 통이 나왔다⁠. 두 통은 뜯겨 있었고 한 통은 그대로였다⁠. 뜯긴 봉투의 종이가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대출 이자 연체 안내 · 3월분⁠, 4월분 미납 · 연체가 이어지면 신용 정보에 등록될 수 있습니다⁠」

보담은 우편함 앞에서 종이를 두 번 읽었다⁠. 대출 금액 칸에는 이억이 찍혀 있었다⁠. 담보는 이 아파트였다⁠. 아빠는 퇴직하던 해에 대출은 다 갚았다고 했다⁠. 생일 케이크 앞에서 촛불을 끄며 「⁠이제 우리 집은 빚 하나 없다⁠」고 했다⁠.

보담은 종이를 휴대전화로 찍었다⁠. 봉투에 도로 넣고 우편함에 다시 꽂았다⁠. 쓰레기봉투를 내다 버리고 올라오는 동안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았다⁠.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장인어른 댁 청소 잘돼⁠? 점심 뭐 먹어⁠?⁠」 보담은 「⁠라면 말고 아무거나⁠」라고 보냈다⁠.

오후 세 시⁠, 청소를 마친 보담은 거실 바닥에 앉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실 장식장 위에 부모님 결혼사진이 있었다⁠. 스물일곱의 엄마가 면사포를 쓰고 입을 꼭 다문 채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엄마는 지금 보담보다 네 살 어렸다⁠.

“⁠엄마⁠, 아빠 집 다 봤어⁠.⁠”

“⁠냉장고에 뭐 있든⁠?⁠”

“⁠라면⁠. 냉장실에 라면⁠. 그리고 엄마 묵은지⁠.⁠”

“⁠묵은지는 안 먹었고⁠?⁠”

“⁠한 조각도 안 먹었어⁠. 뚜껑도 안 열었어⁠.⁠”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보담은 우편함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입을 연 채로 결혼사진 속 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한 달 전 처음으로 혼자 고른 집에서⁠, 처음으로 혼자 심은 상추를 뜯고 있을 것이었다⁠.

“⁠우편함은⁠?⁠”

“⁠전단지⁠. 치킨집 전단지만 잔뜩⁠.⁠”

보담은 거짓말을 하고 나서 결혼사진을 엎어 놓았다⁠. 엎어 놓고 보니 엄마에게 미안해서 도로 세웠다⁠.

*

일요일 오전 열한 시⁠, 용인 7호 거실 한가운데에 화이트보드가 세워졌다⁠. 보담이 회사 회의실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반납해야 했다⁠. 보담은 파란 마커로 안건을 적었다⁠.

「⁠1⁠. 졸혼 2⁠. 집 3⁠. 옆집⁠」

소파 한쪽 끝에 엄마가⁠, 반대편 끝에 아빠가 앉았다⁠. 가운데에 쿠션 두 개만큼의 빈자리가 있었다⁠. 보담은 마커 뚜껑을 닫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규칙⁠. 말하고 싶으면 손 들어⁠. 휴대전화 무음⁠. 남의 말 끊으면 마커 뚜껑 압수⁠.⁠”

“⁠마커 뚜껑은 왜⁠?⁠”

“⁠아빠 지금 손 안 들고 말했어⁠. 경고 하나⁠.⁠”

영칠이 입을 다물었다⁠. 영란이 손을 들었다⁠.

“⁠엄마⁠.⁠”

“⁠회의 끝나고 점심은 상추쌈이야⁠. 거름 냄새 이제 다 빠졌어⁠.⁠”

“⁠안건이랑 상관없는 발언⁠. 근데 좋아⁠. 계속⁠.⁠”

영칠이 손을 들었다⁠. 들긴 들었는데 반만 들었다⁠.

“⁠아빠⁠.⁠”

“⁠졸혼이 뭔데⁠? 법에도 없는 말이야⁠. 동창들한테 물어봐도 다 그런 거 없대⁠.⁠”

“⁠법에 없으니까 내가 만든 거예요⁠.⁠”

엄마가 손을 안 들고 말했다⁠. 보담은 엄마에게도 경고 하나를 주었다⁠. 영란은 순순히 손을 들고 같은 말을 다시 했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했다⁠.

“⁠법에 없으니까⁠, 내가 만든 거예요⁠.⁠”

보담은 화이트보드에 「⁠졸혼 = 엄마가 만듦⁠」이라고 적었다⁠. 영칠이 파란 글씨를 노려보았다⁠.

“⁠2번⁠, 집⁠. 아빠는 집을 5월 15일에 판다⁠. 맞아⁠?⁠”

“⁠판다⁠.⁠”

“⁠엄마는 못 팔게 하고 싶다⁠. 맞아⁠?⁠”

“⁠맞아⁠.⁠”

영칠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들었다⁠.

“⁠아빠⁠.⁠”

“⁠나도 안건 있다⁠.⁠”

영칠은 일어나서 보담의 손에서 마커를 가져갔다⁠. 화이트보드 맨 밑에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적었다⁠. 돋보기를 안 쓴 손이라 글씨가 오른쪽 아래로 미끄러졌다⁠. 「⁠4⁠. 엄마 서울 복귀⁠」 복귀의 ‘⁠귀⁠’ 자가 보드 밖으로 반쯤 나갔다⁠.

“⁠아빠⁠, 4번은 안 돼⁠. 안건은 미리 내야 돼⁠.⁠”

“⁠회사에서는 부장이 내면 되는 거야⁠.⁠”

“⁠아빠 퇴직했잖아⁠.⁠”

영칠은 마커를 쥔 채 잠깐 서 있다가 소파로 돌아갔다⁠. 엄마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웃음을 참는 어깨였다⁠. 보담은 4번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야⁠.⁠”

보담은 마커를 내려놓았다⁠. 회사에서 거래처 계약 조건을 읽을 때처럼 목소리가 건조해졌다⁠.

“⁠엄마⁠, 차라리 이혼해⁠. 이혼하면서 재산분할 받으면 집 반은 엄마 거야⁠. 법적으로⁠. 그럼 아빠 혼자 못 팔아⁠.⁠”

거실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났다⁠. 영칠이 손을 들지 않고 말했다⁠.

“⁠너⁠, 지금 아빠 앞에서 이혼하라고 했냐⁠?⁠”

“⁠경고 둘⁠. 아빠⁠, 나 회의하는 중이야⁠.⁠”

영란이 손을 들었다⁠. 들었다가⁠, 그냥 내렸다⁠.

“⁠이혼은 안 해⁠.⁠”

“⁠왜⁠? 그게 엄마한테 제일 유리해⁠.⁠”

“⁠네 아빠랑 싸우자고 졸혼한 거 아니야⁠. 나 혼자 한번 살아 보자고 한 거지⁠. 이혼은 싸움이야⁠. 법원 가서 서른두 해를 반으로 쪼개는 거⁠.⁠”

“⁠엄마⁠, 지금 이미 싸우고 있어⁠. 담 쌓고 거름 뿌리고⁠.⁠”

“⁠그건 싸움 아니야⁠. 그냥 사는 거야⁠.⁠”

영칠이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천장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싸움이나 사는 거나⁠, 그게 그거지⁠.⁠”

보담은 아빠의 옆얼굴을 보았다⁠. 우편함의 봉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말하면 회의는 끝날 것이었다⁠. 보담은 마커 뚜껑을 쥐었다 놓았다⁠. 화이트보드의 「⁠3⁠. 옆집⁠」에 줄을 긋지 않은 채 회의를 쉬자고 했다⁠.

*

점심 상추쌈을 먹고 보담은 마당으로 나갔다⁠. 돌담 위에 벽돌이 두 단 올라가 있었다⁠. 줄이 바다처럼 출렁거렸고⁠, 벽돌 사이로 장미 줄기가 노끈에 묶여 위로 뻗어 있었다⁠. 담 너머 8호 마당에서 은발의 남자가 토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아저씨⁠.⁠”

도기백이 고개를 들었다⁠. 키가 커서 벽돌 두 단이 올라간 담이 겨우 허리에 왔다⁠.

“⁠우리 엄마 첫사랑이시죠⁠? 저 딸이에요⁠. 우보담⁠.⁠”

“⁠아⁠, 예⁠. 도기백입니다⁠.⁠”

“⁠몇 가지만 여쭤봐도 돼요⁠? 면접이에요⁠.⁠”

“⁠면접이요⁠?⁠”

“⁠연세는요⁠?⁠”

“⁠예순입니다⁠.⁠”

“⁠혈압은요⁠?⁠”

“⁠약 먹습니다⁠.⁠”

“⁠연금은요⁠?⁠”

기백이 물조리개를 내려놓았다⁠.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가 떨렸다⁠.

“⁠화원 하던 사람이라 많지 않습니다⁠.⁠”

“⁠마지막 질문⁠. 우리 엄마 좋아하세요⁠?⁠”

기백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담 밑의 장미를 내려다보고⁠, 7호 거실 창을 보고⁠, 다시 보담을 보았다⁠.

“⁠노래 박자 맞추는 정도로요⁠.⁠”

“⁠그게 어느 정도인데요⁠?⁠”

“⁠두 마디쯤 빠르거나 느린 정도요⁠.⁠”

보담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백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잠금 화면에 꽃밭 가운데에서 진초록 앞치마를 두르고 웃는 여자가 있었다⁠.

“⁠집사람입니다⁠. 지난봄에 갔어요⁠.⁠”

보담은 화면을 오래 보았다⁠. 담 너머로 동백 냄새가 넘어왔다⁠. 무겁고 조금 쓴 냄새였다⁠. 외할머니 화장대에서 맡던 냄새와 비슷했다⁠.

“⁠아저씨한테서 할머니 냄새 나요⁠. 좋은 냄새요⁠.⁠”

“⁠집사람 핸드크림입니다⁠.⁠”

보담은 핸드크림이라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마당으로 돌아왔다⁠. 거실 화이트보드의 「⁠3⁠. 옆집⁠」 옆에 작게 적었다⁠. 「⁠통과⁠. 단⁠, 박자 주의⁠」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엄마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면접 봤다며⁠?⁠”

“⁠어떻게 알아⁠?⁠”

“⁠담 너머로 다 들려⁠. 연금까지 물어봤어⁠?⁠”

“⁠딸이 그 정도는 물어봐야지⁠. 엄마는 안 물어봤어⁠?⁠”

“⁠나는 왜 군대 갈 때 말도 없이 갔는지만 물을 거야⁠. 상추 다 뜯고⁠.⁠”

엄마의 손에서 상추 씻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보담은 엄마가 마흔 해 묵힌 질문을 상추 철 뒤로 미뤄 두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

저녁 여섯 시⁠, 아빠가 보담을 역까지 태워 주겠다고 했다⁠. 은색 중형차 안에서는 소나무 모양 방향제 냄새와 파스 냄새가 섞여 났다⁠. 단지 입구를 빠져나가자 보담이 휴대전화 화면을 아빠 쪽으로 내밀었다⁠. 우편함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아빠⁠, 이거 뭐야⁠?⁠”

영칠은 신호에 멈춰서 화면을 힐끗 보았다⁠. 돋보기 없이도 굵은 글씨는 보였다⁠.

“⁠남의 우편물을 왜 봐⁠?⁠”

“⁠아빠 우편물이야⁠. 남 아니야⁠. 이억 대출이 왜 있어⁠? 다 갚았다며⁠.⁠”

“⁠어른 일이야⁠.⁠”

“⁠아빠⁠, 나 오늘 그 말 세 번째 들어⁠.⁠”

신호가 바뀌었다⁠. 영칠은 앞만 보고 차를 몰았다⁠. 보담은 코가 맹맹해져서 휴지를 찾았다⁠. 조수석 서랍을 열자 휴지 대신 하얀 약봉투가 손에 잡혔다⁠. 봉투에 「⁠심장내과⁠」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고⁠, 안에서 작은 갈색 병이 굴렀다⁠. 병에 붙은 종이를 읽었다⁠. 「⁠가슴 통증이 있을 때 혀 밑에 한 알⁠」

“⁠아빠⁠.⁠”

영칠이 한 손으로 봉투를 낚아챘다⁠. 핸들이 잠깐 흔들렸다⁠.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체해서 받은 거야⁠.⁠”

“⁠체한 사람한테 혀 밑에 녹이는 약을 왜 줘⁠?⁠”

“⁠보담아⁠.⁠”

아빠가 이름을 불렀다⁠. 서른한 해 동안 아빠가 이름을 부를 때는 잔소리가 시작될 때였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낮았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엄마 지금 자기 하고 싶은 거 하잖아⁠. 그거 하게 둬⁠.⁠”

보담은 약봉투를 쥔 아빠 손을 보았다⁠. 손바닥 가장자리가 시멘트 독에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분홍 고무장갑으로도 다 막지 못한 자국이었다⁠.

역 앞에 차가 멈췄다⁠. 보담은 안전벨트를 풀고도 내리지 않았다⁠.

“⁠엄마한테 말 안 할게⁠. 대신 조건 있어⁠.⁠”

“⁠무슨 조건⁠?⁠”

“⁠계약하는 날⁠, 나도 갈 거야⁠. 아빠 옆에 앉을 거야⁠.⁠”

영칠은 대답 대신 비상등을 켰다⁠. 똑딱똑딱 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보담은 문을 열고 내렸다⁠. 개찰구를 지나 뒤돌아보았을 때 은색 차는 아직 비상등을 켠 채 역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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