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53자)

사월의 골목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상자 테이프를 뜯자 동백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도기백은 손을 멈췄다⁠. 상자 맨 위에 아내 정순향의 화원 앞치마가 개켜져 있었다⁠. 진초록 천에 흰 글씨로 「⁠순향 화원⁠」이 박혀 있었고⁠, 주머니에서 전지가위 손잡이가 삐죽 나와 있었다⁠. 대전에서 짐을 쌀 때 이 상자만은 테이프를 세 겹으로 감았다⁠. 열지 않으려고 감은 것인데⁠, 용인으로 온 지 열하루 만에 결국 열었다⁠.

수요일 아침이었다⁠. 8호 거실 바닥에 아직 풀지 못한 상자가 일곱 개 남아 있었다⁠. 기백은 앞치마를 꺼내 펴 보았다⁠. 무릎 자리에 흙물이 동그랗게 배어 있었다⁠. 순향은 꽃을 옮겨 심을 때 꼭 오른쪽 무릎부터 꿇었다⁠. 기백은 앞치마를 도로 개어 상자에 넣고⁠, 핸드크림 통만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반 통에서 조금 더 줄어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들의 영상 통화였다⁠. 수지의 회사 주차장인지 아들 등 뒤로 차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버지⁠, 단지 단톡방에 아버지 얘기 벌써 돌아요⁠. 회장님이 장모님 친구라 다 들려요⁠.⁠”

“⁠무슨 얘기⁠?⁠”

“⁠옆집 아주머니랑 대학 동창이라면서요⁠. 그 집 아저씨는 주말마다 담을 쌓고⁠.⁠”

“⁠동창 아니다⁠. 동아리⁠.⁠”

“⁠그게 그거죠⁠. 아버지⁠, 남의 부부 싸움에 끼지 마세요⁠. 이사 오자마자 소문나면 피곤해요⁠. 혈압약은 드셨어요⁠?⁠”

“⁠먹었다⁠.⁠”

기백은 약을 먹지 않았다⁠. 통화를 끊고 약봉지를 뜯었다⁠. 물 컵을 드는데 단지 단톡방에 회장의 글이 떴다⁠. 「⁠오늘 두 시 노래 교실⁠~ 8호 선생님 꼭 오세요♡ 남자 회원 귀해요^^⁠」 하트 옆에 남자 하나를 여자 여럿이 둘러싼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

두 시 정각⁠, 마을회관 문을 열자 믹스커피와 파스와 분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접이식 의자 서른 개에 단지 어르신들이 반쯤 앉아 있었다⁠. 남자는 구석에 졸고 있는 일흔여덟의 3호 할아버지 하나였다⁠. 기백이 문턱을 넘자 의자들이 일제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여기 앉으셔요⁠. 여기가 스피커 잘 들려요⁠.⁠”

“⁠여기는 에어컨 바람이 안 와요⁠.⁠”

“⁠아따⁠, 다들 비켜 보시오⁠. 선생님은 회장 옆이여⁠.⁠”

봉옥단이 기백의 팔을 끌고 맨 앞줄 가운데에 앉혔다⁠. 회장 옆자리였다⁠. 뒤에서 누가 혀를 찼다⁠. 기백은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고개만 살짝 돌렸다⁠. 맨 뒷줄 창가에 손영란이 앉아 있었다⁠. 밀짚모자 대신 회색 모자를 썼고⁠, 손톱 밑에는 여전히 흙이 끼어 있었다⁠. 영란은 기백과 눈이 마주치자 박하사탕 봉지를 부스럭 뜯었다⁠.

강사가 들어왔다⁠. 예순 중반쯤 된 남자로⁠, 반짝이 조끼를 입고 탬버린을 들었다⁠. 탬버린을 허벅지에 한 번 탁 치자 방이 조용해졌다⁠.

“⁠자⁠, 어머님들 배에 힘⁠! 오늘은 아버님이 한 분 더 오셨으니까 소리도 한 배 반으로 갑니다⁠!⁠”

목 풀기 노래를 두 곡 부르는 동안 기백은 입만 벙긋거렸다⁠. 세 번째 곡이 끝나자 강사가 탬버린을 내려놓았다⁠.

“⁠추석 앞에 단지 잔치 있는 거 아시죠⁠? 올해는 듀엣 한 팀 올립니다⁠. 공정하게 제비뽑기⁠!⁠”

회장이 상자를 들고 줄 사이를 돌았다⁠. 다들 손을 넣어 종이를 하나씩 꺼냈다⁠. 기백이 꺼낸 종이에는 「⁠7⁠」이 적혀 있었다⁠. 강사가 소리쳤다⁠.

“⁠칠 번 두 분 손⁠!⁠”

기백이 손을 들었다⁠. 맨 뒷줄에서 영란이 손을 들었다⁠. 회장이 상자 바닥을 뒤집어 털었다⁠.

“⁠아따⁠, 내 종이는 어디 갔당가⁠. 분명히 칠 번 두 장 중에 한 장은 내가 넣었는디⁠.⁠”

“⁠회장님이 넣으신 걸 회장님이 뽑으면 안 되죠⁠.⁠”

강사가 웃으며 탬버린을 흔들었다⁠. 방 안의 어르신들도 따라 웃었다⁠. 회장만 웃지 않았다⁠.

“⁠두 분 무슨 노래 하실래요⁠?⁠”

영란이 대답했다⁠. 기백보다 반 박자 빨랐다⁠.

“⁠「⁠사월의 골목⁠」이요⁠.⁠”

강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팔십 년대 끝 무렵에 대학가에서 잠깐 불리다 사라진 포크송이었다⁠. 강사는 노트북을 한참 두드리다가 반주를 찾아냈다⁠. 통기타 소리가 낡은 스피커에서 쇳소리를 섞으며 흘러나왔다⁠.

기백은 첫 소절을 놓쳤다⁠. 영란이 먼저 들어갔다⁠. 담장 밑에 앉은 봄을⁠, 나는 모른 척 지나왔네⁠. 영란의 목소리는 마흔 해 전보다 낮았고 끝이 조금 쉬어 있었다⁠. 알토였던 사람이 더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기백은 두 번째 소절에서 위로 화음을 얹었다⁠.

1987년 봄의 옥상이 겹쳐 왔다⁠. 기타 케이스를 열면 송진 냄새가 났다⁠. 영란은 케이스 냄새를 맡고 “⁠선배 기타는 소나무 냄새가 나요⁠” 했다⁠. 기백은 송진이 소나무에서 나온다는 말을 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스무 살 때도 할 말을 고르다 놓치는 사람이었다⁠.

노래가 끝났다⁠. 회관 안이 조용했다⁠. 졸던 3호 할아버지가 눈을 뜨고 손뼉을 쳤다⁠. 다른 사람들이 따라 쳤다⁠. 회장은 휴대전화를 내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방금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

수업이 끝나고 느티나무 아래 의자에 둘만 남았다⁠. 나무 그늘에서 묵은 잎 냄새가 났다⁠. 영란이 박하사탕 하나를 기백 쪽으로 밀었다⁠. 기백은 받지 않고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영란아⁠, 아니 영란 씨⁠.⁠”

“⁠편한 대로 하세요⁠.⁠”

“⁠나는 남의 집 일에 끼고 싶지 않아요⁠. 바깥양반이 벌써 담을 쌓잖아요⁠. 이번 주말에는 두 단째 올린대요⁠. 거기다 내가 노래까지 하면⁠.⁠”

“⁠누가 끼워 준대요⁠? 노래만 해요⁠.⁠”

영란이 사탕을 입에 넣었다⁠. 딱⁠,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박자나 맞추세요⁠. 아까 두 마디 빨랐어요⁠.⁠”

“⁠영란 씨가 늦은 거예요⁠.⁠”

“⁠내가 마흔 해 늦은 건 맞네요⁠.⁠”

기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영란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관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왜 말도 없이 갔는지는 안 물을게요⁠. 지금 물으면 노래 못 해요⁠.⁠”

“⁠…언제 물을 건데요⁠?⁠”

“⁠상추 다 뜯고요⁠. 그 전에 물으면 상추가 쓰게 자라요⁠.⁠”

기백은 웃음이 터졌다⁠. 웃고 나니 손이 풀렸다⁠. 기백은 의자 위의 박하사탕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수요일마다 오지요⁠. 연습은 해야 하니까⁠.⁠”

“⁠그래요⁠. 연습은 해야 하니까⁠.⁠”

영란이 일어서려다 다시 앉았다⁠.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해가 비스듬히 들어와 영란의 모자챙에 걸쳐졌다⁠.

“⁠사모님은 노래 좋아하셨어요⁠?⁠”

“⁠순향이는 노래를 못 했어요⁠. 음치였어요⁠. 대신 화원에서 꽃한테 말을 많이 했지요⁠. 장미한테는 존댓말을 하고 국화한테는 반말을 했어요⁠.⁠”

“⁠왜요⁠?⁠”

“⁠장미는 까다롭다고요⁠. 국화는 친구 같고⁠.⁠”

영란이 소리 내어 웃었다⁠. 기백도 따라 웃었다⁠. 순향 이야기를 하고 웃은 것은 한 해 만에 처음이었다⁠. 웃음이 멎자 기백은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에 바른 동백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장미⁠, 존댓말 해 주세요⁠. 그래야 잘 커요⁠.⁠”

“⁠벌써 했어요⁠. 첫날 심으면서 잘 부탁드린다고⁠.⁠”

*

목요일 밤⁠, 단지 단톡방에 회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회관 맨 앞에서 찍은 것이라 기백의 옆얼굴과 뒷줄 영란의 입 벌린 얼굴이 한 화면에 잡혀 있었다⁠. 「⁠추석 잔치 듀엣 결정⁠!⁠! 7호 사모님♡8호 선생님 옛날 동아리 커플이시래요^^⁠」 밑으로 박수 이모티콘이 열네 개 달렸다⁠. 커플이라는 말은 회장이 붙인 말이었다⁠.

아들에게서 바로 문자가 왔다⁠. 「⁠아버지 커플이요⁠?⁠?⁠?⁠」 물음표가 세 개였다⁠. 기백은 「⁠동아리⁠」라고만 답했다⁠.

기백은 창고 방 구석에서 기타 케이스를 꺼냈다⁠. 대전 화원 이층에서 스무 해 넘게 잠자던 기타였다⁠. 걸쇠를 열자 송진 냄새 대신 녹 냄새가 났다⁠. 줄이 전부 검붉게 삭아 있었다⁠. 첫 줄을 퉁기자 소리가 나는 대신 줄이 툭 끊어졌다⁠.

기백은 끊어진 줄을 손가락에 감고 한참 앉아 있었다⁠. 그러다 휴대전화로 기타 줄을 주문했다⁠. 「⁠내일 도착⁠」 결제 단추를 누르는 데 돋보기가 필요 없었다⁠. 돋보기 없이 단추를 누른 일이 기백은 조금 미안했다⁠. 담 너머 7호 바깥양반은 돋보기를 네 개 놓고도 늘 찾았다⁠.

*

토요일 오전⁠, 8호 마당에 순향이 쓰던 토분 서른 개가 줄지어 있었다⁠. 기백은 분갈이 흙을 체에 치고 있었다⁠. 체 밑으로 고운 흙이 내려앉으며 마른 낙엽 냄새를 냈다⁠. 담 너머 7호 대문 앞에 은색 중형차가 서 있었다⁠. 우영칠의 차였다⁠. 오늘은 벽돌 수레가 보이지 않았다⁠.

열한 시에 회장이 7호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로 서른 중반의 부부와 여섯 살쯤 된 여자아이가 따라 들어갔다⁠. 아이는 대문을 넘자마자 상추 이랑으로 달려가 코를 박았다⁠.

“⁠엄마⁠, 여기 풀에서 껌 냄새 나⁠!⁠”

“⁠쑥갓이야⁠. 만지지 마⁠.⁠”

현관문이 열렸다⁠. 영란이 앞치마를 두르고 나오다가 마당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다⁠. 회장이 손을 비비며 웃었다⁠.

“⁠사모님 계셨네⁠. 집 보러 오셨어라⁠. 금방 둘러보고 갈 것이요⁠.⁠”

영란이 회장을 지나 거실 창 앞에 선 영칠을 보았다⁠. 기백은 체를 내려놓았다⁠. 손에 흙이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집 내놨어⁠.⁠”

“⁠내 집을 왜 당신 혼자 내놔요⁠?⁠”

“⁠내 이름으로 된 집이야⁠. 서울로 돌아오면 다 끝나⁠. 돌아올 집은 하나면 돼⁠.⁠”

젊은 부부가 서로를 보았다⁠. 아내가 남편 팔을 잡아당겼고⁠, 남편은 신발 앞코만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쑥갓 이랑에서 일어나 어른들을 쳐다보았다⁠.

영란의 목소리가 깍듯해졌다⁠.

“⁠그럼 제가 이 집이랑 같이 팔려 가는 줄 아세요⁠? 상추도 같이 드릴까요⁠?⁠”

“⁠말 이상하게 하지 마⁠.⁠”

기백은 담 앞에서 한 발 물러났다⁠. 아들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남의 부부 싸움에 끼지 마세요⁠. 기백은 체를 들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았다⁠. 등 뒤에서 아이가 물었다⁠.

“⁠엄마⁠, 저 할머니 울어⁠?⁠”

“⁠안 울어⁠. 쉿⁠.⁠”

기백은 문고리를 놓았다⁠. 수돗가로 가서 물조리개에 물을 받았다⁠.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마당에 퍼졌다⁠. 기백은 물조리개를 들고 담 앞으로 돌아와 순향의 토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주지 않아도 되는 물이었다⁠. 흙이 이미 젖어 있었다⁠.

젊은 남편이 담 너머의 기백을 발견하고 목례했다⁠.

“⁠옆집이세요⁠? 이웃분들은 좋으세요⁠?⁠”

“⁠저도 이사 온 지 두 주 됐습니다⁠.⁠”

기백은 물조리개를 기울인 채 덧붙였다⁠.

“⁠아침에 상추 냄새가 좋습니다⁠. 저 집 상추는 저 집 사모님 손에서 자란 거예요⁠.⁠”

회장이 기백을 흘겼다⁠. 젊은 아내는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담 밑의 장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벽돌 한 단에 노끈으로 묶인 줄기가 새순을 두 개 밀어 올리고 있었다⁠.

“⁠여보⁠, 이 담 너무 예쁘다⁠. 장미 피면 사진 찍으러 사람들 오겠어⁠.⁠”

영칠이 헛기침을 하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회장에게 서류 봉투를 받아 들고⁠, 젊은 남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음 달 중순에 계약합시다⁠. 오월 십오일 토요일⁠.⁠”

젊은 남편이 아내를 보았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가 악수했다⁠. 영란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회장이 부부와 아이를 데리고 대문을 나가다가⁠, 8호 담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목소리는 웃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선생님⁠, 남의 집 일에 상추 칭찬은 왜 하요⁠? 집 팔리는 거 방해하믄 단지 사람들이 섭섭해허요⁠.⁠”

“⁠상추가 좋아서 좋다고 했습니다⁠.⁠”

“⁠아따⁠, 대전 양반들은 말을 참 곧게도 허네⁠.⁠”

회장은 아이 손을 잡고 앞서 걸었다⁠. 영칠은 차 열쇠를 찾느라 조끼 주머니를 뒤지며 따라 나갔다⁠. 마당에 영란 혼자 남았다⁠. 영란이 고개를 돌렸다⁠. 여든 센티짜리 담 너머로 기백과 눈이 마주쳤다⁠.

기백은 물조리개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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