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38자)

한 단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새벽 다섯 시⁠, 손님방에는 새 벽지 풀 냄새와 영칠 자신의 파스 냄새만 있었다⁠. 서른두 해 동안 우영칠의 아침은 된장 냄새로 시작했다⁠. 여섯 시에 눈을 뜨면 부엌에서 뚝배기가 끓었고⁠, 식탁에는 다림질한 와이셔츠가 의자 등받이에 걸린 채 기다렸다⁠. 용인 집 부엌은 조용했다⁠. 안방 문은 닫혀 있었고⁠, 문틈으로는 아무 냄새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영칠은 머리맡을 더듬어 돋보기를 찾았다⁠. 없었다⁠. 거실 탁자에도 없었고 욕실 선반에도 없었다⁠. 현관 신발장 위까지 갔다가 거울을 보고서야 이마 위에 얹힌 돋보기를 발견했다⁠. 어젯밤 집 안 곳곳에 하나씩 놓아둔 셋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영칠은 거울 속 자기에게 혀를 차고 돋보기를 콧등으로 내렸다⁠.

동창 단톡방 「⁠광성고 21회⁠」에는 벌써 아침 인사가 쌓여 있었다⁠. 장미 사진에 「⁠좋은 아침⁠」⁠, 연꽃 사진에 「⁠건강이 최고⁠」⁠, 해 뜨는 바다 사진에 「⁠오늘도 감사⁠」 총무는 늘 하던 대로 자기 오리고기 식당 광고를 올려 두었다⁠. 「⁠주말 특가 훈제 오리 한 마리 시키면 한 마리 더⁠! 친구들 많이 와 주라⁠」

영칠은 입력 칸에 한 글자씩 눌렀다⁠. 「⁠마누라 첫사랑이 옆집에⁠」 거기까지 쓰고 한 글자씩 지웠다⁠. 지우는 데 쓰는 데보다 손이 더 갔다⁠. 대신 「⁠다들 건강하지⁠」를 보냈다⁠. 삼 분 만에 답이 왔다⁠. 「⁠영칠이 살아 있었네⁠」 밑에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총무에게는 따로 짧은 글을 보냈다⁠. 「⁠이번 달 이자 말이야⁠. 통화 좀 하자⁠」 글 옆에 숫자 1이 붙었고⁠, 영칠이 화면을 끌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

여섯 시⁠, 마당에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영칠은 등산 조끼 주머니에서 줄자를 꺼냈다⁠. 영업 부장 시절 현장에서 쓰던 오 미터짜리였다⁠. 돌담 꼭대기에 줄자 끝을 걸고 땅까지 당겼다⁠. 일흔두 센티였다⁠. 무릎보다 조금 높았다⁠.

돌담 한가운데에 어제 심은 장미가 있었다⁠. 대나무 지지대가 8호 거실 창을 똑바로 가리켰다⁠.

8호 현관문이 열렸다⁠. 도기백이 물조리개를 들고 나왔다⁠. 베이지 카디건은 어제 그대로였고 은발은 이 시간에도 빗질이 되어 있었다⁠. 기백은 담 앞에 쪼그려 앉은 영칠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선생도 일찍이오⁠.⁠”

“⁠화원 하던 버릇입니다⁠. 꽃은 해 뜨기 전에 물을 줘야 잎이 안 데어요⁠.⁠”

영칠은 줄자를 탁 감고 일어났다⁠. 일어나도 눈높이가 기백의 턱에 닿았다⁠.

“⁠선생⁠, 키가 몇이오⁠?⁠”

“⁠백팔십일입니다⁠. 젊을 땐 둘이었는데 줄었어요⁠.⁠”

“⁠…담을 좀 올려도 되겠소⁠?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형님 담인데 제가 뭐라고 합니까⁠?⁠”

“⁠형님⁠?⁠”

“⁠예순 넘으셨지요⁠?⁠”

“⁠예순셋이오⁠.⁠”

“⁠그럼 형님 맞습니다⁠.⁠”

영칠은 형님 소리를 듣고 어깨를 한 번 폈다⁠. 그러고 나서 진짜 묻고 싶던 말을 꺼냈다⁠.

“⁠우리 집사람하고 옛날에 무슨 사이였소⁠?⁠”

기백은 물조리개를 내려놓았다⁠. 대답을 고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해 반 같이 노래했습니다⁠. 영란 씨가 알토였고 제가 기타를 쳤어요⁠.⁠”

“⁠그게 다요⁠?⁠”

“⁠제가 말 한마디 없이 군대 갔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말도 없이 간 사람이 왜 하필 옆집으로 와⁠.⁠”

“⁠단지 고를 때는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안 왔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데로 가시면 되겠네⁠.⁠”

“⁠이삿짐 센터에 돈을 또 내야 합니다⁠. 어제 백팔십만 원 냈어요⁠.⁠”

영칠은 할 말을 찾다가 장미를 보았다⁠. 기백도 장미를 보았다⁠.

“⁠자리 잘 잡았네요⁠. 거실 창 앞이라 해를 종일 받겠어요⁠.⁠”

영칠은 거실 창이 누구네 창인지 다시 확인했다⁠. 8호 창이었다⁠.

*

화요일 밤⁠, 서울 상계동 아파트 702호에서는 라면 스프 냄새와 쉰 수건 냄새가 났다⁠. 영칠은 수건을 빨면 그냥 개어 넣는 줄 알았다⁠. 한 달 사이에 욕실 수건 열두 장이 차례로 쉰내를 풍겼다⁠.

거실 텔레비전에서 저녁 뉴스가 흘렀다⁠. 「⁠이혼 상담을 받으러 오는 육십 대 이상이 크게 늘었습니다⁠.⁠」 화면에는 뒷모습만 찍힌 노부부가 공원 의자 양 끝에 앉아 있었다⁠. 영칠은 채널을 돌렸다⁠. 홈쇼핑에서 안마 의자를 팔았다⁠.

휴대전화에 문자가 왔다⁠. 「⁠[은행] 4월 대출 이자 납입일은 25일입니다⁠. 잔액을 확인해 주세요⁠.⁠」 영칠은 문자를 지우고⁠, 총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영칠은 전화를 끊었다⁠.

다리미판을 폈다⁠. 내일 아침 거래처였던 건재상 사장을 만나러 갈 와이셔츠였다⁠. 다리미를 처음 쥐어 본 손이 소매 끝에서 오래 머뭇거렸다⁠. 탄내가 났다⁠. 소매에 다리미 바닥 모양으로 누런 자국이 찍혔다⁠. 영칠은 셔츠를 들어 불빛에 비춰 보고⁠, 서른두 해 동안 이 자국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탄내가 가시기도 전에 딸 보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뭐 태웠어⁠? 목소리에서 탄 냄새 나⁠.⁠”

“⁠목소리에서 냄새가 어떻게 나⁠.⁠”

“⁠나는 나⁠. 아빠 지금 다리미 쥐고 있지⁠? 셔츠는 세탁소 맡기라니까⁠.⁠”

“⁠세탁소가 한 장에 삼천 원이야⁠.⁠”

“⁠아빠 셔츠 한 장 새로 사면 삼만 원이야⁠. 계산해 봐⁠.⁠”

영칠은 탄 소매를 뒤로 감췄다⁠. 전화기 너머로 딸이 보는 것도 아닌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보담은 잠깐 말이 없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엄마가 그러는데⁠, 옆집에 엄마 첫사랑 이사 왔다며⁠.⁠”

“⁠네 엄마가 그 말을 너한테까지 했냐⁠?⁠”

“⁠엄마 원래 숨기는 거 못 하잖아⁠. 아빠⁠, 이상한 짓 하지 마⁠. 담 쌓고 그런 거⁠.⁠”

“⁠안 쌓는다⁠.⁠”

영칠은 전화를 끊고 탄 셔츠를 세탁 바구니 맨 밑에 묻었다⁠. 바구니 뚜껑을 닫고⁠, 뚜껑 위에 쉰 수건 두 장을 더 얹었다⁠.

자정 넘어 동영상 채널을 열었다⁠. 「⁠초보도 하루면 끝⁠! 벽돌 쌓기 기초⁠」 강사는 말이 너무 느렸다⁠. 영칠은 재생 속도를 1⁠.5배로 올렸다⁠. 강사의 목소리가 다람쥐처럼 높아졌다⁠. “⁠시멘트에 물은 조금씩⁠! 조금씩⁠! 한꺼번에 부으면 죽이 됩니다⁠!⁠” 영칠은 메모지에 「⁠물 조금씩⁠」이라고 적고 밑줄을 두 번 그었다⁠. 알고리즘은 다음 동영상으로 「⁠졸혼한 아내가 돌아왔어요⁠」를 띄웠다⁠. 영칠은 누르지 않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

토요일 아침⁠, 용인 시내 건재상 마당에 붉은 벽돌이 팔레트째 쌓여 있었다⁠. 사장이 안경을 이마로 올리며 뛰어나왔다⁠.

“⁠아이고⁠, 우 부장님⁠! 퇴직하셨다더니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

“⁠사장도 그대로요⁠.⁠”

“⁠부장님 때 우리 시멘트 제일 많이 받아 주셨잖아요⁠. 오늘은 뭘 드릴까요⁠?⁠”

“⁠벽돌 이백 장⁠, 시멘트 두 포대⁠, 모래 한 포대⁠. 흙손도 하나⁠.⁠”

“⁠어디 공사하세요⁠?⁠”

“⁠집 담을 좀 올리오⁠.⁠”

사장은 값을 반만 받았다⁠. 영칠은 영수증을 접어 등산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서른두 해 동안 쌓은 이름이 아직 어딘가에서는 절반 가격으로 돌아왔다⁠.

느티울 7호 마당에 벽돌을 내려놓는 데만 한 시간이 들었다⁠. 영칠은 고무 대야에 시멘트와 모래를 붓고 물을 조금씩 부었다⁠. 조금씩 붓다가 답답해서 한꺼번에 부었다⁠. 죽이 되었다⁠. 흙손으로 죽을 떠서 돌담 위에 바르자 회색 물이 돌 틈으로 줄줄 흘렀다⁠. 영칠은 시멘트 위에 벽돌을 한 장 얹었다⁠. 벽돌이 천천히 기울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영란이 나왔다⁠. 밀짚모자를 쓰고⁠, 하늘색 리넨 셔츠에 흙 묻은 앞치마를 둘렀다⁠. 손에는 모종삽과 노끈 한 뭉치가 들려 있었다⁠. 영란은 영칠을 보지 않고 곧장 담 한가운데로 갔다⁠. 장미 줄기 끝을 살살 당겨 영칠이 방금 얹은 벽돌에 노끈으로 묶었다⁠.

“⁠뭐 하는 거야⁠?⁠”

“⁠장미가 탈 데가 생겼네요⁠.⁠”

“⁠거기 묶으면 벽돌을 어떻게 놔⁠.⁠”

“⁠장미가 먼저 왔어요⁠.⁠”

“⁠내 담이야⁠.⁠”

“⁠벽돌은 당신 거⁠, 흙은 내 거⁠, 장미는 장미 거예요⁠.⁠”

영칠은 흙손을 대야에 꽂았다⁠. 시멘트 죽이 튀었다⁠.

“⁠등기부 떼 보면 다 내 거야⁠. 집도 마당도 담도⁠.⁠”

“⁠그럼 장미도 등기해 봐요⁠. 나는 상추 물 주러 갈게요⁠.⁠”

영란은 수돗가로 갔다⁠. 호스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 상추 잎에 후드득 떨어졌다⁠. 젖은 흙냄새가 마당 가득 올라왔다⁠. 영칠은 기울어진 벽돌을 바로 세우려고 손바닥으로 밀었다⁠. 벽돌이 반대로 기울었다⁠.

담 너머에서 헛기침이 났다⁠. 기백이 8호 마당에서 화분 분갈이를 하고 있었다⁠. 눈이 영칠의 벽돌에 가 있었다⁠.

“⁠형님⁠, 실례지만 시멘트가 좀 묽습니다⁠.⁠”

“⁠동영상에서 이렇게 하라고 했소⁠.⁠”

“⁠몇 배속으로 보셨어요⁠?⁠”

영칠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백은 더 묻지 않고 분갈이로 돌아갔다⁠. 영칠은 대야에 모래를 한 줌 더 넣고 휘저었다⁠. 이번에는 시멘트가 흙손에 붙어 있었다⁠.

점심때가 지나 벽돌 한 단이 돌담 위에 올라갔다⁠. 줄은 물결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장미 줄기가 벽돌 세 장에 걸쳐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영칠이 허리를 펴는 순간 대문 밖에서 목포 말씨가 넘어왔다⁠.

“⁠아따⁠, 7호에 성 쌓으시오⁠? 만리장성이네⁠.⁠”

주민회장 봉옥단이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옥단은 담을 한 번 훑고⁠, 수돗가의 영란을 한 번 보고⁠, 영칠에게 손짓했다⁠. 영칠이 대문 밖으로 나가자 옥단이 목소리를 낮췄다⁠.

“⁠부장님 속을 내가 알지라⁠. 우리 바깥양반도 젊어서 속 많이 썩였소⁠. 근디 여자는 집이 흔들려야 정신을 차리요⁠. 사모님이 여기 눌러앉은 것도 이 집이 있응께 그런 것이제⁠.⁠”

“⁠무슨 말이오⁠.⁠”

“⁠집이 없으믄 졸혼할 데도 없당께요⁠.⁠”

옥단이 장바구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영칠의 조끼 주머니에 꽂아 주었다⁠. 「⁠느티울 부동산 · 공인중개사 봉옥단⁠」 옥단은 주머니를 두 번 토닥이고 회관으로 갔다⁠.

마당으로 돌아오니 담 위에 고무장갑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부엌에서 쓰던 분홍 장갑이었다⁠. 수돗가의 영란은 등을 돌린 채 호스를 감고 있었다⁠.

“⁠이건 뭐야⁠.⁠”

“⁠맨손으로 시멘트 만지면 손바닥 다 터요⁠. 그 손으로 서울 가서 라면 끓이면 쓰려요⁠.⁠”

“⁠필요 없어⁠.⁠”

영칠은 장갑을 담 끝으로 밀어 놓았다⁠. 벽돌 열 장을 더 얹었을 때 손가락 끝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영칠은 영란이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분홍 장갑을 꼈다⁠. 손목까지 오는 장갑이 손에 꼭 맞았다⁠. 서른두 해 동안 영란의 손과 영칠의 손 크기가 비슷하다는 것도 영칠은 처음 알았다⁠.

*

저녁 해가 산마루로 내려앉았다⁠. 영칠은 마당 의자에 앉아 하루 동안 쌓은 한 단을 보았다⁠. 일흔두 센티였던 담이 여든 센티가 되었다⁠. 장미는 새 벽돌에 기대어 조금 더 꼿꼿해 보였다⁠.

8호 거실에 불이 켜졌다⁠. 커튼은 오늘 달렸지만 아직 걷혀 있었다⁠. 기백이 창가에서 컵을 들고 있다가 영칠과 눈이 마주쳤다⁠. 기백이 컵을 든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든 센티짜리 담 너머로 기백의 가슴께까지 다 보였다⁠.

안방에서 영란이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소리가 났다⁠. 졸혼한 여자들이 나와서 수다를 떠는 프로그램이었다⁠. 영칠은 영란이 저렇게 크게 웃는 소리를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는지 떠올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조끼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돋보기를 찾느라 손이 이마로 갔다가 거실 탁자로 갔다가 다시 이마로 왔다⁠. 숫자를 하나씩 눌렀다⁠. 신호가 두 번 가고 목포 말씨가 받았다⁠.

“⁠느티울 부동산이요⁠.⁠”

“⁠회장님⁠, 7호요⁠.⁠”

영칠은 안방 문을 한 번 보았다⁠. 웃음소리가 계속 새어 나왔다⁠.

“⁠이 집 내놓으면 얼마나 받겠소⁠?⁠”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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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선재2026.11.01· 2화

    서른두 해 동안 된장 냄새로 시작하던 아침이 조용하다는 장면, 졸혼이 뭔지 한 번에 알겠어요.

    • 석담율작가2026.11.01

      영칠 씨는 아침이 혼자 차려지는 줄 알았어요. 조용한 부엌이 아내의 첫 대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