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79자)

담 너머 화분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상추 모종 판에서 풋내가 올라왔다⁠. 손영란은 무릎 밑에 깐 방석을 고쳐 대고 모종삽으로 흙을 한 번 더 뒤집었다⁠. 깻묵 거름을 섞은 흙은 사흘 전보다 냄새가 순해져 있었고⁠, 덜 삭은 자리에서만 고소한 콩기름 내가 났다⁠. 4월 첫 토요일 아침 아홉 시⁠, 경기 용인 산자락의 느티울 전원마을 7호 마당이었다⁠. 챙 넓은 밀짚모자 밑으로 흰머리 섞인 단발이 어깨에 닿았고⁠, 하늘색 리넨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졸혼을 선언한 지 꼭 한 달이었다⁠. 결혼 서른두 해째 되던 3월 초하루 아침⁠, 영란은 서울 상계동 아파트 식탁에 남편 우영칠의 밥 대신 종이 한 장을 올렸다⁠. 「⁠오늘부터 졸혼합니다⁠. 당신은 서울⁠, 나는 용인⁠.⁠」 영칠은 돋보기를 찾느라 종이를 십 분 넘게 쥐고만 있었다⁠. 돋보기는 영칠의 이마 위에 얹혀 있었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연달아 떨었다⁠. 영란은 흙 묻은 손가락 대신 새끼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밀었다⁠. 가족 단톡방 「⁠우리 셋⁠」이었다⁠.

「⁠보담⁠: 엄마 졸혼 한 달 축하해⁠!⁠!⁠!⁠」

딸 보담의 말 밑으로 폭죽 터지는 이모티콘이 세 개 따라왔고⁠, 다음 줄에 남편의 답이 떠 있었다⁠.

「⁠영칠⁠: 축하는 무슨⁠」

영칠의 말 밑에는 손뼉을 치며 웃는 곰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우는 곰을 누르려다 옆 칸을 누른 것이다⁠. 서른두 해 동안 영칠은 돋보기 없이 휴대전화를 만질 때마다 엉뚱한 곰을 보냈고⁠, 영란은 곰만 보고도 남편이 무슨 말을 하려다 실패했는지 알았다⁠.

단지 단톡방 「⁠느티울 이웃사촌⁠」에는 주민회장의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공지] 8호 새 식구 오늘 이사 오십니다⁠~ 대전에서 오신 점잖은 선생님이셔요♡ 떡은 각자 알아서⁠~ - 회장 봉옥단⁠」 하트가 빠진 회장 공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화면을 닫으려는데 동영상 채널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졸혼 3년 차⁠, 남편이 달라졌다⁠」 한 달 전에 ‘⁠졸혼⁠’을 한 번 검색했을 뿐인데⁠, 휴대전화는 이후로 날마다 남의 졸혼을 배달했다⁠.

이삿짐 트럭이 뒷걸음질 치며 내는 삑삑 소리가 옆집에서 났다⁠. 경유 냄새와 새 종이 상자 냄새가 담을 넘어왔다⁠. 영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새 이웃은 오늘 하루 바쁠 테고⁠, 상추는 해가 높아지기 전에 심어야 했다⁠.

다른 냄새가 끼어든 것은 모종 여섯 포기째를 눌러 심을 때였다⁠. 동백기름 같은⁠, 무겁고 조금 쓴 핸드크림 냄새였다⁠. 바로 머리 위에서 났다⁠.

무릎을 조금 넘는 돌담 위로 토분 하나가 쑥 넘어왔다⁠. 가는 대나무 지지대에 초록 줄기가 노끈으로 묶여 있었고⁠, 잎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잘게 패어 있었다⁠. 덩굴장미였다⁠.

“⁠담 밑에 심으면 담을 타고 올라가요⁠. 이사 떡 대신입니다⁠.⁠”

낮고 느린 남자 목소리였다⁠. 말끝이 살짝 늘어졌다⁠. 영란은 화분을 받으려고 손을 뻗다가 손을 멈췄다⁠. 얼굴보다 목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1987년 봄⁠, 대학 통기타 동아리 소리샘의 옥상에서 기타 줄을 고르며 “⁠라 음 줘 봐⁠” 하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깔끔하게 빗어 넘긴 은발이 보였다⁠. 베이지 카디건에 단추를 끝까지 채운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키가 커서 돌담이 허벅지에 겨우 닿았다⁠.

“⁠…영란이⁠?⁠”

영란은 일어나려다 무릎이 먼저 소리를 냈다⁠. 뚝⁠, 하는 소리가 둘 사이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영란은 모종삽을 등 뒤로 감추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손등으로 볼을 훔쳤다⁠. 남자가 자기 왼쪽 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영란이 다른 손으로 오른쪽 볼을 훔쳤다⁠. 남자가 이번에는 양쪽 볼을 다 가리켰다⁠.

“⁠흙이 양쪽으로 갔어요⁠.⁠”

“⁠균형이 맞으면 됐어요⁠.⁠”

도기백이 웃었다⁠. 마흔 해 동안 주름은 늘었는데 웃을 때 왼쪽 눈이 먼저 감기는 버릇은 그대로였다⁠.

“⁠도기백 선배⁠.⁠”

“⁠선배는 무슨⁠. 나 예순이야⁠, 이제⁠.⁠”

“⁠나는 쉰아홉이에요⁠. 아직 선배 맞네요⁠.⁠”

기백은 대전에서 왔다고 했다⁠. 아내와 스물다섯 해 동안 화원을 했는데⁠, 아내가 지난봄에 먼저 갔고⁠, 혼자서는 꽃이 안 팔려서 문을 닫았다고 했다⁠. 아들이 수지에 살아서 가까이 오라는 말에 이 단지를 골랐다고 했다⁠. 화원 이야기를 할 때 기백은 장미 화분만 내려다보았다⁠.

“⁠집사람이 마지막으로 꺾꽂이한 놈이에요⁠. 화원 담에 있던 장미에서 땄어요⁠.⁠”

영란은 화분을 받아 들었다⁠. 꽃은 아직 없고 잎에서 풀 비린내만 났다⁠. 토분 테두리에 동백 냄새가 묻어 있었다⁠.

“⁠핸드크림 냄새가 나네요⁠.⁠”

“⁠집사람 거예요⁠. 짐 싸다 보니 반 통이 남아서⁠. 손이 트길래 바르고 있어요⁠.⁠”

기백이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영란은 화분을 돌담 밑에 내려놓고⁠, 남은 모종 판을 옆으로 밀었다⁠.

“⁠바깥양반은 출근하셨어요⁠?⁠”

“⁠서울에 있어요⁠. 졸혼했어요⁠.⁠”

“⁠…졸혼⁠?⁠”

“⁠결혼 졸업이요⁠. 오늘로 한 달 됐어요⁠.⁠”

기백이 반걸음 물러났다⁠. 담에 얹었던 손도 거둬들였다⁠.

“⁠아⁠, 그러면 내가 괜히⁠. 남의 집 일에 끼려던 건 아니고⁠.⁠”

“⁠뭘 끼어요⁠. 화분 하나 넘긴 거예요⁠.⁠”

“⁠그래도⁠.⁠”

기백은 이삿짐 상자가 쌓인 현관으로 돌아갔다⁠. 영란은 모종삽으로 담 밑 흙을 한 삽 떴다⁠. 장미를 어디에 심을지는 벌써 정해져 있었다⁠. 담 한가운데⁠, 8호 거실 창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

오후 두 시⁠, 주민회장 봉옥단이 시루떡 접시를 들고 8호 대문을 두드렸다⁠. 떡은 각자 알아서 돌리라고 공지한 사람이 제일 먼저 돌렸다⁠. 옥단은 떡을 건네고도 한참을 담 앞에 서 있다가⁠, 7호 마당을 넘겨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따⁠, 7호 사모님이 8호 선생님을 아시오⁠? 아까 둘이 웃는 소리가 회관까지 들리드만⁠.⁠”

“⁠대학 때 동아리 선배예요⁠.⁠”

“⁠오메⁠, 세상 좁네⁠. 동아리믄 뭔 동아리⁠?⁠”

“⁠노래요⁠.⁠”

옥단의 눈이 반짝 빛났다⁠. 노래 교실을 맡은 사람이 옥단이었다⁠. 영란이 대답을 고르는 사이⁠,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끼어들었다⁠. 박하가 섞인 시큼한 파스 냄새였다⁠. 서른두 해 동안 아침마다 오른쪽 어깨에 한 장씩 붙이던 냄새가 대문 밖에서 났다⁠.

대문 앞에 은색 중형차가 서 있었다⁠. 엔진이 꺼지기 직전⁠, 열린 운전석 창으로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황혼 이혼 뒤에 연금은 어떻게 나눌까요⁠, 오늘은 이것만 알아 두세요⁠.⁠」 시동이 꺼지고 라디오도 꺼졌다⁠.

우영칠이 내렸다⁠. 반백의 짧은 스포츠머리에 회색 등산 조끼를 입었고⁠, 돋보기는 이번에도 이마 위에 있었다⁠. 트렁크에서 스물여덟 인치짜리 여행 가방이 나왔다⁠. 2019년 제주도 여행 때 공항에서 붙인 꼬리표가 아직 손잡이에 달랑거렸다⁠. 영칠은 가방을 끌고 대문 앞까지 와서 바퀴를 탁 멈췄다⁠.

“⁠주말마다 내려온다⁠. 토요일 아침에 와서 일요일 저녁에 올라가⁠.⁠”

“⁠왜요⁠?⁠”

“⁠동네 사람들이 남편 없는 집이라고 쑥덕거려⁠. 집은 남자가 지켜야 돼⁠.⁠”

영란은 회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옥단이 떡 접시를 든 채 느티나무 그늘로 슬쩍 물러났고⁠, 6호 할머니는 강아지 줄을 쥔 채 산책을 멈췄다⁠. 휴대전화 화면을 이쪽으로 든 사람도 있었다⁠.

“⁠서른두 해 동안 집을 지킨다는 소리는 처음 듣네요⁠.⁠”

“⁠서른두 해 내가 혼자 벌어서 식구 먹였어⁠. 새벽 여섯 시에 나가서 밤 열한 시에 들어왔고⁠. 그거 모르는 사람 아니잖아⁠.⁠”

“⁠알아요⁠.⁠”

영란은 모종삽을 앞치마 주머니에 꽂았다⁠.

“⁠그 서른두 해 동안 나는 손영란으로 하루도 안 살았어요⁠. 보담이 엄마⁠, 우 부장 사모님⁠, 상계동 702호⁠. 당신도 그거 모르는 사람 아니잖아요⁠.⁠”

영칠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등 뒤로 고개를 돌려 구경꾼들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들어가서 얘기해⁠.⁠”

“⁠여기서 해요⁠. 여기가 내 집 마당이에요⁠.⁠”

“⁠이 집 누구 이름으로 돼 있는지 알지⁠?⁠”

“⁠알아요⁠. 당신 이름이요⁠. 마당 흙은 내가 갈았고요⁠.⁠”

영칠이 가방 손잡이를 쥔 채 마당을 둘러보았다⁠. 반듯하게 줄 맞춘 상추와 쑥갓⁠, 비닐을 씌운 고추 이랑⁠, 수돗가 옆에 쌓인 거름 포대가 차례로 눈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영칠의 눈이 돌담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새로 판 흙 위에 토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담 너머 8호 마당에서 기백이 빈 상자를 접고 있었다⁠. 영칠이 턱을 들었다⁠.

“⁠누구시오⁠?⁠”

“⁠8호에 오늘 이사 온 도기백입니다⁠.⁠”

“⁠7호 바깥양반 우영칠이오⁠.⁠”

영칠이 담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기백이 허리를 숙여 손을 잡았다⁠. 키 차이가 한 뼘 반이었다⁠. 영칠은 슬그머니 수돗가 시멘트 턱 위로 올라가 눈높이를 맞췄다⁠. 악수는 영칠이 턱에서 내려올 때까지 길게 이어졌다⁠.

“⁠이사 오시자마자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남의 집 일에는 안 끼겠습니다⁠.⁠”

기백은 접던 상자를 들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영칠은 기백이 사라진 문을 한참 보다가 중얼거렸다⁠.

“⁠누가 끼라 했나⁠.⁠”

토요일 저녁 단지 단톡방에 회장의 글이 올라왔다⁠. 「⁠7호 바깥양반 오셨네요⁠~ 반가워요♡ 주말 부부도 보기 좋아요^^⁠」 영란은 하트 두 개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엎어 놓은 휴대전화가 곧바로 다시 떨었다⁠. 보담이었다⁠. 받자마자 서울 지하철 안내 방송과 딸의 빠른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엄마⁠, 아빠 내려갔지⁠? 단톡방에 웃는 곰 보냈길래 사고 쳤구나 했어⁠.⁠”

“⁠가방 들고 왔어⁠. 주말마다 집 지키겠대⁠.⁠”

“⁠헐⁠, 경비 아저씨 됐네⁠. 엄마⁠, 밀리지 마⁠. 한 달 버텼으면 졸혼 일 단계는 통과한 거야⁠. 이 단계부터는 진짜 갓생이야⁠.⁠”

“⁠갓생이 뭔데⁠?⁠”

“⁠엄마 같은 거⁠. 아⁠, 내려야 돼⁠. 아빠 라면만 먹이지 마⁠, 혈압 있잖아⁠.⁠”

전화가 끊겼다⁠. 졸혼을 응원한다는 딸이 끊기 직전에 걱정한 사람은 아빠였다⁠. 영란은 휴대전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돌담 밑에 놓아둔 장미 화분을 들어 미리 파 둔 구덩이에 앉혔다⁠. 흙을 덮고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는 동안⁠, 거실 창 안에서 영칠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

해가 떨어지자 마당의 흙냄새가 가라앉고 부엌에서 냉이 된장국이 끓었다⁠. 영란은 국 한 그릇과 상추 한 소쿠리를 식탁에 놓고 혼자 앉았다⁠. 숟가락은 하나였다⁠.

영칠은 손님방에서 가방을 풀었다⁠. 라면 한 박스가 나왔고⁠, 3인용 전기밥솥이 나왔고⁠, 돋보기 세 개와 파스 한 통이 나왔다⁠. 영칠은 돋보기 셋을 집 안 곳곳에 하나씩 놓았다⁠. 거실 탁자에 하나⁠, 욕실 선반에 하나⁠, 현관 신발장 위에 하나⁠. 이마 위에 있는 것까지 치면 넷이었다⁠.

“⁠밥은⁠?⁠”

“⁠내 밥은 했어요⁠.⁠”

영칠은 대답 대신 라면 봉지를 뜯었다⁠. 영란의 냄비에 물을 받고 불을 켰다⁠. 스프를 넣는 순간 매운 냄새가 부엌을 덮어서 냉이 향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영란은 국그릇을 코 앞으로 바짝 당겼다⁠.

“⁠졸혼하면 밥도 따로 먹냐⁠?⁠”

“⁠따로 먹는 연습은 서른두 해 했잖아요⁠. 당신은 회사 식당에서⁠, 나는 부엌 싱크대 앞에서⁠.⁠”

영칠은 냄비째 식탁에 앉았다⁠. 뚜껑에 면을 덜어 후후 불다가⁠, 상추 소쿠리에 손을 뻗었다⁠. 영란이 소쿠리를 자기 앞으로 당겼다⁠. 영칠의 손이 허공에서 잠깐 멈췄다가 김치 통으로 갔다⁠.

창밖으로 8호 거실 불이 켜졌다⁠. 커튼이 아직 안 달린 창으로 상자 더미와 상자 사이를 오가는 은발이 비쳤다⁠. 영칠이 라면을 한 젓가락 들어 올리다가 창을 보았다⁠.

“⁠옆집 저 양반⁠, 아는 사람이야⁠? 아까 둘이 웃더라⁠.⁠”

영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국그릇에서 김이 가늘게 올라왔다⁠.

“⁠첫사랑이요⁠.⁠”

영칠의 젓가락에서 면발이 미끄러져 국물로 떨어졌다⁠. 빨간 국물이 튀어 등산 조끼 가슴께에 점 두 개가 찍혔다⁠. 영칠은 휴지를 찾지 않았다⁠. 이마에 얹었던 돋보기를 내려 쓰고⁠, 창 너머 8호의 불빛을 오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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