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25자)

증인석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다리미 밑에서 김이 올라오며 풀 먹인 면 냄새가 났다⁠. 도기백은 와이셔츠 칼라를 다리미판에 펴고 다리미 끝으로 칼라부터 눌렀다⁠. 10월 15일 금요일 아침 일곱 시⁠, 8호 거실이었다⁠. 서른다섯 해 동안 셔츠는 기백이 다렸다⁠. 순향은 다리미를 무서워했다⁠. 대신 순향은 소파에 앉아 기백이 다리는 것을 보며 늘 같은 말을 했다⁠. “⁠칼라 먼저⁠. 소매는 나중⁠.⁠”

“⁠칼라 먼저⁠.⁠”

기백은 혼잣말로 순향의 말을 했다⁠. 칼라가 반듯해졌다⁠. 소매로 넘어갔다⁠. 소매는 나중이었다⁠.

셔츠를 입고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식탁 위에 어제 산 핸드크림이 놓여 있었다⁠. 유자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기백은 면 소재지 약국 진열대 앞에서 동백 핸드크림을 한 번 집었다가 내려놓고 유자를 골랐다⁠. 뚜껑을 열고 손등에 조금 짜서 문질렀다⁠. 새콤하고 가벼운 냄새가 났다⁠. 순향의 냄새는 아니었다⁠. 기백은 손등을 코에 대고 한참 있었다⁠.

여덟 시에 아들이 차를 몰고 왔다⁠. 아들은 조수석에 탄 아버지의 셔츠 칼라를 보고 말했다⁠.

“⁠아버지⁠, 사실만 말하세요⁠. 감정 말고요⁠. 변호사가 묻는 것만 대답하세요⁠.⁠”

“⁠감정이 사실이면⁠?⁠”

아들은 대답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단지 입구를 지날 때 기백은 창밖으로 7호 담장을 보았다⁠. 벽돌 세 단 위로 장미 줄기가 다시 잎을 틔우고 있었다⁠. 가을에 한 번 더 피는 장미였다⁠. 붉은 봉오리 몇 개가 벽돌 끝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

법정 앞 복도에는 자판기 커피 냄새와 바닥 왁스 냄새가 났다⁠. 기백이 복도 긴 의자에 앉자 맞은편 끝에 영란이 와서 앉았다⁠. 둘 사이에 의자 네 개가 비어 있었다⁠. 변호사가 증인과 원고는 재판 전에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둘은 서로 보지 않고 복도 끝 창만 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영칠이 나왔다⁠. 안경 줄을 목에 걸고⁠, 다린 와이셔츠에 등산 조끼 대신 양복 윗도리를 걸쳤다⁠. 영칠은 의자 네 개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말없이 자판기 앞으로 갔다⁠. 동전 넣는 소리가 세 번 났다⁠. 영칠이 식혜 캔 세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를 기백 옆 의자에⁠, 하나를 영란 옆 의자에 놓고⁠, 하나를 자기가 땄다⁠.

“⁠목 마르면 말이 꼬여⁠.⁠”

영칠은 한마디만 하고 복도 반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기백은 식혜 캔을 쥐었다⁠. 차가웠다⁠. 맞은편 끝에서 영란이 캔을 따는 소리가 났다⁠. 탁⁠, 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리고 봉옥단이 나왔다⁠. 감색 정장에 브로치를 단 옥단 뒤로 6호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따라 나왔다⁠. 할머니는 증인도 아닌데 따라왔다고 했다⁠. 법원은 처음 와 본다고⁠, 죽기 전에 한 번 와 보고 싶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복도의 세 사람을 차례로 보더니 혀를 찼다⁠.

“⁠다들 식혜 하나씩 들고 따로 앉았네⁠. 잔칫집이여⁠, 상갓집이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대신 셋이 거의 동시에 식혜를 한 모금씩 마셨다⁠.

*

수원 가정법원 법정은 나무 의자에 바른 니스 냄새와 종이 냄새가 났다⁠. 법정은 생각보다 작았다⁠. 판사석에는 오십 대 여자 판사가 앉아 있었다⁠. 왼편 탁자에 영란과 변호사가⁠, 오른편 탁자에 영칠과 변호사가 앉았다⁠. 방청석 첫 줄에 보담이 혼자 앉아 있었고⁠, 두 칸 떨어져 봉옥단이 진한 감색 정장에 브로치를 달고 앉아 있었다⁠. 옥단은 기백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영칠은 목에 안경 줄을 걸고 있었다⁠. 지난여름보다 얼굴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영란은 하늘색 리넨 셔츠 대신 회색 재킷을 입었다⁠. 손톱 밑은 깨끗했다⁠. 기백은 증인석으로 걸어가며 영란의 손톱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는 흙을 만지지 않은 손이었다⁠.

증인 선서를 했다⁠. 종이에 적힌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화원에서 꽃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영칠의 변호사가 일어났다⁠. 헤어젤 냄새가 증인석까지 왔다⁠. 변호사는 사진 한 장을 화면에 띄웠다⁠. 돌담 너머로 토분을 내미는 기백의 손과⁠, 받으려는 영란의 손이 찍혀 있었다⁠.

“⁠증인⁠, 이 사진은 무엇입니까⁠?⁠”

“⁠제가 이사 온 날 장미 화분을 넘긴 겁니다⁠.⁠”

“⁠이사 온 첫날부터 원고에게 선물을 주셨네요⁠.⁠”

“⁠이웃한테 이사 떡 대신 준 겁니다⁠. 떡을 못 쪄서요⁠.⁠”

방청석에서 누군가 웃음을 참았다⁠. 변호사가 다음 사진을 띄웠다⁠. 노래 교실이었다⁠. 다음은 공동 텃밭⁠, 고추 고랑의 두 사람이었다⁠. 변호사가 다음 장으로 넘겼다⁠. 8호 현관 계단에서 남자 둘이 막걸리 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판사가 화면을 보고 안경을 고쳐 썼다⁠.

“⁠이 사진은 피고 본인이네요⁠?⁠”

영칠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네⁠. 접니다⁠.⁠”

“⁠증인과 막걸리를 드셨습니까⁠?⁠”

“⁠두 병 마셨습니다⁠. 벽돌 쌓고 나서요⁠.⁠”

방청석에서 이번에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옥단이 브로치를 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변호사가 서둘러 화면을 넘겼다⁠. 금시계가 탁자 모서리에 탁 부딪혔다⁠.

“⁠증인⁠,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증인은 원고를 좋아합니까⁠?⁠”

기백은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유자 냄새가 손등에서 올라왔다⁠. 마흔 해 전 옥상의 송진 냄새와도⁠, 순향의 동백 냄새와도 다른 냄새였다⁠.

“⁠예⁠. 좋아합니다⁠.⁠”

법정이 다시 조용해졌다⁠. 영란은 탁자 위의 두 손을 깍지 끼었다⁠. 영칠은 안경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마흔 해 전에도 좋아했습니다⁠. 그때는 말 안 하고 군대 갔습니다⁠. 아버지 화원이 망해서⁠, 제가 혼자 정했습니다⁠. 이번에는 말했습니다⁠. 오늘 여기서 처음으로요⁠.⁠”

“⁠그렇다면 부정한 관계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손은 두 번 잡았습니다⁠. 한 번은 공동 텃밭 둑에서 원고가 미끄러질 때⁠, 한 번은 장마철 새벽에 고라니 그물을 묶을 때⁠. 두 번 다 원고가 먼저 잡았습니다⁠.⁠”

방청석 첫 줄에서 보담이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영란은 돌아보지 않았다⁠. 기백은 이어서 말했다⁠. 묻지 않은 말이었다⁠.

“⁠원고는 남편분 이야기를 할 때 한 번도 나쁘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셔츠를 다려 줬다는 얘기도⁠, 통닭 얘기도 안 했습니다⁠. 남편분이 담을 쌓을 때는 벽돌 밑에 장미를 묶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영칠의 변호사가 입을 열려 할 때 영란의 변호사가 일어났다⁠.

“⁠증인⁠, 원고가 졸혼한 건 언제입니까⁠?⁠”

“⁠제가 이사 오기 한 달 전입니다⁠.⁠”

“⁠증인 때문에 졸혼한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날 화분을 넘겼을 뿐입니다⁠. 졸혼한 집인 줄도 몰랐습니다⁠.⁠”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무언가를 적었다⁠. 적기를 마치자 펜을 내려놓고 직접 물었다⁠.

“⁠증인은 앞으로 원고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기백은 대답을 고르지 않았다⁠. 마흔 해 동안 고르다 놓친 대답이었다⁠.

“⁠원고가 정할 일입니다⁠. 저는 물어보겠습니다⁠. 혼자 정하지 않고요⁠.⁠”

판사가 펜을 다시 들었다⁠. 기백은 증인석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다⁠. 방청석으로 돌아가며 영칠 탁자 옆을 지났다⁠. 영칠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기백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거짓말 안 했구먼⁠.⁠”

*

봉옥단의 증언은 짧았다⁠. 영칠의 변호사가 이웃 주민으로서 원고와 증인이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 물었다⁠. 옥단은 브로치를 한 번 만지고 대답했다⁠.

“⁠본 것은 장미 화분 하나⁠, 노래 한 곡⁠, 고추 고랑 하나⁠. 그것뿐이요⁠.⁠”

“⁠그 밖에는요⁠? 매일 담 너머로⁠.⁠”

“⁠매일은 못 봤어라⁠. 사진은 내가 찍어서 단톡방에 올렸소⁠. 커플이라고 쓴 것도 나요⁠. 그건 내 말이지 그 사람들 말이 아니여⁠.⁠”

변호사가 서류를 뒤적였다⁠. 옥단은 증인석에서 내려오며 영란의 탁자 옆을 지났다⁠. 지나가면서 영란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한 번 짚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청석으로 돌아간 옥단 옆에서 6호 할머니가 옥단의 손등을 토닥였다⁠. 판사가 다음 증인을 불렀다⁠.

*

우보담이 증인석에 앉았다⁠. 회사에서 입던 남색 정장을 입었다⁠. 영칠의 변호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증인⁠, 아버님이 쓰러지신 날 어머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용인 집에요⁠.⁠”

“⁠어머님이 가처분을 거신 탓에 아버님이 계약금 두 배⁠, 일억을 물어주신 게 맞습니까⁠?⁠”

“⁠맞아요⁠.⁠”

“⁠그 일로 아버님이 차를 파셨고⁠, 그 무렵 쓰러지셨죠⁠?⁠”

“⁠네⁠.⁠”

변호사가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려 했다⁠. 판사가 손을 들었다⁠.

“⁠증인⁠, 딸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세요⁠.⁠”

보담은 증인석 난간을 쥐었다⁠. 한참 말이 없었다⁠. 법정 천장의 환풍기가 낮게 돌았다⁠. 기백은 방청석에서 보담의 손을 보았다⁠. 난간을 쥔 손가락 마디가 엄마 손과 똑같이 생겼다⁠.

“⁠아빠가 쓰러진 날 저녁에 아빠 부엌에 갔어요⁠. 바닥에 감자 다섯 알이 굴러다녔어요⁠. 엄마가 용인에서 캐서 싸 준 감자요⁠. 냉장고에는 아빠가 쓴 메모지가 붙어 있었어요⁠. 물 조금씩⁠. 아빠는 혼자 라면 끓이다 쓰러졌어요⁠.⁠”

영칠이 고개를 숙였다⁠. 보담은 엄마를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엄마는 서른두 해 동안 밥을 먼저 먹은 적이 없어요⁠. 계란 프라이 탄 건 늘 엄마 거였어요⁠. 생선은 늘 엄마가 대가리 쪽이었고요⁠. 아빠는 그걸 몰랐어요⁠. 저도 몰랐어요⁠. 엄마가 졸혼한다고 할 때까지요⁠.⁠”

방청석의 옥단이 손수건을 꺼냈다⁠. 영란은 꼼짝하지 않았다⁠.

“⁠저는 어느 편도 못 들겠어요⁠. 판사님⁠, 저는 두 사람 다 혼자 늙는 게 싫어요⁠. 그거 하나예요⁠.⁠”

보담은 증인석에서 내려와 방청석 첫 줄로 돌아갔다⁠. 엄마와 아빠 사이⁠, 두 탁자의 한가운데 뒤쪽 자리였다⁠.

기백은 영란의 손을 보았다⁠. 영란이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눈가를 눌렀다⁠. 흰 면 손수건에 다리미로 누른 자국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영란의 손수건이 아니었다⁠. 여름에 버스 정류장에서 영칠이 내밀었다는 손수건이었다⁠. 영란은 손수건을 빨아서 다려 두었다⁠. 다림질 자국이 영칠이 다린 것보다 한 줄 더 곧았다⁠.

오른편 탁자의 영칠도 손수건을 보았다⁠. 영칠의 손가락에 감긴 안경 줄이 풀렸다⁠.

*

판사가 서류를 정리하며 다음 기일을 말하려 할 때였다⁠. 오른편 탁자에서 영칠이 손을 들었다⁠. 보담이 가족 회의에서 정한 규칙처럼⁠, 끝까지 들었다⁠.

“⁠피고⁠,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예⁠. 판사님⁠.⁠”

영칠의 변호사가 영칠의 팔을 잡았다⁠. 영칠은 팔을 빼지 않고 일어났다⁠. 목의 안경 줄에서 돋보기가 흔들렸다⁠.

“⁠변호사님⁠, 사진 다 거둬 주시오⁠.⁠”

“⁠부장님⁠!⁠”

“⁠다 거두시오⁠. 막걸리 사진까지⁠.⁠”

변호사의 손에서 서류철이 미끄러졌다⁠. 사진 몇 장이 바닥에 흩어졌다⁠. 장미 화분 사진이 기백의 발치까지 미끄러져 왔다⁠. 기백은 줍지 않았다⁠.

영칠은 왼편 탁자의 영란을 보았다⁠. 서른두 해 만에⁠, 법정 한가운데에서⁠, 똑바로 보았다⁠. 영란도 영칠을 보았다⁠. 기백은 방청석에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쟀다⁠. 탁자 두 개만큼이었다⁠. 돌담 하나보다는 넓고⁠, 서른두 해보다는 좁았다⁠.

영칠이 판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판사님⁠, 이혼하겠습니다⁠.⁠”

법정이 숨을 멈췄다⁠. 보담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옥단이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대신 조건이 둘 있습니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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