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23자)
담장 위의 장미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법정에 니스 냄새만 남았다. 아무도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손영란은 탁자 위에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오른편 탁자의 우영칠이 판사를 보고 있었다. 목에 건 안경 줄 끝에서 돋보기가 아직 흔들렸다.
“조건을 말씀해 보세요.”
판사가 말했다. 영칠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첫째, 용인 집 담은 헐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쌓았습니다. 첫 단은 삐뚤고 세 번째 단은 반듯합니다. 장미가 그걸 타고 올라갑니다.”
방청석에서 6호 할머니가 소리 내어 웃었다. 봉옥단이 할머니 무릎을 찰싹 때렸다. 판사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눌렀다.
“둘째는요?”
“상추 철 되면 한 봉지씩 보내 주십시오. 택배는 쉬니까, 얼려서라도.”
“피고, 그건 법원이 정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닙니다.”
“그럼 집사람한테 직접 묻겠습니다.”
영칠이 왼편 탁자로 몸을 돌렸다. 서른두 해 동안 영칠은 영란을 「어이」라고 불렀다. 「보담 엄마」라고 불렀고, 남들 앞에서는 「집사람」이라고 불렀다. 영칠의 입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다시 열렸다.
“손영란 씨.”
영란은 깍지를 풀었다. 이름 석 자가 법정 바닥을 건너오는 동안 영란은 자기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들었다. 영칠의 목소리로 듣는 이름은 영란이 아는 이름과 조금 달랐다. 조금 더 낮고, 조금 더 늦었다.
“들어주겠소?”
묻는 말이었다. 서른두 해 동안 영칠은 정해서 알렸다. 이사 날짜도, 보담의 학교도, 차도, 용인 집 남향도. 영란도 그렇게 했다. 졸혼도 종이 한 장으로 알렸다. 법정 한가운데에서 처음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네.”
영란은 대답을 하나만 했다. 판사가 펜을 내려놓았다.
“두 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화해로 정리하시는 걸 권하겠습니다. 재산 나누는 건 변호사님들과 복도에서 먼저 이야기해 보세요. 담하고 상추는 두 분이 알아서 하시고요.”
*
복도 창으로 10월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자판기 앞 긴 의자에 영란과 영칠이 한 칸 띄우고 앉았다. 변호사 둘은 서류를 들고 조금 떨어져서 기다렸다. 보담은 두 사람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엄마, 아빠. 숫자 얘기는 짧게 해. 나 회사 반차 냈어.”
영란이 먼저 말했다. 미리 정해 둔 말이 아니었다. 영칠의 이름을 처음 들은 귀로 처음 하는 말이었다.
“용인 집은 내 이름으로 해 줘요. 대신 당신 연금은 안 나눠 받을게요. 서른두 해 치 반이 내 몫이라는데, 안 받아요.”
영칠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통장에 남은 거, 삼천 있어요. 그걸로 당신 마이너스 통장 막아요. 젊은 사람들한테 물어준 일억 중에 내가 묶어서 생긴 몫이에요.”
“그건 내가.”
“당신이 혼자 지는 거, 이제 그만해요.”
영칠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 바닥을 보다가 목의 돋보기를 들어 올려 변호사의 서류를 보았다. 서울 집과 대출은 영칠에게, 용인 집은 영란에게. 영칠은 서류에 손가락을 대고 한 줄씩 짚었다. 거래처 계약서를 읽던 손가락이었다.
“서울 집 대출은 내가 갚는다. 연금으로 이자 내고, 원금은 경차 몰고 다니면서 갚지.”
“경차는 운전이 아니라면서요.”
“운전은 아닌데 연비는 좋아.”
보담이 팔짱을 풀었다.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가 떨렸다. 보담은 휴대전화를 꺼내 엄지로 몇 번 두드렸다. 영란의 주머니와 영칠의 주머니에서 동시에 진동이 울렸다.
「우보담님이 들어왔습니다.」
회색 글씨 밑에 새 글이 떴다. 「방 이름 바꿀게」 대화방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 셋, 따로」
“따로는 왜 붙여?”
“사실대로 해야 된다며. 다들 오늘 그러던데.”
보담은 폭죽 이모티콘을 세 개 보냈다. 반년 전 졸혼 한 달 축하 때와 같은 폭죽이었다. 영칠이 돋보기를 쓰고 화면을 한참 보다가 곰 한 마리를 보냈다. 손뼉 치며 웃는 곰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누른 것이었다.
법원을 나와 보담이 엄마를 용인까지 태워 주었다. 아빠는 지하철을 타겠다고 했다. 철인이니까 걸어도 된다고 했다. 고속도로에 오르자 보담이 앞만 보고 물었다.
“엄마, 아저씨랑은 어떻게 할 거야?”
“물어볼 거야.”
“뭘?”
“같이 할 건지. 뭘 같이 할지는 아직 모르겠고.”
보담이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꿨다. 한참 뒤에 피식 웃었다.
“엄마, 그거 완전 갓생이다.”
“갓생이 뭔지 아직도 몰라.”
“엄마 같은 거라니까. 반년 전에도 말했잖아.”
영란은 창밖을 보았다. 고속도로 옆 산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차 안에서 보담의 방향제 냄새가 났다. 레몬 냄새였다. 보담이 고른 냄새였다.
*
10월 마지막 토요일 아침, 느티울 7호 담장에 가을 장미가 피었다. 6월보다 송이는 작았고 색은 더 짙었다. 줄기는 벽돌 첫 단의 물결을 타고 두 번째 단의 물결을 넘어, 세 번째 단의 곧은 줄 위로 붉은 송이를 올렸다. 서리 오기 전의 장미 냄새는 6월보다 맑았다. 마당의 김장 배추가 어른 머리만 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다.
아홉 시, 연두색 경차가 대문 앞에 멈췄다. 영칠이 트렁크에서 스물여덟 인치 여행 가방을 꺼냈다. 제주 공항 꼬리표가 아직 손잡이에 달랑거렸다. 반년 전 이 가방은 짐을 싣고 왔고, 오늘은 남은 짐을 실으러 왔다.
손님방에 남은 것은 많지 않았다. 파스 냄새가 밴 베개 하나, 줄자, 흙손, 분홍 고무장갑 한 켤레. 영칠은 베개와 줄자를 가방에 넣었다. 분홍 장갑은 들었다가 신발장 위에 내려놓았다. 흙손은 손에 쥐고 마당으로 나왔다.
영칠은 담 앞에 멈춰 벽돌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첫 단부터 차례로 쓸어 올라갔다. 장미 가시가 손등을 스쳤다.
“첫 단은 좀 삐뚤어졌네.”
담 너머에서 도기백이 물조리개를 들고 나왔다. 은발을 빗어 넘기고 베이지 카디건을 입었다. 손등에서 유자 냄새가 났다.
“형님 솜씨입니다. 세 번째 단은 반듯하잖아요.”
“그건 선생 실이지.”
영칠은 손에 든 흙손을 담 너머로 내밀었다. 기백이 물조리개를 내려놓고 받았다.
“담 손볼 일 있으면 선생이 하시오. 헐지는 말고.”
“예, 형님.”
“장미가 벽돌을 다 덮으면 그때 한 단 더 올려도 되고.”
“그때는 형님이 오셔서 올리세요. 줄은 제가 띄우겠습니다.”
영칠은 대답 대신 코를 훌쩍였다. 장미 냄새 때문이라고 했다.
영란이 비닐봉지를 들고 수돗가에서 왔다. 봉지 안에 상추가 꾹꾹 눌려 담겨 있었다. 풋내가 봉지 입구로 올라왔다.
“상추 철 아니잖아.”
“가을 상추예요. 이것도 철이에요. 얼리지 말고 오늘 먹어요. 된장은 애호박 넣고.”
영칠이 봉지를 받았다. 손님방에서 나온 여행 가방 손잡이를 뽑아 올렸다. 철컥 소리가 났다. 바퀴 하나가 삐걱거리며 디딤돌을 넘었다. 대문 앞에서 영칠이 걸음을 멈추고 마당을 돌아보았다. 코를 한 번 킁 하고 들이마셨다.
“이 집은 이제 당신 냄새 나네.”
“무슨 냄샌데요?”
“흙 냄새. 장미 냄새. 된장은 안 나고.”
“된장은 서울 집에서 나겠죠. 당신이 끓이면.”
영칠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경차 트렁크에 밀어 넣었다. 가방이 다 들어가지 않아서 뒷좌석으로 옮겼다. 운전석에 몸을 접어 넣자 무릎이 핸들 밑에 끼었다. 영칠은 의자를 뒤로 밀지 않았다. 창문을 내리고 영란을 불렀다.
“손영란 씨.”
“네.”
“애호박은 반달로 써냐, 깍둑으로 써냐.”
“반달이요. 두께는 새끼손가락만큼.”
시동을 걸기 전에 회관 앞 길에서 봉옥단이 종종걸음으로 왔다. 손에 신문지로 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옥단은 경차 창문 안으로 꾸러미를 밀어 넣었다.
“부장님, 고성 오징어요. 가다가 졸리믄 씹으시오.”
“회장님 바깥양반이 보낸 거 아니오.”
“한 축이 스무 마리여. 혼자는 못 먹어라.”
옥단은 창틀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리고 물러났다. 영칠이 꾸러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신문지 사이로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차 안에 퍼졌다.
경차가 단지 길을 빠져나갔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6호 할머니가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가 멀어질 때까지 경차의 비상등이 두 번 깜박였다.
*
열한 시, 영란은 앞치마 주머니에 모종삽을 꽂았다. 밀짚모자를 쓰고, 마루 밑에서 종이 상자 하나를 꺼냈다. 튤립 구근 서른 알이 왕겨 속에 묻혀 있었다. 면 소재지 농약사에서 산 것이었다. 주인은 이번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덤으로 마늘 한 접을 얹어 주었다.
영란은 담 앞으로 갔다. 장미 너머로 8호 마당에서 기백이 흙손을 닦고 있었다. 담은 영란의 허리 위까지 와 있었다. 상자를 담 너머로 넘기면 한 번에 끝날 일이었다. 반년 동안 화분도, 마스크도, 혼잣말도, 막걸리도 다 이 담 위로 오갔다.
영란은 상자를 품에 안고 대문으로 나갔다. 7호 대문을 나와 단지 길을 열 걸음 걸었다. 8호 대문 앞에서 멈췄다. 초인종 대신 손등으로 대문을 두 번 두드렸다. 흙 묻은 손등이 대문에 작은 자국을 남겼다.
대문이 열렸다. 기백이 흙손을 든 채 서 있었다. 대문 앞에 선 영란을 보고, 담장을 한 번 보고, 다시 영란을 보았다. 담 너머가 아니라 대문 앞에 선 영란을 기백은 처음 보았다.
“담으로 넘겨도 되는데.”
“물어보러 왔어요. 담 너머로 물으면 대답도 담 너머로 와요.”
영란은 상자를 열어 보였다. 왕겨 냄새가 마른 볏짚처럼 올라왔다.
“튤립이에요. 내년 사월에 피어요. 담 밑에, 우리 집 쪽이랑 선배 집 쪽이랑 반씩 심을래요?”
기백은 상자 속 구근을 내려다보았다. 양파 껍질 같은 갈색 구근이 왕겨 사이에서 반들거렸다. 기백이 흙손을 대문 기둥에 기대 세웠다.
“같이 심을게요.”
“나 혼자 정한 거 아니에요. 물어본 거예요.”
“알아요. 그래서 대답한 거예요.”
기백이 상자를 받아 들려고 손을 내밀었다. 영란은 상자 대신 기백의 손등에 코를 가까이 댔다. 새콤하고 가벼운 냄새가 났다.
“유자네요.”
“새로 샀어요. 동백은 순향이 냄새라서, 이건 내 냄새로 하려고요.”
“잘 골랐어요. 장미랑 안 싸워요.”
기백은 그제야 상자를 받아 들었다. 왕겨가 조금 쏟아져 대문 앞에 흩어졌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 단지 단톡방이었다. 「[공지] 7호 8호 담장 장미 사진은 담 밖에서만 찍어 주세요~ 개인 집이에요♡ - 회장」 하트는 하나였다. 밑으로 6호 할머니가 「우리 집 담도 장미 심을까」라고 달았다.
정오 무렵, 돌담 밑 양쪽에 두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7호 마당에서 영란이 모종삽으로 구덩이를 팠고, 8호 마당에서 기백이 흙손으로 구덩이를 팠다. 구근을 하나씩 넣을 때마다 담 아래로 손이 오갔다. 영란이 마늘 한 알을 기백 쪽 구덩이에 슬쩍 넣었다. 기백이 그것을 보고 튤립 한 알을 영란 쪽으로 넘겼다.
머리 위에서는 가을 장미가 영칠의 벽돌을 타고 넘어 두 마당 쪽으로 반씩 늘어져 있었다. 첫 단의 물결과 세 번째 단의 곧은 줄 사이로 붉은 송이들이 흔들렸다. 밀짚모자 챙에 장미 꽃잎 하나가 떨어졌다. 영란은 꽃잎을 털지 않고 다음 구덩이를 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