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39자)

조정실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된장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는 냄새가 났다⁠. 우영칠은 나무 주걱으로 바닥을 긁으며 불을 줄였다⁠. 8월 13일 금요일 아침 여섯 시⁠, 상계동 702호 부엌이었다⁠. 냄비 안에서 애호박이 반달 모양으로 떠다녔다⁠. 반달 크기가 들쭉날쭉했다⁠.

냉동실에는 용인에서 온 된장국이 다섯 봉지 있었다⁠. 퇴원한 다음 날 보담이 아이스박스째 들고 왔다⁠. 「⁠얼려서⁠」 보냈다는 말과 함께였다⁠. 영칠은 다섯 봉지 중에 하나만 녹여 먹고⁠, 나머지 넷은 냉동실 맨 안쪽으로 밀어 두었다⁠. 대신 아침마다 녹여 먹은 맛을 흉내 내 끓였다⁠. 오늘이 열한 번째였다⁠.

국자로 떠서 맛을 보았다⁠. 짰다⁠. 영칠은 물을 반 컵 부었다⁠. 메모지에 적은 대로 조금씩 부었다⁠. 다시 맛을 보았다⁠. 아직 짰지만 어제보다 덜 짰다⁠.

목에 걸린 안경 줄 끝에서 새 돋보기가 흔들렸다⁠. 퇴원하던 날 보담이 안경점에서 맞춰 준 것이었다⁠. 줄은 보담이 따로 샀다⁠. 「⁠아빠는 이마 말고 목에 걸어⁠. 이마는 안 보이잖아⁠」 퇴원한 뒤로 영칠은 돋보기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와이셔츠를 다렸다⁠. 소매 끝에서 다리미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열을 쟀다⁠. 탄내는 나지 않았다⁠. 다림질도 열한 번째였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의사가 목을 조이지 말라고 했다⁠.

일곱 시 반⁠, 보담이 차를 몰고 왔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아빠의 셔츠 소매를 보았다⁠.

“⁠아빠⁠, 소매 안 탔네⁠.⁠”

“⁠열한 번째다⁠.⁠”

“⁠국은⁠?⁠”

“⁠짰다⁠. 열한 번째인데도⁠.⁠”

보담은 웃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운전석에 앉았다⁠. 고속도로에 오르자 보담이 라디오를 켰다⁠. 「⁠이혼 조정⁠, 이것만 알고 가세요⁠. 조정위원은 판사가 아니에요⁠.⁠」 보담이 라디오를 끄려다 그대로 두었다⁠. 영칠은 끝까지 들었다⁠.

수원 나들목을 빠져나올 때 영칠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보담아⁠, 엄마 있는 단톡방 말이다⁠. 다시 들어가 주면 안 되냐⁠.⁠”

“⁠아빠가 왜 그 말을 해⁠?⁠”

“⁠방에 둘만 있으니까 말을 못 하겠다⁠. 둘이서는 서른두 해 동안 말을 안 해 봐서⁠.⁠”

보담은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꿨다⁠. 한참 뒤에 물었다⁠.

“⁠아빠는 엄마 편이야⁠, 내 편이야⁠?⁠”

“⁠나는 내 편이다⁠.⁠”

“⁠그게 뭐야⁠?⁠”

“⁠변호사가 그러더라⁠. 오늘은 무조건 내 편만 하라고⁠.⁠”

보담이 코웃음을 쳤다⁠. 웃음은 아니었지만 코웃음도 열흘 만이었다⁠. 영칠은 목에 걸린 돋보기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

수원 가정법원 조정실은 에어컨 먼지 냄새가 났다⁠. 작은 회의 탁자 하나에 의자 다섯 개였다⁠. 영칠이 변호사와 나란히 앉자 맞은편 문이 열렸다⁠. 손영란이 변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흙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영란의 손톱 밑이 까맸다⁠. 아침에 고추를 따다 그대로 버스를 탄 모양이었다⁠. 리넨 셔츠 소매에 풋고추 꼭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영란은 영칠을 보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목에 걸린 안경 줄을 보고 눈이 잠깐 머물렀다⁠.

조정위원은 일흔 가까운 남자였다⁠. 판사로 오래 일하다 물러났다고 했다⁠. 흰 와이셔츠에 멜빵을 했다⁠. 조정위원이 서류를 펼치다가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이마를 더듬고⁠, 와이셔츠 주머니를 더듬고⁠, 서류 밑을 더듬었다⁠. 영칠의 손이 저도 모르게 목의 안경 줄로 갔다⁠.

“⁠제 돋보기 보신 분⁠.⁠”

영란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조정위원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돋보기가 백발 위에 얹혀 있었다⁠. 조정위원이 웃으며 돋보기를 내렸다⁠.

“⁠나이 들면 다 그래요⁠. 이마에 두고 온 집 안을 다 뒤지지요⁠.⁠”

영칠은 맞장구를 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영란이 고개를 숙이고 입꼬리를 눌렀다⁠.

조정위원이 서류를 넘겼다⁠.

“⁠두 분⁠, 결혼 서른두 해시고⁠. 따님 하나⁠. 아내분은 이혼과 재산분할을 원하시고⁠, 남편분은 이혼을 원하지 않으시고⁠. 맞습니까⁠?⁠”

“⁠맞습니다⁠.⁠”

영칠이 먼저 대답했다⁠. 변호사가 영칠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먼저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영칠은 잊었다⁠.

“⁠이혼은 못 합니다⁠. 서른두 해 혼자 벌어서 식구 먹였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가서 밤 열한 시에 들어왔습니다⁠. 집사람이 옆집 남자가 이사 오고 나서 마음이 변했습니다⁠.⁠”

“⁠옆집 남자 오기 한 달 전에 졸혼했어요⁠.⁠”

영란이 변호사를 거치지 않고 말했다⁠. 조정위원은 막지 않았다⁠.

“⁠졸혼도 당신 혼자 정했잖아⁠. 나한테 물어봤어⁠?⁠”

영란의 입이 다물렸다⁠. 조정실이 조용해졌다⁠. 에어컨이 덜컥 소리를 내며 바람을 바꿨다⁠. 영란의 변호사가 박하사탕을 굴리던 볼을 멈췄다⁠.

“⁠안 물어봤어요⁠.⁠”

영란이 대답했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물어보면 당신이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했을 거니까요⁠.⁠”

“⁠그것도 당신이 혼자 정한 거잖아⁠.⁠”

“⁠맞아요⁠. 그것도 내가 혼자 정했어요⁠. 서른두 해 동안 당신이 혼자 정하는 걸 보고 배웠어요⁠. 이사도⁠, 보담이 학교도⁠, 차도⁠, 용인 집 남향도⁠.⁠”

조정위원이 돋보기를 벗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한숨처럼 웃었다⁠.

“⁠두 분 다 맞는 말씀을 하시니⁠,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조정위원이 서류를 덮고 깍지를 꼈다⁠.

“⁠제가 조정할 때마다 여쭙는 게 있습니다⁠. 서른두 해 동안 상대방한테 고마웠던 거⁠, 딱 하나씩만 말씀해 보시지요⁠. 길게 말고⁠.⁠”

영칠의 변호사가 영칠을 보았다⁠. 대답하지 말라는 눈이었다⁠. 영칠은 변호사를 보지 않았다⁠.

“⁠셔츠요⁠.⁠”

“⁠셔츠요⁠?⁠”

“⁠서른두 해 동안 아침마다 의자에 다린 셔츠가 걸려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안 탔습니다⁠. 나는 열한 번 다리는 동안 한 번 태웠습니다⁠.⁠”

조정위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영란을 보았다⁠. 영란은 탁자 위에 올린 흙 묻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월급날 통닭이요⁠.⁠”

영칠의 고개가 들렸다⁠.

“⁠보담이 어릴 때 월급날마다 통닭을 사 왔어요⁠. 종이봉투에 기름이 배어서 현관에서부터 냄새가 났어요⁠. 보담이가 냄새 맡고 뛰어나가면⁠, 당신이 봉투를 머리 위로 들고 못 뺏게 했어요⁠. 보담이 중학교 들어가고는 안 사 왔지만요⁠.⁠”

“⁠애가 살찐다고 네가⁠.⁠”

“⁠내가 그랬죠⁠.⁠”

조정위원이 서류 귀퉁이를 접었다⁠. 영칠의 변호사가 금시계를 손가락으로 돌렸다⁠. 영칠은 월급날 통닭 냄새를 떠올렸다⁠. 현관에서부터 났다는 통닭 냄새를 영칠은 맡아 본 적이 없었다⁠. 봉투를 든 사람은 냄새를 맡지 못했다⁠.

*

영란의 변호사가 가방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보자기를 풀자 고무줄로 묶인 통장 다발이 탁자에 놓였다⁠. 영칠은 보자기를 알아보았다⁠. 영란이 김장 때 고춧가루를 싸던 보자기였다⁠.

“⁠아내분이 1995년부터 부은 적금 통장입니다⁠. 시장 보기 생활비에서 매달 따로 떼어 부으셨습니다⁠.⁠”

변호사가 2019년 통장을 펼쳐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조정위원이 돋보기를 다시 썼다⁠. 영칠도 목에서 돋보기를 들어 올렸다⁠. 안경 줄이 팽팽해졌다⁠.

「⁠2019⁠. 3⁠. 8⁠. 출금 80⁠,000⁠,000 · 용인 주택 계약금⁠」

영칠은 줄을 두 번 읽었다⁠. 숫자를 세다가 놓치고 다시 셌다⁠.

“⁠계약금은 내 중간 정산 받은 걸로⁠.⁠”

“⁠그 돈은 그대로 있었어요⁠.⁠”

영란이 말했다⁠. 목소리가 깍듯하지도 높지도 않았다⁠.

“⁠당신이 계약금 어떻게 하느냐고 했을 때 내가 알아서 했다고 했죠⁠. 당신은 묻지 않았어요⁠. 중간 정산 받은 돈은 당신 통장에 그대로 있다가⁠, 퇴직금이랑 합쳐졌어요⁠. 그 돈이 총무님한테 간 거예요⁠.⁠”

영칠의 손에서 돋보기가 미끄러져 가슴께로 떨어졌다⁠. 안경 줄이 돋보기를 붙들었다⁠. 영칠은 탁자 위의 통장들을 보았다⁠. 맨 위 통장의 표지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1995년이었다⁠. 결혼한 해였다⁠.

“⁠그 돈도 다 내 월급에서 아낀 거잖아⁠.⁠”

영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화가 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기 귀에도 그렇게 들렸다⁠.

“⁠당신 월급 서른두 해 동안 지킨 사람이 나예요⁠. 시장에서 콩나물 오백 원 깎으면서요⁠. 보담이 학원비 내고 남은 천 원을 모으면서요⁠. 그 돈 아니었으면 당신 퇴직금은 용인 집에 다 들어갔을 거고⁠, 총무님한테 빌려줄 돈도 없었을 거예요⁠.⁠”

영칠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영칠의 변호사가 서류를 넘기며 헛기침을 했다⁠. 금시계가 탁자에 탁 부딪혔다⁠.

“⁠그렇다고 해도 그 돈 역시 부부가 함께 모은 재산이고⁠, 원고가 이웃 남성과 부정한 관계를 맺은 사정은⁠.⁠”

조정위원이 손바닥을 들어 변호사의 말을 막았다⁠.

“⁠그 이야기는 재판에서 하시지요⁠. 오늘 조정은 안 되겠습니다⁠. 변론 기일은 10월로 잡겠습니다⁠. 증인은 남편분이 신청하신 세 분⁠, 그대로 부르지요⁠.⁠”

조정위원이 돋보기를 벗어 다시 머리 위로 올렸다⁠. 일어나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콩나물 오백 원이라⁠. 우리 집사람도 그랬지요⁠.⁠”

복도로 나오자 영칠의 변호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헤어젤 냄새가 가까이 왔다⁠.

“⁠부장님⁠, 먼저 말씀하지 마시라니까요⁠. 셔츠 이야기는 또 왜 하셨어요⁠. 상대방 변호사가 다 받아 적었습니다⁠.⁠”

“⁠물어봐서 대답한 거요⁠.⁠”

“⁠10월에는 따님이 결정타입니다⁠. 따님이 아버님 편에서 한마디만 해 주시면 됩니다⁠. 어머님이 집을 지키는 동안 아버님이 혼자 쓰러지셨다고⁠.⁠”

영칠은 복도 창으로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보담의 차가 땡볕 아래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운전석의 보담이 휴대전화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법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영칠이 있는 창을 찾는 눈이었다⁠.

*

오후 한 시⁠, 법원 주차장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일렁였다⁠. 기온이 35도를 넘었다⁠. 보담은 차에서 에어컨을 켜고 기다렸다⁠. 영칠이 조수석 문을 열려다 손을 멈췄다⁠. 법원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 영란이 서 있었다⁠. 정류장 지붕 그늘이 짧아서 영란의 등 절반이 햇볕에 나와 있었다⁠. 밀짚모자는 없었다⁠.

“⁠아빠⁠, 타⁠.⁠”

“⁠먼저 에어컨 쐬고 있어⁠.⁠”

영칠은 정류장까지 걸었다⁠. 아스팔트 열기가 구두 밑창을 뚫고 올라왔다⁠. 가슴에 철망을 넣은 뒤로 영칠은 빨리 걷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도 정류장은 가까웠다⁠.

영란 옆에 서자 냄새가 났다⁠. 흙냄새와⁠, 소매 끝의 풋고추 냄새와⁠, 냄새들 밑에 아주 희미한 장미 냄새⁠. 서른두 해 동안 영칠이 기억하는 영란의 냄새는 다림질하던 김 냄새와 된장 냄새였다⁠. 옆에 선 사람에게서는 김 냄새도 된장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영칠은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린 손수건이었다⁠.

“⁠땀 닦아⁠.⁠”

영란은 손수건을 받았다⁠. 펴 보고⁠, 다린 자국을 보고⁠, 영칠을 보았다⁠.

“⁠당신이 다렸어요⁠?⁠”

“⁠열한 번째다⁠.⁠”

영란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눌렀다⁠. 목덜미를 눌렀다⁠. 손수건에 흙이 묻었다⁠. 영란은 손수건을 접어 돌려주지 않고 앞치마 대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버스가 오는 소리가 났다⁠. 영칠은 정류장 기둥을 한 손으로 짚었다⁠. 하려던 말을 지금 하지 않으면 버스가 가져갈 것이었다⁠.

“⁠10월에 그 양반이 법정에서 당신 좋아한다고 하면⁠, 나는 끝까지 간다⁠. 이혼 못 해 준다⁠.⁠”

“⁠그 사람 거짓말 안 해요⁠.⁠”

“⁠알아⁠.⁠”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고 문이 열렸다⁠. 찬 바람이 버스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영란이 계단에 한 발을 올렸다⁠. 영칠은 기둥을 짚은 채 말을 끝냈다⁠.

“⁠나한테도 안 했어⁠.⁠”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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