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36자)

나간 사람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젖은 흙냄새 사이로 꽃잎 썩는 냄새가 났다⁠. 손영란은 잠옷 바람에 밀짚모자를 쓰고 현관문을 열었다⁠. 6월 26일 토요일 새벽 네 시 반⁠, 장맛비가 사흘째였다⁠. 담 위 장미는 비에 맞아 꽃잎을 반쯤 떨궜고⁠, 떨어진 꽃잎이 벽돌 틈에 붙어 검붉게 물러 있었다⁠. 장미 냄새는 달던 냄새에서 시큼한 냄새로 바뀌어 있었다⁠.

상추 이랑 한가운데에 고라니가 서 있었다⁠. 비에 젖은 갈색 등이 번들거렸다⁠. 고라니는 상추 한 포기를 입에 문 채 영란을 보았다⁠. 영란은 현관 우산꽂이에서 장우산을 뽑았다⁠.

“⁠야⁠. 내려놔⁠.⁠”

고라니는 내려놓지 않았다⁠. 천천히 씹었다⁠. 영란은 우산을 펼쳐 들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고라니는 영란이 세 걸음 앞까지 올 때까지 상추를 다 씹고⁠, 한 포기를 더 물고 나서야 돌담을 훌쩍 넘었다⁠. 넘은 데가 벽돌이 없는 담 끝이었다⁠. 그물이 찢어져 있었다⁠.

8호 현관 등이 켜졌다⁠. 도기백이 손전등을 들고 나왔다⁠. 줄무늬 잠옷 위에 베이지 카디건을 걸쳤다⁠. 은발이 베개에 눌려 한쪽으로 뻗쳐 있었다⁠.

“⁠영란 씨⁠, 무슨 일이에요⁠? 누구랑 싸워요⁠?⁠”

“⁠고라니요⁠. 상추를 두 포기 들고 갔어요⁠.⁠”

“⁠두 포기면 선방했네요⁠.⁠”

“⁠선방이요⁠? 남의 상추라고 쉽게 말하네요⁠.⁠”

“⁠대전 화원 할 때는 고라니가 국화를 한 판 통째로 먹었어요⁠. 순향이가 고라니한테 반말로 욕을 했어요⁠. 국화한테 하던 반말로요⁠. 고라니가 알아듣고 다음 날 또 왔어요⁠. 친구인 줄 알았나 봐요⁠.⁠”

영란은 우산을 접다가 웃음이 터졌다⁠. 새벽 네 시 반에 잠옷 바람으로 웃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였다⁠.

기백은 손전등으로 담 끝을 비췄다⁠. 그물이 말뚝에서 빠져 진흙에 늘어져 있었다⁠. 기백은 8호 대문을 돌아 7호 마당으로 들어왔다⁠. 둘은 빗속에서 그물을 말뚝에 다시 걸었다⁠. 영란이 그물을 잡고 기백이 끈을 묶었다⁠. 빗물이 밀짚모자 챙을 타고 영란의 목덜미로 흘렀다⁠. 기백의 카디건이 어깨부터 젖어 들었다⁠.

마지막 매듭을 짓다가 기백의 손이 미끄러졌다⁠. 영란이 기백의 손을 잡았다⁠. 젖은 손이 젖은 손을 잡았다⁠. 영란은 놓지 않았다⁠. 기백의 손등에서 동백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비에 씻긴 탓인지⁠, 반 통이 바닥난 탓인지 영란은 알 수 없었다⁠.

“⁠핸드크림 다 썼어요⁠?⁠”

“⁠어제 다 썼어요⁠.⁠”

“⁠새로 안 사요⁠?⁠”

“⁠같은 걸로 사면 순향이 냄새가 나고⁠, 다른 걸로 사면 순향이 냄새가 안 나요⁠. 둘 다 못 하겠어서요⁠.⁠”

영란은 기백의 손을 잡은 채로 그물 끈을 마저 묶었다⁠. 매듭이 단단히 졌다⁠. 비가 둘의 손등 위로 똑같이 떨어졌다⁠.

*

8호 처마 밑 계단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처마 끝에서 빗물이 줄지어 떨어졌다⁠. 기백이 수건 두 장을 가져와 하나를 영란의 무릎에 얹었다⁠. 영란은 밀짚모자를 벗고 머리를 닦았다⁠. 흰머리 섞인 단발이 수건 밑에서 엉켰다⁠.

“⁠영란 씨⁠, 형님이 나한테 증인을 서 달라고 했어요⁠. 사실대로⁠.⁠”

“⁠알아요⁠. 막걸리 먹던 날이요⁠.⁠”

“⁠법정에서 나한테 물을 거예요⁠. 좋아하느냐고⁠.⁠”

기백은 수건을 무릎 위에서 반으로 접었다⁠. 다시 반으로 접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영란 씨가 질 수도 있어요⁠. 변호사님이 그랬다면서요⁠. 바람피운 사람은 이혼을 청구 못 한다고⁠.⁠”

“⁠우리가 바람을 피웠어요⁠?⁠”

“⁠손을 두 번 잡았어요⁠. 방금이 두 번째예요⁠.⁠”

영란은 웃음이 나오려다 말았다⁠. 처마 끝의 빗줄기가 굵어졌다⁠.

“⁠그래서요⁠?⁠”

“⁠거짓말할까요⁠? 그냥 동아리 선배라고⁠, 아무 마음 없다고⁠.⁠”

기백이 영란을 보았다⁠. 이번에는 혼자 정하지 않고 묻는 얼굴이었다⁠. 영란은 수건을 목에 걸었다⁠. 빗소리가 처마를 두드렸다⁠.

“⁠거짓말하면 선배 또 마흔 해 가요⁠.⁠”

“⁠…예⁠.⁠”

“⁠나는 이길 거면 사실로 이기고⁠, 질 거면 사실로 질래요⁠. 마흔 해 동안 거짓말 안 하고 산 거⁠, 그거 하나는 내 이름으로 남았어요⁠.⁠”

기백은 대답 대신 수건을 펴서 영란의 젖은 어깨에 덮어 주었다⁠. 영란은 수건을 받아 들었다⁠. 수건에서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동백 냄새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

아침 아홉 시⁠, 단지 단톡방에 회장의 공지가 올라왔다⁠. 「⁠[공지] 장마철 빗물받이 점검합니다⁠~ 그리고 남의 집 사정은 단톡방에 올리지 맙시다♡ - 회장⁠」 영란은 공지를 두 번 읽었다⁠. 남의 집 사정을 제일 먼저 올리던 사람이 쓴 공지였다⁠. 밑에 아무도 답을 달지 않았다⁠.

열 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6호 할머니가 비닐을 덮은 접시를 들고 우산 밑에 서 있었다⁠. 비닐 밑에서 기름 냄새와 부추 냄새가 올라왔다⁠.

“⁠비 오는 날은 부침개여⁠. 혼자 먹으면 맛없어⁠.⁠”

할머니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식탁에 앉았다⁠. 영란은 막걸리 대신 보리차를 따랐다⁠. 할머니는 부침개를 손으로 찢어 영란 앞접시에 놓으며 창밖의 담장을 보았다⁠.

“⁠우리 영감은 담 대신 술을 쌓았어⁠. 마흔 해를⁠. 술병이 담장보다 높았지⁠.⁠”

“⁠영감님 돌아가신 지 오래되셨죠⁠?⁠”

“⁠열두 해⁠. 장례 치르고 이레 만에 내가 처음으로 혼자 짜장면을 시켜 먹었어⁠. 곱빼기로⁠.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 맛있어서 울었어⁠.⁠”

할머니는 부침개를 하나 더 찢었다⁠. 영란은 젓가락을 든 채 할머니의 손등을 보았다⁠. 검버섯 사이로 기름이 반짝였다⁠.

“⁠7호⁠, 단톡방 신경 쓰지 마⁠. 회장도 요새 마음이 시끄러워⁠. 다들 알아⁠.⁠”

“⁠뭘 알아요⁠?⁠”

“⁠다 알지⁠. 말을 안 할 뿐이지⁠.⁠”

할머니는 부침개 접시를 두고 우산을 펴며 나갔다⁠. 영란은 할머니가 무엇을 다 안다는 것인지 묻지 못했다⁠.

*

오후 두 시⁠, 빗속으로 회색 차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췄다⁠. 보담이 남편 차를 몰고 혼자 내려왔다⁠. 우산 없이 현관까지 뛰어온 보담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보담은 엄마에게 인사하지 않고 곧장 손님방으로 갔다⁠.

손님방에는 영칠의 짐이 석 달 동안 쌓여 있었다⁠. 라면 박스⁠, 3인용 전기밥솥⁠, 파스 두 통⁠, 등산 조끼 두 벌⁠, 벽돌 쌓기 동영상을 받아 적은 메모지 한 뭉치⁠. 구석에 스물여덟 인치 여행 가방이 지퍼를 반쯤 연 채 누워 있었다⁠. 제주 공항 꼬리표가 아직 달려 있었다⁠.

보담은 말없이 가방에 짐을 넣었다⁠. 영란은 문간에 서 있다가 거실로 가서 탁자 위의 돋보기를 가져왔다⁠. 욕실 선반의 돋보기를 가져왔다⁠. 현관 신발장 위의 돋보기를 가져왔다⁠. 셋을 손바닥에 나란히 얹어 보담에게 내밀었다⁠.

“⁠거실⁠, 욕실⁠, 신발장⁠. 아빠가 이마에 없으면 여기서 찾았어⁠.⁠”

보담은 돋보기 셋을 받아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 지퍼를 닫는 손이 거칠었다⁠.

가방 옆에서 메모지 뭉치가 바닥으로 흘렀다⁠. 보담이 주워 들었다⁠. 맨 위 장에 「⁠물 조금씩⁠」이 적혀 있었다⁠. 다음 장에 「⁠벽돌 이백 장⁠」⁠, 그다음 장에 「⁠줄 띄우기 — 8호 선생⁠」⁠, 맨 마지막 장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애호박⁠」 보담이 마지막 장을 영란 앞에 들어 보였다⁠.

“⁠애호박은 뭐야⁠?⁠”

“⁠모르겠어⁠.⁠”

영란은 정말 몰랐다⁠. 보담은 메모지를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가방 앞주머니에 돋보기와 함께 넣었다⁠.

“⁠아빠 새 돋보기 맞췄어⁠. 병원 앞 안경점에서⁠.⁠”

“⁠잘했네⁠.⁠”

“⁠엄마⁠.⁠”

보담이 일어났다⁠. 무릎을 펴는 소리가 영란의 무릎 소리와 똑같았다⁠. 서른한 살인데 벌써 그랬다⁠.

“⁠취하할 거야⁠?⁠”

“⁠안 해⁠.⁠”

“⁠아빠 일억 물었어⁠. 차 팔았어⁠. 심장에 철망 넣었어⁠. 그래도⁠?⁠”

“⁠그래도⁠.⁠”

보담의 입술이 하얘졌다⁠. 영란은 손님방 창밖을 보았다⁠. 빗물이 담장 벽돌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 단짜리 벽돌이 비에 젖어 검붉었다⁠.

“⁠보담아⁠. 내가 지금 그만두면⁠, 너는 나중에 네 딸한테 참으라고 할 거야⁠. 참는 게 사랑이라고⁠. 회장님처럼⁠.⁠”

“⁠나 딸 없어⁠.⁠”

“⁠생기면⁠.⁠”

“⁠엄마는 맨날 엄마 얘기만 해⁠.⁠”

“⁠서른두 해 만에 처음 하는 거야⁠. 석 달째야⁠, 아직⁠.⁠”

보담은 가방 손잡이를 뽑아 올렸다⁠. 손잡이가 끝까지 올라가며 철컥 소리를 냈다⁠.

“⁠엄마가 결혼을 졸업했으니까⁠, 나도 엄마 졸업할게⁠.⁠”

보담은 가방을 끌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바퀴 하나가 삐걱거렸다⁠. 서른두 해 전 신혼여행 때부터 삐걱거리던 바퀴였다⁠. 보담은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다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아빠 퇴원은 다음 주 화요일이야⁠. 엄마는 오지 마⁠.⁠”

“⁠국은 보내도 되니⁠?⁠”

운동화 끈을 묶던 보담의 손이 멈췄다⁠. 한참 뒤에 대답이 왔다⁠.

“⁠…택배로⁠.⁠”

“⁠된장국은 택배로 가면 쉬어⁠.⁠”

“⁠그럼 얼려서⁠.⁠”

보담은 끈을 마저 묶었다⁠. 영란은 따라 나가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빗소리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자 다시 멀어졌다⁠. 대문 앞의 회색 차가 빗물을 튀기며 단지 길을 빠져나갔다⁠.

*

삼 분 뒤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 가족 단톡방 「⁠우리 셋⁠」이었다⁠.

「⁠우보담님이 나갔습니다⁠.⁠」

회색 글씨 한 줄이 대화창 맨 밑에 떠 있었다⁠. 바로 위에는 석 달 전 보담이 보낸 「⁠엄마 졸혼 한 달 축하해⁠!⁠!⁠!⁠」와 폭죽 세 개가 있었다⁠. 영란은 화면을 위로 밀어 보았다⁠. 폭죽⁠, 엄지 사십 개⁠, 웃는 곰⁠, 카네이션 케이크⁠. 다시 밑으로 내리자 회색 한 줄이 그대로 있었다⁠.

방에는 이제 영란과 영칠 둘만 남았다⁠. 일 분쯤 지나 영칠이 글을 올렸다⁠. 글자는 없었다⁠. 곰 한 마리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곰이었다⁠.

서른두 해 동안 영칠은 우는 곰을 보내려다 언제나 옆 칸의 웃는 곰을 눌렀다⁠. 새 돋보기를 쓴 영칠이 처음으로 우는 곰을 제대로 눌렀다⁠. 영란은 곰을 오래 보았다⁠. 답을 쓰려다 쓰지 않았다⁠.

영란은 손님방으로 갔다⁠. 방은 비어 있었다⁠. 라면 박스가 있던 자리에 네모난 먼지 자국이 남았고⁠, 전기밥솥이 있던 콘센트 옆 벽지가 조금 누랬다⁠. 베개에서 파스 냄새가 났다⁠. 박하가 섞인 시큼한 냄새였다⁠. 석 달 동안 주말마다 이 냄새가 대문 밖에서부터 영칠보다 먼저 왔다⁠.

영란은 창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들어와 파스 냄새를 조금씩 밀어냈다⁠. 영란은 베개를 들어 창틀에 걸쳐 두었다⁠. 빨지는 않았다⁠.

*

저녁 여섯 시⁠, 비가 잦아들었다⁠. 영란은 마당 의자를 처마 밑으로 끌고 와 앉았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변호사의 명함을 꺼냈다⁠.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에 아직 흙이 끼어 있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박하사탕 굴리는 목소리가 받았다⁠.

“⁠사모님⁠, 주말에 무슨 일이세요⁠?⁠”

“⁠변론 날 잡아 주세요⁠. 조정이든 재판이든 빨리요⁠.⁠”

“⁠남편분이 증인을 셋 신청했어요⁠. 옆집 선생님⁠, 주민회장님⁠, 그리고 따님이요⁠.⁠”

“⁠알아요⁠.⁠”

“⁠따님까지요⁠, 사모님⁠.⁠”

“⁠다 나와도 돼요⁠. 우리 딸도요⁠.⁠”

변호사가 잠시 말이 없었다⁠. 사탕이 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럼 그 통장⁠, 이제 꺼낼게요⁠.⁠”

“⁠꺼내세요⁠.⁠”

영란은 전화를 끊었다⁠. 처마 끝에서 마지막 빗방울들이 떨어졌다⁠. 담장 위에서 비에 젖은 장미 줄기 하나가 세 번째 단을 넘어 허공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탈 데가 없는 줄기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영란은 일어나 수돗가에서 노끈을 가져왔다⁠. 줄기를 세 번째 단 벽돌에 한 번 더 묶었다⁠. 매듭은 기백에게 배운 대로 지었다⁠.

1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나간 사람 ·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