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06자) · 여덟 사람
무게추
시간을 빌린 사람들 · 문가온
만 19세 이상 이용가
지상 2175년 2월 · 기지 시각 16:00
필리핀해 한가운데, 벽해 해상 플랫폼 갑판에 바람이 불었다. 해양안전청 경비함 한 척이 플랫폼 옆에 붙어 있었다. 수송정 크레인 제어실 문에는 압수수색 영장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벽해개발 직원 셋이 갑판 구석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문가람이 수송정 문턱에서 나를 돌아봤다.
“어르신, 정말 안 타세요? 증인으로 모실 수 있어요. 계약이 아니니까 네 번째가 아니에요.”
“안 타. 나는 여기서 달력 볼 거야.”
나는 조끼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달력을 꺼내 보였다. 부두 사무소에서 뜯어 온 것이었다. 지상에 올라온 날부터 하루에 한 칸씩 가위표를 쳤다. 가위표가 벌써 이백오십 개를 넘었다. 저 아래에서는 사흘 남짓이다. 은서는 그 달력을 보고 할아버지는 가위표를 너무 세게 친다고, 종이가 찢어지겠다고 했다. 세게 쳐야 한다. 백이십 년 동안 못 친 것까지. 은서가 옆에서 웃었다. 그 애는 복학 서류를 넣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은서도 타지 않는다. 가족은 탈 수 없다는 규정이었다. 이번 규정은 맞는 규정이었다.
수송정이 내려가는 데 기지 시각 열두 시간. 우리 쪽으로는 사십 일이 넘는다. 기지가 그동안 육천사백 밑으로 내려가면 수송정은 갱 중간에서 돌아와야 한다. 문가람은 그걸 알고 탔다.
은서가 수송정 창에 손바닥을 댔다.
“감독관님, 고모한테 전해 주세요. 조카 언니가 복학했다고.”
기지 시각 03:30 · 지상 2175년 3월 · 수심 6,251m · 1 : 92
의무실 단말에 갱 상부 신호가 떴다. 수송정 하강 중. 현재 수심 사천이백. 도킹 예상 기지 시각 05:10. 발신 해양안전청. 한지오가 그 화면을 캡처해 은채 침대 머리맡에 띄워 주었다. 은채는 투여 열여덟 시간째였다. 누운 채로 화면을 봤다.
“다섯 시 십 분. 하강은 네 시.”
“응.”
“한 시간 십 분 동안 기지가 안 내려가면 되는 거지.”
“응.”
“기지장 아저씨가 가만있을까?”
은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못 할 걸 알았다.
윈치실은 복구돼 있었다. 새 호스 넷. 보안 인력 넷. 청소부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기지장은 하강을 네 시에 다시 건다. 분당 오 미터면 육천사백까지 삼십 분. 네 시 반이면 수송정은 닿을 곳이 없어진다.
윈치로는 못 막는다. 그러면 다른 쪽이다.
나는 정비 교본을 폈다. 첫 계약 때 받은 종이 교본. 모서리가 닳았다. 봄이 옆에서 들여다봤다. 마지막 장. 비상 부상 절차. 그림 하나, 문장 세 줄.
“선배, 이거 해 본 사람 있어요?”
“없어.”
“통계적으로 처음 하는 건 실패 확률이…”
“너 지금 통계 말고 렌치 들 힘 있어?”
봄은 찢어지기 전의 손바닥을 펴 보이며 씩 웃었다. 「주먹밥 먹었잖아요.」
기지 설계도 맨 아래층. 요양동 바로 밑에 밸러스트실이 있다. 기지는 윈치 줄에 매달려 있지만 줄이 무게를 다 받치지는 않는다. 기지 몸통 대부분은 부력으로 뜨고, 그 부력을 눌러 두는 게 무게추다. 쇳덩이 네 개. 하나에 사십 톤. 바닥에 볼트로 물려 있다. 비상시에 풀면 기지가 가벼워져서 줄을 따라 위로 떠오른다. 백이십 년 동안 한 번도 푼 적이 없다. 푸는 법은 정비 교본 마지막 장에 있다. 수동. 볼트 하나에 렌치 하나. 두 사람이 매달려 돌려야 한다.
기지 시각 03:50
밸러스트실은 차갑고 무거웠고, 쇠 냄새가 났다. 기지에서 제일 무거운 곳이었다. 중력정에 제일 가깝고, 쇳덩이 넷이 누르고 있으니까. 들어서는 순간 무릎이 꺾일 뻔했다. 갈비뼈가 찔렀다. 봄이 나를 받쳤다.
볼트는 팔뚝만 했다. 백이십 년 묵은 녹이 나사산마다 끼어 있었다. 렌치는 봄의 키만 했다. 봄이 렌치를 볼트에 걸고 매달렸다. 꿈쩍하지 않았다. 나도 매달렸다. 갈비뼈에서 소리가 났다. 볼트가 반 바퀴 돌았다. 한 볼트에 스무 바퀴. 볼트 넷. 팔십 바퀴.
“선배. 이십 분 남았어요.”
“세지 마.”
“세야 돼요. 이건 세야 돼요.”
밸러스트실 문이 열렸다. 보안 인력인 줄 알았다. 소 영감이었다. 바둑통 대신 산소통을 끌고. 그 뒤에 모 할머니. 그 뒤에 요양동 환자 넷. 걸을 수 있는 사람들.
“총각들. 판 안 끝났다며.”
소 영감이 렌치 끝을 잡았다. 모 할머니가 그 옆을 잡았다. 칠십 넘은 손들이 쇠를 쥐었다. 여기서 제일 무거운 방에서, 여기서 제일 오래 무게를 받아 온 손들이었다. 여덟 사람이 매달렸다. 볼트가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모 할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우리 손주가 요금 내느라 허리 휘었을 거야. 이번엔 내가 좀 휘어 보자.”
첫 번째 볼트가 빠졌다. 바닥이 한 번 울렸다. 쇳덩이가 반 뼘 기울었다.
기지 시각 04:00 · 수심 6,251m
하강 방송이 울렸다. 드럼이 돌기 시작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내려왔다. 발바닥이 무거워졌다. 기지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6,255. 6,260.
두 번째 볼트. 세 번째 볼트. 봄의 손바닥이 찢어졌다. 피가 렌치 손잡이에 묻었다. 봄은 놓지 않았다. 소 영감이 헉헉대며 봄에게 말했다. 「이 볼트 푸는 동안 지상에선…」 봄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영감님 제발.」 모두가 웃었다. 웃으면서 돌렸다. 웃는 힘이 렌치로 갔다.
기지 시각 04:18 · 수심 6,340m · 1 : 97
네 번째 볼트 앞에 기지장이 서 있었다.
보안 인력 둘을 데리고. 제복 소매에 유압유 얼룩이 그대로였다. 그는 밸러스트실 안을 둘러봤다. 렌치에 매달린 늙은 손들을. 산소통들을. 봄의 피를. 빠진 볼트 셋을.
“환자를 밸러스트실에 끌어들였군. 산소통을 끌고. 이게 자네가 말하는 보호인가, 하란 씨.”
소 영감이 렌치에서 손을 떼지 않고 말했다.
“끌려온 거 아니야. 줄 서서 왔어. 칠십 년 만에.”
기지장은 영감을 보지 않았다. 나를 봤다.
“네 번째를 풀면 기지가 기울어진 채로 떠올라. 줄 넷이 한꺼번에 느슨해지고, 드럼이 헛돌아. 요양동 배관이 또 꺾일 수도 있어. 이번엔 투여 중인 아이가 거기 누워 있지. 자네가 책임질 수 있나.”
나는 렌치를 놓았다. 기지장 앞으로 걸어갔다. 갈비뼈가 찔렀다. 무게가 어깨를 눌렀다. 나는 주머니에서 칩을 꺼냈다. 두 번째 칩. 손가락 한 마디.
“기지장님. 2112년 8월 19일 23시 21분. 탈출정 수동 잠금. 코드 STO-0419. 23시 40분부터 58분까지 해제 신호 거부 열일곱 번. 관제 윤서경이 해제하라고 할 때, 관제 통신 종료라고 하신 목소리. 이 안에 있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한 선생님이 이중 기록을 꺼냈습니다.”
기지장의 눈이 한 번 흔들렸다. 아주 조금.
“그때도 책임질 수 있냐고 물으셨으면 저는 대답했을 겁니다. 그 칸에 서명했으니까요. 이번에도 대답하겠습니다. 네. 제가 책임집니다. 풀겠습니다.”
나는 돌아서서 렌치를 다시 잡았다. 보안 인력 하나가 움직였다. 기지장이 손을 들지 않았다. 대신 보안 인력의 팔을 잡은 건 한지오였다. 의무실에서 뛰어 내려온 얼굴이었다.
“은채 배관 제가 잡고 있어요. 수동 밸브로. 꺾이면 제 손으로 막아요. 푸세요.”
여덟 사람이 매달렸다. 스무 바퀴. 기지장은 그 자리에 서서 보고만 있었다. 막지도, 돕지도 않았다. 육십삼 년 전 그날 밤처럼.
네 번째 볼트가 빠졌다.
나중에 한지오에게 들었다. 그 순간 요양동 배관이 한 번 크게 휘었다고. 한지오는 수동 밸브를 두 손으로 붙잡고 온몸으로 버텼다고. 은채의 산소 줄에서 쉭 하는 소리가 났다가 멎었다고. 은채는 눈을 뜨고 벽의 둥근 글씨를 보고 있었다고. 한지오가 괜찮냐고 묻자 은채가 대답했다고. 「셋 중 둘이잖아, 한 쌤. 아니다, 영점팔이지.」
바닥이 솟았다. 기지 전체가 한 번 크게 흔들리고, 발바닥에서 무게가 빠졌다. 반 뼘쯤 떠오르는 느낌. 드럼이 헛도는 소리가 위층에서 났다. 벽 속 수심 표시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6,330. 6,300. 6,250. 오른쪽 시계가 느려지는 걸 소 영감이 봤다고 했다. 모 할머니가 렌치를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웃었다. 웃다가 산소 마스크가 벗겨졌고, 벗겨진 채로 계속 웃었다. 봄이 마스크를 도로 씌워 주었다.
기지 시각 05:10 · 수심 6,180m · 1 : 88
수송정 도킹 포트에 경보등이 주황으로 돌았다. 무게추가 내려앉는 소리. 문이 열렸다. 문가람이 먼저 내렸다. 뒤로 수사관 둘. 문가람은 도킹 포트 앞에 모인 사람들을 봤다. 손바닥에 피를 묻힌 정비사, 갈비뼈를 감싼 청소부, 산소통을 끈 노인들.
기지장이 앞으로 나섰다. 제복 소매를 폈다.
“벽해 기지장 서태오입니다. 여기선 아무도 늙지 않아요. 늙는 건 저 위의 돈뿐이죠. 감독관님도 여기 있다 가시면 알게 될 겁니다.”
문가람은 영장을 펼쳤다.
“서태오 씨. 2112년 8월 탈출정 2번 탑승자 네 명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올라가시죠. 저 위에서 늙으러.”
나는 칩을 수사관 손에 올려놓았다. 손가락 한 마디. 육십삼 년 동안 이 기지 바닥에 있던 무게였다. 내 손바닥이 가벼워졌다.
기지장은 수갑을 찬 채 수송정 발판에 올랐다. 발판에서 한 번 돌아봤다. 기지를. 식당 벽의 시계 두 개가 보이는 쪽을. 그리고 들어갔다. 발판이 올라갔다. 수송정이 떠나는 데 기지 시각 열두 시간. 그가 해수면에 닿을 때 지상은 사십 일이 지나 있을 것이다. 그가 좋아하던 비율이었다.
문가람은 기지에 남았다. 수사관 하나와 함께. 현장 조사를 위해서. 그는 의무실로 가서 한지오에게 신분증을 보이고, 은채의 침대 앞에 섰다. 은채는 투여 스무 시간째였다. 얼굴에 핏기가 조금 돌아와 있었다. 손톱은 아직 푸르렀다.
“오은채 씨죠. 전할 말이 있어요. 조카분이.”
“조카 언니요.”
문가람이 멈칫했다가 고쳐 말했다.
“조카 언니분이 전해 달래요. 복학했대요. 간호학과.”
은채는 한참 천장을 봤다. 그리고 벽의 둥근 글씨를 봤다. 고모는 왜 안 올라오나요.
“감독관 아저씨. 올라갈 때 나도 전할 말 있어.”
“뭐요?”
“지금 올라간다고. 칠십이 시간 뒤에.”
봄이 의무실 문간에서 찢어진 손바닥을 붕대로 감다가 코를 훌쩍였다. 소 영감이 그 등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지상 시간을 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