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07자) · 의료 긴급 통신

영점팔

시간을 빌린 사람들 · 문가온

만 19세 이상 이용가

지상 2175년 1월 · 기지 시각 08:10

보건청 의약품 심사부 민원 창구 직원은 은서가 내민 서류를 두 번 밀어냈다. 첫 번째는 양식이 틀렸다고. 두 번째는 민간 기지 환자는 회사 의료진이 판단할 일이라고.

은서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간호학과 이 학년 교재. 해양 의료 법규.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휴학하면서도 팔지 않은 책이었다. 그 애는 포스트잇이 붙은 쪽을 펴서 창구 유리에 댔다.

“해양 의료법 제구조. 수심 삼천 미터 이상 해양 시설의 환자 가족은 보건청을 통해 시설 의료 책임자에게 의료 긴급 통신을 요청할 수 있다. 해당 통신은 시설의 어떠한 정보 필터로도 차단할 수 없다. 이 학년 일 학기 기말고사에 나왔어요. 저 이거 틀려서 비플 받았어요.”

직원이 책을 봤다. 은서를 봤다. 은서 뒤에 선 나를 봤다. 지팡이를 짚은 백이십 년짜리 늙은이.

“그 조항, 실제로 쓴 사람이 없어요. 만들어지고 나서 한 번도.”

“그럼 제가 처음이네요.”

직원은 한참 망설이다가 상급자를 불렀다. 상급자는 서류를 읽다가 전무 채도경의 서명이 있는 위험 평가 메모 사본에서 멈췄다. 그리고 안경을 벗었다.

“이 문서, 저희 부서 이름이 붙어 있는데 저희가 쓴 게 아니네요.”

통신은 그날 오후 네 시에 나갔다. 기지 시각으로 한 시간쯤 뒤에 닿을 것이다. 은서는 보건청 계단에 앉아 시계를 봤다. 초침이 보이는 시계. 그 애는 초침을 세지 않았다. 대신 책을 가방에 도로 넣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 이 학기 복학할래요. 고모 올라오면 누가 돌봐요.”

기지 시각 09:20 · 지상 2175년 2월 · 수심 6,251m · 1 : 92

근신실은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찬다. 기지가 기울어져서 한쪽 벽이 바닥이 되려다 만 각도였다. 봄은 벽 쪽에, 나는 문 쪽에 기대앉았다. 갈비뼈가 숨 쉴 때마다 찔렀다. 한지오가 아니라 보안 인력이 붕대를 감아 주고 갔다. 너무 세게 감아서 숨이 반만 쉬어졌다.

봄은 소 영감이 넣어 준 검은 바둑돌을 손바닥에서 굴리고 있었다. 돌이 손바닥 온도로 데워져 있었다.

“선배. 기울어진 방에서 이틀 치 밥 못 먹으면 지상에선…”

“하지 마.”

“반년 굶은 거예요.”

“하지 말랬지.”

봄은 웃었다. 웃다가 배를 움켜쥐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웃다가 기울어진 벽에 옆구리를 찧어서였다.

기지 전체에서 공구 소리가 났다. 윈치실 쪽. 기지장이 직접 복구를 지휘한다고 했다. 유압 호스 넷을 새로 갈고, 기울기를 바로잡고, 다시 내린다. 호스 하나 가는 데 정비사 둘이 한 시간. 넷이면 네 시간. 정비과 여섯 명 가운데 둘이 여기 갇혀 있다.

문이 열렸다. 기지장이었다. 혼자 들어왔다. 제복 소매에 유압유 얼룩이 묻어 있었다. 처음 보는 얼룩이었다.

“하란 씨. 자네한테 선택을 주러 왔어.”

그는 서류 한 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울어진 바닥에서 서류가 조금 미끄러졌다. 진술서였다. 이미 채워져 있었다. 본인은 개인적 불만으로 윈치 유압 계통을 절단하였으며, 정비과 봄은 본인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서명란이 비어 있었다.

“서명하면 봄 군은 오늘 풀어 줘. 경고로 끝나. 첫 계약이고 어리니까. 자네는 다음 수송정에 태워 지상으로 보내지. 회사가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 해지. 지상에서 조용히 살면 돼. 연금도 나와.”

“다음 수송정은 없습니다. 하강하면.”

“하강 전에 한 대 더 부를 거야. 자네를 태우려고. 특별히.”

기지장은 무릎을 굽혀 내 눈높이에 앉았다. 처음이었다.

“하란 씨. 자네 지상에 가면 은채 가족한테 연락해 봐. 요금 밀렸다더군. 삼천이백만. 회사가 탕감해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대. 스무 살짜리가. 그 애가 거절하는 동안 은채 체류 등급은 다음 달부터 조정돼. 조정이 뭔지 알지. 요양동에서 위층 일반 병실로. 한 시간에 몇 초 빠른 방으로.”

그는 서류를 내 쪽으로 밀었다.

“서명 안 하면 봄 군도 같이 기지 파괴로 걸려. 지상 법으로 칠 년. 이 친구 칠 년 지나서 나오면 지상은 몇 년이지? 봄 군이 세어 보겠나.”

봄이 바둑돌을 쥔 손을 멈췄다.

봄이 나를 봤다. 고개를 저었다. 서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봄의 고개 젓는 것을 보고도 손을 뻗었다. 서류 옆에 볼펜이 있었다. 기지장은 볼펜까지 챙겨 왔다. 칠 년. 스물여섯 살이 서른셋이 되어 나오면 지상에서는 봄이 아는 사람들이 다 늙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나갔다 온 나는 그게 어떤 건지 알았다. 볼펜을 쥐었다. 뚜껑을 뺐다. 첫 계약 때 격납고 앞에서 서명만 하라고 했을 때도 이렇게 쥐었다. 그때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은 손이 멈췄다. 멈춘 채로 오래 있었다.

나는 서류를 봤다. 개인적 불만. 기지장이 좋아하는 단어였다. 무단 이탈, 정서 보호, 개인적 불만. 이유가 되는 단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이유.

그때 기지 전체 방송 스피커가 지직거렸다. 방송이 아니었다. 의무실 전용 채널이 기지 전체로 넘어온 소리였다. 한지오의 목소리.

“의무실에서 알립니다. 방금 지상 보건청에서 의료 긴급 통신을 받았습니다. 해양 의료법 제구조, 의료 긴급 통신은 기지 의료 책임자에게 직접 전달되며 어떤 필터로도 차단할 수 없습니다. 발신인 보건청 의약품 심사부. 요청인 오은서, 환자 가족.”

기지장이 일어섰다.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섬유화 치료제의 장기 중력정 체류자 투여 지침. 2169년 확정. 칠십이 시간 저용량 단계 투여 시 심정지 위험 영점팔 퍼센트. 삼십일 퍼센트가 아닙니다. 영점팔입니다. 둘째, 벽해개발 의료 자문단 명의로 기지에 전달된 위험 평가 메모는 보건청이 작성하거나 검토한 적이 없는 문서라는 확인서입니다.”

방송이 잠깐 멈췄다. 한지오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의사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는 그 숫자로 보름 동안 서른여덟 명을 여기 붙잡았습니다. 제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기지장이 손목 단말을 두드렸다. 방송이 끊겼다. 그는 나를 내려다봤다. 웃음이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격납고 음성 기록 속에서 들은 목소리의 얼굴이었다. 관제 통신 종료.

그는 서류를 집어 들지 않고 나갔다. 문이 잠겼다.

기지 시각 10:05 · 지상 2175년 2월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서 있는 사람은 한지오였다. 가운 위에 방호복을 반쯤 걸치고, 손에 노란 테이프를 들고 있었다. 뒤에 보안 인력 둘이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근신실 두 사람 감염 의심입니다. 외상 부위 유압유 노출, 이틀 금식. 의료 격리 조치합니다. 해양 의료법 제십일조. 격리 중에는 의사가 신병을 관리합니다. 기지장 명령보다 우선합니다.”

보안 인력 하나가 무전을 들었다. 「기지장님, 의사가…」 무전 너머에서 기지장의 목소리가 났다. 「막아.」

한지오가 그 보안 인력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키가 작았다. 그 순간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막으세요. 막고 나서 이 사람 갈비뼈가 폐를 찌르면 그건 당신 이름으로 기록돼요. 제가 기록해요. 저 이제 기록하는 사람이에요.”

보안 인력은 무전을 든 채로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한 발 비켰다.

의무실로 가는 복도는 기울어져 있었다. 봄이 내 어깨를 받쳤다. 한지오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격납고 칩, 두 번째 거. 아직 나한테 있어요. 이제 줄게요.”

그는 가운 주머니에서 칩을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손가락 한 마디. 열일곱 번의 거부와 윤서경의 마지막 목소리.

“의료 긴급 통신은 받는 것만 돼요. 보낼 수는 없어요. 이걸 지상에 보내려면 캡슐이든 수송정이든 사람이 들고 가야 돼요.”

“탈출정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한지오가 걸음을 멈췄다.

“육십이 년 된 거요?”

“이음매 멀쩡합니다. 산소 전지는 제가 어젯밤 가져다 놨습니다. 잠금만 풀면 됩니다. STO-0419.”

“그 잠금을 건 사람이 지금 윈치실에 있잖아요.”

“네.”

의무실 안에는 벌써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모 할머니가 휴대용 산소통을 끌고 맨 앞에 서 있었고, 소 영감이 그 뒤에 바둑통을 안고 서 있었다. 한지오가 들어서자 모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한 선생, 영점팔이라며. 나도 맞을 수 있어?”

“할머니는 섬유화가 아니시잖아요.”

“아, 그렇지. 그래도 줄은 서 볼래. 칠십 년 만에 줄 서는 거야.”

소 영감이 봄을 보더니 바둑통에서 주먹밥 하나를 꺼냈다. 바둑통 안에 주먹밥이 있었다. 봄이 그걸 받아 들고 두 입 만에 먹었다. 먹다가 목이 메어 가슴을 쳤다. 소 영감이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이틀 굶었으면 지상에선…」 봄이 먹던 걸 뿜을 뻔했다. 「영감님까지 왜 그래요.」

의무실 문 앞에서 은채가 휠체어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산소 줄을 코에 꽂은 채로. 무릎 위 담요에 편지 뒷장. 은채가 한지오를 올려다봤다.

“한 쌤. 방송 들었어. 영점팔.”

“응.”

“영점팔이면 백 명 중에 한 명도 안 되는 거지.”

“응.”

“그럼 지금 시작해. 칠십이 시간. 기지 시간으로.”

한지오는 무릎을 꿇어 은채와 눈높이를 맞췄다.

“은채야. 투여 시작하면 칠십이 시간 동안 움직이면 안 돼. 수송정이 와도 그동안은 못 타. 여기 누워 있어야 돼.”

은채는 한참 생각했다. 열한 살의 얼굴로. 칠십삼 년을 기다린 얼굴로.

“칠십이 시간이면 지상에서 몇 년이야?”

봄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셀 수 있었지만 세지 않았다. 대신 내가 말했다.

“비율이 바뀌어서 정확히는 몰라. 대충 아홉 달.”

“은서 언니 생일 지나겠네. 스물한 살.”

은채는 웃었다. 그리고 편지 뒷장을 한지오에게 내밀었다.

“한 쌤, 이거 붙여 줘. 누워서 보이는 데.”

한지오는 편지 뒷장을 은채 침대 머리맡 벽에 테이프로 붙였다. 둥근 글씨가 맨 위에 오도록. 고모는 왜 안 올라오나요. 은채가 그 글씨를 올려다보며 누웠다. 한지오가 첫 투여 줄을 연결했다. 약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윈치실 쪽에서 공구 소리가 멈췄다. 기지 전체 방송이 울렸다.

“유압 계통 복구 완료. 하강 재개는 기지 시각 내일 04:00.”

열여덟 시간이었다. 은채의 칠십이 시간은 그보다 길었다. 은채가 누운 채로 벽의 둥근 글씨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약이 또 한 방울 떨어졌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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