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05자) · 달력
왼쪽 시계
시간을 빌린 사람들 · 문가온
만 19세 이상 이용가
기지 시각 06:00 · 지상 2175년 3월 · 수심 5,930m · 1 : 76
기지는 오천구백삼십에서 멈췄다. 무게추 넷을 잃은 몸이 줄 네 가닥이 허락하는 데까지 떠올라서 거기 걸렸다. 원래 자리보다 칠십 미터 위. 오른쪽 시계가 조금 느려졌다. 소 영감은 그 차이를 바둑 한 수로 쟀다. 「이제 한 수에 선거가 한 번이 안 돼. 반 번.」
해양안전청이 기지를 넘겨받았다. 문가람은 기지장실 문에 봉인 테이프를 붙이고, 서랍을 열어 편지 일곱 장을 꺼냈다. 윤서경의 필기체. 문가람은 그걸 증거 봉투에 넣기 전에 나에게 한 번 보여 주었다. 첫 장 맨 아래 한 줄을 나는 처음 읽었다. 기지장 서랍에 들어가기 전에는 못 읽은 줄이었다.
하란 씨.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때쯤 저는 없습니다. 그래도 묻지 마세요, 지금 지상이 몇 년이냐고. 대신 세어 보세요. 거기서 당신이 가진 시간을.
필터 서버는 봄이 껐다. 끄는 날 아침, 봄은 서버실 문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차단 보관함이 한꺼번에 풀렸다. 칠십 년 치 소식이 요양동 화면마다 쏟아졌다. 부고와 결혼과 출생과 선거. 모 할머니는 손주가 아홉 번 편지를 보냈다는 걸 알았다. 아홉 번 다 정서 보호로 막혀 있었다. 할머니는 그 아홉 통을 소리 내어 읽었다. 요양동 사람들이 다 들었다. 누구도 끄라고 하지 않았다.
수송정은 한 번에 여섯 명. 올라가는 데 열두 시간, 내려오는 데 열두 시간. 기지 하루에 한 번. 한지오가 순서를 정했다. 치료가 필요 없는 환자부터, 치료가 끝난 환자, 그리고 투여 중인 환자는 마지막. 서른여덟 명이 다 올라가는 데 기지 시각으로 이레. 지상으로는 한 해 반이 넘는다. 먼저 올라간 사람들은 부두에서 뒤에 올 사람들을 한 해 넘게 기다리게 된다. 한지오는 그 순서표를 요양동 벽에 붙이며 말했다.
“이번엔 기다리는 게 지상 쪽이에요. 칠십 년 기다렸으니까, 한 해쯤은.”
소 영감과 모 할머니는 첫 수송정에 탔다. 소 영감은 바둑판을 두고 갔다. 봄에게. 「총각, 올라와서 둬. 나 아홉 달 연습하고 있을게.」 봄은 바둑판을 받아 들고 경례를 했다. 「영감님, 아홉 달이면 저는 여기서 사흘이에요. 사흘 연습하고 갈게요.」 소 영감이 웃다가 수송정 문턱에 머리를 찧었다.
한지오는 순서표 맨 아래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서른여덟 명 다음. 근무자 가운데서도 마지막.
“의사가 먼저 올라가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저도 조사받아야 해요. 보름 동안 삼십일 퍼센트를 믿은 의사로. 면허 심사가 있을 거래요.”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억울하죠. 근데 확인 안 한 건 저예요. 서명한 건 하란 씨였고.”
한지오는 청진기를 목에 건 채로 웃었다. 그날 밤 그가 의무실 의자에서 청진기를 건 채로 잠든 걸 봄이 봤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나에게는 수사관이 왔다. 윈치 유압 계통 절단. 재물손괴. 격납고 무단 출입. 사정은 참작하되 입건은 한다고 했다. 나는 서명했다. 이번에는 칸을 다 읽고.
기지 시각 10:00 · 지상 2175년 8월
은채의 칠십이 시간이 끝났다. 한지오가 마지막 투여 줄을 뽑았다. 은채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두 손을 펴 봤다. 손톱이 분홍이었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끝이 조금 푸르스름했다. 한지오가 그 손톱을 한참 들여다봤다.
“지상 가서 석 달 더 맞아야 돼. 지상 석 달.”
“기지로 치면 한 시간 좀 넘는 거지?”
“거기선 그렇게 안 세.”
은채는 벽에 붙은 편지 뒷장을 떼었다. 테이프 자국이 네 귀퉁이에 남았다. 네 번 접어서 환자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나를 봤다.
“아저씨도 타?”
“타.”
“세 번째 계약 안 해?”
“안 해.”
은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아저씨는 올라가서 누구 만나?”
나는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첫 계약을 마치고 올라갔을 때, 아는 사람 넷이 나를 못 알아봤다. 이번에 올라가면 그 넷도 없을 것이다. 정 노인이 있다. 달력을 든.
“만들 거야.”
은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저씨 귀.”
“안 빨개.”
“응. 안 빨개.”
나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 벽에 시계 두 개가 걸려 있었다. 오른쪽, 지상 시각. 초침이 안 보이고 분침이 시침처럼 도는. 왼쪽, 기지 시각. 초침이 보이고 보통 시계처럼 도는.
첫 계약 때부터 나는 오른쪽 시계를 안 봤다. 안 보면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안 보는 동안 왼쪽 시계도 안 봤다. 여기서 내가 가진 시간을. 두 번의 계약. 몸으로 여섯 해. 그 여섯 해 동안 나는 필터를 켜고, 드럼을 닦고, 서명을 했다. 아무도 만들지 않았다. 윤서경이 세어 보라고 한 것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었다.
나는 의자를 딛고 올라가 왼쪽 시계를 벽에서 뗐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먼지 자국이 벽에 동그랗게 남았다. 뒤판에 제조 연도가 찍혀 있었다. 2051. 이 기지가 생긴 해. 백이십사 년 동안 여기서 초침을 돌린 시계였다. 봄이 식당 입구에서 나를 봤다.
“선배. 그거 가져가요? 기지 비품인데.”
“해양안전청에 신고할게.”
“통계적으로 비품 들고 가는 퇴사자는…”
봄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바둑판을 옆구리에 낀 채로 다가와, 시계를 감쌀 수건을 건넸다.
“저는 다음 수송정이에요. 한 선생님이랑. 올라가면 부두에서 기다려 주세요, 선배. 기지로 하루, 지상으로 두 달 반이에요.”
“기다릴게.”
기지 시각 12:00 · 지상 2175년 8월
수송정 안에서 은채는 내 작업복 소매를 쥐었다. 칠십사 년 전 이 기지로 내려올 때처럼. 열두 시간 동안 놓지 않았다. 올라갈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수압이 줄어서가 아니라 무게가 줄어서. 은채가 중간에 한 번 말했다.
“아저씨. 나 이제 무겁지 않아.”
“응.”
“가벼운 게 좀 무서워.”
“정 어르신도 그랬대.”
나는 윤서경의 마지막 줄을 떠올렸다. 세어 보세요, 거기서 당신이 가진 시간을. 수송정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었다. 스물여덟에 내려와서 서른넷. 몸으로 여섯 해. 그 여섯 해 가운데 은채가 내 소매를 쥔 시간이 이번까지 스물네 시간이었다. 여섯 해 가운데 스물네 시간. 작았다. 그래도 그건 내 쪽 숫자였다. 오른쪽 시계가 한 번도 세어 주지 않은 숫자.
무릎 위에 수건으로 감싼 시계가 있었다. 초침이 수건 너머로 째깍거렸다. 은채가 거기 귀를 댔다.
지상 2175년 9월 26일
부산 신항 제7부두. 수송정 문이 열리자 빛이 먼저 들어왔다. 갈매기, 크레인, 누가 우는 소리.
부두에 은서가 서 있었다. 스물한 살. 간호학과 실습복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그 옆에 지팡이를 짚은 정 노인. 한 해 넉 달 사이에 등이 조금 더 굽었다. 손에 종이 달력을 들고 있었다.
은채가 발판에 섰다. 가벼움에 비틀거렸다. 은서가 뛰어와 받쳤다. 은서가 은채를 내려다봤다. 은채가 은서를 올려다봤다. 열 살 차이. 거꾸로.
“고모.”
“조카 언니.”
둘 다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은채가 은서의 실습복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오은서. 그리고 주머니에서 네 번 접힌 종이를 꺼내 펴서, 맨 아래 둥근 글씨를 짚었다. 고모는 왜 안 올라오나요.
“올라왔어.”
은서가 무릎을 꿇었다. 은채를 안았다. 실습복 어깨가 젖었다. 은채가 은서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언니 늙었다.」 은서가 울다가 웃었다. 「고모가 어려진 거야.」 부두 사무소 직원들이 창문에 붙어 구경했다. 은서가 실습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 은채 가슴에 댔다. 한참 들었다. 간호학과 이 학년의 얼굴로. 그러다 청진기를 빼고 말했다. 「고모, 심장 소리 좋다. 가볍다.」 은채가 그 청진기를 뺏어 자기 귀에 꽂고 은서 가슴에 댔다. 「언니 건 빨라.」
은서가 은채를 안은 채로 나를 봤다. 그리고 정 노인을 봤다. 정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한 해 넉 달 치 이야기가 오간 얼굴이었다. 나중에 정 노인이 전부 말해 주었다. 서태오는 살인 네 건으로 기소됐다. 채도경은 문서 위조와 공모로. 벽해개발은 영업이 정지됐고, 국회에 시간 채무를 금지하는 법안이 올라갔다. 칠십 년 동안 낸 요금을 돌려받는 소송이 서른여덟 가족 이름으로 걸렸다. 은서의 밀린 삼천이백만 원은 법원이 청구를 멈추게 했다. 은서는 그 소식을 편의점 대신 강의실에서 들었다고.
정 노인이 나에게 걸어왔다. 지팡이 소리가 콘크리트에 또각거렸다. 그는 내 품의 수건 뭉치를 봤다. 수건 틈으로 초침이 보였다.
“그거 뭐냐.”
“왼쪽 시계입니다.”
정 노인은 한참 그걸 보다가 웃었다. 이가 몇 개 없었다. 틀니는 이제 입에 있었다.
“달력 봤냐.”
“아직요.”
그는 종이 달력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구월 이십육 일까지 가위표가 빼곡했다. 너무 세게 쳐서 종이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이십칠 일부터는 비어 있었다.
“오늘부터 네가 쳐. 나는 이제 좀 쉬련다.”
“어르신. 윤서경 씨는 어디 계십니까?”
정 노인은 달력을 한 장 넘겨 뒷면을 보여 주었다. 볼펜으로 주소가 적혀 있었다. 영도 바닷가 납골당. 몇 층 몇 번째 칸.
“은서가 찾았어. 너 오면 같이 가자고. 내일 가자. 달력 한 칸 치고.”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 매일 너한테 한 말 있잖아. 새벽마다.”
무게 조심하세요. 나는 그 말을 입속으로 한 번 굴려 봤다. 여기서는 무게가 없다. 그래도 조심할 것은 있다. 육십삼 년 동안 한 사람이 들고 있다가, 세 사람을 거쳐 나에게 온 무게. 내일 나는 그 칸 앞에서 그 말을 돌려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나는 달력을 받았다. 오늘은 구월 이십육 일이었다. 스물여섯 번째 칸에 이미 가위표가 있었다. 정 노인이 아침에 친 것이었다. 나는 스물일곱 번째 빈칸을 봤다. 내일. 그 칸은 내일 치면 된다. 오늘은 이미 쳐져 있으니까.
부두 사무소 벽 빈 못에 나는 왼쪽 시계를 걸었다. 직원이 뭐라고 하려다 말았다. 초침이 돌았다. 여기서는 오른쪽 시계가 필요 없었다. 지상 시각과 내 시각이 같은 속도로 가는 곳이었다. 백이십사 년 만에 이 시계는 바깥 시간과 나란히 돌았다.
은채가 은서의 손을 잡고 걸어와 시계 앞에 섰다. 두 사람이 나란히 초침을 봤다.
“아저씨. 이제 세?”
“응. 이번엔 이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