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124자) · 합의서

지상 사십 일

시간을 빌린 사람들 · 문가온

만 19세 이상 이용가

지상 2174년 5월 27일 · 기지 시각 02:10

수송정 문이 열리자 빛이 먼저 들어왔다. 그다음이 소리였다. 갈매기, 크레인, 누가 욕하는 소리. 그다음이 무게였다. 아니, 무게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발판을 딛는 순간 몸이 반 뼘쯤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백이십 년 동안 어깨에 얹혀 있던 누군가가 손을 뗀 것처럼. 나는 그 가벼움에 넘어질 뻔했다. 세 번째라 알면서도.

부산 신항 제7부두. 벽해개발 전용 부두다. 사십 일 전 필리핀해 한가운데 해상 플랫폼에서 수송정을 건져 올린 배가 오늘 아침 여기 닿았다. 배 안에서 사십 일을 누워 있었다. 몸은 그 사십 일을 모른다. 수송정 안의 열두 시간만 안다.

부두 사무소 벽에 달력이 걸려 있었다. 종이 달력. 벽해 부두는 옛날식을 좋아한다. 오월. 이십칠 일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누가 쳤는지 모른다. 나는 그 앞에 서서 한참 봤다. 오늘이 오월 이십칠 일이다. 백이십 년 만에 날짜를 알았다.

“정만호 선생님!”

검은 양복 둘이 꽃다발을 들고 뛰어왔다. 벽해개발 대외협력실. 한 사람이 꽃을 안기고, 한 사람이 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를 받아 든 사람이 무게를 가늠하듯 두 번 들었다 놨다.

“백이십 년 근속, 회사 역사상 처음입니다. 전무님이 직접 모시라고 하셨어요. 해운대에 회사 요양 호텔을 잡아 두었습니다. 지상 적응 프로그램 삼 개월. 식사, 의료, 다 무료입니다.”

“적응 안 해도 돼. 난 세 번째야.”

“규정입니다, 선생님.”

규정. 백이십 년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지상에 올라와서 처음 들은 말도 그거였다.

지상 2174년 6월 3일

요양 호텔은 좋았다. 창밖이 바다였다. 침대가 넓고 이불이 가벼웠다. 식사 때마다 간호사가 혈압을 쟀다. 방문은 밖에서 잠기지 않았다. 대신 복도 끝 엘리베이터 앞에 늘 양복 하나가 앉아 있었다. 산책을 나가면 그 양복이 열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적응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 나는 틀니를 뺐다. 식당에서. 간호사가 보는 앞에서. 틀니를 물컵에 넣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틀니가 안 맞아. 지상 오니까 잇몸이 부었어. 치과 가야겠어. 내 단골 치과. 백이십 년 전부터 다니던 데.”

“백이십 년 된 치과가 있어요?”

“있지. 자갈치에. 삼대째 해.”

없었다. 그래도 양복은 치과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늙은이가 입을 벌리고 앉아 있는 걸 지켜볼 규정은 없었다. 나는 자갈치 어느 건물 삼 층 치과 대기실에 들어갔다가, 뒷문 비상계단으로 내려와 택시를 탔다. 틀니 통을 주머니에 넣고. 틀니 밑에는 여전히 종이가 깔려 있었다.

물자 발송소는 신항 제3부두 뒤 골목에 있었다. 기지로 가는 편지는 여기서만 부친다. 창구에 앉은 사람은 예순쯤 된 여자였다. 안경을 코끝에 걸고 있었다.

“기지 편지요? 한 통에 지상 임금 일 년 치예요, 어르신. 요즘은 이천사백만 원.”

“부치러 온 거 아니야. 몇 달 전에 여기서 편지 부친 아가씨를 찾아.”

여자는 안경 너머로 나를 봤다.

“그런 거 알려 드리면 안 돼요.”

“나 벽해에서 백이십 년 있었어. 오늘로 지상 적응 일주일째고.”

여자가 안경을 벗었다.

“백이십 년이요? 그럼 우리 할머니 태어나기 전에…”

“그러니까 이 늙은이 소원 하나 들어줘. 할머니 대신.”

여자는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알려 줄 수는 없다고. 대신 그 아가씨는 매달 첫째 주 수요일 밤 아홉 시에 여기 와서 답장 왔느냐고 묻는다고. 넉 달째. 답장은 절대 안 온다고 말해 줬는데도 온다고. 오늘이 첫째 주 수요일이라고.

오은서는 아홉 시 칠 분에 왔다. 편의점 조끼를 입은 채였다. 이름표에 오은서. 스무 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었다. 은채처럼. 그 애는 창구로 가다가 대기 의자에 앉은 나를 봤다. 여자가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답장 왔어요?”

은서가 물었다. 나를 보고. 나는 틀니 통을 꺼내 열었다. 은서가 한 발 물러섰다. 나는 틀니를 들어 올리고 그 밑에서 종이를 꺼냈다.

“미안하다. 봉투가 이거밖에 없었어.”

은서는 종이를 받았다. 차단 기사 한 장. 규칙 목록 네 줄. 편지 뒷장을 옮겨 적은 종이. 하란의 글씨. 그 애는 선 채로 읽었다. 기사 제목에서 멈췄다. 차단 사유 칸에서 멈췄다. 정서 보호. 그리고 규칙 목록 둘째 줄에서 멈췄다. 섬유화 치료제, 등록 2165년, 기지장 권한.

“알고 있었어요? 기지에서?”

“기지장만.”

은서의 손이 떨렸다. 종이가 사각거렸다.

“저 삼 년 동안 회사에 편지 썼어요. 스무 통. 고모 언제 올라오냐고. 치료제 나왔는데 왜 안 올라오냐고. 답장이 매번 똑같았어요. 기지 의료진이 판단합니다. 기지 의료진이 판단합니다. 스무 번.”

그 애는 편의점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내밀었다. 청구서. 오은채 체류 요금. 지상 2174년분. 미납 누적 삼천이백만 원. 그 아래 빨간 글씨. 미납 지속 시 환자 체류 등급 조정.

“할아버지가 오십 년 냈고, 아빠가 삼십 년 냈어요. 아빠는 편의점 두 개 했어요. 하나는 요금, 하나는 우리 밥. 아빠 죽고 가게 하나 팔았어요. 이제 제 차례예요. 저 간호학과 휴학했어요. 고모 올라오면 제가 돌보려고 간호학과 간 건데, 요금 내느라 휴학했어요.”

은서는 웃었다. 웃음이 끝까지 안 갔다.

“웃기죠. 고모가 저보다 아홉 살 어려요.”

지상 2174년 6월 5일

벽해개발 본사는 센텀 쪽 유리 건물 사십 층에 있었다. 로비 벽 전체가 화면이었다. 화면 속에서 모래시계를 두 손으로 받쳐 든 그림이 천천히 돌았다. 시간을 빌려 드립니다.

전무 채도경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양 호텔 양복이 먼저 보고한 모양이었다. 오십 대 여자. 회색 정장.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기지장과 같은 종류의 부드러움이었다.

“정만호 선생님, 치과는 잘 다녀오셨어요? 은서 씨도 반가워요. 편지 스무 통, 제가 다 읽었어요.”

회의실 탁자 위에 서류 두 부가 놓여 있었다. 채도경은 한 부를 은서 앞으로 밀었다.

“은서 씨. 미납 삼천이백만 원, 전액 탕감해 드릴게요. 앞으로 오 년 요금도 회사가 부담합니다. 고모님은 치료 안전성이 확인되는 대로 최우선 귀환 대상에 올려 드릴게요. 대신 한 가지만. 이 건에 대해 언론, 당국, 온라인, 어디에도 말하지 않는다는 합의서예요. 정서 보호 차원이에요. 기지 환자 서른여덟 명과 그 가족 전체의.”

그리고 다른 한 부를 내 앞으로 밀었다.

“선생님 퇴직 신탁이에요. 백이십 년 치 임금과 이자. 기밀 유출 조사가 끝날 때까지 동결됐어요. 유감이지만 규정이라서요.”

나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은서를 봤다. 은서는 합의서를 보고 있었다. 삼천이백만 원. 오 년. 최우선. 스무 살짜리가 편의점 조끼를 입고 이천사백만 원을 모아 편지 한 통을 부쳤다. 그 애의 손이 볼펜 쪽으로 갔다. 볼펜을 쥐었다. 서명란 위에 멈췄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말릴 자격이 없었다. 백이십 년 동안 나는 기지에서 한 번도 누구 편을 든 적이 없다. 필터가 뭘 막는지 묻지 않았고, 탈출정이 왜 부서졌는지 묻지 않았다. 딸이 쉰여덟이 되어 부두에 나와 있을 때 나는 그 애 얼굴을 못 보고 다시 들어갔다. 이 애가 서명한다고 해서 내가 할 말은 없었다.

은서가 볼펜을 쥔 채로 물었다.

“전무님. 안전성은 누가 확인해요?”

“회사 의료 자문단이요.”

“자문단에 누가 있어요?”

채도경이 웃었다.

“저도 있죠.”

은서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합의서를 탁자 가운데로 도로 밀었다.

“저 간호학과 이 학년 일 학기까지 다녔어요. 약리학 들었어요. 자문단에 의사 아닌 사람이 있으면 그건 자문단이 아니라 영업부래요. 교수님이 그랬어요.”

그 애는 일어섰다. 편의점 조끼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삼천이백만 원 제가 낼게요. 고모는 제가 올릴게요.”

채도경은 앉은 채로 은서를 올려다봤다. 웃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은서 씨. 기지에는 하루가 팔십 일이에요. 은서 씨가 그 돈 모으는 동안 고모님은 며칠도 안 늙어요. 은서 씨만 늙어요. 그리고 곧 백이십 일이 될 거예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은서는 울지 않았다. 사십 층에서 일 층까지 내려오는 동안 층수 표시만 봤다. 일 층 문이 열리기 직전에 말했다.

“할아버지. 백이십 일이 무슨 뜻이에요.”

“기지를 더 내린다는 거야. 더 내리면 수송정이 못 내려가.”

로비 화면 속 모래시계가 천천히 돌았다. 은서가 그 앞에서 멈췄다.

“그럼 시간이 없는 거네요. 우리 쪽에는 많고, 저쪽에는 없고.”

그 애는 휴대폰을 꺼내 편지 뒷장 사본을 다시 봤다. 붉은 동그라미 넷. 기록 코드 X. 이름 넷.

“할아버지. 이 네 사람도 가족이 있었겠죠.”

“있었겠지.”

“살인은 시효가 없어요. 약리학 말고 교양으로 들었어요.”

은서는 이름 넷을 소리 내어 읽었다. 로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봤다. 나는 그 애 옆에 서서 틀니 통을 주머니 속에서 쥐었다. 오른쪽 시계는 여기 없었다. 대신 로비 시계가 보통 시계처럼 돌았다. 초침이 보였다. 나는 백이십 년 만에 초침이 무섭다는 걸 알았다. 저 초침 한 칸 한 칸이 저 아래에서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지상 2174년 6월 9일

해양안전청 부산지청 민원실. 감독관 문가람은 서른 중반이었다. 소매를 걷은 셔츠에 볼펜 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는 우리가 내민 종이를 끝까지 읽고, 한 번 더 읽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치료제 소식을 막은 건 계약서 안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약관에 정서 보호 필터가 있고, 환자 가족이 거기 서명했어요. 저희가 기지를 세우고 들어갈 근거가 안 돼요. 수송정 운항 허가도 회사 거고요.”

“하강은?”

“심도 변경은 신고 사항이에요. 신고는 들어와 있어요. 석 달 전에.”

석 달 전. 기지에서 집회가 열리기도 전이었다. 은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문가람은 종이 맨 아래 붉은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다만 이건 달라요. 사람이 죽었고, 사고가 아니라면. 살인이면 저희가 아니라 검찰이 들어가요. 검찰이 들어가면 저희가 배를 띄워요. 유족 고소든 증거든, 둘 중 하나만 있으면.”

그는 볼펜으로 이름 넷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

“육십이 년 전이에요. 유족 찾는 데 몇 달은 걸릴 거예요.”

“몇 달이면 저 아래서는 하루도 안 돼.”

내가 말했다. 문가람이 나를 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볼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여기서 서두르면 되겠네요. 저 아래는 느리니까.”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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