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24자) · 틀니 통

세 번이 최대

시간을 빌린 사람들 · 문가온

만 19세 이상 이용가

기지 시각 08:40 · 지상 2174년 4월

기지장은 작업화를 벗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하란 씨. 그 편지를 쓴 사람은 관제실에서 쫓겨났어. 근무 중 음주, 허위 보고. 기록에 다 있어. 죽기 전에 원한을 종이에 쏟아 놓고 간 사람이야. 그런 종이는 여기서 쓸모가 없어.”

“원한이 있었습니까?”

“누구나 있지. 여기 있는 사람이면.”

기지장은 편지 일곱 장을 모아 서랍에 넣고 잠갔다. 열쇠를 제복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단추를 채웠다.

“한 가지만 부탁하지. 요양동에 가서 편지 얘기 하지 마. 특히 그 아이한테. 오은채. 그 아이 집안은 칠십 년째 요금을 내고 있어. 지상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적어 보냈든, 그 아이가 헛된 기대를 하면 몸이 먼저 상해. 섬유화는 마음을 따라가는 병이야.”

그 말은 다정하게 들렸다. 다정하게 들리는 게 기지장의 일이었다.

기지 시각 10:05 · 지상 2174년 4월

필터 서버는 정비실 안쪽, 냉각수 배관이 지나가는 좁은 방에 있다. 지상에서 내려오는 소식은 전부 이 서버를 거친다. 기지 규정은 이걸 「정서 보호 필터」라고 부른다. 지상 사십 년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사람이 못 견딘다고. 전쟁, 가족의 부고, 사라진 도시. 그런 건 걸러서 조금씩 준다. 나는 그 서버의 관리자다. 팬을 갈고, 먼지를 털고, 로그가 꽉 차면 비운다. 두 번째 계약 넉 달 동안 한 번도 그 안에 무엇이 걸리는지 열어 보지 않았다. 열어 볼 이유가 없었다. 걸러 주는 게 고마웠다.

차단 규칙 목록을 열었다. 줄이 이천 개가 넘었다. 대부분 예상한 것들이었다. 대량 사망, 전쟁, 재난. 그 사이에 이상한 줄이 끼어 있었다.

섬유화 치료제. 섬유화 승인. 벽해 탈출정. 윤서경.

규칙마다 등록자와 등록일이 붙어 있었다. 등록자는 전부 같은 계정이었다. 기지장 권한. 등록일은 넷 다 달랐다. 윤서경은 2113년. 벽해 탈출정은 2112년. 섬유화 치료제는 2165년. 구 년 전. 기지 시각으로는 마흔하루 전.

차단된 기사 보관함을 열었다. 걸러진 소식은 지워지지 않고 여기 쌓인다. 날짜순으로 넘겼다. 2165년 6월. 보건청, 심근섬유화 치료제 최종 승인. 완치율 구십이 퍼센트. 소아 환자 우선 투여. 그 아래 사진이 있었다. 병원 복도에서 아이 하나가 링거 걸이를 끌며 웃고 있었다. 은채 또래였다.

보관함 검색창에 오은채를 쳤다. 세 건이 나왔다. 2150년, 오선영 부고. 은채의 어머니. 2170년, 오준 부고. 은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동생. 은채가 이 기지에 내려온 뒤에 태어나서, 평생 누나의 요금을 내다가 쉰아홉에 죽었다. 그리고 2171년, 개인 전언 한 통. 보낸 사람 오은서. 고모, 저는 고모 조카예요. 스무 살 되면 제가 요금 낼게요. 걱정 마세요. 차단 사유 칸에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정서 보호.

마흔하루. 은채가 흥, 흥 하며 기지장 흉내를 내는 동안에도, 창에 시계 두 개를 그리는 동안에도, 이 기사는 여기 있었다. 내가 팬을 갈던 이 방에.

“찾을 걸 찾았나.”

기지장이 문간에 서 있었다. 배관 사이로 냉각수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들어오지 않고 문틀에 한 손을 짚었다.

“구 년 전에 치료제가 나왔습니다.”

“알아.”

그 대답이 너무 빨랐다.

“알고 막으셨습니까?”

“회사 의료 자문단 판단이야. 여기 오래 있은 몸은 지상 몸하고 달라. 칠십 년 동안 중력정 옆에서 굳은 심장에 새 약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몰라. 알 때까지는 알리지 않는다. 그게 보호야.”

“그럼 왜 요금은 계속 받습니까. 알 때까지.”

기지장은 웃었다. 이번에는 웃음이 얼굴 위쪽까지 올라왔다.

“하란 씨. 이 필터, 누구 계정으로 돌아가는지 알아? 운영은 자네 계정이야. 규칙은 내가 올렸지만 매일 아침 필터를 켜는 건 자네 손이야. 넉 달 동안 한 번도 안 빠지고. 칭찬하려고 했는데.”

그는 손목 단말을 두드렸다. 내 단말이 짧게 울렸다. 서버 관리자 권한 회수. 정비 등급 삼 단계 하향.

“오늘부터 봄이가 필터를 맡는다. 자네는 윈치실 청소나 하게.”

그가 돌아서다가 한마디를 더 얹었다.

“그리고 편지 뒷장. 가지고 있다면 태워. 여기서 불은 산소를 먹으니까, 조금만.”

요양동 앞을 지날 때 은채가 또 창에 붙어 있었다. 이번에는 이마 대신 손바닥을 대고.

“아저씨. 편지 우리 집 거였어?”

나는 창 앞에 섰다. 유리 너머 은채의 손바닥이 작았다. 손톱 끝이 조금 푸르스름했다. 섬유화가 심장에서 먼 곳부터 색을 바꾼다고 의사 한지오가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집 거」라고 말하면, 은채는 편지를 보여 달라고 할 것이다. 편지는 기지장 서랍에 있다. 뒷장은 내 작업화 밑에 있다. 뒷장 맨 아래에 고모는 왜 안 올라오나요 라고 적혀 있다. 그걸 읽은 은채가 기지장실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그다음 장면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옛날 관제사 아줌마가 보낸 거야.”

은채는 한참 나를 봤다. 그리고 손바닥을 창에서 뗐다.

“아저씨 거짓말할 때 귀 빨개지는 거 알아?”

“몰라.”

“지금 빨개.”

은채는 병실 쪽으로 돌아가다가 한 번 더 돌아봤다. 「괜찮아. 우리 집 돈 없는 거 알아.」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거짓말은 은채를 지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킨 게 은채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봄이 윈치실로 찾아왔다. 얼굴이 하얬다.

“선배. 기지장님이 내일 아침부터 제가 필터 켜래요. 저 그거 못 켜겠어요. 그거 켜면 은채가 약 소식을 또 하루 못 듣잖아요. 하루면 지상 팔십 일이에요.”

“켜.”

“선배.”

“안 켜면 너 내일 윈치실 청소하러 여기 와. 둘이 여기 있으면 아무도 서버실에 못 들어가. 켜고, 지켜봐. 뭐가 걸리는지.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거야.”

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걸레를 하나 집어 들고 윈치 드럼을 닦기 시작했다. 한참 닦다가 말했다. 「이 드럼 한 바퀴 닦는 동안 지상에선 벚꽃이…」 그러다 말을 멈추고 코를 훌쩍였다. 「아 진짜, 이제 이 농담도 못 하겠네.」

기지 시각 13:30 · 지상 2174년 4월

정 노인의 짐은 상자 하나였다. 개인 물품 반입 한도가 오 킬로그램이라 들어올 때도 오 킬로그램, 나갈 때도 오 킬로그램이다. 백이십 년 동안 세 번 들어왔다 세 번 나가는데, 짐이 한 번도 늘거나 줄지 않았다.

“어르신, 그게 다입니까?”

“백이십 년 치야. 가볍지.”

나는 정비실에서 복사해 온 것을 내밀었다. 차단 기사 한 장, 규칙 목록 네 줄, 그리고 편지 뒷장을 옮겨 적은 종이. 필터 서버 권한이 사라지기 전 삼십 초 동안 뽑은 것이었다.

“지상에 가시면 오은서라는 사람을 찾아 주세요. 스무 살. 이 종이를 보여 주세요.”

정 노인은 종이를 받아 들고 오래 봤다. 윤서경이라는 이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 목소리 알아. 새벽 관제. 무게 조심하세요 하던.”

“네.”

“내 딸 또래였지. 딸한테는 한 번도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정 노인의 딸 이야기는 기지 사람이면 다 안다. 딸이 열여덟일 때 첫 계약을 들어왔다. 여섯 달 일하고 나갔더니 딸이 쉰여덟이었다. 부두에서 딸이 그를 알아보고 처음 한 말이 「아빠 늙지도 않았네」였다고. 그는 딸 얼굴을 못 보겠어서 두 번째 계약을 했다. 두 번째 나갔을 때 딸은 없었다. 그래서 세 번째를 왔다.

“그 얘기 또 하실 거면 저 나가 있을게요.”

봄이 말했다. 정 노인은 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안 해. 오늘은 딴 얘기 할 거야. 이번엔 지상에 할 일이 있거든. 백이십 년 만에 처음이야, 할 일이 있는 게.”

그는 종이를 접어 상자 안에 넣으려다 멈췄다. 상자는 수송정 타기 전에 기지장이 직접 검사한다. 정 노인은 입을 벌려 아랫니 틀니를 쑥 뺐다. 봄이 옆에서 「으악」 하고 뒷걸음쳤다. 정 노인은 틀니 통을 열고, 틀니 밑에 종이를 깔고, 그 위에 틀니를 도로 얹고, 뚜껑을 닫았다.

“기지장이 백 가지를 열어 봐도 이건 안 열어. 삼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열었어. 더럽다고.”

봄이 코를 막은 채 경례를 했다. 「어르신, 존경합니다. 통계적으로요.」

기지 시각 14:00 · 지상 2174년 4월

수송정 도킹 포트 앞에 여섯 명이 다 나왔다. 기지장이 정 노인의 상자를 열었다. 옷 두 벌, 사진 한 장, 책 한 권, 틀니 통. 기지장은 사진을 들어 뒤집어 봤다. 책을 펼쳐 흔들었다. 틀니 통을 집어 들었다가, 뚜껑 틈으로 새어 나온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고 도로 넣었다.

“잘 가십시오, 정만호 씨. 세 번이면 최대입니다. 네 번째는 안 받아요.”

“알아. 규정 만든 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정 노인이 수송정 발판에 올랐다. 오르는 데 기지 시각 열두 시간. 지상으로는 사십 일이다. 그가 문턱에서 돌아봤다.

“하란이.”

“예.”

“나가면 뭐부터 할 줄 알아?”

“모르겠습니다.”

“달력 볼 거야. 여긴 날짜가 없잖아. 오른쪽 시계 밑 그 작은 창은 날짜가 아니야. 요금 청구서지.”

그는 기지장을 한 번 보고 웃었다. 이가 몇 개 없었다. 틀니는 통 안에 있었다.

수송정 문이 닫혔다. 경보등이 주황으로 한 번 돌았다. 줄이 감기는 소리가 갱을 타고 올라갔다. 기지장이 내 옆에 섰다.

“종이는 태웠나.”

“아니요.”

“그래. 솔직하군.”

기지장은 손목 단말을 봤다.

“열두 시간 뒤에 수송정이 해수면에 닿으면 지상은 사십 일이 지나 있지. 그동안 회사 사람이 부두에 나가 정만호 씨를 맞을 거야. 백이십 년 일한 분인데, 환영해 드려야지.”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알았다. 기지장은 틀니 통을 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종이가 어디 있든, 그 종이를 든 노인이 도착하는 곳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윈치실로 갔다. 청소나 하라고 했으니까. 윈치실 벽에 기지 줄 네 가닥이 드럼에 감겨 있었다. 그 줄 끝에 이 기지가 매달려 있었다. 걸레를 들고 드럼 옆에 서서, 나는 처음으로 그 줄이 얼마나 굵은지 손바닥으로 재 봤다. 두 손을 다 둘러도 손끝이 닿지 않았다. 이 줄이 더 풀리면 기지는 아래로 가고, 감기면 위로 간다. 청소부에게 윈치실 열쇠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지장은 아직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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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차2026.05.24· 2화

    이 장면 묘사가 오래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줄이요.

세 번이 최대 · 시간을 빌린 사람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