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153자) · 깨금 · 동짓달 스무엿새

이름을 부르는 밤

문지방의 계약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스무엿새 저녁, 절벽 위에 짝 열여섯이 나란히 누웠다. 누런 속살에 먹줄 자국이 곧았고, 모서리마다 팽덕수의 대패가 지나간 자리가 매끈했다. 이랑은 짝 하나하나를 손바닥으로 쓸며 결을 확인했다. 결이 거꾸로 선 짝은 반쪽만 데운다고 옥례가 말했었다. 열여섯 가운데 거꾸로 선 것은 없었다.

봉수와 장정 셋이 사흘 동안 염소 길에 발 디딤을 새로 팠다. 얼음을 도끼로 찍어 계단을 내고, 굽이마다 새끼줄을 말뚝에 걸었다. 막순 할멈도 복실도 새끼줄을 잡으면 오를 수 있었다. 내일 동틀 녘에 옥례가 첫 짝을 놓는다. 해가 짝을 넘어 들에 닿으면 자리가 되고, 옥례가 부르면 솔재 사람들이 올라온다. 이랑은 그 순서를 입속으로 세 번 되뇌었다.

한밤에 이랑은 절벽 끝에 섰다. 솔재 비탈에 관솔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막순 할멈이 밤마다 켜 두는 불이었다. 이랑은 그 불을 보고 돌아서려다가 멈췄다. 불빛 곁에 다른 불빛이 셋 있었다. 흔들리는 모양이 달랐다. 사람 손에 들린 불이었다.

이랑이 다시 봤을 때 막순 할멈의 불이 꺼졌다.

“옥례 언니!”

이랑은 불 곁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옥례가 대패를 든 채 일어났다. 이랑이 무엇을 봤는지 말하기도 전에 옥례의 얼굴이 하얘졌다. 옥례도 솔재 쪽 하늘이 캄캄하다는 걸 알아챘다.

“짝 지켜요. 종구랑 막쇠랑요. 누가 올라오면 절벽 끝으로 짝을 밀어요. 떨어뜨려서라도 뺏기지 마요.”

이랑은 새끼줄 한 타래를 어깨에 걸고 염소 길로 내려섰다. 봉수가 판 발 디딤이 밤에는 보이지 않았다. 얼음 계단을 발끝으로 더듬어 찾고, 말뚝에 걸린 줄을 손바닥으로 훑으며 내려갔다. 줄이 손바닥 살갗을 벗겼다. 뜨거웠다. 세 번째 굽이에서 발이 미끄러져 무릎이 바위 모서리에 찍혔다. 이랑은 비명을 삼키고 다시 줄을 잡았다. 해가 뜨려면 두 시진이었다. 새 짝은 해가 닿아야 데운다. 지금 쉰을 데울 수 있는 문지방은 하나뿐이었고, 그 문지방은 할아버지가 놓았다.

*

깨금은 오줌이 마려워서 깼다. 솔재 안은 늘 축축했지만 따뜻해서, 한밤에 깨면 이불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그래도 깨금은 문지방 밖에서 누기로 정해 두었다. 안에서 누면 김이 올라와 모두가 알았다. 깨금은 거적을 살그머니 들추고 문지방을 깨금발로 넘었다. 밖은 영하 스물둘이었다. 공기가 이빨을 때렸다.

바위 뒤에서 오줌을 누는데 발소리가 났다. 눈을 밟는 소리가 셋, 넷. 깨금은 바위 틈으로 내다봤다. 관솔불을 든 사내가 넷이었다. 맨 앞은 칼쇠였다. 손등에 덴 자국이 불빛에 번들거렸다. 칼쇠의 손에 쇠지레가 들려 있었다. 두 사내가 칼쇠 뒤를 따랐고, 맨 뒤에 두만이 섰다. 두만은 관솔불을 들고 있었는데 불이 떨리고 있었다.

칼쇠는 문지방 앞에 쪼그려 앉아 쇠지레 끝을 짝과 흙 사이에 밀어 넣었다.

“어른 말씀이다. 내 나무 거둬 간다.”

칼쇠가 낮게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깨금은 알 수 없었다. 문지방 안에서 자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고, 제 손에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칼쇠 형님.”

두만이 말했다.

“안에 사람 쉰이에요. 밖이 스물둘이에요.”

“알아.”

“복실이 일곱 살이에요.”

칼쇠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불이나 똑바로 들어.”

쇠지레가 흙을 파고들었다. 숯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두 사내가 짝 양 끝에 손을 넣었다. 깨금은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열었다. 목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짝이 들렸다.

숨 몇 번이었다. 안쪽 흙에서 오르던 김이 한 번에 꺼지고, 공기가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거적 위에서 누군가 깼다. 한 사람, 두 사람. 막순 할멈이 기침을 하다가 멈추고 “왜 이리 추워” 하고 중얼거렸다. 쇠분이 복실을 끌어안으며 일어났다. 누군가 문지방 쪽을 보고 소리쳤다. 문지방 자리가 비어 있었다. 흙에 긴 구멍 하나와 부서진 숯만 남았다.

칼쇠와 사내들은 짝을 어깨에 메고 비탈 아래로 내려갔다. 두만은 따라가지 않았다. 관솔불을 든 채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칼쇠가 돌아와 두만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두만은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났고, 그래도 따라가지 않았다. 칼쇠는 욕을 한 번 뱉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솔재 안이 솔재 밖과 같아졌다. 쉰이 한꺼번에 일어나 우왕좌왕했다. 불을 피우자는 사람, 거적을 겹쳐 덮자는 사람, 문턱골로 가자는 사람. 강서방이 소리쳤다.

“문턱골은 우리 못 넘어. 영감님이 안 불렀어.”

“그럼 여기서 얼어요?”

“목수 아가씨가 새 짝을 놓으면 되잖아?”

“해가 떠야 데워진대. 해 뜨려면 두 시진이야.”

강서방이 막순 할멈을 등에 업었다. 할멈은 가벼웠다. 쇠분이 제 털 덧옷을 벗어 복실을 둘둘 말았고, 덧옷을 벗은 쇠분의 어깨가 관솔불 아래서 금세 하얗게 떨었다. 덕칠 아저씨가 꺼진 관솔을 다시 붙이느라 부싯돌을 쳤다. 불똥이 튀었다가 눈에 떨어져 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겨우 붙었다.

두 시진이면 막순 할멈이 못 버틴다는 걸 깨금도 알았다. 깨금은 달렸다. 누구에게 말하고 달린 게 아니었다. 문턱골까지 삼 리였다. 길은 눈에 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깨금은 이 길을 스무 번도 넘게 오갔다. 감자를 얻으러, 소금 항아리를 받으러, 곰녀 아주머니 엉덩이 도 재는 걸 구경하러. 발이 눈에 빠졌다가 빠져나왔다. 짚신 한 짝이 벗겨졌다. 깨금은 줍지 않았다. 한 발로 뛰었다. 깨금발은 빨랐다. 언 발바닥이 눈을 밟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는데, 그 뜨거움이 이상하다는 걸 알 틈도 없었다.

문턱골 어귀 문지방 앞에서 깨금은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문지방에 손을 뻗었는데 손이 넘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깨금을 부른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

깨금은 목이 찢어지게 불렀다. 목수 할아버지의 이름을 몰랐다. 할아버지라고만 불렀다.

“할아버지! 솔재 문지방 뽑혔어요! 칼쇠가 뽑아 갔어요!”

너럭바위 쪽 귀틀집에서 먼저 불이 켜졌다. 곰녀가 속곳 바람으로 뛰어나왔다. 곰녀는 깨금을 보고, 깨금의 맨발을 보고, 뒤를 돌아 소리쳤다.

“영감님! 영감님!”

*

할아버지가 나오는 데 숨 열 번쯤 걸렸다. 깨금은 그 숨을 셌다. 할아버지는 누비옷 하나만 걸친 채 어귀로 왔다. 깨금 앞에 섰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가 안에, 깨금이 밖에 있었다.

“몇이냐?”

“쉰이요. 막순 할머니가 기침해요. 복실이는 이마가 펄펄 끓어요.”

할아버지는 비탈 쪽을 봤다. 비탈 너머로 관솔불 여러 개가 흔들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솔재 사람들이었다. 업고, 끌고, 서로 붙들고 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참 그 불빛을 봤다. 깨금은 할아버지가 돌아서 들어갈까 봐 무서웠다. 사십 년 동안 그랬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가, 너 이름이 뭐냐?”

“깨금이요.”

“깨금아, 들어오너라.”

문지방이 한 번 삐걱했다. 깨금의 몸이 넘어갔다.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덮었고, 얼었던 발바닥이 녹으면서 칼로 긋는 것처럼 아팠다. 깨금은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깨금의 어깨를 잡았다.

“너, 저 사람들 이름 아느냐?”

“다 알아요.”

“내 곁에 서라. 한 사람씩 말해라.”

솔재 사람들이 어귀에 닿았다. 맨 앞은 복실을 업은 두만이었다. 두만은 문지방 앞에서 멈추고, 복실을 등에서 내려 문지방 앞에 세웠다. 두만의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얼어 있었다.

“복실이요.”

깨금이 말했다.

“복실아, 들어오너라.”

할아버지가 불렀다. 삐걱. 복실이 넘어왔다.

“종구 형 엄마 곱단이요.”

“곱단, 들어오너라.”

삐걱.

“뭉치 아저씨요. 이름이 뭉치예요. 진짜예요.”

“뭉치, 들어오너라.”

삐걱.

“말복이요. 솔재에서 제일 코를 크게 골아요. 옆에 자면 못 자요.”

“말복, 들어오너라.”

“꽃분이 누나요. 노래 잘해요. 근데 막순 할머니가 부르지 말래요.”

“꽃분, 들어오너라.”

깨금은 한 사람을 댈 때마다 그 사람이 솔재에서 무얼 했는지 한 마디씩 붙였다. 붙이지 않으면 이름이 그냥 소리가 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끊지 않았다. 깨금은 이름을 댔고 할아버지는 불렀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처음엔 낮았다가 점점 갈라졌다. 스무 번째 이름에서 할아버지는 한 번 기침을 했고, 서른 번째에서 목소리가 쉬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사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부른 이름을 한 밤에 몰아 부르고 있었다. 이름이 넘어올 때마다 문지방이 울었다. 곰녀가 뒤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받아 제 집으로 끌고 갔다. 길만이 잠옷 바람으로 나와 멍하니 서 있다가, 아무 말 없이 제 이불을 들고 와 넘어온 사람 어깨에 씌웠다. 길만은 이불을 씌우고 나서 손가락을 꼽으려다 말았다. 손가락이 떨려서 몇까지 꼽았는지 알 수 없었다. 좌상은 손을 소매 속에 넣고 다음 사람을 받으러 문지방 쪽으로 걸어갔다.

마흔다섯째 이름을 부르고 나서 깨금은 입을 다물었다. 제 이름까지 마흔여섯이었다. 더 댈 이름이 없었다.

문지방 밖에는 두만이 혼자 남았다. 두만은 넘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문지방에서 두 걸음 떨어진 눈 위에 서서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두만을 봤다.

“너는 누구냐?”

“두만이에요. 칼쇠 형님이랑 같이 왔어요. 관솔불 들었어요.”

두만은 그 말을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할아버지는 두만을 부르지 않았다. 두만도 불러 달라고 하지 않았다. 곰녀가 제 집에서 숯 화로를 들고 나와 문지방을 넘어, 두만의 발치에 내려놓고 도로 들어왔다.

“두꺼비, 발 녹여.”

“막순 할머니는요?”

깨금이 물었다. 두만이 문지방 밖에서 고개를 저었다. 비탈 쪽에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들고 오고 있었다. 넷이었다. 막순 할머니, 할머니를 업고 오던 강서방, 복실에게 덧옷을 벗어 준 쇠분 아주머니, 맨 뒤에서 불을 들던 덕칠 아저씨.

할아버지는 넷의 이름을 깨금에게 묻지 않았다. 깨금이 말해 주기 전에 할아버지가 먼저 불렀다.

“막순, 들어오너라.”

문지방은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한 번 더 불렀다. 울지 않았다.

그때 염소 길 쪽에서 누군가 미끄러지듯 달려 내려왔다. 목수 누나였다. 무릎이 찢어져 있었다. 누나는 어귀에 와서 할아버지와 깨금과 문지방 밖의 넷을 차례로 봤다. 그리고 할아버지 곁에 섰다. 할아버지는 누나를 보지 않고 넷째 이름을 불렀다. 문지방은 끝내 울지 않았다.

곰녀가 너럭바위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열일곱이야. 엉덩이가 열일곱이래.”

아무도 웃지 않았다. 곰녀도 웃지 않았다. 동쪽 절벽 위가 희끄무레해지고 있었다. 해가 뜨면 저 위에서 옥례 누나가 첫 짝을 놓는다. 넷에게는 그 두 시진이 모자랐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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