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172자) · 두만 · 동짓달 열하루

넘어가지 않는 발

문지방의 계약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두만은 아침마다 헛간의 느티를 셌다. 어른이 시킨 일이었다. 쉰둘에서 하나가 솔재로 올라갔으니 쉰하나였고, 어제도 쉰하나였고, 그저께도 쉰하나였다. 나무가 밤사이 저절로 늘거나 줄 리가 없는데도 어른은 매일 세라고 했다. 세는 사람이 있어야 훔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헛간은 춥고 어두웠다. 판자 틈으로 들어온 빛이 느티 더미 위에 가는 줄을 그었고, 나무에서는 마른 흙과 오래된 기름 냄새가 났다. 짝마다 못 자국이 있었다. 두만은 그 구멍들을 볼 때마다 누군가의 집 어귀가 떠올랐다. 이 나무들은 전부 어딘가의 입구였다. 거기 살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두만은 그런 생각을 오래 하지 않았다. 오래 하면 무서워졌다.

두만도 남쪽 갈골 사람이었다. 팽덕수 영감이 놓은 자리에서 열 살까지 살았다. 흉년 세 해째에 어미가 앓았고, 약값을 노루목 객주에서 꾸었다. 어미는 약을 다 먹기 전에 죽었고 빚은 두만에게 남았다. 빚을 갚으라고 마 객주가 준 일이 장정 노릇이었다. 덩치가 크니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서 있기만 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문지방 앞에서는.

헛간에는 고양이도 한 마리 살았다. 누런 털에 한쪽 귀가 반쯤 잘린 놈이었는데, 느티 더미 맨 위에 올라앉아 두만이 셀 때마다 꼬리로 숫자를 흐트러뜨렸다. 두만이 스물까지 세면 꼬리가 한 번 탁 내려왔고, 두만은 스물 다음이 뭐였는지 잊어버렸다. 오늘도 두 번을 처음부터 다시 셌다. 칼쇠는 저 고양이를 쫓아내라고 했지만 두만은 쫓지 못했다. 고양이가 무서운 게 아니라 고양이가 무섭다는 걸 칼쇠가 알게 되는 게 무서웠다.

*

“두만아, 들어오너라.”

안방에서 어른이 불렀다. 두만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이상했다. 어른은 방에는 아무렇게나 사람을 부르면서, 문지방 앞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안 불러 준다고 화를 냈다. 방은 화로 두 개로 더웠다. 칼쇠가 먼저 와서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칼쇠는 말이 적고 손이 컸다. 손등에 불에 덴 자국이 있었는데, 두만은 그 자국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어른은 빚 문서 뭉치를 무릎에 올려놓고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솔재에 들어간 스물 가운데 열아홉이 내 문서에 있다. 오늘 올라가서 내려오라고 해라. 노루목 헛간 뒤 비탈이 해를 먼저 받는다. 거기서 사흘 세운다.”

“안 내려오면요?”

칼쇠가 물었다.

“문서를 읽어 준다. 빚이 몇 섬인지.”

어른은 문서를 가지런히 모아 무릎에 탁탁 쳤다.

“그리고 문턱골 소금은 오늘부터 안 올려 보낸다. 좌상한테 기별해라. 소금이 왜 끊겼는지는 솔재 목수 아가씨한테 물으라고.”

“소금은 문턱골이 쌀 주고 사는 건데요.”

두만이 말했다. 말하고 나서 입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끊는 거다. 사는 사람이 있을 때 끊어야 아프지.”

어른은 두만을 보고 웃었다. 두만은 그 웃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칭찬할 때 짓는 웃음이었다.

두만이 방을 나서는데 뒤에서 어른이 칼쇠에게 낮게 말했다. 두만은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귀가 컸다.

“솔재 짝은 내 나무다. 놓아 두게 해 준 거지 준 게 아니다. 잊지 마라.”

*

솔재 비탈을 오르는 동안 어른은 한 번도 숨이 차지 않았다. 여우 털 덧옷 자락이 눈 위를 쓸었다. 칼쇠가 뒤를 따랐고, 두만이 맨 뒤에서 빚 문서 상자를 안고 올라갔다. 상자는 가벼웠다. 사람 열아홉의 빚이 이렇게 가볍다는 게 두만은 좀 이상했다.

바위 셋 앞에 짝이 누워 있었다. 안쪽 흙이 검고 축축했고, 김이 올랐다. 바깥은 눈인데 안에서는 사람들이 소매를 걷고 있었다. 두만은 문지방 한 걸음 앞에 서자 뺨에 온기가 닿는 것을 느꼈다. 안에서 새어 나온 공기가 눈 위에 얇게 깔려 있었고, 거기에 조밥 냄새와 젖은 흙냄새와 사람 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갈골 냄새였다. 열 살까지 맡던 냄새였다. 두만은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칼쇠가 쳐다보는 것 같아 입으로 도로 내쉬었다. 목수 아가씨의 한서표가 문지방 안쪽 바위에 기대 세워져 있었다. 붉은 물이 스물하나 언저리에 있었다. 두만은 그 눈금을 읽을 줄 몰랐지만, 안쪽 사람들 얼굴이 밖에서 본 얼굴보다 한 겹 풀려 있는 건 알았다. 막순 할멈이 솥을 젓다가 이쪽을 보고 국자를 내려놓았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일어나 문지방 쪽으로 모였다. 맨 앞에 목수 아가씨와 옥례가 섰다.

어른은 문지방 한 걸음 앞에서 멈췄다.

“잘 놓으셨소. 결이 곱소.”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내 사람들을 데리러 왔소. 사흘 세우려고. 노루목 비탈이 여기보다 해를 먼저 받소.”

어른이 손짓하자 두만이 상자를 열었다. 어른은 문서를 한 장씩 꺼내 이름을 읽었다.

“종구, 조 두 섬 반. 막쇠, 쌀 한 섬에 조 한 섬. 강서방, 쌀 세 섬. 쇠분, 약값 한 섬 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안쪽 사람들의 어깨가 조금씩 내려갔다. 두만은 그걸 보고 제 이름이 불리는 것처럼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제 문서도 저 상자 맨 밑에 있었다.

“빚은 빚이에요.”

목수 아가씨가 말했다.

“갚을게요. 봄에 노루목에 한 짝 놓아 드리기로 했잖아요? 그 값에 얹으세요. 그런데 누가 어디 서서 누구를 부를지는 빚이 정하는 게 아니에요.”

“아가씨, 셋째 줄을 읽으셨다지요.”

어른이 부드럽게 말했다.

“한 도를 받은 자는 스물을 부른다. 좋은 줄이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받은 한 도는 내 나무에서 나왔소. 그러니 누구를 부를지도 나무 주인이 좀 거들어야 셈이 맞지 않겠소?”

옥례가 한 걸음 나섰다. 먹줄통을 손에 쥐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나무도 객주 헛간에 있어요. 뜯어 가셨잖아요? 그럼 그 나무에서 나온 도는 누가 거들어요?”

어른의 입꼬리가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두만아, 들어가서 모셔 오너라. 종구부터.”

두만은 눈을 감고 싶었다. 대신 문지방에 발을 올렸다. 발바닥이 나무 위 한 치에서 멈췄다.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발끝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두만은 제 발을 설득하려고 한 번 더 힘을 줬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뒤로 튕겨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이 풀썩 일었다.

안에서 누군가 킥 웃었다. 깨금이었다. 아이는 문지방 안쪽에 서서 두만을 흉내 냈다. 한 발을 들고, 공중에서 머뭇거리고, 제 엉덩이를 흙에 털썩 떨어뜨렸다. 안쪽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막순 할멈까지 국자를 들고 웃었다.

“한 번 더.”

어른이 말했다. 두만은 일어나서 한 번 더 했다. 결과는 같았다. 세 번째에는 엉덩이보다 자존심이 더 아팠다. 칼쇠가 두만을 옆으로 밀어내고 제가 발을 올렸다. 칼쇠의 발도 멈췄다. 칼쇠는 넘어지지 않고 발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문지방을 오래 내려다봤다. 두만은 칼쇠가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무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나무 밑 흙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른이 소매의 눈을 털었다.

“조는 오늘부터 안 올라오오. 내 조였으니. 문턱골 소금도 오늘부터 안 올라가오. 문턱골 좌상이 오늘 저녁쯤 아가씨를 찾아올 거요. 나는 기다리면 되오. 문지방 안은 따뜻하지만, 따뜻하다고 배가 부르지는 않소.”

어른은 돌아섰다. 목수 아가씨가 문지방 안에서 소리쳤다.

“사람 굶겨서 받는 빚도 빚이에요?”

어른은 돌아보지 않았다.

“빚은 사람이 굶어도 줄지 않소. 그게 빚의 좋은 점이오.”

*

비탈을 내려오다가 두만은 어른과 칼쇠를 먼저 보냈다. 뒷간에 가야 한다고 했다. 어른은 두만의 핑계가 셋 중 둘은 뒷간이라는 걸 알아서 대꾸도 안 했다.

문턱골에 기별할 일은 어차피 두만 몫이었다. 두만은 어귀 앞에 서서 좌상을 불러 달라고 했다. 좌상 길만은 한참 뒤에 나왔다. 오늘도 버선이 축축해 보였다. 곰녀가 그 뒤에서 따라 나와 너럭바위에 앉았다.

“노루목 어른 말씀이에요. 소금이 오늘부터 안 올라온대요.”

길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 겹 빠졌다.

“쌀은 이미 내려보냈다. 소금 여섯 섬 값으로.”

“그 쌀은 창에 잘 있대요. 소금이 왜 끊겼는지는 솔재 목수 아가씨한테 물으시래요.”

두만은 전하라는 말을 다 전하고 나서 저도 모르게 덧붙였다.

“저는 전하기만 해요. 저도 소금 좋아해요.”

“두꺼비가 소금을 좋아하면 쪼그라들어.”

곰녀가 말했다. 두만은 움찔했지만 곰녀는 웃지 않았다. 길만은 한참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꼽지도 않고 주먹을 쥐었다.

“문턱골 소금 독에 몇 달 치가 남았는지 아느냐? 한 달이다. 한 달 뒤면 감자를 맨입에 먹어야 해. 그 목수 아가씨가 우리 좌상 댁 손녀였으면 벌써 종아리를 쳤어.”

“아가씨는 영감님 손녀잖아요?”

“그러니까 못 치지.”

길만은 돌아서 들어갔다. 두만은 잠깐 서 있다가 비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만은 등에 멘 자루를 풀었다. 자루 안에 대패가 하나 있었다. 날이 반들반들하고 손잡이가 사람 손바닥 모양으로 파여 있었다. 팽덕수 영감의 대패였다. 영감이 어귀에서 죽은 날, 어른은 죽은 인부의 연장은 모아서 팔라고 했다. 두만은 그 대패를 사흘 동안 자루 속에 넣고 다녔다. 팔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했다.

두만은 솔재 길을 벗어나 문턱골 어귀 쪽으로 돌아갔다. 해가 기울어 비탈의 돌 백스물셋이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새 돌은 아직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두만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대패를 돌 곁에 눕혔다. 눈이 대패 날에 닿아 녹지 않고 그대로 얹혔다.

“영감님, 이거 옥례 누나가 찾아가게 여기 둘게요.”

말하고 나니 할 말이 더 있었다.

“영감님 자리에서 저 열 살까지 살았어요. 따뜻했어요. 그 말 한 번도 못 했어요.”

바람이 비탈을 쓸고 올라갔다. 두만은 코를 훌쩍이고 일어섰다. 문턱골 어귀 너럭바위에 곰녀가 앉아 있다가 두만을 봤다. 두만은 곰녀가 또 두꺼비라고 부를까 봐 어깨를 움츠렸다. 곰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곰녀는 대패를 한 번 보고, 두만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렸다.

*

노루목에 돌아오니 헛간 앞에 칼쇠가 앉아 있었다. 숫돌 위에서 쇠지레 끝을 갈고 있었다. 쇠지레는 두만 팔뚝만 한 길이였고 끝이 납작했다. 쓱, 쓱, 쇠가 돌을 미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났다.

“두만아.”

칼쇠가 손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문지방 하나 들어내는 데 몇 사람이 드냐?”

두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알고 있었다. 칼쇠 같은 사람이면 하나, 두만 같은 사람이면 둘이었다. 들어내는 데 드는 사람보다 들어낸 뒤에 추워지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알았다. 두만은 헛간 안에 들어가 느티를 셌다. 쉰하나였다. 어제도 쉰하나였다. 두만은 한 번 더 셌다. 세는 동안에는 쇠 가는 소리가 조금 덜 들렸다.

4화는 어땠나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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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차2026.05.30· 4화

    설정이 과하지 않게 깔려서 편하게 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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