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212자) · 서이랑 · 동짓달 초하루

셋째 줄

문지방의 계약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덧나무는 손바닥 두 개 길이였다. 못 구멍 넷이 붉게 슬어 있었고, 안쪽 면이 마흔한 해 동안 셋째 줄에 눌려 있던 자리만 색이 조금 옅었다. 이랑은 그것을 할아버지 방 문지방 앞에 내려놓았다. 할아버지는 이불을 개고 있었다. 이불 모서리를 두 번 접고 손바닥으로 쓸어 각을 세우는 동안 한 번도 이랑 쪽을 보지 않았다.

“셋째 줄 읽었어요.”

“읽었으면 됐다.”

“한 도를 받은 자는 스물을 부른다. 이 골짜기 백스물이 스무 도를 받았어요. 사십 년 넘게요. 그런데 한 사람도 안 불렀어요. 부를 줄 아는 사람이 할아버지 하나뿐이니까요.”

할아버지가 개던 이불을 내려놓았다.

“누가 너한테 그걸 읽으라더냐?”

“팽덕수 어르신이요. 어젯밤에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 문지방 두 걸음 밖에서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문턱골의 방은 겨울에도 문을 열어 두는데, 열린 문으로 밭의 김이 들어와 천장 서까래에 물방울이 맺혔다.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덧나무 위에서 튀었다.

“앉아라.”

이랑은 앉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혼자 앉았다.

“내 스승은 남쪽 무듬골에 자리를 놓았다. 스승이 부른 사람이 서른이었고, 그 서른이 사흘씩 서서 목수가 됐다. 셋째 줄대로 했다. 목수 서른이 스물씩 불렀다. 다섯 해 만에 무듬골 언저리에 자리가 마흔이 넘었다.”

“좋은 일이잖아요?”

“끝까지 들어라. 목수 서른 가운데 하나가 제 자리에 값을 매겼다. 쌀 한 말에 한 사람. 다른 놈들이 보고 배웠다. 누구는 관아에 자리를 바쳤고, 누구는 자리를 두고 칼부림을 했다. 스승은 그 칼에 죽었다. 칼을 든 게 스승이 처음 부른 제자였다. 내 사형이었다.”

할아버지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굳은살이 옷감에 걸려 사각거렸다.

“나는 스승 문지방을 들고 북으로 왔다. 여기다 놓고, 처음 온 백스물을 부르고, 덮었다. 부르는 손이 하나면 팔리지 않는다.”

“그래서 밖에 돌이 백스물셋이에요.”

할아버지의 턱이 한 번 굳었다.

“네 아비 돌이 몇째인지 아느냐?”

이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백열째였다.

*

열두 해 전 늦가을, 아비는 남쪽에서 스무 사람을 데리고 고개를 넘어왔다. 이랑은 일곱 살이었고 아비 등에 업혀 있었다. 아비의 목덜미에서 땀과 연기 냄새가 났다. 어귀에 이르자 아비는 이랑을 내려놓고 문지방 너머 할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이 사람들 불러 주십시오.”

할아버지는 한참 서 있다가 이랑을 봤다.

“이랑아, 들어오너라.”

문지방이 한 번 삐걱했고, 이랑의 발이 넘어갔다. 안의 공기가 얼굴에 닿았을 때 몸이 저절로 풀렸다. 등 뒤에서 아비가 다시 할아버지를 불렀지만 할아버지는 이랑의 손만 잡고 돌아섰다. 이랑은 뒤를 보지 않았다. 따뜻했다. 따뜻한 것이 좋았다. 그 좋았던 것을 이랑은 열두 해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비는 그 겨울을 스무 사람과 어귀 밖에서 났고, 봄이 오기 전에 비탈에 돌이 되었다.

*

“가르쳐 주세요.”

이랑이 말했다.

“사흘 서는 거요. 어디에, 어떻게 서는지.”

“안 가르친다.”

“그럼 혼자 설게요.”

“얼어 죽는다.”

“할아버지가 부르시면 안 죽어요. 저는 이미 불렸잖아요. 드나들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이불을 접었다. 이랑은 덧나무를 들고 나왔다. 문간에서 한 번 돌아봤지만 할아버지의 등은 그대로였다.

어릴 때 들은 말이 있었다. 아비가 할아버지에게 물었고, 할아버지가 딱 한 번 대답했다. 동틀 녘부터 해가 한 뼘 오를 때까지, 사흘을 서 있으면 보인다. 무엇이 보이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어귀 밖 달구지 곁에서 옥례가 거적을 꿰매고 있었다. 이랑이 사흘 서겠다고 하자 옥례는 바늘을 멈추고 한참 이랑의 얼굴을 봤다.

“저도 서면 안 돼요?”

“불린 적 없잖아요. 불린 사람 눈에만 보인대요.”

“그럼 먼저 서서 저를 부르세요.”

옥례는 그 말을 농담처럼 하지 않았다. 품에서 아비의 먹줄통을 꺼내 실 끝을 이랑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그랬어요. 문지방은 해를 등지고 놓는 거고, 결이 해 쪽으로 누워야 한대요. 결을 거꾸로 놓으면 반쪽만 데운대요. 먹줄을 튕겨 수평을 보고, 흙을 한 뼘 파서 숯을 깔고 그 위에 앉힌대요. 안 깔면 봄에 흙이 녹을 때 나무가 기울어요.”

이랑은 그 말을 한 줄씩 머리에 넣었다. 할아버지가 마흔한 해 동안 안 가르친 것을 남쪽에서 온 인부가 거적을 꿰매다 말고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문턱골 안에서는 설 수 없었다. 골짜기 안은 이미 자리였고, 해는 동쪽 절벽에 가려 한낮이 다 돼서야 바닥에 닿았다. 첫 해가 먼저 닿는 땅은 서쪽 고개 솔재 비탈이었다. 이랑은 어릴 때부터 그 비탈이 골짜기보다 먼저 금빛이 되는 것을 봐 왔다.

*

첫날 새벽 솔재 비탈은 영하 스물두 도였다. 한서표는 볼 필요도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콧속 털이 얼어 바삭거렸고, 발가락은 한 식경 만에 제 것이 아니게 됐다. 이랑은 털 덧옷 위에 거적을 두르고 비탈 중턱 바위 곁에 섰다. 동쪽 하늘이 먹빛에서 쪽빛으로, 쪽빛에서 잿빛으로 옅어졌다. 해는 솔고개 너머에서 한참을 뜸 들이다가 산등성이 위로 손톱만큼 올라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이 비탈을 쓸고 내려가 눈이 반짝였을 뿐이었다.

해가 한 뼘 오르자 이랑은 안으로 들어가 두 시진을 떨었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제 귀에 너무 커서 부끄러웠다.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가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이랑의 언 발을 한 번 내려다보고, 물동이에 바가지를 띄워 놓고 갔다. 물은 미지근했다. 이랑은 거기 발을 담그고 발가락이 다시 제 것이 될 때까지 울지 않으려고 이를 물었다.

해 질 녘에는 두만이 어귀에 왔다. 등에 숯 한 가마니와 조 한 자루를 지고 있었다. 두만은 인부들에게 조를 한 되씩 나눠 주면서 한 사람씩 이름을 대게 하고, 줄 때마다 손가락을 꼽았다.

“조 한 되, 숯 한 줌. 어른 말씀이 이것도 빚에 얹는대요. 나는 전하기만 해요.”

“전하는 사람도 셈은 하던데?”

옥례가 말했다. 두만은 꼽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그러고는 곰녀가 앉아 있는 너럭바위를 흘끔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저 아주머니가 오늘도 나보고 두꺼비라고 하면, 나는 울 거예요.”

“두꺼비야, 조 흘린다.”

곰녀가 바위 위에서 말했다. 두만은 울지는 않고 조 자루를 끌어안았다.

둘째 날 새벽에는 손님이 있었다. 깨금이었다. 아이는 삶은 감자 두 알을 품에 안고 비탈을 올라왔다. 한 알은 제 몫이라며 먼저 한 입 베어 물고, 나머지를 이랑의 손에 쥐여 줬다. 감자가 손바닥을 지졌다.

“누나 뭐 해요?”

“서 있어.”

“왜요?”

“뭐가 보이는지 보려고.”

“뭐가 보여요?”

“아직 안 보여.”

깨금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랑의 등 뒤로 돌아가 등을 맞대고 섰다. 아이의 등은 작았지만 뜨거웠다. 거적 너머로 아이의 숨이 들고 날 때마다 등판이 부풀었다 꺼졌다.

“이러면 덜 추워요. 엄마랑 이렇게 잤어요.”

이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구멍 안쪽이 뜨겁게 막혔다. 해가 올라오는 동안 두 사람은 등을 대고 서 있었고, 깨금은 가끔 한 발을 들어 깨금발로 균형을 잡았다가 이랑의 등에 기대 도로 내렸다.

그날 오후 곰녀가 비탈을 올라왔다. 한 손에 곰 털 덧옷을 들고 있었다. 털이 두껍고 윤이 났다. 문턱골에 그런 덧옷은 하나뿐이었다.

“이거 입어.”

“이거 할아버지 거잖아요?”

“내 거야. 방금 내 거가 됐어. 영감이 마루에 벗어 놓고 들어갔는데, 벗어 놓은 건 주운 사람 거야.”

곰녀는 덧옷을 이랑의 어깨에 둘러 주고, 바위에 엉덩이를 대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영하 스물! 엉덩이가 틀린 적 없어.”

“그건 저도 알아요.”

“알면 됐어. 내일 모레 안에 얼어 죽으면 그 덧옷은 도로 내 거야.”

그날 밤 문턱골 우물가에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았다. 물을 길으러 온 사람보다 말을 길으러 온 사람이 많았다. 길만은 우물 난간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이랑이가 스물을 부르면, 여기다 들이면 한 도다. 한 도면 참는다. 그런데 그 스물이 또 스물을 부르면 두 도, 그다음은 네 도다. 네 도면 열다섯이야. 열다섯이면 빨래가 안 말라.”

“빨래는 원래 좌상 댁이 제일 안 말려.”

곰녀가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며 말했다.

“좌상 댁 버선은 여름에도 축축해. 발이 원래 그래.”

“지금 버선 얘기가 아니잖소?”

“셈 얘기지. 좌상은 셈을 하면 꼭 제일 나쁜 데까지 가. 이랑이는 여기다 들인다고 한 적 없어. 솔재에 놓는대.”

우물가가 잠깐 조용해졌다. 솔재에 놓으면 문턱골은 식지 않는다. 그 셈을 다들 머릿속에서 굴려 보는 동안 두레박 줄이 우물 벽을 긁는 소리만 났다. 길만이 꼽던 손가락을 폈다가 도로 쥐었다.

“솔재에 놓아도, 부르는 손이 둘이 되는 거야. 영감이 그걸 제일 무서워했어.”

셋째 날 새벽, 좌상 길만이 비탈 밑까지 왔다가 올라오지는 않고 소리만 질렀다.

“이랑아, 좌상으로서 묻는다. 거기서 뭘 보려는 거냐? 뭘 보고 나서 뭘 하려는 거냐?”

“놓으려고요.”

“놓아서 누굴 부르게?”

“스물이요.”

길만은 한참 서 있다가 돌아섰다. 이랑은 그의 손가락이 또 꼽히는 것을 봤다. 문턱골 사람들은 무엇이든 손가락으로 먼저 셌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다.

해가 솔고개 위로 올라왔다. 빛이 산등성이를 넘어 비탈로 쏟아지는 그 순간, 이랑은 보았다. 비탈 아래쪽, 바위 셋이 둘러선 평평한 땅 위로 김이 올랐다. 눈이 녹는 김이 아니었다. 눈은 그대로 하얬다. 그 위로 여름날 뙤약볕 아래 흙에서 오르는 것 같은 아지랑이가 한 뼘 높이로 일렁였고, 첫 햇살이 다른 데보다 한 숨 먼저 거기 앉았다. 다른 데는 보통 햇빛이었다. 거기만 달랐다. 눈을 감았다 떠도 김은 그대로였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봐도 바위 셋 사이에서 일렁였다. 코끝에 봄 흙 냄새가 스친 것 같았지만 그건 이랑이 지어낸 것일지도 몰랐다.

다리가 풀렸다. 이랑은 눈 위에 주저앉아 그 자리를 봤다. 깨금이 등 뒤에서 뭐가 보이냐고 물었다. 이랑은 대답하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비탈 아래에서 소달구지 방울 소리가 났다. 여우 털 덧옷을 입은 사내가 달구지 곁에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만이 소 고삐를 쥐고 있었다. 마종술이 손을 들어 인사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비탈 위까지 들리게 말했다.

“보이셨소? 그럼 이제 나무가 필요하시겠소.”

이랑은 일어서지 않았다. 바위 셋 사이의 김이 해가 한 뼘 오르면서 옅어지고 있었다. 저 자리를 데울 나무는 저 사내의 달구지에 있었다. 팽덕수가 끝내 달라고 하지 않은 그 나무였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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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줄2026.05.28· 2화

    같은 출발점에서 나온 다른 작품도 읽고 왔는데 완전히 달라서 신기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