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73자) · 서이랑 · 시월 그믐
첫눈에 온 서른
마을로 들어오려면 나와 혼인해야 한다 · 백해원
첫눈은 어귀 문지방 앞에서 물이 됐다. 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가 바깥 비탈에는 소복이 쌓이는데, 문지방 한 발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젖은 점이 되어 흙에 스몄다. 그래서 문턱골 어귀에는 겨울마다 선이 하나 그어졌다. 흰 쪽과 검은 쪽, 그 사이에 느티 한 짝이 누워 있었다.
이랑은 그 선에 쪼그려 앉아 품에서 한서표를 꺼냈다. 손가락 길이만 한 유리 대롱에 붉은 물이 들어 있고, 대롱을 받친 나무판에 칼로 판 눈금이 서른 개 남짓 있었다. 아비가 남쪽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붉은 물은 열아홉 눈금에 멈춰 있었다. 대롱을 문지방 바깥으로 내밀자 붉은 물이 숨 몇 번 사이에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열아홉이지?”
뒤에서 곰녀가 말했다. 곰녀는 어귀 옆 너럭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문턱골 사람들은 저 바위를 곰녀 자리라고 불렀다.
“열아홉이요.”
“거봐. 내 엉덩이가 먼저 알았어. 그 유리 막대보다 내 엉덩이가 삼십 년 먼저 여기 앉았다고.”
“아주머니 엉덩이는 어제도 스물이라고 했잖아요?”
“어제는 감자를 두 알 더 먹었어. 배부르면 엉덩이도 후해지는 거야.”
이랑은 웃음을 참으며 한서표를 품에 넣었다. 문턱골 안은 사철 스무 도 안팎이었다. 밭에서는 동짓달에도 김이 올랐고, 귀틀집 서른한 채는 불을 안 때도 벽에서 나무 냄새가 났다. 불은 밥 지을 때만 피웠다. 백스물이 사는 골짜기에 겨울은 문지방 너머 구경거리였다.
바깥 비탈에는 돌이 있었다. 사람 머리만 한 돌이 어귀 오른쪽 비탈을 따라 줄지어 놓여 있었고, 눈이 그 위에 모자처럼 앉았다. 이랑은 돌을 세지 않았다. 셀 필요가 없었다. 백스물둘이었다.
*
해 질 녘에 소달구지 소리가 났다. 바퀴가 언 길을 긁는 소리가 먼저 오고, 한참 뒤에 달구지가 솔고개 굽이를 돌아 나타났다. 소 두 마리가 끄는 달구지 위에 거적을 덮은 나무가 실려 있었다. 거적 틈으로 드러난 결이 누랬다. 느티였다.
달구지 뒤로 사람이 따라왔다. 누비옷 위에 거적을 두르고 새끼로 허리를 묶은 사람들이 서른쯤, 발에 감발을 감았는데 감발이 눈에 젖어 검었다. 맨 앞에는 여우 털 덧옷을 입은 사내가 걸었다. 걸음이 느긋했고, 눈 속인데도 신이 젖지 않았다. 사내 곁에서 덩치 큰 장정 하나가 달구지 바퀴가 빠질 때마다 어깨로 밀어 올렸다.
“노루목 마종술이오.”
사내가 문지방 두 걸음 앞에서 섰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서 목수 어른을 뵈러 왔소. 기별은 먼저 넣었는데, 답이 없으시기에 직접 왔소.”
서 목수는 이미 와 있었다. 이랑이 돌아보니 할아버지가 문지방 안쪽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일흔넷, 등이 조금 굽었지만 손은 여전히 도끼 자루만큼 굵었다. 할아버지는 대꾸하지 않고 달구지의 나무만 봤다.
“느티요. 백 년 넘은 걸로만 열 짝 싣고 왔소.”
마종술이 거적을 걷었다. 한 발 길이, 손바닥 두 개 너비로 켠 느티 짝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몇 짝에는 옛 못 자국이 있었다. 어디선가 뜯어 온 문지방이었다.
“그리고 쌀 스무 섬을 노루목 창에 달아 두었소. 봄에 실어 오겠소.”
“값은 뭐요?”
할아버지가 처음 입을 열었다.
“여기 서른을 불러 주시오. 그리고 나도.”
어귀 뒤에 모여 있던 문턱골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좌상 길만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길만은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서른하나면 한 도 반이었다. 열아홉이 열일곱 반이 되면 옷이 겨우 마른다. 이랑도 그 셈을 동시에 했고, 셈을 하는 제 머리가 싫었다.
“안 부르오.”
할아버지는 그렇게만 말했다.
“서른이 안 되면 스물은 어떻소?”
“안 부르오.”
“그럼 나 하나만.”
마종술이 웃었다. 이랑은 그 웃음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았다. 불린 사람은 사흘을 서면 놓을 수 있다. 마종술 손에 느티 쉰 짝이 있다는 소문은 고개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당신이 제일 안 되오.”
마종술 곁의 장정이 한 발 나섰다. 어깨가 문짝만 했다.
“두만아, 그러지 마라.”
마종술이 말렸지만 장정은 이미 문지방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 발이 문지방 위에서 멈췄다. 누가 막은 것도 아닌데 발바닥이 공중에서 머뭇거렸고, 장정은 제 발을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이 풀썩 일었다.
곰녀가 바위 위에서 손뼉을 쳤다.
“두꺼비가 문지방을 넘으려고 하네.”
“두꺼비 아닙니다. 두만입니다.”
장정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얼굴이 귀까지 붉었다. 문턱골 아이들이 킥킥거렸고, 이랑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달구지 뒤의 사람들을 보고 도로 내려왔다. 그들은 웃지 않았다. 웃을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마종술이 소맷자락의 눈을 털었다.
“어른께서 부르실 때까지 이 사람들은 여기 두겠소. 나는 노루목에 내려가 있겠소. 마음이 바뀌시면 기별 주시오.”
“데려가시오.”
“데려갈 데가 없소. 이 사람들 빚이 내게 있고, 빚진 사람을 먹일 창은 노루목에 없소.”
마종술은 두만을 데리고 돌아섰다. 달구지는 두고 갔다. 느티 열 짝이 어귀 밖 눈 속에 누워 있었고, 그 곁에 서른이 남았다.
*
밤이 되자 바깥은 영하 스무 도로 내려갔다. 한서표를 문지방 밖에 내밀면 붉은 물이 대롱 밑바닥 눈금 아래로 숨어 버렸다. 이랑은 부엌에서 삶은 감자를 바구니에 담고, 숯을 담은 화로를 들고 어귀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길만은 모른 척 등을 돌렸다.
문지방을 넘자 공기가 얼굴을 쳤다. 차다는 느낌이 먼저가 아니었다. 콧속이 쩍 달라붙고 속눈썹이 무거워지고, 숨을 들이쉬면 가슴 안쪽이 쇠를 삼킨 것처럼 저렸다. 발밑의 눈이 짚신 밑창을 통해 울었다. 서른은 달구지 곁에 모여 거적을 한데 덮고 있었다. 가운데 관솔불 하나가 바람에 누웠다 섰다 했다.
감자를 나눠 주는데 작은 손 하나가 두 번 나왔다. 열 살쯤 된 사내아이였다. 한 알을 받고, 거적 반대쪽으로 돌아가 한 발로 깡충 뛰어와서 또 손을 내밀었다.
“아까 받았잖아?”
“아까는 두 발로 받았고요, 이번엔 깨금발이에요. 다른 사람이에요.”
“이름이 뭔데?”
“깨금이요. 원래 이름은 까먹었어요. 엄마가 불러 주던 건데, 엄마가 고개 밑에서 안 일어났어요.”
아이는 그 말을 감자 값처럼 했다. 이랑은 한 알을 더 쥐여 줬다.
화로 곁에 늙은 사내가 누워 있었다. 딸로 보이는 여자가 그 머리를 무릎에 받치고 있었다. 사내는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마른 가랑잎 소리가 났다. 여자는 서른 남짓, 손가락 마디가 굵고 손톱 밑에 먹 자국이 있었다.
“아버지가 목수였어요.”
여자가 먼저 말했다.
“옥례예요. 이분은 팽덕수.”
늙은 사내가 눈을 떴다. 눈이 화로의 숯을 먼저 보고, 그다음 이랑을 봤다.
“서 목수 손녀요?”
“네.”
“닮았소. 셈하는 눈이.”
팽덕수는 기침을 하고 한참 숨을 골랐다. 이랑은 화로를 그의 발치로 밀었다. 숯이 발갛게 일었다가 바람에 금세 어두워졌다.
“저 달구지 느티 중에 두 짝이 내 거였소.”
팽덕수가 달구지를 턱으로 가리켰다.
“남쪽 갈골에 내가 놓은 자리가 있었소. 흉년 세 해에 사람이 떠나고, 마종술이 와서 문지방을 뜯어 갔소. 사람이 남아 있는데도. 빚 대신이라고.”
“그럼 어르신이 놓으시면 되잖아요? 저 나무로, 여기 밖에서라도요.”
“마종술이 그러라고 했소. 제 나무로 놓은 자리에 제가 들어가야 한다고. 나보고 저를 부르라고.”
팽덕수가 웃었다. 웃음이 기침이 됐다.
“저놈을 부르면 저놈이 사흘을 서고, 그다음엔 저놈이 부르는 사람이 되오. 누구를 부를지 저놈이 정하고 값을 매기오. 남쪽이 그렇게 망했소.”
이랑은 할아버지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도 같은 말을 했다. 부르는 힘이 퍼지면 파는 놈이 생긴다.
“그래서 서른이 여기서 떨어요?”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옥례가 이랑을 봤지만 막지 않았다. 팽덕수는 한참 대답하지 않다가 이랑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얼음 같았고 굳은살이 두꺼웠다.
“그 느티.”
그가 어귀의 문지방을 가리켰다.
“안쪽 옆면에 줄이 있지 않소? 석 줄.”
“덧나무가 대어져 있어요. 할아버지가 박으셨대요.”
“그럴 거요. 내 스승 자리에도 똑같은 석 줄이 있었소. 셋째 줄을 읽어 보시오. 당신 할아버지도 나도 안 한 일이 거기 있소.”
팽덕수는 그 말을 하고 눈을 감았다. 이랑은 그가 잠든 줄 알았다.
한밤에 이랑은 한 번 안으로 들어갔다. 문지방을 넘자 얼었던 귀가 녹으면서 바늘로 찌르듯 쑤셨고, 누비옷 어깨에 앉은 눈이 녹아 목덜미로 흘렀다. 할아버지 방에는 불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어둠 속에 앉아 대패 날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쓱, 쓱, 날이 돌을 미는 소리만 났다.
“할아버지, 저 사람 오늘 밤 못 넘겨요.”
“안다.”
“아시면서요?”
“서른하나면 한 도 반이다. 네가 셌잖느냐. 내년에 또 서른이 온다. 그다음 해엔 예순이 온다. 부른 사람이 또 부르고, 그러다 저 마종술 같은 놈이 부르는 날이 온다. 그날 골짜기가 팔린다.”
숫돌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나가거라. 감자 식는다.”
*
동틀 녘에 옥례가 울지 않고 아비의 손에서 먹줄통을 빼냈다. 나무로 깎은 둥근 통에 먹물 먹인 실이 감겨 있었다. 옥례는 실 끝을 한 번 당겨 봤다가 도로 감았다. 팽덕수의 수염에 성에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비탈로 옮겼다. 문턱골 사람 넷이 문지방 밖으로 나와 돌을 하나 굴려 왔다. 백스물셋째 돌이 백스물둘째 곁에 놓였다. 돌 밑의 눈이 눌리며 뽀드득 울었고, 굴려 온 자국이 비탈 아래로 길게 남았다. 깨금이 그 자국을 한 발로 따라 뛰다가 옥례 곁에 와서 멈췄다. 길만은 오지 않았고, 할아버지도 오지 않았다.
이랑은 어귀로 돌아와 문지방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엌에서 들고 나온 끌을 덧나무와 느티 사이 틈에 박았다. 못은 마흔한 해 묵어 붉게 슬어 있었다. 끌 자루를 망치로 세 번 치자 덧나무가 삐걱 들렸고, 네 번째에 떨어져 나갔다.
그 밑에 글자가 있었다. 칼로 깊게 판 획에 세월이 까맣게 배어 있었다.
하나, 해가 먼저 닿는 곳에 놓아라. 둘, 부른 자만 넘는다.
이랑은 셋째 줄에 손가락을 댔다. 나무가 따뜻했다. 바깥은 영하 스무 도인데.
셋, 한 도를 받은 자는 스물을 부른다.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떨어진 덧나무를 보고, 이랑의 손을 보고, 비탈의 새 돌을 봤다. 그러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랑은 셋째 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열두 해 전 이 문지방 앞에서 제 이름이 불렸다. 그날 할아버지가 부른 이름은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