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243자) · 하람 · 11월 4일 ~ 12월 초

0.8초

막차까지 삼 분 · 진해솔

공지는 십일월 사일에 붙었다.

관제실 게시판은 코르크판이다. 전자결재가 다 되는 회사인데 게시판만 이십 년 전 그대로라, 종이를 압정으로 꽂는다. 누가 떼면 티가 나야 한다고 김 차장이 우겨서 그렇게 남았다. 코르크판 위에는 압정 구멍이 수천 개 나 있었고, 오래된 구멍 둘레는 누렇게 바래 있었다.

안전문 신호 계통 전수 점검 시행 안내. 대상은 순환선 쉰여덟 역 승강장 안전문 전부, 기간은 11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맨 아래 근거 칸에 번호가 하나 있었다.

안전개선 접수 제2026-0814-114호.

하람은 그 줄을 세 번 읽었다. 석 달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원이 캡처했다는 번호였다. 소원이 떠난 뒤로 하람은 그 번호를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두고 가끔 열어 봤다. 번호는 그대로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번호가 지금 코르크판 위에서 압정 네 개에 꽂혀 있었다.

“석 달 반을 밤마다 점검 열차 넣는다는 소리다.”

김 차장이 뒤에서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내년 유월이 내 정년인데, 마지막에 이런 걸 하고 가네. 그 번호 누가 낸 건지는 안 적혀 있다.”

“회사 문서는 원래 그렇다면서요. 왜 하는지는 안 적고, 무슨 번호 때문에 하는지만 적는다고요.”

김 차장이 안경을 올리며 하람을 봤다. 하람이 자기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을 알아듣고 입맛을 다셨다.

그날 아침 하람은 계단을 올라가며 휴대폰을 열었다. 소원과 나눈 메시지는 짧았다. 구월 말에 소원이 보낸 것이 마지막이었다. 심사 떨어졌어요, 괜찮아요, 연구원 그만두고 용역 과제 하나 받았어요. 하람은 그때 답장을 세 번 썼다가 지우고, 네 번째에 수고하셨습니다, 라고만 보냈다. 오늘은 사진 한 장을 찍어 보냈다. 코르크판, 압정 네 개, 번호.

답은 계단을 다 올라가기 전에 왔다.

「봤어요. 그 압정 중에 빨간 거 있어요?」

하람은 사진을 확대해 봤다. 왼쪽 위 압정 하나가 빨갰고,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김 차장이 소원에게 준 것과 같은 종류였다. 하람은 계단 맨 위에서 햇빛에 눈을 찡그린 채 한참 서 있었다.

*

점검은 막차가 들어간 뒤에 했다.

영업이 끝나면 전차선을 살려 둔 채로 점검 열차 한 편성이 역을 하나씩 돈다. 승강장마다 안전문을 열 번씩 여닫고, 열림 신호와 실제 문이 도는 시각이 얼마나 어긋나는지 잰다. 그 열차를 넣고 빼는 것이 관제다. 한밤의 화면 벽에서 초록 점이 다 빠지고 나면 검은 선 위로 점 하나만 천천히 간다. 칠 년을 봤는데도 하람은 점이 하나만 움직이는 화면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나만 있으면 그게 사람처럼 보였다.

첫날 밤 점검반이 인사를 왔다. 안전모를 든 사람 넷 가운데 맨 뒤의 사람이 안전모를 벗었다.

“안녕하십니까?”

문세아였다. 가슴팍에 하람이 모르는 회사 이름이 박혀 있었다.

“기지 재계약 안 돼서 여기 들어왔어요. 점검 용역이요. 근데 이게 웃긴 게요, 저 자른 데가 이 용역 발주한 데예요. 저를 자르고, 저한테 돈 주고, 저더러 고치래요.”

세아가 안전모를 다시 썼다.

“시급은 올랐어요. 시험은 또 떨어졌고요. 한 과목만 더 들으면 되는데 그게 안전공학이에요. 교재에 우리 회사 사고가 나와요. 이름은 안 나오고 A운영사라고.”

막내 관제사가 그 말에 풉 웃었다가 하람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람은 웃지도 굳지도 않았다. 세아의 허리춤에서 휴대폰이 흔들렸고, 잠금 화면에 초시계 앱이 떠 있었다.

점검 나흘째 밤 01시 44분에 무전이 왔다.

“관제, 점검반입니다. 가람 내선 11-4, 신호랑 문이 안 맞습니다.”

세아의 목소리였다. 하람이 마이크를 당겼다.

“얼마나요?”

“0.8초요. 열 번 다요. 열리는 쪽만 그래요. 닫히는 건 정상이고요.”

하람의 손이 마이크를 쥔 채 멈췄다. 화면 벽에서 가람역 위에 점 하나가 서 있었다. 칠 년 전 00시 52분에 열차가 일 분 늦게 출발한 그 자리였다. 공조기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는데, 하람은 등줄기에 땀이 한 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관제사님, 기록지에 뭐라고 적어요?”

“측정값 그대로 적으십시오.”

“원인은요?”

하람은 입력창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봤다. 그러고 마이크를 다시 눌렀다.

“원인 칸은 비워 두십시오.”

무전이 조용해졌다. 한참 뒤에 세아가 웃는 소리가 잡음에 섞여 들어왔다.

“그거 누가 가르쳐 준 거예요?”

*

셈은 하람의 공책에서 먼저 늘었다.

관제 일지가 아니라 하람 개인 공책이었다. 점검이 끝난 역마다 한 줄씩 적었다. 날짜, 역, 편차가 나온 문의 수. 열흘이 지나자 서른일곱 역을 했고, 그 가운데 열여덟 역에서 편차가 나왔다. 절반 가까이였다. 절반이면 우연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관제실에서 다른 게 번졌다. 막내 관제사가 먼저였다. 어느 밤 막내의 모니터 모서리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두 시각이 적혀 있었고, 7의 허리에 짧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차장님이 제 글씨 못 읽으셔서요.”

막내가 쑥스럽게 말했다. 김 차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주에는 맞은편 줄 관제사 둘이 적었고, 그다음 주에는 넷이 더 적었다. 야간조 열하나 가운데 일곱이었다. 누가 시킨 게 아니었다. 점검반 무전으로 0.8초, 0.4초 같은 숫자가 밤마다 들어오니까 다들 제 화면 아래 신호 줄을 한 번씩 보게 됐고, 보고 나면 적게 됐다. 십일월 말까지 관제실에서 잰 일 분이 육백열둘이 됐다.

하람은 그 숫자를 공책 맨 뒤에 적으면서 손목이 저렸다. 넉 달 전에는 소원 혼자 휴대폰 초시계를 들고 세던 숫자였다.

십일월 마지막 금요일 밤 00시 49분에 영업 중인 열차가 가람에서 일 분 늦었다. 하람은 무전을 받기 전에 신호 줄부터 봤다. 정차 00:49:02.1, 열림 00:49:02.9. 포스트잇에 두 시각을 적고 입력창을 열었다. 커서가 코드 칸에서 깜빡였다.

하람은 0을 누르고, 3을 눌렀다.

사유 칸에 한 줄을 적었다. 가람 내선 11-4 열림 신호 0.8초 지연, 승하차 시간 평소와 같음. 적는 데 이십오 초가 걸렸다. 칠 년 동안 이십오 초가 없어서 안 적은 줄이었다. 맞은편에서 김 차장이 하람의 화면을 봤다가, 안경을 벗어 손에 쥐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아침 여덟 시에 설비팀에서 전화가 왔다. 하람은 퇴근 준비를 하다가 가방을 내려놓고 받았다. 칠 년 동안 이 전화가 무서웠다.

“정 관제사님, 어젯밤 03 건 말인데요. 몇 시 몇 분이었습니까?”

“00시 49분입니다. 신호 시각 적어 뒀습니다. 정차 02.1, 열림 02.9입니다.”

저쪽이 잠깐 조용했다.

“적어 두셨어요? 그러면 볼 수 있습니다. 점검반 기록이랑 맞춰 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하람은 통화 시간을 봤다. 십오 초였다. 칠 년 동안 무서워한 전화가 십오 초였다. 하람은 휴대폰을 쥔 채로 사물함 문에 등을 기댔다. 등 뒤의 쇠가 차가웠고, 다리에서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서 무릎이 조금 굽었다.

그 주에 관제실에서 03이 열한 번 나왔다. 칠 년 동안 하람이 누른 03이 마흔한 번이었다.

*

십이월 첫 주 월요일에 채민호가 관제실에 왔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들고 곧장 코르크판 앞으로 갔다. 점검 공지 옆에 새 종이를 대고, 압정 네 개를 하나씩 눌러 박았다. 그의 엄지가 압정 머리를 누를 때마다 코르크가 작게 뽀드득거렸다.

야간 지연 입력 시 비공식 시각 기록 중지 요청. 업무 가중 및 기록 혼선 방지.

“관제사님들, 포스트잇 다 떼 주시고요. 공식 입력 외에 따로 적는 거 없게 해 주십시오. 본부 지시입니다.”

관제실이 조용해졌다. 막내가 제 모니터 모서리의 포스트잇을 반쯤 떼다가 하람 쪽을 봤다. 하람은 자기 포스트잇을 떼지 않았다. 채민호가 하람 자리로 걸어왔다.

“정 관제사님은요?”

“공문은 입력할 때 따로 적지 말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입력하기 전에 적는 건 공문 밖입니다. 제 공책도 공문 밖이고요.”

채민호가 웃었다. 두 손으로 명함을 줄 때와 같은 웃음이었다.

“정 관제사님, 2019년 11월 근무 기록 본부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날 밤 은행정 쪽만 보셨다면서요. 그거 정리가 아직 안 된 일이라서요.”

하람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릎 뒤가 의자 모서리에 부딪혀 의자가 뒤로 굴러갔다.

“정리하십시오. 저도 칠 년 동안 정리가 안 됐습니다.”

채민호가 한 걸음 물러났다. 뒤에서 김 차장이 헛기침을 했다. 큰 소리였다.

“채 팀장, 여기 영업 중이야. 무전 들어와.”

무전은 들어오지 않았다. 채민호는 김 차장을 한 번 보고 나갔다. 그가 나간 뒤에 막내가 반쯤 뗀 포스트잇을 도로 꾹 눌러 붙였다. 다른 여섯도 떼지 않았다. 하람은 넘어진 의자를 끌어다 앉았고, 앉고 나서야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

그 주 금요일에 등기가 한 통 왔다.

반송 딱지가 붙어 있었다. 회사 인사 기록에 남은 옛 주소로 한 번 갔다가 돌아와 있었다. 발신인 칸에 윤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람은 원룸 건물 계단에 앉아 봉투를 뜯었다. 서류 한 부와 포스트잇 한 장이 나왔다.

사고조사 재심의 신청서. 대상, 2019년 11월 17일 가람역 내선 승강장 사고. 신청 사유, 초기 조사 당시 설비 요인 미검토, 안전개선 접수 제2026-0814-114호 및 점검 결과 참조. 칸이 다 채워져 있었다. 신청인 칸만 비어 있었다.

포스트잇에는 소원의 글씨로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이 칸은 제가 못 채워요. 유족만 된대요. 채우시면 그날 밤 근무자 기록도 같이 심의에 올라간대요. 하람 씨 기록이요. 안 채우셔도 돼요. 정말로.

하람은 계단에 앉은 채 오래 있었다. 위층에서 누가 내려왔다. 하람은 서류를 접어 무릎에 올려놓고, 그 사람이 지나가자 다시 폈다. 계단참 창문으로 겨울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신청인 칸 위에 네모난 빛을 떨어뜨렸다. 그 빛 안에서 빈 칸이 유난히 하얬다.

칠 년 동안 하람은 그날 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은행정을 본 삼십 분도 종이에 적히지 않았다. 여기에 이름을 쓰면 그 삼십 분이 심의대 위에 올라간다. 채민호가 말한 정리가 시작된다.

하람은 가방에서 볼펜을 꺼냈다. 신청인 정하람, 관계 동생.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볼펜 끝이 종이를 긁었다. 뒤집어 보니 글씨가 종이 뒷면에 오목하게 배어 있었다.

하람은 휴대폰을 열어 한 줄을 보냈다.

「채웠어요. 월요일에 부칩니다.」

답이 오기까지 사 분이 걸렸다. 하람은 그 사 분 동안 휴대폰을 무릎에 엎어 두고 계단참 창밖을 봤다. 넉 달 전 첫 주 목요일 새벽 두 시에, 대답을 안 하는 하람 옆에서 소원이 기다린 시간이 사 분쯤이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럼 저도 갈게요. 심의 날에요.」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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