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170자)
먼저 피하는 법
제자 셋 남은 문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 한도윤
「진하율」
명단에는 넷까지 이름을 쓸 수 있었다. 나는 분타에서 받은 출전 종이를 국수집 뒷방 밥상 위에 펴 놓고 붓을 들었다가 한참을 못 썼다. 이름을 쓰는 순서가 싸우는 순서였다.
“내가 첫째로 나가겠소.”
육손이 먼저 말했다. 이유를 묻자 첫 판이 제일 많이 보는 판이라고 했다. 관중이 이백이면 그중 백오십은 첫 판만 보고 해바라기씨를 사러 간다고 했다. 나는 그 셈이 틀리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철석은 둘째.”
“밥은요?”
“이기면.”
철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석에게 이기면 밥이라는 말은 사부의 검보보다 무겁다. 소은이 손을 반쯤 들었다가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저는 빼 주시면 안 돼요? 장문인이 나가시면 되잖아요.”
“장문인은 맨 끝에 쓰는 거야. 셋째는 너.”
“제가 지면요?”
“그럼 내가 나가.”
소은이 나를 봤다. 그 눈에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소은은 며칠 전부터 나를 볼 때마다 그런 눈을 했다. 나는 그 질문을 받지 않고 붓을 내렸다. 육손, 철석, 소은, 진하율. 내 이름은 맨 아래 칸에 작게 들어갔다. 사부가 빚 문서에 이름을 작게 쓰던 것이 생각나서, 나는 붓을 다시 들어 내 이름 위에 획을 굵게 덧그었다.
*
「육손」
먼저 말해 두오. 나는 이겼소.
거짓말이오. 졌소. 그래도 들어 보시오. 지는 데도 품격이 있소.
성도 남문 밖 비무장은 흙을 다져 무릎 높이로 쌓은 네모난 단이오. 단 네 귀퉁이에 말뚝을 박고 밧줄을 둘렀는데, 밧줄 밖으로 몸이 떨어지면 그 판은 진 거요. 단 한쪽에 심판장 엄대호가 앉고, 그 옆에서 향을 피우오. 비무대에 오른 사람은 그 향 한 대가 타는 동안 자기 문파 이름을 걸고 인사를 마쳐야 칼을 뽑을 수 있소. 인사를 마치기 전에는 출전자를 바꿔도 되고.
관중석은 이백은 넘었소. 아침부터 장사꾼들이 해바라기씨와 꼬치를 팔았소. 다들 철우방이 청송문을 얼마 만에 끝내는지 내기를 걸었소. 나는 그 내기판을 지나가면서 우리한테 거는 사람이 있는지 봤소. 하나 있었소. 철석 사형 아버님이었소.
첫 판은 나였소. 상대는 철우방의 우삼. 팔뚝이 내 허벅지만 한 사내였소.
나는 인사를 했소. 청송문의 셋째 제자 육손, 낙산 비단 거리에서 태어나 손가락이 여섯이요, 그중 하나는 하늘이 덤으로 준 것이라… 여기까지 했을 때 엄대호가 말했소.
“짧게.”
나는 짧게 했소. 그리고 목검을 들고 우삼에게 다가가면서 말을 계속했소. 당신 팔뚝이 크오, 그런데 큰 팔은 느리오, 느린 팔은 내 혀를 못 따라오오, 내 혀는 사천에서 제일 빠른… 그 대목에서 우삼의 주먹이 내 입에 들어왔소.
정말로 빨랐소. 내 혀보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밧줄 밖 흙바닥에 누워 있었고, 입안에서 쇠 맛이 났소. 손바닥에 하얀 것이 하나 있었소. 앞니였소. 관중석이 웃음으로 떠나갔소. 이백 명이 한꺼번에 웃는 소리를 바로 밑에서 들으면 땅이 울리오.
장문인이 나를 일으켜 앉히고 이를 받아 손수건에 쌌소. 그리고 말했소.
“입 다물고 있어. 피 나.”
“이게 다 내 품격이오.”
말을 하자 바람이 이 빠진 자리로 새어 나와 품격이 품겨으로 들렸소. 철석 사형이 등을 돌리고 어깨를 떨었소. 울고 있는 줄 알았소. 웃고 있었소.
*
「철석」
배가 고팠다.
장문인이 아침에 쌀을 아꼈다. 성도에서 번 돈은 다 보증금으로 들어갔고, 국수집에서 얻어 온 쌀로 사흘을 버텨야 했다. 나는 아침에 죽 한 그릇을 먹었다. 죽 한 그릇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다. 물이다.
두 번째 판의 상대는 조칠이었다. 키는 나보다 작았는데 주먹이 쇠처럼 단단했다. 철우방은 이름처럼 소가 들이받듯 싸운다. 조칠이 나한테 달려들어 내 배를 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는 막지 않았다. 배는 원래 단단하다. 다만 맞을 때마다 뱃속이 울려서 꼬르륵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비무대 아래까지 들렸다.
관중석에서 누가 소리쳤다. 저 사람 배에서 소가 운다.
조칠이 열 번을 넘게 쳤다. 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배 아래에 있어야 할 따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 국수집에서 면을 뽑을 때는 만두를 열여덟 개 먹고 난 다음이었다.
그때 비무대 아래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만두였다. 기름종이에 싼 만두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내 가슴에 맞고 떨어지려 했다. 나는 그걸 받았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갔다. 대기석에서 소은 사매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사매가 던졌다. 아버지가 아침에 사매 손에 쥐여 준 만두였다.
나는 만두를 한입에 먹었다. 조칠이 주먹을 든 채 멈췄다.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엄대호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반칙 아님.”
뱃속이 따뜻해졌다. 따뜻한 것이 배 아래로 내려갔다가 가슴으로 올라오고, 어깨를 지나 손바닥으로 갔다. 고추기름과 돼지고기와 아버지 손 냄새가 났다. 나는 조칠의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치지 않았다. 대기만 하고 밀었다. 반죽을 밀듯이.
조칠이 밧줄을 넘어 관중석 앞줄 해바라기씨 장수의 좌판 위로 떨어졌다. 해바라기씨가 사방으로 튀었다.
손바닥에서 나가는 기운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것을 강호에서는 장력이라 한다고 나중에 육손이 알려 줬다. 나는 그날 처음 해 봤다. 해바라기씨 장수한테 미안했다.
한 판씩. 마지막 판이 남았다.
*
「소은」
비무대에 오르는 계단은 다섯 칸이었어요. 저는 그걸 올라가면서 계단 수를 셌어요. 내려올 때 몇 칸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마철은 먼저 올라와 있었어요. 손에 쇠를 덧댄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고, 목검 대신 쇠막대를 들었어요. 철우방은 원래 쇠막대를 써요. 마철이 저를 위아래로 훑어봤어요. 제 팔에서 눈이 멈췄어요. 저는 팔을 등 뒤로 숨겼어요.
“청송문은 여자도 내보내나?”
“죄송해요.”
“왜 사과를 해?”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졌어요. 저는 인사를 했어요. 청송문 둘째 제자 소은입니다. 그다음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잘 부탁드립니다 했어요. 엄대호 심판장이 향을 봤어요. 향은 반도 안 탔어요.
그리고 시작됐어요.
마철 어깨가 내려갔어요. 위에서 와요. 저는 옆으로 갔어요. 쇠막대가 제가 있던 자리 흙을 깊게 팠어요. 흙 파편이 제 발목에 튀었어요. 마철이 쇠막대를 끌어 옆으로 휘둘렀어요. 왼발이 먼저 끌렸으니까 옆이에요. 저는 뒤로 갔어요. 쇠막대가 제 앞섶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바람이 차가웠어요. 쇠가 지나간 자리의 바람은 차가워요.
저는 계속 피했어요. 단 위를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았어요. 밧줄 네 귀퉁이 말뚝 중에 동쪽 것이 조금 기울어 있었어요. 단 북쪽 흙이 아침 비에 젖어 무르고, 남쪽은 단단했어요. 저는 그걸 다 알게 됐어요. 나갈 문이 없으니까 단 위의 모든 것을 셌어요.
관중석에서 야유가 나왔어요. 싸워라. 도망만 치냐? 누가 도망 문파라고 소리쳤고, 몇 사람이 따라 외쳤어요. 도망 문파, 도망 문파. 저는 귀가 뜨거워졌어요. 장문인이 대기석에서 일어서 있었어요. 장문인 얼굴은 셈하는 얼굴이었어요.
마철의 숨이 거칠어졌어요. 쇠막대가 무거우니까요. 마철이 쇠막대를 휘두르다 말고 멈춰 서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관중석에는 안 들리고 저한테만 들리는 소리로요.
“잡히기만 해. 팔 하나는 두고 내려가게 해 줄 테니까.”
그 순간 무서운 게 무서운 것을 넘어섰어요. 이상하게 손발이 차분해졌어요. 너무 무서우면 저는 오히려 조용해져요. 그때 장문인 말이 생각났어요. 한 번도 안 맞았네. 장문인은 그걸 꾸짖는 말로 하지 않았어요.
마철이 달려들었어요. 쇠막대를 버리고 두 팔을 벌려서 저를 잡으려고 했어요. 저는 북쪽으로 갔어요. 젖은 흙 쪽으로요. 기울어진 동쪽 말뚝 앞이요. 마철이 따라왔고, 저는 그 사람 손끝이 제 소매에 닿기 바로 전에 옆으로 한 걸음 비켰어요. 늘 하던 대로요. 먼저 피하는 거요.
마철의 발이 젖은 흙에서 미끄러졌어요. 몸이 앞으로 쏠려 기울어진 말뚝에 걸렸고, 말뚝이 마철을 받아 주지 못하고 같이 넘어갔어요. 밧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고, 마철이 단 아래 진흙 구덩이로 얼굴부터 떨어졌어요.
관중석이 아주 조용해졌어요.
엄대호 심판장이 일어났어요.
“장외. 청송문.”
저는 그 자리에 서서 제 손을 봤어요. 목검을 한 번도 안 휘둘렀어요. 손바닥이 땀으로 미끄러웠어요. 내려오는 계단을 세는 걸 잊어서, 다섯 칸을 내려온 다음에야 다섯 칸이었다는 게 생각났어요.
*
「진하율」
두 판을 이겼다. 청송문이 예선 첫 판을 넘었다.
관중석은 웃다가 야유하다가 다시 웃었다. 도망 문파라는 말이 아직 여기저기서 들렸다. 철우방 방주 마대우가 진흙투성이 아들을 일으켜 세우고 우리 대기석까지 걸어왔다. 그는 나보다 머리 두 개가 컸고 목소리가 철판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도망치는 것도 무공이냐?”
“이긴 것도 무공이죠.”
“칼 한 번 안 섞고 이긴 걸 누가 이겼다고 해?”
“심판장이요.”
마대우가 엄대호를 돌아봤다. 엄대호는 다음 대진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대우가 침을 뱉고 돌아섰다. 나는 그가 돌아설 때까지 숨을 참고 있었다. 철석이 내 뒤에 와서 섰다. 등 뒤가 따뜻했다.
내기판 쪽에서 누가 크게 웃었다. 철석의 아버지였다. 청송문에 건 사람이 그 하나뿐이라, 판돈이 전부 그 앞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동전 더미를 앞치마에 쓸어 담으며 한 번도 우리 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해바라기씨 장수에게 다가가 흩어진 씨앗 값을 셈해 주었다.
소은은 대기석 의자 끝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있었다. 육손이 이 빠진 입으로 소은에게 축하를 하려다 바람 새는 소리만 냈다. 소은이 그걸 보고 웃었다. 소은은 이기고 나서 처음 웃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셈을 하나 지웠다. 예선에서 지면 산의 반. 오늘은 안 졌다. 소매 속의 종이가 조금 가벼워졌다.
관람석 맨 위 칸에 기름 먹인 검은 우산이 접힌 채 기대어 있었다. 당무결은 끝까지 앉아서 봤다. 그는 소은이 단을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일어서서 그대로 내려갔다. 박수도 야유도 하지 않았다.
그때 대기석 쪽으로 사람 여럿이 다가왔다. 맨 앞에 선 젊은 남자는 금실로 테를 두른 흰 도포를 입었고, 허리에 찬 검집에 금박으로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 뒤에 검을 든 제자 여섯이 줄지어 섰다. 다음 상대의 대진 칸에 적힌 이름, 금정검문이었다.
남자가 소은 앞에 서서 웃었다. 이가 하얬다.
“소은 낭자, 두 해 동안 찾았소. 내 약혼녀가 여기서 무얼 하오?”
소은의 손에서 물그릇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그릇이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