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50자)

은자물쇠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철운은 아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맷돌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가 놓았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나무에서 미끄러졌다⁠.

“⁠내일 말하마⁠.⁠”

“⁠지금 하세요⁠.⁠”

“⁠내일⁠, 천호 앞에서⁠.⁠”

“⁠왜 천호 앞에서요⁠? 제 일인데⁠, 왜 남 앞에서요⁠?⁠”

“⁠남이 아니라서다⁠.⁠”

승로가 아버지를 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철운은 일어나 등잔을 껐다⁠. 어둠 속에서 승로의 숨소리가 오래 거칠었다⁠.

*

새벽에 철운은 서생을 불렀다⁠. 젊은이 셋 가운데 서생이 글씨가 가장 반듯했다⁠.

“⁠천호한테 전하시오⁠. 오늘 해가 중천에 뜨면 버들나루 염방에서 기다린다고⁠. 관아로는 안 간다고⁠.⁠”

“⁠대협⁠, 마을이 봉쇄되어 있는데 제가 어떻게 성안까지 갑니까⁠?⁠”

“⁠현령 나리를 찾아가시오⁠. 어젯밤 여기 안 왔던 현령 나리⁠.⁠”

“⁠안 왔던 분을 어떻게 찾습니까⁠?⁠”

“⁠안 왔던 사람이 제일 잘 찾아지오⁠. 다들 숨기느라 바쁘니까⁠.⁠”

서생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부채를 접고 나루로 뛰어갔다⁠. 키다리와 뚱보가 철운의 앞을 막았다⁠.

“⁠대협⁠, 저희도 갑니다⁠. 호위입니다⁠.⁠”

“⁠호위가 뭘 하오⁠?⁠”

“⁠대협 허리가 아프시면 저희가 업겠습니다⁠.⁠”

“⁠업히면 천하제일검 체면이 뭐가 되오⁠?⁠”

“⁠두부검 체면은 괜찮지 않습니까⁠?⁠”

철운은 대꾸하지 않고 앞치마를 둘렀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종이가 나왔다⁠. 채향이 새벽에 꽂아 둔 것이었다⁠.

「⁠하나⁠, 아범한테 다 말하기⁠. 둘⁠, 다 말하기⁠. 셋⁠, 다⁠.⁠」

엿 금지가 처음으로 빠져 있었다⁠.

*

도각은 관아 안채에서 북경에서 내려온 공문을 애체로 읽고 있었다⁠. 공문 끝에 붉은 도장이 세 개나 찍혀 있었다⁠. 강남의 무예 있는 자를 왜구를 친다는 명목으로 불러 모은 다음 칼을 거두라는 명이었다⁠. 칼을 내지 않는 자는 요서 무리로 다스린다⁠. 성안 찻집마다 앉아 있던 칼 찬 사내들은 저희가 의병으로 불려 온 줄 알고 있었다⁠.

“⁠나리⁠, 버들나루에서 웬 젊은이가 왔습니다⁠. 부채를 들었습니다⁠.⁠”

서리의 말에 도각이 고개를 들었다⁠. 서생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와 철운의 말을 전했다⁠. 도각은 다 듣고 나서 한참 애체를 만지작거렸다⁠.

“⁠어젯밤 나는 버들나루에 가지 않았네⁠.⁠”

“⁠예⁠, 대협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 왔던 분이 제일 잘 찾아진다고⁠.⁠”

도각이 웃음을 참느라 기침을 했다⁠. 위가 쓰려 볶은 쌀을 씹었다⁠. 쌀을 다 씹고 나서 일어났다⁠.

“⁠천호한테는 내가 가겠네⁠. 현령이 전하면 천호가 의심을 덜 하지⁠. 의심은 내가 받고⁠.⁠”

서리가 놀라 도각을 보았다⁠. 현령은 남의 말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각은 관복 소매를 털고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걷는 동안 한 번도 공문을 돌아보지 않았다⁠.

*

염방은 마을 아래 운하가 갈라지는 자리에 있었다⁠. 지붕 낮은 긴 집에 쪽물 독이 스무 개 넘게 줄지어 묻혀 있었다⁠. 독마다 파란 물이 거품을 물고 있었고⁠, 거품 위로 쇠붙이 냄새 비슷한 쪽물 냄새가 올라왔다⁠. 천장 대들보에 물들인 실타래가 줄줄이 늘어져 바닥에 파란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일꾼들은 맨발이었다⁠. 발바닥까지 파랬다⁠.

승로는 맨 안쪽 독 앞에서 긴 막대로 실을 뒤집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막대가 물을 휘저을 때마다 파란 물결이 독 가장자리를 넘었다⁠.

“⁠일꾼들은 내보내라⁠.⁠”

“⁠한창 물이 오를 때예요⁠. 지금 손 떼면 이 독은 버려요⁠.⁠”

“⁠내가 물어 주마⁠. 두부로⁠.⁠”

승로가 막대를 독에 걸쳐 놓았다⁠. 염방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일꾼들을 내보냈다⁠. 일꾼들은 맨발로 나가며 철운을 힐끔거렸다⁠. 두부검이 염방에 왔다는 말이 해 지기 전에 우물가에 닿을 것이었다⁠.

염방 주인이 문간에서 되돌아와 철운의 소매를 잡았다⁠. 배가 불룩하고 손이 파란 노인이었다⁠.

“⁠영감⁠, 독 하나에 쪽 잎이 석 섬 들어가오⁠. 정말 두부로 물어 줄 거요⁠?⁠”

“⁠두부 석 섬이면 되오⁠?⁠”

“⁠두부를 섬으로 세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럼 판으로 세시오⁠. 열 판⁠.⁠”

“⁠스무 판⁠.⁠”

“⁠열다섯⁠.⁠”

“⁠영감⁠, 천하제일검이 두부 흥정을 하오⁠?⁠”

“⁠천하제일검은 흥정을 안 해 봐서 못하오⁠. 두부 장수는 잘하오⁠.⁠”

주인이 열다섯 판에 손을 털고 나갔다⁠. 승로는 흥정하는 동안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쪽물 독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말없이 기다렸다⁠. 승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맷돌을 내주셨잖아요⁠. 서당 애들이랑 싸우고 왔을 때요⁠.⁠”

“⁠기억하냐⁠?⁠”

“⁠물집 터뜨려 주시면서 그러셨잖아요⁠. 손바닥이 단단해지면 주먹을 덜 쥔다고⁠.⁠”

“⁠기억하는구나⁠.⁠”

“⁠아버지는 왜 주먹을 덜 쥐셔야 했어요⁠?⁠”

철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은 해가 중천에 뜨면 염방 문간으로 걸어 들어올 것이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문간이 어두워졌다⁠. 현곡이 들어왔다⁠. 금의위 둘이 뒤따르다가 현곡의 손짓에 문밖에 남았다⁠. 현곡은 평복이 아닌 비어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에 수춘도를 찼다⁠. 쪽물 독 사이를 걸어오는 동안 비어복 자락에 파란 물방울이 떨어졌다⁠. 현곡은 털지 않았다⁠.

“⁠관아로 오지 않는다더군⁠.⁠”

“⁠관아에는 율이 있소⁠. 오늘은 율 말고 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하오⁠.⁠”

“⁠사람 이야기 전에 하나 알려 주지⁠. 북경의 명이 내려왔다⁠. 성안에 모인 강호 칼잡이들은 왜구를 치러 온 줄 알지만⁠, 이름을 올리는 날 칼을 내놓게 된다⁠. 칼을 안 내는 자는 요서 무리다⁠. 네 이름을 듣고 모인 자들이다⁠. 네가 불러 모은 칼을 내가 거둔다⁠.⁠”

“⁠그 사람들은 나를 모르오⁠.⁠”

“⁠너를 몰라도 네 이름은 안다⁠. 이름이 칼을 부른다⁠.⁠”

*

현곡이 품에서 은자물쇠를 꺼냈다⁠. 철운은 손을 내밀어 소석에게서 빌려 온 자물쇠를 꺼냈다⁠. 아침에 손주가 자다가 깨서 목에서 벗어 준 것이었다⁠. 할아버지 이거 왜 가져가요⁠, 하고 묻다가 다시 잠들었다⁠.

두 자물쇠가 쪽물 독 가장자리 나무판에 나란히 놓였다⁠. 크기가 같았다⁠. 구름 무늬가 같았다⁠. 옆면의 작은 홈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현곡이 자기 것의 홈을 손톱으로 밀었다⁠. 앞판이 열렸다⁠. 안쪽에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현곡⁠.

현곡이 소석의 것을 열었다⁠. 은추⁠.

“⁠어머니가 은장이를 불러 둘을 한꺼번에 지었다⁠. 형 것과 아우 것⁠. 아우가 태어난 가을이었다⁠. 그래서 은추라 했다⁠. 숨을 은⁠, 가을 추⁠. 가을에 숨어 온 아이라고⁠.⁠”

승로가 나무판을 내려다보았다⁠. 아들 목에 서른 해 걸려 있던 것을⁠, 자기 목에 아기 때 걸려 있던 것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았다⁠.

“⁠서른 해 전 나는 여덟 살이었다⁠.⁠”

현곡이 쪽물 독을 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금의위 천호의 것이었다⁠. 짧고 딱딱했다⁠. 말이 이어지면서 조금씩 무너졌다⁠.

“⁠아버지는 강호에서 이름이 있는 검객이었다⁠. 위지 집안의 검이라 하면 강북에서는 다 알았다⁠. 아버지는 천하제일검이라는 이름을 갖고 싶어 했다⁠. 그해 봄에 아버지는 천하제일검에게 겨루자는 글을 보냈다⁠. 천하제일검이 우리 집 대숲 앞마당까지 왔다⁠. 나는 사랑채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보았다⁠.⁠”

철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아버지 칼이 세 번 움직였다⁠. 천하제일검 칼은 한 번 움직였다⁠. 아버지가 쓰러졌다⁠. 천하제일검이 칼을 거두고 아버지 곁에 무릎을 꿇었다⁠. 무엇이라 말을 했다⁠. 나는 듣지 못했다⁠.⁠”

*

“⁠그날 밤 집에 불이 났다⁠.⁠”

현곡의 손이 나무판 가장자리를 쥐었다⁠.

“⁠어머니가 나를 깨워 뒷문으로 내보냈다⁠. 대숲으로 숨으라 했다⁠. 아우는 어머니가 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금방 따라온다 했다⁠. 나는 대숲에서 기다렸다⁠. 불이 지붕까지 올라갔다⁠. 기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염방 안이 조용했다⁠. 대들보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독에 닿는 소리만 들렸다⁠.

“⁠불길 속에서 사내 하나가 나왔다⁠. 키가 크고⁠, 손에 피 묻은 칼을 들고⁠, 다른 팔에 쪽빛 포대기를 안고 있었다⁠. 포대기 안에서 아기가 울었다⁠. 아우의 울음소리였다⁠. 여덟 살이었지만 아우 울음은 알았다⁠. 사내는 대숲을 지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쫓아가지 못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현곡이 고개를 들어 철운을 보았다⁠.

“⁠이튿날 아침 잿더미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나를 거둔 것은 지나가던 금의위 백호였다⁠. 나는 금의위가 되었다⁠. 서른 해 동안 천하제일검을 찾았다⁠. 강호에서는 천하제일검이 죽었다 했고⁠, 바다로 갔다 했고⁠, 산에 들어갔다 했다⁠. 두부를 누르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현곡이 철운의 칼집을 보았다⁠. 철운은 칼을 가져오지 않았다⁠. 현곡의 눈이 철운의 오른손으로 내려갔다⁠.

“⁠나루에서 네 칼자루에 감긴 천을 보았을 때 알았다⁠. 쪽빛 포대기였다⁠. 서른 해를 칼에 감고 다녔더군⁠.⁠”

*

“⁠말하라⁠. 네가 내 아버지를 베었나⁠?⁠”

“⁠베었소⁠.⁠”

“⁠그 밤 불길 속에서 내 아우를 안고 나왔나⁠?⁠”

“⁠안고 나왔소⁠.⁠”

“⁠내 어머니는⁠?⁠”

철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승로가 아버지를 보았다⁠. 현곡이 다시 물었다⁠.

“⁠내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나⁠?⁠”

철운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었다⁠. 엄지 아래 흉터가 손바닥 안으로 숨었다⁠.

“⁠그 밤 일은 다 내 탓이오⁠. 다른 말은 하지 않겠소⁠.⁠”

현곡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닫혔다⁠. 서른 해 동안 품어 온 그림이 철운의 대답으로 마지막 조각을 얻은 얼굴이었다⁠. 아버지를 베고⁠, 집에 불을 지르고⁠, 아우를 훔쳐 간 사내⁠. 현곡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가 떼었다⁠.

“⁠너를 지금 베지 않겠다⁠. 너를 베는 것은 내 아버지가 하던 짓이다⁠. 강호의 짓이다⁠. 나는 법으로 하겠다⁠.⁠”

승로가 막대를 잡았다⁠. 막대 끝이 독을 휘저어 파란 물이 튀었다⁠. 물방울이 철운의 흰 앞치마와 현곡의 비어복과 승로의 얼굴에 골고루 떨어졌다⁠. 승로는 얼굴을 닦지 않았다⁠.

“⁠아버지⁠.⁠”

승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럼 저는 누구예요⁠?⁠”

철운이 아들을 보았다⁠. 서른한 해 전 포대기 안에서 울던 얼굴을 보았다⁠. 쪽물에 젖은 지금의 얼굴을 보았다⁠. 둘이 같은 얼굴이었다⁠. 철운은 대답할 말을 찾았다⁠. 서른 해 동안 맷돌을 돌리며 이 물음에 할 대답을 골라 두었다⁠. 골라 둔 말이 하나도 입에 오르지 않았다⁠.

“⁠너는 내 아들이다⁠.⁠”

“⁠그거 말고요⁠.⁠”

“⁠그거밖에 없다⁠.⁠”

*

현곡이 소석의 은자물쇠를 닫아 철운에게 돌려주었다⁠. 자기 것은 품에 넣었다⁠. 그리고 승로 앞으로 걸어갔다⁠. 쪽물 독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형과 아우가 마주 보았다⁠. 키가 비슷했다⁠. 턱이 비슷했다⁠. 승로는 닮은 턱을 처음 알았다⁠. 현곡은 서른 해 전부터 알았다⁠.

“⁠수레는 필요 없다⁠. 이레가 지나도 수레는 버들나루에 가지 않는다⁠.⁠”

현곡이 철운을 돌아보았다⁠.

“⁠나는 내 것을 데려간다⁠. 네가 서른 해 훔친 것을 돌려받는다⁠.⁠”

철운이 한 걸음 나왔다⁠. 현곡이 손을 들어 막았다⁠. 칼을 뽑지는 않았다⁠.

“⁠늙은이⁠, 오늘은 율 말고 사람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 사람 이야기를 하겠다⁠.⁠”

현곡이 승로를 똑바로 보았다⁠. 쪽물 냄새 속에서 현곡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아졌다⁠.

“⁠너는 위지은추다⁠. 내 아우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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