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739자)

연무장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사흘째 아침⁠, 철운은 수염을 다듬었다⁠. 구리 거울을 팔 길이만큼 떼어 놓고 가위를 댔다⁠. 거울 속 얼굴이 흐려서 가위가 두 번 헛돌았다⁠. 소석이 옆에서 거울을 가까이 들어 주었다⁠.

“⁠할아버지⁠, 더 가까이요⁠?⁠”

“⁠더 멀리⁠.⁠”

“⁠멀리 하면 안 보이잖아요⁠.⁠”

“⁠할아버지 눈은 거꾸로다⁠. 멀어야 보인다⁠.⁠”

소석은 거울을 들고 뒷걸음질을 쳤다⁠. 부엌 문턱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거울은 놓치지 않았다⁠. 철운은 웃음을 참으며 수염 끝을 마저 잘랐다⁠. 젊은이 셋이 맷돌 옆에서 거울 소동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큭큭거렸다⁠.

옷은 평소 입던 쪽빛 무명이었다⁠. 소매를 걷고 흰 앞치마를 둘렀다⁠. 칼은 맷돌 받침돌 밑에 다시 넣었다⁠. 키다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대협⁠, 칼 없이 가십니까⁠?⁠”

“⁠칼 들고 가면 싸우러 가는 거고⁠, 앞치마 두르고 가면 흥정하러 가는 거요⁠.⁠”

“⁠천호가 흥정을 받아 줍니까⁠?⁠”

“⁠두부 장수가 칼을 들고 가면 받아 줄 흥정도 안 받아 주오⁠.⁠”

채향은 부엌에서 나오지 않았다⁠. 철운이 마당을 나설 때 앞치마 주머니에 종이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언제 꽂았는지 몰랐다⁠.

「⁠하나⁠, 살아서 오기⁠. 둘⁠, 엿 금지⁠.⁠」

두 줄뿐이었다⁠. 철운은 종이를 다시 접어 넣었다⁠. 소석이 대문까지 뛰어나와 두부 한 모를 내밀었다⁠. 젖은 베에 싸여 있었다⁠.

“⁠천호 아저씨 드려요⁠. 할아버지 두부 먹으면 착해져요⁠.⁠”

“⁠그 아저씨는 두부로는 안 착해진다⁠.⁠”

“⁠그럼 두 모 드려요⁠.⁠”

*

도각이 보낸 포졸 둘이 철운을 성안까지 데려갔다⁠. 봉쇄된 나루에서 배 한 척만 풀려났다⁠. 사공은 노를 저으며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천하제일검을 태운 사공이 되었다고 손주에게 자랑할 얼굴이었다⁠.

소주 성안은 봄빛에 젖어 있었다⁠. 운하 양쪽에 비단 가게와 찻집이 늘어서 있고⁠, 다리마다 짐배가 줄지어 지나갔다⁠. 성 한가운데 현묘관 앞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여 담벼락의 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현묘관은 소주에서 가장 큰 도교 사원이었다⁠. 방에는 붉은 글씨로 올해 비단 징발 몫이 적혀 있었다⁠. 집집마다 직방마다 바쳐야 할 비단이 지난해의 곱절이었다⁠. 방 앞에서 늙은 직녀 하나가 손바닥을 펴 보이며 울고 있었다⁠.

방 옆에 새 방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바다의 왜구를 치려 하니 강남의 무예 있는 자는 관아에 이름을 올리라⁠.⁠」

찻집 이층 창가에 칼을 찬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사내들의 눈이 철운을 따라 움직였다⁠. 소문이 사흘 만에 성안 찻집까지 와 있었다⁠. 철운은 앞치마 끈을 고쳐 매고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

현곡은 관아 연무장에 있었다⁠. 모래를 깐 마당 둘레에 창과 칼을 꽂은 시렁이 있었다⁠. 금의위 열댓이 모래 위에서 칼을 휘두르다가 철운이 들어서자 멈췄다⁠. 연무장 끝의 처마 아래에 도각이 서 있었다⁠. 금 간 애체를 아직 바꾸지 못했다⁠.

현곡은 탁자 위의 종이 한 장을 철운에게 내밀었다⁠.

“⁠읽어라⁠.⁠”

철운은 종이를 받아 팔을 쭉 뻗었다⁠. 글자가 멀어지자 겨우 읽혔다⁠. 현곡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강남 요서 무리의 우두머리 독고철운⁠. 서른 해 숨어 지내며 서당 훈장에게 요서를 건네고⁠, 강호의 칼잡이들을 버들나루로 불러 모았다⁠. 금의위의 배를 습격해 증인을 빼앗았다⁠.⁠」

“⁠훈장에게 시집을 건넨 적 없소⁠.⁠”

“⁠건넨 적이 없다는 것을 누가 증명하나⁠? 훈장과 같은 마을에 천하제일검이 서른 해를 숨어 있었다⁠. 그 마을 서당에서 금서가 나왔다⁠. 그 마을로 칼잡이들이 몰려들었다⁠.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네가 한 일을 차례로 옮겨 적었을 뿐이다⁠.⁠”

“⁠칼잡이들은 천호가 부른 거요⁠. 사흘을 주었으니까⁠.⁠”

현곡이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은 아니었다⁠.

“⁠네가 칼을 꺼낸 것도 내가 시킨 일인가⁠?⁠”

철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현곡이 연무장 모래를 한 발로 그었다⁠.

“⁠강남은 칼이 너무 많다⁠. 문인은 붓으로 조정을 비웃고⁠, 무인은 칼로 제 마음대로 사람을 벤다⁠. 둘이 손을 잡으면 난이 된다⁠. 조정은 칼을 나라만 쥐기를 바란다⁠. 나도 그렇다⁠. 내 아버지는 강호의 칼에 죽었다⁠. 법도 재판도 없이⁠, 칼 쥔 두 사람이 마주 서서 하나가 쓰러졌다⁠. 그것이 강호의 법이다⁠. 나는 그 법을 끝내러 왔다⁠.⁠”

말끝이 떨리지 않았다⁠. 서른 해를 같은 말로 다져 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철운은 현곡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

“⁠칼을 뽑아 보아라⁠.⁠”

“⁠가져오지 않았소⁠.⁠”

“⁠그럼 맨손으로⁠.⁠”

현곡이 손짓하자 금의위 다섯이 모래 위로 나왔다⁠. 수춘도를 뽑아 철운을 둘러쌌다⁠. 처마 밑에서 도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천호⁠, 여기는 현의 관아입니다⁠. 맨손의 백성을⁠…⁠…⁠.⁠”

“⁠현령은 물러나 있으라⁠.⁠”

다섯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철운은 모래 위에서 발을 끌듯이 옮겼다⁠. 맷돌을 돌리는 걸음이었다⁠. 몸이 원을 그리며 돌자 칼날이 하나씩 빗나갔다⁠. 첫 칼은 앞치마 끈을 스쳤고⁠, 두 번째 칼은 소매를 스쳤다⁠. 철운은 손을 들지 않았다⁠. 피하기만 했다⁠. 칼날이 모래에 박히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치지 않는가⁠!⁠”

현곡이 소리쳤다⁠. 철운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였다⁠. 칼 하나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났다⁠. 철운이 얼굴을 찡그렸다⁠.

“⁠천호⁠, 잠깐만⁠. 허리가⁠.⁠”

금의위 하나가 멈칫했다⁠. 멈칫한 틈에 철운은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자리가 다섯 칼날이 모두 닿지 않는 한가운데였다⁠. 금의위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앉은 늙은이를 베라는 명은 받지 않았다⁠.

현곡이 칼을 뽑아 직접 들어왔다⁠. 칼끝이 철운의 가슴으로 곧게 왔다⁠. 철운은 앉은 채로 두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칼날이 두 손바닥 사이에 끼었다⁠. 손바닥 굳은살이 칼날 양면을 물었다⁠. 현곡이 칼을 빼려 했다⁠. 칼은 빠지지 않았다⁠.

연무장이 조용했다⁠. 도각이 애체를 눈에 댔다⁠.

철운이 손바닥을 폈다⁠. 칼이 풀려났다⁠. 현곡은 칼을 거두지 않고 칼끝으로 철운의 오른 소매를 툭 쳐서 갈랐다⁠. 소매가 갈라지며 손바닥이 드러났다⁠. 현곡이 철운의 손목을 잡아 손바닥을 위로 뒤집었다⁠.

손바닥 한가운데에 맷돌 굳은살⁠, 손가락 뿌리 밑에 칼 굳은살⁠. 엄지 아래에 동전만 한 동그란 흉터⁠. 살갗이 반들반들하고 결이 없었다⁠.

“⁠이건 무엇인가⁠?⁠”

“⁠솥에 덴 거요⁠.⁠”

“⁠두부 장수가 솥에 손바닥을 대나⁠?⁠”

“⁠젊어서 서툴렀소⁠.⁠”

현곡은 흉터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손목을 놓았다⁠.

*

“⁠거래를 하자⁠.⁠”

현곡이 탁자 앞에 앉았다⁠. 철운은 모래 위에 앉은 채였다⁠. 일어나려다 허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레 뒤 아침⁠, 철창 수레가 버들나루로 간다⁠. 네가 혼자 수레에 타면 북쪽으로 데려간다⁠. 네가 타면 마을 봉쇄를 푼다⁠. 아이들은 증인에서 뺀다⁠. 훈장은 목을 베지 않고 귀양을 보낸다⁠.⁠”

“⁠천호의 원수는 나 하나요⁠. 아이들과 훈장은 원수가 아니오⁠.⁠”

“⁠그래서 거래가 되는 것이다⁠.⁠”

도각이 처마 밑에서 나왔다⁠.

“⁠천호⁠, 아이들 진술에는 퍼뜨린 흔적이 없습니다⁠. 훈장의 귀양은 원래 율에 맞는 벌입니다⁠. 그것을 거래로 내줄 일은 아닙니다⁠.⁠”

“⁠현령은 율을 잘 아는군⁠. 율은 금의위가 정한다⁠.⁠”

도각이 입을 다물었다⁠. 철운이 모래를 짚고 일어났다⁠. 무릎이 두 번 소리를 냈다⁠.

“⁠이레를 주시는 까닭이 무엇이오⁠?⁠”

“⁠네가 주라고 할 테니까⁠. 늙은이들은 늘 무언가를 마무리할 날을 달라고 한다⁠.⁠”

“⁠맞소⁠. 손주한테 두부 누르는 법을 가르쳐야 하오⁠. 이레면 될 거요⁠.⁠”

“⁠두부가 이레나 걸리나⁠?⁠”

“⁠콩 불리는 데만 하룻밤이오⁠. 눌러 보고 망치고 다시 하면 이레도 모자라오⁠.⁠”

현곡이 철운을 보았다⁠. 철운은 소석이 쥐여 준 두부 보따리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손주가 천호께 드리랍디다⁠. 이 두부를 먹으면 착해진다고⁠.⁠”

금의위 하나가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현곡은 보따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철운은 보따리를 그대로 두고 연무장을 나왔다⁠.

*

관아 옥은 연무장 뒤에 있었다⁠. 도각이 앞에서 걸었다⁠. 옥문 앞에서 도각이 옥졸에게 눈짓하자 옥졸이 열쇠를 꺼냈다⁠.

“⁠잠깐이오⁠. 천호가 알면 내 목이오⁠.⁠”

“⁠나리 목은 요즘 하루에 몇 번씩 날아가오⁠?⁠”

“⁠세지 않소⁠. 위가 쓰려서⁠.⁠”

육계담은 짚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등에 곤장 자국이 줄줄이 부어 있었다⁠. 철운을 보자 육계담이 몸을 일으키려다 신음했다⁠.

“⁠어른⁠, 거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옥까지 빠르오⁠.⁠”

“⁠옥졸이 우리 서당 아이 삼촌입니다⁠.⁠”

육계담이 철운의 소매를 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없었다⁠.

“⁠수레를 타지 마십시오⁠. 천호는 아이들이나 저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어른의 이름을 원합니다⁠. 이름이 수레에 오르면 강남이 통째로 수레에 오릅니다⁠.⁠”

“⁠훈장님은 목이 붙었으면 그걸로 됐소⁠.⁠”

“⁠목만 붙어 있으면 사람입니까⁠?⁠”

“⁠훈장님⁠, 그 시는 왜 가르쳤소⁠? 위험한 줄 알면서⁠.⁠”

육계담이 짚더미에 이마를 대고 잠깐 웃었다⁠. 곤장 자국이 아파서 웃음이 반쯤에서 끊겼다⁠.

“⁠스승님이 버들나루를 지나가다 지은 시입니다⁠. 나루에서 빨래하는 직녀들 손을 보고요⁠. 우리 서당 아이들 어미가 다 그 손입니다⁠. 아이들이 제 어미 손을 시로 한 번 써 보면⁠, 커서 그 손을 함부로 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그 손을 함부로 할 것 같소⁠?⁠”

“⁠어른도 손주가 크면 그 두부 맛을 잊어버릴 거라 생각하십니까⁠?⁠”

철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훈장은 말이 길었지만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고집스러웠다⁠.

육계담이 기침을 했다⁠. 철운은 대답하지 않고 훈장의 등에 손바닥을 얹었다⁠. 부은 자리가 뜨거웠다⁠. 옥 밖에서 도각이 헛기침을 했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소리였다⁠.

*

관아를 나와 나루로 가는 길에 찻집 이층에서 누가 철운을 불렀다⁠.

“⁠독고 형⁠, 차 한 잔 하고 가시오⁠.⁠”

창가에 백발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왼눈에 검은 천을 대고 있었다⁠. 철운은 한참 올려다보다가 계단을 올라갔다⁠. 포졸 둘이 서로 얼굴을 보다가 계단 아래에 남았다⁠.

“⁠서른 해 전 항주 서호 다리 위에서 형한테 눈 하나를 내준 사람이오⁠. 기억하시오⁠?⁠”

“⁠눈은 기억나오⁠. 얼굴은 잊었소⁠.⁠”

“⁠얼굴이 그때보다 나아졌으니 잊어도 되오⁠.⁠”

외눈 노인이 차를 따랐다⁠. 손이 조금 떨렸다⁠. 철운은 찻잔을 받으며 노인의 무릎을 보았다⁠. 노인도 철운의 무릎을 보았다⁠.

“⁠형도 무릎이오⁠?⁠”

“⁠무릎이 먼저고 허리가 다음이오⁠.⁠”

“⁠나는 허리가 먼저였소⁠. 형보다 빨리 늙었구려⁠. 형한테 처음으로 이긴 것 같소⁠.⁠”

두 노인이 웃었다⁠. 외눈 노인이 웃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형⁠, 성안 객잔마다 흑장 쪽지가 돌고 있소⁠. 외팔이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오⁠. 서른 해 전 형한테 팔을 잃은 그 흑장 두목 말이오⁠. 외팔이가 형 핏줄을 노리는 건 형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도 있소⁠. 형이 그날 밤 무엇을 안고 나왔는지⁠, 외팔이는 아는 모양이오⁠.⁠”

철운의 찻잔이 멈췄다⁠. 외눈 노인이 철운의 손바닥을 힐끗 보았다⁠.

“⁠나는 그날 밤 거기 없었소⁠. 소문만 들었소⁠. 차 식겠소⁠.⁠”

철운은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났다⁠. 노인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형⁠, 이번에도 이기시오⁠. 우리 나이에 지면 다시 일어나기가 오래 걸리오⁠.⁠”

*

연무장에 해가 기울었다⁠. 금의위들이 물러가고 현곡 혼자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두부 보따리가 그대로 있었다⁠. 젖은 베가 말라 가고 있었다⁠.

현곡은 보따리를 풀었다⁠. 두부 한 모가 아이 손바닥 자국을 두 개 달고 있었다⁠. 누르다 만 자국이었다⁠. 현곡은 두부를 들여다보다가 품에 손을 넣었다⁠.

은자물쇠 하나가 나왔다⁠. 오래 만져서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현곡은 엄지로 자물쇠 앞면을 문질렀다⁠. 앞면에 구름 무늬가 있었다⁠. 사흘 전 새벽 나루에서 아이 목에 걸려 흔들리던 자물쇠에도 구름 무늬가 있었다⁠.

현곡은 자물쇠를 손바닥에 쥐었다⁠. 쥔 손이 오래 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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