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08자)

불타던 밤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철운은 판목 더미 모서리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옆구리에서 흐른 피가 앞치마를 지나 무릎까지 젖었다⁠. 젊은이 셋이 판목 더미에서 뛰어내려 철운을 부축하려 했다⁠. 철운이 왼손을 들어 막았다⁠.

“⁠앉아서 말하겠소⁠. 서서 하기엔 긴 이야기요⁠.⁠”

소석이 엄마 손을 빠져나와 할아버지에게 달려왔다⁠. 손에 표주박을 들고 있었다⁠. 곽 노파가 장아찌 단지 옆에 두었던 물이었다⁠. 소석은 표주박을 두 손바닥으로 받쳐 할아버지 입에 댔다⁠. 물이 반은 입으로⁠, 반은 수염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천천히 드세요⁠. 엄마가 그랬어요⁠. 물은 천천히⁠.⁠”

철운이 물을 다 마셨다⁠. 손주의 젖은 손바닥을 왼손으로 감쌌다⁠. 오래 감싸지 않았다⁠. 소석의 등을 엄마에게로 가볍게 밀었다⁠. 소석은 몇 걸음 가다 돌아보고⁠, 다시 엄마에게 갔다⁠. 현곡은 아이가 오가는 것을 끝까지 눈으로 따라갔다⁠.

현곡은 천을 쥔 채 서 있었다⁠. 마당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처마 밑 금의위들도⁠, 동쪽의 무인들도⁠, 서쪽 담 밑의 사람들도⁠. 단 위에서 도각이 애체를 눈에 댔다⁠.

“⁠그날 낮에 천호의 아버지와 겨루었소⁠. 위지 대협은 세 번 칼을 썼고 나는 한 번 썼소⁠. 대협이 쓰러졌소⁠. 나는 대협 곁에 무릎을 꿇었소⁠.⁠”

“⁠무엇이라 했나⁠?⁠”

현곡의 목소리가 낮았다⁠.

“⁠서른 해 동안 그게 궁금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에 고개를 끄덕였는지⁠.⁠”

“⁠대협이 먼저 말했소⁠. 흑장이 위지 집 검보를 노린다고⁠. 오늘 밤 올 거라고⁠. 자기가 쓰러지면 막을 사람이 없다고⁠. 처자식을 부탁한다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소⁠. 대협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소⁠.⁠”

현곡의 손에서 천이 조금 흘러내렸다⁠. 현곡이 다시 쥐었다⁠.

*

“⁠밤에 대숲 건너 주막에 묵었소⁠. 이경쯤 불빛이 보였소⁠. 뛰어갔소⁠. 대숲에 들어서니 집이 타고 있었소⁠. 지붕까지 불이 올라가 있었소⁠. 앞마당에 손바닥이 검은 사내들이 열 남짓 있었소⁠. 사랑채에서 상자를 들고 나오는 놈도 있었소⁠. 검보였겠지⁠.⁠”

철운이 왼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칼을 뽑았소⁠. 그날은 많이 벴소⁠. 우두머리가 내 앞을 막았소⁠. 그놈 오른팔을 벴소⁠. 팔이 상자를 쥔 채 떨어졌소⁠. 그놈은 불길 너머로 달아났소⁠.⁠”

마당 구석에서 누군가 웃었다⁠. 낮고 마른 웃음이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철운도 돌아보지 않았다⁠.

“⁠안채 문 앞에 부인이 있었소⁠. 불이 문틀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소⁠. 부인이 포대기를 안고 있었소⁠. 옆구리가 젖어 있었소⁠. 흑장한테 찔린 거였소⁠. 부인이 나를 보았소⁠. 낮에 남편을 벤 사내를⁠.⁠”

철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끊겼다⁠. 소석이 엄마 치맛자락 뒤에서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가 말을 멈추는 것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부인이 포대기를 내밀었소⁠. 나한테⁠. 손이 피투성이였소⁠. 포대기 한가운데를 쥐고 내밀었소⁠. 그 자국이오⁠.⁠”

현곡이 천 한가운데의 손바닥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부인이 말했소⁠. 큰애는 대숲에 있다고⁠. 큰애도⁠. 거기까지 말했소⁠. 문틀 위 들보가 내려왔소⁠. 나는 포대기를 받아 안고 오른손으로 들보를 받쳤소⁠. 불붙은 들보였소⁠. 손바닥이 들보에 붙었소⁠. 부인을 끌어내려고 왼손을 뻗었소⁠. 들보가 하나 더 내려왔소⁠.⁠”

철운이 무명을 감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무명 밑의 흉터는 어젯밤 칼날에 반으로 갈라졌다⁠.

“⁠서른 해 동안 솥에 덴 자국이라고 했소⁠. 들보 자국이오⁠.⁠”

*

승로가 채향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왔다⁠. 아버지 곁까지 와서 멈췄다⁠. 승로는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현곡만 보며 말을 이었다⁠.

“⁠포대기를 안고 대숲으로 갔소⁠. 큰애를 찾았소⁠. 이름을 몰라서 큰애야⁠, 큰애야⁠, 불렀소⁠. 대숲이 넓었소⁠. 품에서 아이가 울었소⁠. 흑장 놈들이 다시 모여 오는 소리가 들렸소⁠. 아이 울음소리를 따라올 거였소⁠.⁠”

“⁠그래서 떠났나⁠.⁠”

“⁠떠났소⁠. 큰애를 찾지 못하고⁠. 아이 울음을 멈추려면 걸어야 했소⁠. 걸으면 울음이 그쳤소⁠. 소주까지 걸었소⁠.⁠”

현곡이 눈을 감았다⁠. 대숲에서 여덟 살 아이는 사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큰애야⁠, 큰애야⁠. 아이는 숨었다⁠. 피 묻은 칼을 든 사내가 자기를 찾으러 온 줄 알았다⁠. 대숲 가장 깊은 곳에서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숨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아우의 울음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현곡은 서른 해 동안 큰애를 부르던 목소리를 원수가 자기를 찾던 소리로 기억했다⁠.

“⁠왜 말하지 않았나⁠? 나루에서⁠, 염방에서⁠, 역관에서⁠. 왜⁠?⁠”

“⁠천호 아버지를 벤 것은 나요⁠. 그날 낮에 내가 겨루러 가지 않았으면 대협이 흑장을 막았을 거요⁠. 그 밤 일은 다 내 탓이오⁠. 불을 누가 질렀든⁠.⁠”

철운이 처음으로 승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너한테는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너는 내 아들이 아니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웠다⁠. 천하제일검이 서른 해 동안 무서운 게 그거 하나였다⁠.⁠”

승로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앞에서⁠. 쪽물 든 손으로 아버지의 왼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 밑에서 곽 노파가 코를 풀었다⁠. 크게 풀었다⁠. 할멈들이 노파를 돌아보았다⁠. 노파가 손사래를 쳤다⁠.

“⁠장아찌가 매워서 그래⁠.⁠”

“⁠노파⁠, 장아찌는 짜지 맵지 않소⁠.⁠”

이장이 말했다⁠. 노파가 이장 발등을 밟았다⁠. 할멈들이 울다가 웃었다⁠. 직녀들 사이에서도 누군가 웃었다⁠. 웃음이 울음을 덮지는 못했지만 울음 사이에 숨 쉴 틈을 냈다⁠.

단 위에서 육계담이 형틀에 묶인 채 중얼거렸다⁠.

“⁠큰애도⁠. 부인이 거기까지 말씀하셨답니다⁠. 그 뒤의 말이 무엇이었을지 서른 해를 생각하셨겠지요⁠.⁠”

“⁠훈장⁠, 지금은 풀이하지 마시오⁠.⁠”

도각이 말했다⁠. 애체를 벗어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금 간 알에 물기가 번졌다⁠.

*

마당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커졌다⁠. 외팔 노인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빈 오른 소매가 바람에 날렸다⁠. 노인은 마당 한가운데까지 걸어 나와 현곡 앞에 멈췄다⁠.

“⁠잘도 꾸몄군⁠, 천하제일검⁠. 서른 해 동안 입 다물고 있다가 이제 와서 다 털어놓으면 다들 울어 줄 줄 알았나⁠?⁠”

노인이 현곡을 보았다⁠. 누런 이가 드러났다⁠.

“⁠그런데 천호⁠, 저놈 말이 맞아⁠. 불은 우리가 질렀다⁠. 네 어미 옆구리는 내가 찔렀다⁠. 검보를 내놓으라는데 안 내놓더군⁠. 아기를 끌어안고 있더라⁠. 아기를 뺏으려고 했지⁠. 그때 저놈이 와서 내 팔을 가져갔다⁠. 네 어미 손에서 아기를 받은 건 저놈이고⁠, 네 어미를 죽인 건 나다⁠.⁠”

마당이 얼어붙었다⁠. 현곡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서른 해 동안 너는 원수를 잘못 쫓았다⁠. 금의위가 되어서⁠, 강남을 다 뒤져서⁠, 두부 장수 하나를 쫓았지⁠. 진짜 원수는 객잔에서 한 팔로 젓가락질하며 네가 쫓는 꼴을 구경했고⁠. 재미있었다⁠, 천호⁠. 서른 해 동안 재미있었다⁠.⁠”

현곡이 천을 떨어뜨렸다⁠.

여덟 살에 잿더미에서 어머니를 찾던 아침이 돌아왔다⁠. 금의위 백호의 집에서 처음 목검을 쥐던 날이 돌아왔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도 울지 않았다⁠. 원수의 얼굴을 떠올리면 울지 않을 수 있었다⁠. 피 묻은 칼⁠, 쪽빛 포대기⁠, 키 큰 그림자⁠. 서른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떠올린 그림이었다⁠. 그림의 한가운데가 지금 비어 가고 있었다⁠. 비어 가는 자리에 낯선 늙은이의 누런 이가 들어앉았다⁠.

노인의 검은 왼손이 소매에서 나왔다⁠. 손바닥에 짧은 칼이 붙어 있었다⁠. 칼날이 푸르스름했다⁠. 노인이 현곡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현곡은 맨손이었다⁠. 부러진 칼은 발밑에 있었다⁠. 몸이 굳어 있었다⁠. 서른 해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는 몸이었다⁠.

철운이 판목 더미에서 일어났다⁠. 왼손으로 칼을 들었다⁠. 일어나면서 승로의 손을 놓았다⁠. 칼이 한 번 움직였다⁠.

노인의 짧은 칼이 손바닥에서 떨어져 나갔다⁠. 칼끝이 현곡의 가슴 한 치 앞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철운의 칼등이 노인의 왼 손목을 내리쳤다⁠. 노인이 무릎을 꿇었다⁠. 검은 손바닥이 땅을 짚었다⁠.

“⁠서른 해 전엔 팔이었고 오늘은 손이오⁠. 남은 건 없소⁠.⁠”

철운이 칼을 거두었다⁠. 노인을 베지 않았다⁠. 노인이 고개를 들어 철운을 보았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왜 안 베나⁠?⁠”

“⁠그건 법이 하오⁠.⁠”

철운이 현곡을 보았다⁠. 현곡이 금의위들에게 손짓했다⁠. 금의위 넷이 뛰어와 노인을 묶었다⁠. 노인은 끌려가며 다시 웃으려 했다⁠.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동쪽의 무인들 사이를 지날 때 누군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서른 해 전 흑장에게 사형제를 잃은 사람이 무인들 줄에 여럿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숙였다⁠. 한 팔로 젓가락을 쥐는 법을 삼 년 동안 익혔다던 손이 금의위의 포승 안에서 축 늘어졌다⁠.

*

현곡의 무릎이 꺾일 뻔했다⁠. 현곡은 무릎에 힘을 주었다⁠. 금의위 천호는 강남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칼 굳은살이 두껍게 박힌 손바닥이었다⁠. 서른 해 동안 엉뚱한 사람을 베려고 다진 굳은살이었다⁠.

현곡이 땅에 떨어진 천을 주웠다⁠. 흙을 털었다⁠. 손바닥 자국 위의 흙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털었다⁠. 현곡은 천을 접어 품에 넣었다⁠. 은자물쇠가 있는 자리였다⁠.

현곡이 철운 앞으로 왔다⁠. 철운은 칼을 든 채 서 있었다⁠. 옆구리의 피가 멎지 않았다⁠. 다리가 떨렸다⁠. 승로가 아버지 허리를 붙잡았다⁠.

“⁠네가 내 아버지를 벤 것은 남는다⁠.⁠”

현곡이 말했다⁠. 목소리가 무너져 있었지만 말은 무너지지 않았다⁠.

“⁠흑장이 어머니를 죽인 것과는 다른 일이다⁠. 아버지가 먼저 글을 보냈어도⁠, 네가 가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살았다⁠. 그건 네 말이다⁠.⁠”

“⁠그렇소⁠.⁠”

“⁠그것을 무엇으로 갚겠나⁠?⁠”

철운은 왼손의 칼을 내려다보았다⁠. 쪽빛 천이 벗겨진 칼자루가 맨살로 드러나 있었다⁠. 서른 해 동안 천 밑에 있던 나무가 손때 없이 하얬다⁠. 철운은 칼을 뒤집었다⁠. 칼날을 자기 쪽으로⁠, 칼자루를 현곡 쪽으로⁠.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꿇으라고 하지 않았다⁠. 방에 적힌 대로가 아니었다⁠. 철운이 스스로 꿇었다⁠. 무릎이 뚝 소리를 냈다⁠. 곽 노파가 담 밑에서 입을 막았다⁠.

“⁠천하제일검의 칼이오⁠. 북경으로 가져가시오⁠.⁠”

철운이 칼자루를 현곡 앞으로 내밀었다⁠.

“⁠강남의 칼을 이것 하나로 거두었다고 하시오⁠. 조정이 원하는 게 강남의 칼이라면⁠, 이 칼보다 무거운 칼은 강남에 없소⁠. 이 칼은 천호 아버지를 벤 칼이오⁠. 천호가 가져가시오⁠.⁠”

현곡이 칼자루를 내려다보았다⁠. 맨나무 칼자루에 늙은 왼손이 받쳐져 있었다⁠. 엄지와 검지가 칼자루를 감싸지 못하고 펴져 있었다⁠. 오른손은 무명에 감겨 가슴께에 매달려 있었다⁠.

현곡은 칼자루를 보며 북경의 공문을 떠올렸다⁠. 붉은 도장 세 개⁠. 강남의 칼을 거두라⁠. 문인과 무인이 손을 잡지 못하게 하라⁠. 공문은 칼의 수를 묻지 않았다⁠. 강남의 칼이 이제 조정 손에 있다는 것을 보이라고 했다⁠. 천하제일검의 칼이 북경에 닿으면 강남의 칼잡이들은 칼보다 먼저 이름을 잃는다⁠. 조정은 그것을 원했다⁠.

아버지를 벤 칼이었다⁠. 서른 해 동안 꺾고 싶던 칼이었다⁠. 칼을 꺾은 사람은 현곡이 아니었다⁠. 칼 임자가 스스로 손을 펴서 내밀고 있었다⁠.

마당의 사람들이 현곡을 보았다⁠. 동쪽의 무인들이⁠, 서쪽의 직녀들이⁠, 단 위의 현령과 훈장이⁠, 쇠사슬 찬 선비들이⁠. 처마 밑의 금의위들까지⁠.

1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불타던 밤 ·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