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71자)

두부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현곡이 칼자루를 잡았다⁠. 맨나무 칼자루에 늙은 왼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철운이 손을 폈다⁠. 칼의 무게가 현곡의 손으로 옮겨 갔다⁠. 서른 해 동안 한 사람이 들던 무게였다⁠.

현곡은 칼을 들어 보지 않았다⁠. 칼날을 아래로 향한 채 옆구리에 붙였다⁠. 그리고 마당을 둘러보았다⁠. 마당이 숨을 죽였다⁠.

“⁠강남의 칼은 거두었다⁠.⁠”

현곡의 목소리가 마당 끝까지 갔다⁠. 나루에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였다⁠. 짧고 딱딱했다⁠. 이번에는 끝이 떨리지 않았다⁠.

“⁠천하제일검의 칼을 북경으로 가져간다⁠. 강남에서 이보다 무거운 칼은 없다⁠. 나머지 칼은 무게가 모자라 거두지 않는다⁠. 집에 가져가라⁠. 부엌에서 쓰든 왜구를 치든 마음대로 하되⁠, 사람을 벨 때는 관아에 먼저 물어라⁠.⁠”

동쪽 무인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누군가 칼을 칼집에 넣었다⁠. 하나가 넣자 줄줄이 넣었다⁠. 서리가 탁자 밑에서 기어 나와 수레에 실린 칼을 하나씩 내려 주었다⁠. 무인들은 칼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누구에게 숙이는지 모르는 숙임이었다⁠.

“⁠판목은 태운다⁠.⁠”

현곡이 금의위에게 손짓했다⁠. 금의위 하나가 장작에 불을 붙였다⁠. 불이 판목 더미로 옮겨 붙었다⁠. 마른 배나무 판이 금방 탔다⁠. 거꾸로 새긴 글자들이 불 속에서 한 줄씩 검게 오그라들었다⁠. 끈에 묶인 책들도 불에 들어갔다⁠. 현곡이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불에 던졌다⁠. 첫 장에 늙은 손 글씨가 있는 책이었다⁠.

단 위에서 도각이 스승의 책을 보았다⁠. 불이 첫 장을 먼저 삼켰다⁠. 도각은 눈을 감지 않았다⁠.

“⁠훈장과 선비들은 풀어 준다⁠. 요서는 불에 탔다⁠. 요서를 지은 자는 오래전에 죽었다⁠. 남은 자들에게서 더 거둘 것이 없다⁠.⁠”

금의위들이 단 위로 올라가 육계담의 포승을 풀었다⁠. 육계담이 일어나다 휘청거렸다⁠. 도각이 붙잡았다⁠. 쇠사슬 찬 선비들의 사슬도 풀렸다⁠. 가장 늙은 선비가 일어나 단 위의 도각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정하라는 끄덕임이 아니었다⁠. 잘 정했다는 끄덕임이었다⁠.

*

불길이 판목을 다 삼키는 동안 마당 서쪽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직녀들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노래도 아니고 말도 아니었다⁠. 베틀 앞에서 북을 던지며 입속으로 세던 가락이었다⁠. 앞줄에서 뒷줄로 번졌다⁠. 버들나루 할멈들도 따라 웅얼거렸다⁠. 가사는 없었다⁠. 가사는 불 속에 있었다⁠.

소석이 엄마 손을 잡고 서서 불을 보았다⁠.

“⁠엄마⁠, 책이 다 타요⁠.⁠”

“⁠응⁠.⁠”

“⁠나 그 시 외워요⁠. 처음부터 끝까지⁠.⁠”

채향이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그럼 속으로 외워⁠. 엄마 손 볼 때마다⁠.⁠”

소석이 엄마 손바닥을 펴서 보았다⁠. 실 자국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었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육계담이 단에서 내려와 불 앞으로 갔다⁠. 스승의 판목이 타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불티가 날아와 수염 끝을 그슬렸다⁠. 육계담은 수염을 털며 중얼거렸다⁠.

“⁠판목은 탔지만 판목에 새긴 사람 손은 안 탔습니다⁠. 판목을 새긴 각수는 버들나루 목수 영감입니다⁠. 서당 기둥도 그 영감이 깎았습니다⁠.⁠”

곁에 있던 이장이 놀라 훈장을 보았다⁠.

“⁠훈장⁠, 그 말은 왜 지금 하오⁠?⁠”

“⁠다 끝났으니까요⁠. 끝난 뒤에 하는 말이 제일 안전합니다⁠.⁠”

*

현곡이 철운 앞으로 다시 왔다⁠. 철운은 승로의 부축을 받고 서 있었다⁠. 옆구리를 채향의 치맛자락으로 감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또 하나 찢겨 나갔다⁠. 채향은 치마가 짧아졌다고 투덜거렸다⁠.

“⁠네가 내 아버지를 벤 것은 갚은 것이 아니다⁠.⁠”

“⁠압니다⁠.⁠”

“⁠칼은 받았다⁠. 갚음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나랏일로 받은 것이다⁠.⁠”

“⁠그것도 압니다⁠.⁠”

현곡이 철운의 무명 감은 오른손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손은⁠.⁠”

현곡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철운이 왼손을 들어 오른손 무명을 툭 쳤다⁠.

“⁠두부는 누를 수 있다 하오⁠. 의원 말이⁠.⁠”

현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서 금의위들에게 말에 오르라고 했다⁠. 외팔 노인은 포승에 묶인 채 수레에 실렸다⁠. 북경으로 간다⁠. 서른 해 전 일은 북경의 법이 다룬다⁠. 금의위 천호가 그렇게 정했다⁠.

*

도각의 일은 닷새 뒤에 왔다⁠. 북경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소주 현령 사마도각을 서남쪽 끝 고을의 주부로 보낸다⁠. 현령보다 두 단계 아래였다⁠. 금서를 지닌 죄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대신 멀리 보냈다⁠.

도각은 짐배를 타고 떠났다⁠. 배가 버들나루를 지날 때 도각은 사공에게 나루에 잠깐 대라고 했다⁠. 새 애체를 쓰고 있었다⁠. 금이 하나도 없었다⁠. 성안 안경방에서 은자 두 냥을 주고 샀다고 했다⁠. 주부 녹봉으로는 석 달 치였다⁠. 도각은 애체를 이마에 올렸다가 눈에 댔다가⁠, 새것이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몇 번이고 옮겼다⁠.

“⁠두부 한 모 주시오⁠. 아니⁠, 두 모⁠. 순두부도⁠.⁠”

철운이 왼손으로 두부를 싸서 건넸다⁠. 베를 묶느라 한참 애를 썼다⁠. 매듭이 비뚤었다⁠. 도각은 비뚤어진 매듭을 보고 웃었다⁠.

“⁠서남쪽은 콩이 잘 안 된다 하오⁠. 두부를 못 먹겠지⁠.⁠”

“⁠콩을 가져가시오⁠. 불려서 갈면 되오⁠. 맷돌은 거기도 있을 거요⁠.⁠”

철운이 콩 한 자루를 배에 실어 주었다⁠. 도각이 동전 두 닢을 맷돌에 놓듯 두부 판에 놓았다⁠. 그리고 두 닢을 더 놓았다⁠.

“⁠지난번에 깎은 값이오⁠. 이자까지⁠.⁠”

“⁠나리⁠, 현령 노릇은 어땠소⁠?⁠”

도각이 애체를 이마로 올렸다⁠. 버들나루 서당 기와 처마가 보였다⁠. 봉인 종이가 떨어진 대문이 열려 있었다⁠. 육계담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베틀 소리는 한 번 들었소⁠. 한 번이면 되오⁠.⁠”

배가 나루를 떠났다⁠. 도각은 뱃전에 서서 손을 흔들지 않았다⁠. 순두부 사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

현곡의 배는 이레 뒤 아침에 떠났다⁠. 북쪽으로 가는 큰 배였다⁠. 버들나루 앞 운하를 지나가는 길이었다⁠. 배가 나루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 승로가 나루 계단 끝에 서 있었다⁠. 염방에 가는 차림이었다⁠. 쪽물 든 무명옷에 소매를 걷고 있었다⁠.

현곡이 뱃전에 나왔다⁠. 비어복을 입고 있었다⁠. 옆구리에 천하제일검의 칼을 차고 있었다⁠. 칼자루에 아무것도 감겨 있지 않았다⁠. 쪽빛 천은 현곡의 품 안에 있었다⁠. 은자물쇠와 같은 자리였다⁠.

배와 나루 사이가 한 길이었다⁠. 둘은 한참 서로 보기만 했다⁠.

“⁠형⁠.⁠”

승로가 먼저 불렀다⁠. 현곡의 눈이 움직였다⁠.

“⁠북경 가면 편지하세요⁠. 저는 글씨가 엉망이라 채향이가 대신 쓸 거예요⁠. 잔소리가 섞여 있어도 화내지 마세요⁠.⁠”

“⁠네 처는 잔소리를 하나⁠?⁠”

“⁠목록으로 해요⁠.⁠”

현곡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짧았다⁠. 웃음 끝에 현곡이 뱃전 너머로 무언가를 던졌다⁠. 승로가 받았다⁠. 은자물쇠였다⁠. 현곡의 것이었다⁠. 안쪽에 현곡 두 글자가 새겨진⁠.

“⁠형⁠, 이건⁠…⁠…⁠.⁠”

“⁠소석이 목에 하나⁠, 소석이 동생 목에 하나⁠. 어머니는 둘을 한꺼번에 지으셨다⁠.⁠”

“⁠소석이 동생은 아직 없는데요⁠.⁠”

“⁠생기겠지⁠. 위지든 독고든⁠.⁠”

계단 위에서 소석이 엄마 손을 뿌리치고 뛰어 내려왔다⁠. 손에 두부 한 모를 들고 있었다⁠. 젖은 베에 싸여 있었다⁠. 소석은 계단 끝에서 두부를 높이 들었다⁠.

“⁠아저씨⁠! 제가 누른 거예요⁠! 모서리 반듯해요⁠!⁠”

현곡이 금의위 하나에게 눈짓했다⁠. 금의위가 장대 끝에 바구니를 달아 내밀었다⁠. 소석이 바구니에 두부를 넣었다⁠. 현곡이 바구니에서 두부를 꺼냈다⁠. 모서리가 반듯했다⁠. 아이 손바닥 자국이 두 개 있었다⁠.

현곡이 두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뱃전에 서서⁠, 금의위들 앞에서⁠, 천하제일검의 칼을 옆구리에 찬 채로⁠.

“⁠착해졌어요⁠?⁠”

소석이 물었다⁠. 현곡이 두부를 다 먹었다⁠. 손바닥에 묻은 물기를 비어복에 닦았다⁠.

“⁠조금⁠.⁠”

배가 다시 속도를 냈다⁠. 버드나무 사이로 멀어졌다⁠. 승로는 배가 운하 굽이를 돌아 안 보일 때까지 계단 끝에 서 있었다⁠. 손에 은자물쇠를 쥐고 있었다⁠. 자물쇠가 손바닥 안에서 따뜻해졌다⁠.

*

새벽이었다⁠. 닭이 울기 전에 맷돌이 먼저 돌았다⁠.

철운은 왼손바닥을 맷돌 손잡이에 얹었다⁠. 서른 해 동안 오른손이 패어 놓은 자리였다⁠. 왼손은 패인 자리에 맞지 않았다⁠. 손바닥이 패인 자리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철운은 손바닥을 조금 옮겨 보았다⁠. 패인 자리 바로 아래⁠, 나무가 아직 매끈한 데였다⁠. 몸으로 밀었다⁠. 맷돌이 돌았다⁠. 느렸다⁠. 콩이 위짝 구멍으로 들어가 갈렸다⁠. 흰 콩물이 홈을 따라 돌다 양동이로 떨어졌다⁠.

오른손은 무명에 감긴 채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주머니 안에 잔소리 종이가 스무 장 넘게 모여 있었다⁠. 무명 감은 손가락 끝에 종이 모서리들이 닿았다⁠.

젊은이 셋은 사흘 전에 떠났다⁠. 각자 집으로 갔다⁠. 키다리는 쌍칼을 등에 메고⁠, 뚱보는 창을 끌고⁠, 서생은 부채를 접고⁠. 두부 열다섯 판 빚은 염방 주인이 깎아 주었다⁠. 셋은 떠나면서 겨울에 콩을 불리러 다시 오겠다고 했다⁠. 콩은 겨울에 더 오래 불려야 한다고 철운이 가르쳤다⁠.

승로가 부엌 문턱에서 멈췄다⁠. 손톱 밑까지 쪽물이 든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철운이 맷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서른한 해 동안 아침마다 고개만 꾸벅하던 아들이었다⁠.

“⁠독고승로⁠, 다녀옵니다⁠.⁠”

승로가 이름을 붙여 말했다⁠. 자기 이름이었다⁠. 형한테 듣지 않고 스스로 아는 이름이었다⁠. 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승로는 그것으로 되었다는 얼굴로 나갔다⁠.

채향이 머리를 매만지며 따라 나왔다⁠. 직방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봉황 꼬리 깃을 짜던 베틀은 다른 직녀가 차지했고⁠, 채향은 학 다리를 짜는 베틀로 돌아갔다⁠. 채향은 종이 한 장을 시아버지의 앞치마 주머니에 꽂았다⁠. 철운은 왼손으로 꺼내 팔을 쭉 뻗었다⁠.

「⁠하나⁠, 엿은 하루 한 조각⁠. 둘⁠, 서당 늦지 않게⁠. 셋⁠, 아버님 손 물에 넣지 않기⁠.⁠」

엿 금지가 아니었다⁠. 하루 한 조각이었다⁠.

“⁠얘야⁠, 한 조각이 두 조각인 거 너도 알지 않냐⁠?⁠”

“⁠그러니까 한 조각이라고 쓴 거예요⁠. 두 조각 주시라고⁠.⁠”

채향이 나갔다⁠. 나루에서 첫 배가 떠나는 소리가 났다⁠.

*

소석은 부엌 바닥에 앉아 두부 판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오늘 누를 두부를 기다리는 빈 판이었다⁠. 아침 햇빛이 부엌 창으로 들어와 판 위에 네모나게 누웠다⁠. 소석이 손가락을 물그릇에 담갔다가 판 위에 글씨를 썼다⁠.

「⁠밤새 베틀 소리 그치지 않는데⁠」

물 글씨가 햇빛 속에서 반짝였다⁠. 소석이 다음 줄을 썼다⁠. 첫 줄 끝이 벌써 마르기 시작했다⁠. 세 번째 줄을 쓸 때 첫 줄이 사라졌다⁠. 네 번째 줄을 쓸 때 두 번째 줄이 사라졌다⁠. 소석은 마른 자리에 다시 첫 줄을 썼다⁠.

철운은 맷돌을 돌리며 손주를 보았다⁠. 물 글씨가 마르고⁠, 손주가 다시 쓰고⁠, 다시 말랐다⁠. 철운은 맷돌을 멈추고 손주에게 갔다⁠. 무릎이 뚝 소리를 냈다⁠. 오른손을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내 손주의 정수리에 얹었다⁠. 무명 감은 손바닥이었다⁠. 손바닥 밑에서 작은 머리가 따뜻했다⁠.

소석이 네 번째 줄 끝을 다 쓰고 손가락을 들었다⁠. 판 위에 「⁠아이는 맨발로 봄 진흙을 밟네⁠」 한 줄만 반짝이며 남아 있었다⁠. 솥에서 콩물이 끓기 시작했다⁠. 철운은 왼손바닥을 솥 위에 펴서 김을 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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