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13자)

왼손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마당 한가운데가 비었다⁠. 금의위들이 처마 밑으로 물러났고⁠, 무인들이 동쪽으로 물러났다⁠. 버들나루 사람들과 직녀들은 서쪽 담 밑에 붙었다⁠. 판목 더미 위의 젊은이 셋만 그대로 있었다⁠. 내려오라고 해도 내려오지 않았다⁠.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다⁠.

현곡이 칼을 뽑았다⁠. 어젯밤 철운의 손바닥을 가른 칼이었다⁠. 철운은 칼집을 발밑에 내려놓고 왼손으로 칼을 들었다⁠. 칼자루에 감긴 쪽빛 천이 왼손바닥 안에서 서걱거렸다⁠.

곽 노파가 담 밑에서 소리쳤다⁠.

“⁠영감⁠, 허리 조심해⁠!⁠”

“⁠노파⁠, 지금 허리 얘기할 때요⁠?⁠”

“⁠허리가 나가면 칼이고 뭐고 다 나가⁠!⁠”

마당에 웃음이 번졌다가 금방 사그라졌다⁠. 소석이 엄마 손을 뿌리치고 한 걸음 나왔다⁠.

“⁠할아버지⁠, 간수는 세 번에 나눠요⁠!⁠”

철운이 손주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현곡이 들어왔다⁠.

*

도각은 단 위에서 형틀 곁에 꿇어앉아 있었다⁠. 금의위 둘이 도각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포승은 아직 묶이지 않았다⁠. 묶으려던 금의위가 마당 한가운데를 보느라 손을 멈췄다⁠.

“⁠훈장⁠, 보이시오⁠? 나는 애체가 금이 가서 둘로 보이오⁠.⁠”

“⁠저는 머리카락이 눈을 가려서 반만 보입니다⁠.⁠”

“⁠둘이 합치면 하나는 보이겠군⁠.⁠”

“⁠나리⁠, 그건 글자 풀이가 틀렸습니다⁠. 둘로 보이는 것과 반만 보이는 것을 합치면⁠…⁠…⁠.⁠”

“⁠훈장⁠, 제발⁠.⁠”

육계담이 입을 다물었다⁠. 도각은 애체를 눈에 대고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늙은 두부 장수가 왼손으로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오른손은 가슴께에 매달려 있었다⁠. 도각은 어젯밤 의원의 바늘이 늙은 손바닥을 지나던 것을 등불을 들고 보았다⁠. 등불이 떨려서 의원에게 혼났다⁠.

“⁠훈장⁠, 저 사람이 지면 우리 목이오⁠.⁠”

“⁠압니다⁠.⁠”

“⁠이기면⁠?⁠”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이기는 걸 본 적이 없어서요⁠. 서른 해 동안 두부 지는 것만 봤습니다⁠. 순두부 될 때요⁠.⁠”

도각이 웃음을 참느라 위를 움켜쥐었다⁠.

*

첫 칼은 목으로 왔다⁠. 철운은 왼손으로 칼을 올려 받았다⁠. 쇠와 쇠가 부딪쳤다⁠. 왼팔이 저렸다⁠. 손목이 꺾일 뻔했다⁠. 두 번째 칼이 옆구리로 왔다⁠. 철운은 칼을 내렸지만 늦었다⁠. 칼끝이 앞치마를 가르고 옆구리 살갗을 스쳤다⁠. 흰 앞치마에 붉은 줄이 번졌다⁠.

채향이 숨을 들이켰다⁠. 승로가 한 걸음 나가려다 채향에게 팔을 잡혔다⁠.

세 번째 칼은 허벅지로 왔다⁠. 철운은 발을 끌어 몸을 돌렸다⁠. 맷돌을 돌리는 걸음이었다⁠. 원을 그리며 물러났다⁠. 현곡이 원을 따라 들어왔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철운의 칼은 한 번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받고⁠, 늦고⁠, 다시 받았다⁠. 왼손이 칼을 따라가지 못했다⁠. 칼이 왼손을 끌고 다녔다⁠.

“⁠이것이 천하제일검이냐⁠!⁠”

현곡이 소리쳤다⁠. 칼이 더 빨라졌다⁠.

“⁠서른 해 동안 두부를 누르더니 칼 쥐는 법도 잊었나⁠!⁠”

“⁠잊었소⁠.⁠”

철운이 대답했다⁠. 숨이 찼다⁠.

“⁠잊으려고 서른 해를 눌렀소⁠.⁠”

*

판목 더미 위에서 뚱보가 창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밀린다⁠, 밀린다⁠. 대협이 밀린다⁠.⁠”

“⁠입 다물어⁠. 대협은 지금 콩을 불리시는 중이야⁠.⁠”

키다리가 말했다⁠. 서생이 부채로 입을 가렸다⁠.

“⁠콩을 불리는데 왜 피가 납니까⁠?⁠”

“⁠콩도 오래 불리면 껍질이 벗겨지잖아⁠.⁠”

담 밑에서는 할멈들이 장아찌를 걸고 있었다⁠. 영감이 이기면 무짠지 한 단지⁠, 지면 오이짠지 한 단지⁠. 곽 노파는 양쪽에 다 걸었다⁠. 누가 이기든 단지 하나는 남는다고 했다⁠. 이장이 노파를 노려보았다⁠. 노파는 이장 손에 무짠지 한 조각을 쥐여 주었다⁠. 이장은 받아먹었다⁠. 입이 짜서 할 말을 잊었다⁠.

*

승로는 채향 곁에서 아버지의 발을 보았다⁠. 아버지는 원을 그리며 물러났다⁠. 마당 한가운데를 도는 걸음이었다⁠. 승로는 아버지의 걸음을 알았다⁠. 일곱 살까지 밤마다 업혀서 느낀 걸음이었다⁠. 나루 끝까지 가서 돌아오는 걸음⁠, 등에 업힌 아이가 깨지 않게 몸을 흔들지 않는 걸음⁠. 아버지 등에 얼굴을 대고 있으면 걸음이 원을 그리는 것이 느껴졌다⁠. 승로는 업혀서 느낀 원이 맷돌 걸음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아범⁠, 왜 울어요⁠?⁠”

채향이 물었다⁠. 승로는 자기가 우는 줄 몰랐다⁠.

“⁠아버지가 나 업고 걷던 걸음이야⁠. 저거⁠.⁠”

채향이 마당을 보았다⁠. 시아버지는 칼끝을 피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원이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과 할멈들과 직녀들 앞을 막았다⁠. 채향은 소석의 손을 더 꽉 잡았다⁠.

*

현곡은 칼을 휘두르며 늙은이의 발을 보았다⁠. 늙은이의 발은 이상하게 움직였다⁠. 물러나는데 아무 데로나 물러나지 않았다⁠. 현곡의 칼끝이 서쪽 담으로 향하면 늙은이는 꼭 서쪽으로 반 걸음 들어와 칼끝 앞을 막았다⁠. 서쪽 담 밑에 아이 열한 명이 있었다⁠. 동쪽으로 향하면 동쪽으로 들어왔다⁠. 동쪽에는 무인들이 있었다⁠. 판목 더미로 향하면 판목 더미 앞으로 들어왔다⁠. 판목 더미 위에 젊은이 셋이 있었다⁠.

늙은이는 이 마당 사람들과 현곡의 칼 사이에 자기 몸을 두고 있었다⁠. 마당 전체를 맷돌처럼 돌며⁠.

현곡은 늙은이의 발을 읽었다⁠. 읽고 나서 칼이 더 빨라졌다⁠. 화가 났다⁠. 무엇에 화가 났는지 현곡은 몰랐다⁠.

*

철운의 왼손이 저렸다⁠. 손가락에 힘이 빠졌다⁠. 칼자루가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현곡의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칼은 손바닥으로 쥐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쥐는 것이다⁠. 역관 마당에서 소석에게 가르친 말이었다⁠. 소석이 객잔에서 할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아저씨가 손바닥으로 쥐지 말래요⁠.

철운은 손가락을 풀었다⁠.

칼자루를 손바닥 한가운데에 얹었다⁠. 맷돌 손잡이를 쥐듯이⁠. 손가락은 감싸기만 하고⁠, 힘은 손바닥으로 밀었다⁠. 서른 해 동안 매일 새벽 왼손은 맷돌 손잡이 아래쪽을 받쳤다⁠. 오른손이 밀면 왼손이 받았다⁠. 왼손바닥은 맷돌이 도는 결을 알았다⁠. 무거운 것이 한 바퀴 도는 동안 어디서 힘을 빼고 어디서 힘을 주는지⁠.

칼이 가벼워졌다⁠. 칼끝이 허리 높이에서 멈췄다⁠. 흔들리지 않았다⁠.

현곡이 달라진 칼끝을 보았다⁠. 한 걸음 물러나 칼을 고쳐 쥐었다⁠.

*

현곡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온몸을 실은 칼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철운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내려오는 칼이었다⁠. 아버지가 서른 해 전 대숲 앞마당에서 쓰던 칼이었다⁠. 위지 집안의 칼이었다⁠.

철운의 칼이 한 번 움직였다⁠.

맷돌이 한 바퀴 도는 동안이었다⁠. 칼끝이 아래에서 원을 그리며 올라왔다⁠. 현곡의 칼날 옆면에 닿았다⁠. 닿은 자리가 칼날 가운데였다⁠. 쇠가 쇠를 미는 소리가 났다⁠. 길지 않았다⁠.

현곡의 칼이 부러졌다⁠.

칼날 위쪽 반이 공중으로 돌아 올라갔다⁠.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판목 더미 위로 떨어졌다⁠. 키다리가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다⁠. 칼날이 판목에 꽂혔다⁠. 판목 한 장이 쪼개졌다⁠. 『⁠기저음⁠』 첫 수가 새겨진 판이었다⁠.

현곡의 손에 칼날 반이 남았다⁠. 현곡은 남은 칼을 들고 그대로 멈췄다⁠. 철운의 칼끝이 현곡의 가슴 한 뼘 앞에 있었다⁠. 더 들어가지 않았다⁠.

마당이 조용했다⁠.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담 밑에서 곽 노파가 장아찌 단지를 떨어뜨렸다⁠. 단지가 깨지는 소리가 마당을 깨웠다⁠.

동쪽 무인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졌다⁠. 칼을 든 손들이 하늘로 올라갔다⁠. 처마 밑 금의위들이 칼자루를 고쳐 쥐며 앞으로 나오려 했다⁠. 현곡이 부러진 칼을 든 채로 왼손을 들었다⁠. 금의위들이 멈췄다⁠. 현곡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거래는 현곡이 말한 것이었다⁠. 금의위 천호가 강남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이었다⁠.

*

철운의 칼자루에서 쪽빛 천이 풀리고 있었다⁠. 현곡의 칼날이 몇 번 스치고 지나간 자리였다⁠. 천이 한 바퀴 풀리고⁠, 두 바퀴 풀리고⁠, 칼자루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바람이 불었다⁠. 천이 땅에 닿기 전에 바람을 타고 서쪽 담 밑으로 날아갔다⁠. 채향의 발밑에 떨어졌다⁠.

채향이 천을 주웠다⁠. 서른 해 칼자루에 감겨 있던 천이었다⁠. 바깥쪽은 쪽빛이 바래 희끄무레했다⁠. 채향은 천을 뒤집었다⁠. 안쪽은 바래지 않았다⁠. 해를 보지 못한 쪽빛이 그대로였다⁠.

안쪽에 수가 놓여 있었다⁠. 흰 실로 놓은 구름 무늬였다⁠. 은자물쇠의 구름과 같은 구름이었다⁠. 구름 사이에 글자 두 개가 수놓여 있었다⁠. 현곡⁠. 은추⁠. 형과 아우의 이름이 구름 속에 나란히 있었다⁠.

구름 한가운데 검붉은 자국이 있었다⁠. 손바닥 자국이었다⁠. 작았다⁠. 여자의 손바닥이었다⁠. 다섯 손가락이 펴진 채로 천에 눌려 있었다⁠. 서른 해가 지나 피는 검게 말라 있었다⁠.

소석이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와 천을 들여다보았다⁠.

“⁠엄마⁠, 이거 할아버지 칼에 감겨 있던 거예요⁠? 안에 그림 있어요⁠.⁠”

“⁠구름이야⁠.⁠”

“⁠구름 사이에 글자도 있어요⁠. 훈장님이 가르쳐 준 글자예요⁠. 숨을 은⁠.⁠”

채향은 아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직녀의 눈으로 천을 보았다⁠. 수를 놓은 땀이 고르고 촘촘했다⁠. 땀 하나하나에 겨울 밤이 들어 있었다⁠. 한 사람이 한 계절을 다 바쳐 놓은 수였다⁠.

채향이 자기 손바닥을 자국 위에 대 보았다⁠. 크기가 비슷했다⁠. 실을 만지는 손이었다⁠. 손가락 끝이 굳어 있었다⁠.

“⁠천호 나리⁠.⁠”

채향이 천을 들고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아무도 막지 않았다⁠. 직녀가 천을 들고 걷는 걸음이었다⁠. 비단을 감독에게 바치러 가는 걸음과 같았다⁠. 채향은 현곡 앞에서 멈추고 천을 내밀었다⁠.

“⁠이거⁠, 나리 어머니가 놓으신 수죠⁠?⁠”

*

현곡이 부러진 칼을 떨어뜨렸다⁠. 두 손으로 천을 받았다⁠. 구름 무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겨울이면 사랑채 창가에서 어머니가 놓던 수였다⁠. 끝 소절을 두 번 부르며 놓던 수였다⁠. 손가락이 구름 사이의 두 이름에서 멈췄다⁠. 그리고 한가운데의 손바닥 자국에서 멈췄다⁠.

현곡은 손바닥 자국에 자기 손바닥을 대지 않았다⁠. 대 보지 않아도 알았다⁠. 어머니 손이었다⁠. 아이 둘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었다⁠. 어머니 손바닥에는 바늘에 찔린 자국이 많았다⁠. 천에 찍힌 손바닥 끝에도 작은 점들이 있었다⁠.

“⁠이 천은 포대기다⁠.⁠”

현곡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우를 싸던 포대기다⁠. 그날 밤 불길 속에서 네가 안고 나온 포대기다⁠. 그런데 왜 어머니 손자국이 있나⁠? 어머니 피가 왜 여기 있나⁠?⁠”

현곡이 철운을 보았다⁠. 철운은 칼을 내리고 서 있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 앞치마를 적시고 있었다⁠. 오른손 무명에도 붉은 자국이 새로 배어 있었다⁠.

“⁠포대기를 네 손으로 빼앗았다면 어머니 손자국이 왜 포대기 한가운데에 있나⁠? 어머니가 놓지 않으려고 붙잡은 자국인가⁠? 아니면⁠…⁠…⁠.⁠”

현곡이 말을 잇지 못했다⁠. 서른 해 동안 같은 그림만 보아 온 눈이었다⁠. 그림 한가운데에 처음 보는 손바닥이 찍혀 있었다⁠.

마당 구석에서 외팔 노인이 소매 속의 왼손을 꺼냈다⁠. 검은 손바닥으로 빈 소매를 쓸었다⁠.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가 사라졌다⁠.

현곡이 천을 쥔 채로 철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칼은 없었다⁠. 맨손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어떻게 죽었나⁠? 말하라⁠.⁠”

철운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서른 해 동안 하던 버릇이었다⁠. 현곡이 닫히는 입을 보았다⁠.

“⁠이번에는 다 말하라⁠.⁠”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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