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85자)

손바닥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보름 전날 새벽⁠, 철운은 버들나루 두부집에서 두부를 눌렀다⁠. 객잔에서 첫 배를 타고 마을로 돌아와 콩을 갈았다⁠. 젊은이 셋이 맷돌을 돌렸다⁠. 키다리는 맷돌을 돌리며 콧노래를 불렀고⁠, 뚱보는 장작을 패며 숨을 몰아쉬었고⁠, 서생은 간수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간수는 세 번에 나눠 붓소⁠. 한 번에 부으면 두부가 놀라오⁠.⁠”

“⁠두부가 놀랍니까⁠?⁠”

“⁠놀라면 단단해지오⁠. 사람처럼⁠.⁠”

서생이 간수를 조금 붓고 철운을 보았다⁠. 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조금⁠. 다시 고개⁠. 세 번째 붓고 나서 서생이 숨을 내쉬었다⁠. 콩물이 몽글몽글 엉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손을 떼시오⁠. 젓는 손이 한 번 더 가면 두부가 거칠어지오⁠.⁠”

“⁠대협⁠, 왜 오늘 저희한테 두부를 가르치십니까⁠?⁠”

철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름판에 오른손바닥을 얹었다⁠. 베 사이로 물이 빠졌다⁠. 손바닥이 가만히 있고 싶어질 때까지 오래 얹고 있었다⁠. 키다리가 콧노래를 멈췄다⁠.

*

정오 무렵 곽 노파가 두부집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영감⁠, 성안에서 내일 구경 가는 사람이 버들나루에서만 서른이야⁠. 이장도 간대⁠. 나도 가⁠. 맨 앞자리 잡을 거야⁠.⁠”

“⁠노파⁠, 구경할 일이 아니오⁠.⁠”

“⁠구경할 일이야⁠. 영감 일이니까⁠. 서른 해 동안 영감 두부만 봤지 영감 칼은 못 봤잖아⁠.⁠”

“⁠칼은 안 보여 주오⁠.⁠”

“⁠그럼 두부라도 보여 줘⁠. 내일 정오에 현묘관 마당에서 두부 누르면 내가 장아찌 올려 줄게⁠.⁠”

할멈들이 담 밑에서 웃었다⁠. 철운도 웃었다⁠. 웃으면서 곽 노파의 손등을 보았다⁠. 장아찌를 서른 해 절인 손등이 소금기에 갈라져 있었다⁠. 내일 마당에 서른이 온다⁠. 서른이 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

해 질 녘 역관 별채에서 현곡이 승로에게 옷 한 벌을 내밀었다⁠. 위지 집안 사람이 제사 때 입는 검은 도포였다⁠. 가슴에 구름 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내일 이걸 입고 내 곁에 서라⁠. 그 사람이 무릎을 꿇는 걸 보아라⁠. 그래야 서른 해가 끝난다⁠.⁠”

승로는 도포를 받아 들었다⁠. 구름 무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은자물쇠의 구름과 같았다⁠.

“⁠형⁠, 그 사람이 무릎을 꿇으면 형은 끝나요⁠? 그 사람이 서른 해 동안 저를 업고 나루 끝까지 걸은 건요⁠? 그것도 끝나요⁠?⁠”

“⁠그것은 훔친 물건을 잘 간수한 것이다⁠.⁠”

승로는 도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접지 않았다⁠. 현곡이 접히지 않은 도포를 보았다⁠.

“⁠입지 않겠다는 것이냐⁠?⁠”

“⁠내일 입을지 안 입을지 내일 정할게요⁠.⁠”

현곡이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별채를 나가는 형의 등이 서른 해 전 대숲에 숨던 여덟 살 아이만큼 작아 보였다⁠. 승로는 그렇게 보인 까닭을 몰랐다⁠.

*

삼경이었다⁠. 성안 운하에 달이 떠 있었다⁠. 보름 하루 전이라 달이 거의 찼다⁠. 철운은 역관 뒤 골목에 혼자 서 있었다⁠. 오른손에 천 감은 장검을 쥐고 있었다⁠. 칼을 쥐고 나온 까닭은 하나였다⁠. 흑장이 골목에 있었다⁠.

젊은이 셋은 골목 양 끝에 숨어 있었다⁠. 키다리가 동쪽 끝⁠, 뚱보가 서쪽 끝⁠, 서생은 지붕 위였다⁠. 서생은 지붕 위로 가겠다고 우기다 기와 두 장을 깼다⁠.

뒷문 빗장이 소리 없이 벗겨졌다⁠. 문이 반 뼘 열렸다⁠. 채향이 소석을 업고 서 있었다⁠. 소석은 잠들어 있었다⁠. 엄마 등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채향의 손에 엿 단지가 들려 있었다⁠.

“⁠아버님⁠.⁠”

“⁠엿은 왜 들고 나왔냐⁠?⁠”

“⁠두고 가면 아까워서요⁠.⁠”

철운이 손을 뻗어 손주를 받으려 할 때⁠, 골목 동쪽 끝에서 키다리가 소리를 질렀다⁠.

“⁠온다⁠! 숯 손바닥 온다⁠!⁠”

*

검은 그림자 여섯이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장갑을 벗은 손바닥이 달빛에 검었다⁠. 둘은 골목으로⁠, 넷은 역관 담을 넘었다⁠. 담을 넘은 넷이 노리는 곳은 하나였다⁠. 채향의 등이었다⁠.

철운은 칼집을 왼손으로 잡아 뺐다⁠. 채향을 뒷문 안으로 밀어 넣고 자기도 들어갔다⁠. 역관 뒤뜰이었다⁠. 우물 하나와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담을 넘은 넷이 감나무 그늘에서 나왔다⁠.

칼이 한 번 움직였다⁠. 넷의 손목에 감은 검은 띠가 끊어졌다⁠. 띠 안에 숨긴 독바늘이 땅으로 쏟아졌다⁠. 넷이 맨손으로 덤볐다⁠. 철운은 칼등으로 하나의 어깨를 치고⁠, 다른 하나의 무릎을 쳤다⁠. 세 번째 사내는 칼자루 끝으로 명치를 찔렀다⁠. 네 번째 사내는 채향이 엿 단지로 머리를 내리쳤다⁠. 단지가 깨지며 엿 조각이 흩어졌다⁠. 네 번째 사내가 엿 조각 위에 쓰러졌다⁠.

“⁠얘야⁠.⁠”

“⁠두고 가면 아깝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쓰려고요⁠.⁠”

골목에서 뚱보와 키다리가 소리를 지르며 흑장 둘을 쫓았다⁠. 지붕에서 서생이 기와를 던졌다⁠. 기와가 흑장이 아니라 뚱보 머리에 떨어졌다⁠. 뚱보가 비명을 질렀다⁠.

소란에 역관이 깨어났다⁠. 등불이 하나둘 켜졌다⁠. 금의위들이 칼을 뽑고 뒤뜰로 몰려왔다⁠. 맨 앞에 현곡이 있었다⁠. 웃옷을 걸치지 못하고 속옷 바람이었다⁠. 손에 수춘도가 들려 있었다⁠.

*

현곡이 뒤뜰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흑장 넷⁠, 깨진 엿 단지⁠, 소석을 업은 채향⁠, 그리고 천 감은 칼을 든 철운⁠.

“⁠서른 해가 지나도 버릇은 그대로군⁠. 밤에 남의 집에 들어와 아이를 안고 나가는 버릇⁠.⁠”

“⁠저 아이는 내 손주요⁠.⁠”

“⁠위지의 손자다⁠.⁠”

현곡이 칼을 들었다⁠. 금의위들에게 손짓했다⁠. 물러나라는 손짓이었다⁠. 현곡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맨발이 뒤뜰 흙을 디딜 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첫 칼이 왔다⁠. 철운은 칼등으로 받았다⁠. 두 번째 칼이 왔다⁠. 철운은 몸을 뺐다⁠. 세 번째⁠, 네 번째⁠. 철운은 한 번도 베지 않았다⁠. 받고⁠, 빼고⁠, 물러났다⁠. 우물 쪽으로 밀렸다⁠. 현곡의 칼이 빨라졌다⁠. 칼끝이 철운의 앞치마를 가르고⁠, 소매를 가르고⁠, 어깨 살갗을 스쳤다⁠. 피 한 줄이 쪽빛 무명에 번졌다⁠.

“⁠왜 치지 않나⁠! 나루에서처럼 한 칼로 끝내라⁠!⁠”

“⁠한 칼이면 천호가 다치오⁠.⁠”

“⁠다쳐도 좋다⁠!⁠”

“⁠소석이 삼촌이 다치면 안 되오⁠.⁠”

현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칼이 더 깊이 들어왔다⁠. 철운의 등이 우물 돌에 닿았다⁠. 더 물러날 데가 없었다⁠.

*

“⁠형⁠, 그만⁠!⁠”

별채에서 승로가 뛰어나왔다⁠. 맨발에 속옷 바람이었다⁠. 승로는 형과 아버지 사이로 몸을 던졌다⁠. 현곡의 칼은 이미 철운의 가슴을 향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승로가 칼끝 바로 앞에 있었다⁠. 현곡의 눈이 커졌다⁠. 손목을 거두려 했지만 칼은 몸보다 먼저 나가 있었다⁠.

철운은 왼손으로 승로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폈다⁠.

칼날이 손바닥으로 들어왔다⁠.

철운은 손을 오므렸다⁠. 칼날을 쥐었다⁠. 손바닥 한가운데 맷돌 굳은살과⁠, 손가락 뿌리 밑 칼 굳은살과⁠, 엄지 아래 흉터를 칼날이 차례로 지나갔다⁠. 철운이 손에 힘을 주자 칼이 멈췄다⁠. 칼끝이 승로의 옷깃에서 한 치 앞에 있었다⁠.

뒤뜰에 아무 소리가 없었다⁠. 피가 철운의 손목을 타고 흘러 칼날을 따라 현곡의 손잡이까지 갔다⁠. 현곡의 손이 떨렸다⁠. 현곡이 칼을 놓았다⁠. 칼은 철운의 손바닥에 쥐인 채로 남았다⁠.

철운이 손을 폈다⁠. 칼이 땅에 떨어졌다⁠. 손바닥이 가로로 벌어져 있었다⁠. 엄지 아래 흉터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버지⁠!⁠”

승로가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채향이 소석을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찢었다⁠. 소석이 깨어나 할아버지 손바닥을 보았다⁠. 울지 않았다⁠.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현곡은 땅에 떨어진 자기 칼을 내려다보았다⁠. 칼날에 늙은 사내의 피가 묻어 있었다⁠. 칼끝 한 치 앞에 아우가 있었다⁠. 현곡은 칼을 줍지 않았다⁠.

*

승로가 아버지를 업었다⁠. 철운은 업히지 않겠다고 했다⁠. 승로가 듣지 않았다⁠.

“⁠아버지⁠, 일곱 살까지 저 업고 나루 끝까지 걸으셨다면서요⁠. 이번엔 제가 업어요⁠. 역관 문까지만⁠.⁠”

승로가 걸었다⁠. 채향이 소석의 손을 잡고 뒤따랐다⁠. 금의위들이 길을 막으려다 현곡을 돌아보았다⁠. 현곡은 손을 들지 않았다⁠. 막으라는 손짓도⁠, 비키라는 손짓도 하지 않았다⁠.

대문 앞에서 승로가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형⁠, 내일 그 도포 안 입어요⁠.⁠”

현곡이 대답하지 않았다⁠. 승로의 등에서 철운이 고개를 들었다⁠. 현곡과 눈이 마주쳤다⁠.

“⁠내일 현묘관에 가겠소⁠.⁠”

“⁠칼을 들고 오든⁠, 들고 오지 못하든⁠.⁠”

현곡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현곡은 돌아서서 별채로 들어갔다⁠. 맨발 자국이 뒤뜰 흙에 길게 남았다⁠.

*

역관 건너편 찻집 지붕 위에 늙은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오른 소매가 바람에 날렸다⁠. 외팔 노인은 승로의 등에 업혀 나오는 철운을 내려다보았다⁠. 철운의 오른손에서 피가 떨어져 역관 돌계단에 점점이 찍혔다⁠.

“⁠오른손이군⁠.⁠”

외팔 노인이 혼잣말을 했다⁠. 검은 왼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무릎이 쑤셨다⁠. 지붕까지 올라오는 데 반 시진이 들었다⁠.

“⁠서른 해 전 네가 내 오른팔을 가져갔지⁠. 오늘은 위지 집 큰아들이 네 오른손을 가져갔어⁠. 내가 손댄 것도 아닌데⁠.⁠”

노인이 웃었다⁠. 웃음 끝에 기침이 났다⁠. 아래 골목에서 흑장 둘이 키다리에게 쫓겨 달아나고 있었다⁠. 노인은 혀를 찼다⁠.

“⁠내일은 내가 직접 가야겠군⁠. 늙은이 일은 늙은이가 해야지⁠.⁠”

*

승로는 운하 둑길을 따라 객잔까지 아버지를 업고 걸었다⁠. 달이 물에 떠 있었다⁠. 철운의 오른손에 감은 치맛자락이 금방 붉게 젖었다⁠. 철운은 아들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숨소리가 승로의 목덜미에 닿았다⁠.

둑길 중간쯤에서 철운이 무언가를 흥얼거렸다⁠. 가락이 낮고 느렸다⁠. 끝 소절을 두 번 불렀다⁠. 승로의 걸음이 멈칫했다⁠. 역관 별채에서 형이 말해 준 노래였다⁠. 어머니가 끝 소절을 두 번 부르셨다는 노래⁠.

“⁠아버지⁠, 그 노래 어디서 배우셨어요⁠?⁠”

철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흥얼거림이 멎었다⁠. 아들 어깨에 이마를 댄 채 잠든 숨소리를 냈다⁠. 잠들지 않은 것을 승로는 알았다⁠. 서른 해 동안 아버지가 잠든 척하면 승로는 늘 알았다⁠.

뒤에서 소석이 엄마 손을 잡고 걸으며 물었다⁠.

“⁠엄마⁠, 할아버지 손바닥 다시 붙어요⁠?⁠”

“⁠붙어⁠. 할아버지는 다 붙어⁠.⁠”

채향은 대답하고 나서 자기 손바닥을 꽉 쥐었다⁠.

*

객잔 방에서 도각이 보낸 의원이 철운의 손바닥을 꿰맸다⁠. 도각이 등불을 들고 있었다⁠. 애체를 눈에 대고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늘이 살을 지날 때마다 철운은 이를 악물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젊은이 셋이 문밖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뚱보 머리에 기와 자국이 혹으로 솟아 있었다⁠. 서생이 부채로 뚱보 혹에 바람을 부쳐 주었다⁠.

의원이 마지막 매듭을 짓고 가위로 실을 잘랐다⁠. 흰 무명으로 손을 감았다⁠. 감고 나서 철운의 손가락을 하나씩 눌러 보았다⁠. 엄지와 검지가 움직이지 않았다⁠. 철운은 손가락을 오므려 보려고 했다⁠. 무명 밑에서 약지와 새끼손가락만 조금 꿈틀거렸다⁠. 서른 해 동안 맷돌 손잡이를 쥐던 손가락도⁠, 그보다 먼저 칼자루를 쥐던 손가락도 엄지와 검지였다⁠.

“⁠손바닥 안쪽 힘줄이 끊어졌습니다⁠. 살은 붙어도 힘줄은 다시 안 붙습니다⁠.⁠”

“⁠두부는 누를 수 있소⁠?⁠”

의원이 철운을 보았다⁠. 이런 물음은 처음 받는 얼굴이었다⁠.

“⁠손바닥으로 누르는 거라면⁠, 힘은 덜 들어가도 누를 수는 있습니다⁠.⁠”

“⁠칼은⁠?⁠”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칼을 쥐지 못합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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