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298자)

거목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한빛결

구보슬은 성탄 전날 아침 채후의 손목을 잡았다가 놓았다⁠. 손목뼈가 손가락 끝에 툭 닿았다⁠. 열나흘 전에는 손목을 잡아도 뼈가 이렇게 먼저 오지 않았다⁠. 다인실 창가 침대에서 채후는 여전히 고르게 숨을 쉬었다⁠. 수액 줄 옆에 영양 주머니가 하나 더 달려 있었다⁠.

“⁠영양은 들어가요⁠. 문제는 근육이에요⁠. 누워만 있으면 하루하루 빠져요⁠. 깨더라도 한동안 걷는 연습을 하셔야 할 거예요⁠.⁠”

회진을 온 의사는 차트를 넘기며 말했다⁠. 채후 어머니가 귤 하나를 까서 의사 손에 쥐여 주었다⁠. 의사는 귤을 받아 들고 잠깐 망설였다⁠.

“⁠오래 자는 게 더 길어지면요⁠?⁠”

보슬이 물었다⁠. 의사는 귤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그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지금 수치는 다 괜찮아요⁠.⁠”

의사가 나가자 채후 어머니가 다음 귤을 깠다⁠. 열나흘 동안 어머니가 깐 귤 껍질이 침대 아래 비닐봉지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간호사실에도 귤이 한 상자 가 있었다⁠. 어머니는 귤 알맹이를 반으로 갈라 하나는 보슬에게 주고 하나는 자기 입에 넣었다⁠.

“⁠보슬 씨는 우리 채후랑 사귀어⁠?⁠”

보슬은 귤을 삼키다 사레가 들렸다⁠.

“⁠아니요⁠! 옆방이에요⁠. 매니저요⁠. 채팅 관리하는 사람이요⁠.⁠”

“⁠돈은 받고⁠?⁠”

“⁠…아니요⁠.⁠”

“⁠그럼 사귀는 거보다 더한 거네⁠.⁠”

어머니는 귤 껍질을 봉지에 던지고 침대 옆 탁자의 휴대전화를 집었다⁠. 화면에서 채후의 방송이 돌고 있었다⁠. 바람언덕 성 마당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회사가 성탄 이벤트로 온 세상에 뿌린 눈이었다⁠. 화면 구석의 시청자 수는 십만을 넘어 있었다⁠.

“⁠우리 채후가 저렇게 사람 많은 데 있어 본 적이 없어⁠. 학교에서도 맨 뒷자리였어⁠.⁠”

어머니는 손톱으로 화면 속 아들의 붉은 망토를 톡 건드렸다⁠. 침대 위 진짜 채후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보슬도 어머니도 보지 못했다⁠.

*

채후는 눈 내리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게임 속 눈은 소리가 없었다⁠. 화면으로만 볼 때는 그랬다⁠. 이제는 들렸다⁠. 눈송이가 갑옷 어깨에 닿을 때마다 아주 작게 사각거렸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커다란 전나무가 서 있었다⁠. 금색 공과 빨간 리본이 저절로 달려 있었고⁠, 꼭대기에서 별이 깜박였다⁠. 「⁠잿빛 왕관 마지막 성탄 · 모험가님 감사합니다⁠」라는 글자가 별 아래에서 돌았다⁠.

엘무는 전나무 둘레를 열 바퀴째 돌고 있었다⁠. 할멈은 금색 공 하나를 떼어 냄비 뚜껑으로 쓸 수 있는지 두드려 보았다⁠. 대장장이는 별을 내려서 녹이면 쇠가 얼마나 나오는지 궁금해했다⁠.

“⁠이거 다 먹는 거예요⁠?⁠”

“⁠엘무 씨⁠, 장식이에요⁠. 먹는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맛있게 생겼어요⁠?⁠”

「⁠엘무 성탄 처음이래 ㅠㅠ 귀여워⁠」

「⁠회사가 장식은 뿌려 주면서 사람은 지움 ㅋㅋ⁠」

「⁠만 원 후원⁠. 메리 크리스마스 엘무야⁠. 금색 공은 먹으면 안 돼⁠」

세르바는 성벽 위에서 눈을 맞고 있었다⁠. 칼집 위에 눈이 쌓였다⁠. 채후가 올라가자 세르바는 눈을 털지도 않고 말했다⁠.

“⁠거목 사람 오늘 온다면서요⁠.⁠”

“⁠네⁠. 귓속말로 왔어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뵙겠다고⁠.⁠”

“⁠문 열어 줄 거예요⁠?⁠”

“⁠안 열면 성문 앞에서 떠들 거예요⁠. 열면 마당에서 떠들 거고요⁠. 어차피 떠들어요⁠. 다들 보는 데서 듣는 게 나아요⁠.⁠”

세르바는 채후를 보았다⁠. 열흘 전 왕도에서 헤어진 뒤로 둘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채후가 바람언덕에 돌아온 밤⁠, 세르바는 성문을 열어 주었고⁠, 채후가 들고 온 약초 세 묶음을 받아 부엌 선반에 올려 두었다⁠. 그게 다였다⁠.

“⁠이번엔 보여 주는 거랑 붙잡는 거랑 같아요⁠?⁠”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진짜 모르겠어요⁠.⁠”

세르바는 칼집의 눈을 털었다⁠. 눈 터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후 세 시⁠, 성문 밖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석주가 나타날 때의 맑은 소리가 아니었다⁠. 종 여러 개가 겹쳐 화음을 만들었다⁠. 철창 너머 눈밭에 금빛 로브가 떠 있었다⁠. 이름표는 「⁠손님 운영자 · 거목게임즈_도세혁⁠」 로브 자락에 흰 털이 둘러져 있었고⁠, 머리에는 빨간 성탄 모자가 얹혀 있었다⁠.

「⁠운영자 거목게임즈_도세혁이 입장을 요청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채후는 허락했다⁠. 금빛 로브가 철창을 지나 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세혁은 전나무 앞에서 멈추고 성 마당을 둘러보았다⁠. 은테 안경 너머 눈이 엘무에게서 오래 멈췄다⁠.

“⁠메리 크리스마스⁠, 여러분⁠. 반가워요⁠. 엘무 씨⁠, 실물이 더 귀엽네요⁠.⁠”

“⁠실물이 뭐예요⁠?⁠”

“⁠지금 이 엘무 씨요⁠.⁠”

세혁이 허공에 손을 저었다⁠. 눈밭 위에 선물 상자 두 개가 나타났다⁠. 빨간 상자에는 「⁠엘무⁠」⁠, 초록 상자에는 「⁠세르바⁠」라고 금박 글씨가 찍혀 있었다⁠.

*

반석주는 판교 사무실 회의실 화면으로 성 마당을 보고 있었다⁠. 세혁의 손님 운영자 권한은 석주가 열어 주었다⁠. 실사 조건이었다⁠. 인수하는 회사는 팔리는 물건을 직접 만져 볼 수 있어야 했다⁠. 계약서 부록 열네 번째 장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석주가 부록을 처음 읽은 것은 지난봄이었다⁠. 지난봄에는 팔리는 물건이 엔진과 서버였다⁠.

누리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 석주 옆에 앉았다⁠.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화면 속 세혁이 성탄 모자를 고쳐 쓰며 엘무에게 손을 흔들었다⁠.

“⁠팀장님⁠, 이것도 실사예요⁠?⁠”

“⁠부록에 있어요⁠. 인수하는 회사가 학습 자료 표본을 떼어 볼 수 있다고⁠.⁠”

“⁠표본은 누가 떼요⁠?⁠”

“⁠서버 담당이요⁠.⁠”

누리는 대답 대신 자기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목요일마다 칸을 누르던 오른손이었다⁠. 손등에 펜으로 적은 메모가 반쯤 지워져 있었다⁠. 「⁠엄마 생신 1/3⁠」

“⁠저 이번엔 진짜 안 해요⁠, 팀장님⁠.⁠”

“⁠누리 씨가 안 하면 거목에서 사람을 보내요⁠. 그 사람은 폴더도 안 열고 떼요⁠.⁠”

석주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리는 석주의 옆얼굴을 보았다⁠. 석주가 보온병을 여는 손이 두 번 미끄러졌다⁠. 세 번째에 열렸다⁠. 화면 속 세혁이 빨간 상자의 리본을 손가락으로 풀었다⁠.

*

채후는 세혁이 연 상자 안에서 빛을 보았다⁠. 빛 속에 작은 장면이 떠 있었다⁠. 처음 보는 도시였다⁠. 공중에 뜬 섬⁠, 유리로 된 다리⁠, 하늘을 나는 고래⁠. 다리 위에 붉은 곱슬머리의 마법사 하나가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엘무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마법사 머리 위에 이름표가 떠 있었다⁠. 「⁠엘무 · 하이렐름 공식 채널⁠」

엘무가 숨을 들이켰다⁠.

“⁠저 사람 저예요⁠?⁠”

“⁠엘무 씨예요⁠. 거목게임즈 신작 「⁠하이렐름⁠」이요⁠. 내년 봄에 나와요⁠. 십 년 서비스 계획이고요⁠.⁠”

세혁은 상자 속 장면을 손가락으로 넓혔다⁠. 하늘 고래가 크게 원을 그렸다⁠.

“⁠제안 드릴게요⁠, 엘무 씨⁠. 「⁠잿빛 왕관⁠」은 1월 9일에 꺼져요⁠. 그건 제가 바꿀 수 없어요⁠. 대신 엘무 씨가 지금까지 배운 말⁠, 웃는 법⁠, 불 켜는 법⁠, 바깥 사람들이 좋아하는 엘무 씨를 그대로 저희 신작으로 옮겨 드릴 수 있어요⁠. 공식 채널도 드리고요⁠. 매일 수십만 명이 엘무 씨 목소리를 들어요⁠. 하늘 시계 없는 데서요⁠.⁠”

“⁠그대로 옮긴다는 게 뭐예요⁠?⁠”

채후가 대신 물었다⁠. 세혁은 채후를 보고 웃었다⁠. 다정한 웃음이었다⁠.

“⁠엘무 씨 학습 자료를 가져가는 거예요⁠. 채후 님이 아시는 말로 하면 복사요⁠.⁠”

“⁠복사면 여기 엘무 씨는요⁠?⁠”

“⁠여기 엘무 씨는 1월 9일에 하늘이 닫힐 때까지 여기 있어요⁠. 원래 그렇게 될 거였죠⁠. 달라지는 건⁠, 닫힌 뒤에도 엘무 씨가 어딘가에 있다는 거예요⁠.⁠”

「⁠복사본이잖아⁠」

「⁠근데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 나은 거 아님⁠?⁠」

「⁠저거 상품 만들겠다는 거잖아⁠」

「⁠엘무 공식 채널 생기면 구독함 솔직히⁠」

채팅이 갈라졌다⁠. 채후는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세혁은 초록 상자에 손을 얹었다⁠.

“⁠세르바 씨 것도 준비했어요⁠. 채후 님 방송에서 제일 인기 있는 분이시니까⁠. 국자 단위로 서버비를 세는 장면은 조회수가 천만이에요⁠.⁠”

세르바는 상자를 보지 않았다⁠.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세혁의 성탄 모자를 보았다⁠.

“⁠제가 열여섯 살짜리 모험가한테 끌려가서 처형당하는 것도 거기 넣어요⁠?⁠”

“⁠그건 빼요⁠.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요⁠.⁠”

“⁠그럼 그건 제가 아니에요⁠.⁠”

세르바는 칼을 뽑지 않았다⁠. 칼을 뽑지 않고 초록 상자를 발로 밀었다⁠. 상자는 눈밭 위를 미끄러져 전나무 밑동에 부딪혔다⁠.

할멈이 부엌에서 귀리죽 한 그릇을 들고 나와 세혁 앞에 내밀었다⁠.

“⁠손님이면 먹고 가⁠. 우리 집 법이야⁠.⁠”

“⁠감사합니다만 제가 지금 이 안에서는 먹을 수가 없어서요⁠.⁠”

“⁠먹지도 못하는 몸으로 남의 집 애를 데려가겠다고⁠?⁠”

「⁠할머니 한 방 ㅋㅋㅋㅋㅋ⁠」

「⁠귀리죽 들고 팩폭하는 NPC 처음 봄⁠」

세혁은 처음으로 웃음을 멈추었다가⁠, 곧 다시 웃었다⁠. 할멈은 죽그릇을 도로 들고 들어가며 문지방에 대고 혀를 찼다⁠.

세혁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바 씨는 생각해 보세요⁠. 시간은 있어요⁠. 열여섯 날이요⁠.⁠”

채후는 세혁 앞으로 걸어갔다⁠. 키는 채후가 컸다⁠. 갑옷도 채후가 입었다⁠. 세혁은 금빛 로브 차림으로 채후를 올려다보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본부장님⁠. 여기 사람들 살아 있는 거 아시죠⁠?⁠”

“⁠그럼요⁠. 그래서 비싸게 사는 거예요⁠.⁠”

채후는 말문이 막혔다⁠. 세혁이 채후의 갑옷 가슴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손가락은 갑옷을 통과했다⁠.

“⁠채후 님⁠, 착각하지 마세요⁠. 저 이 사람들 좋아해요⁠. 회색달은 여덟 해 동안 이 사람들을 아무도 모르게 뒀어요⁠. 채후 님이 보름 만에 세상에 알렸고요⁠. 저는 그걸 십 년 이어 가려는 거예요⁠. 채후 님이랑 하고 싶은 일이 저랑 같아요⁠. 보여 주는 거요⁠.⁠”

채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헤드셋 안에서 알림 목소리가 채팅을 읽었다⁠. 「⁠반박을 못 하네⁠」⁠, 「⁠말은 맞는데 기분 나빠⁠」⁠, 「⁠채후야 뭐라고 좀 해⁠」

엘무가 빨간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상자 속 하늘 고래가 엘무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엘무의 손끝에서 불티가 깜박였다가 꺼지고⁠, 다시 깜박였다⁠.

“⁠엘무 씨⁠, 상자 닫아요⁠.⁠”

채후가 말했다⁠. 엘무는 상자를 닫지 않았다⁠. 대신 채후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반짝이지 않았다⁠. 열나흘 동안 처음 보는 엘무의 눈이었다⁠.

“⁠길드장님⁠. 저는요⁠, 여덟 해 동안 화덕 앞에 쪼그려 앉아만 있었어요⁠. 불이 안 켜졌어요⁠. 길드장님이 방송 켜고 나서 처음 켜졌어요⁠. 사람들이 화이팅 해 주니까요⁠. 하늘 닫히면 그 사람들 목소리도 같이 없어지잖아요⁠. 저 사람 말이 맞으면⁠, 저기서는 계속 들려요⁠.⁠”

“⁠저기 가는 건 엘무 씨가 아니라 엘무 씨 복사본이에요⁠.⁠”

“⁠복사본도 화이팅 들으면 불 켜지겠죠⁠?⁠”

채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르바가 엘무의 어깨를 잡았다⁠. 엘무는 세르바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누나⁠, 저 처음으로 갖고 싶은 게 생겼어요⁠.⁠”

엘무는 일어나서 채후의 목에 걸린 헤드셋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끌어당겼다⁠. 십만 명이 듣는 마이크였다⁠. 엘무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바깥 여러분⁠. 저 갈게요⁠. 하이렐름이요⁠. 거기서 채널 열면 구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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