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96자)

만 명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한빛결

채후는 자기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에 잠을 깼다⁠. 높고 빠르고⁠, 중간중간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였다⁠. 눈을 뜨기 전에 귀로 먼저 알았다⁠. 엘무였다⁠.

“⁠아니⁠, 「⁠감자튀김왕⁠」 님⁠. 제가 왜 NPC예요⁠? 당신이 NPC거든요⁠? 당신 이름이 감자튀김왕이잖아요⁠. 감자튀김이 뭔지도 모르는데 왕이래⁠.⁠”

채후는 눈을 떴다⁠. 성 마당의 장작더미 위였다⁠. 어젯밤 갑옷을 입은 채 누웠다가 그대로 잠든 자리였다⁠. 바로 앞에 엘무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채후의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마이크 줄을 두 손으로 붙든 채였다⁠. 붉은 곱슬머리가 헤드셋 밴드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엘무 씨⁠, 뭐 해요⁠?⁠”

“⁠길드장님⁠! 깼어요⁠? 지금 바깥 사람들이 저보고 대본이래요⁠. 제가 대본이면 이렇게 화가 나겠어요⁠?⁠”

엘무는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뽀삐엄마⁠」 님⁠, 저 성우 아니에요⁠. 성우가 뭔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증거요⁠? 증거를 대 보래요⁠. 지금 하늘 시계가 몇이냐고요⁠? 스물아홉이요⁠. 아까 저 위에 새가 한 마리 지나갔고⁠, 할멈이 오늘 아침 귀리죽을 태웠어요⁠. 이건 대본에 없죠⁠?⁠”

채후는 하늘을 보았다⁠. 금빛 「⁠D-29⁠」 하루가 지나 있었다⁠. 채후의 눈이 열리자 방송 화면에도 빛이 들어왔다⁠. 헤드셋 쿠션 밖으로 새어 나온 알림 목소리가 정신없이 채팅을 읽고 있었다⁠.

「⁠화면 켜졌다⁠!⁠!⁠」

「⁠진짜 마법사 얼굴이 대답하면서 움직여⁠」

「⁠내 닉 불러 줘 내 닉 불러 줘⁠」

「⁠감자튀김왕 지금 NPC한테 NPC 소리 들음 ㅋㅋㅋㅋㅋ⁠」

엘무가 헤드셋을 벗어 채후에게 내밀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길드장님⁠, 이 안에 사람이 몇이에요⁠?⁠”

채후는 헤드셋을 받아 목에 걸었다⁠. 쿠션을 귀에 대자 알림 목소리 사이로 숫자가 들렸다⁠. 채후가 방송을 하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시청자 수였다⁠.

「⁠현재 시청자 칠천사백 명⁠」

“⁠칠천⁠?⁠”

“⁠칠천이 많아요⁠?⁠”

“⁠엘무 씨⁠. 저 여덟 해 동안 제일 많이 모인 날이 삼백이었어요⁠.⁠”

엘무는 손가락을 꼽아 보다가 포기하고 대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을린 손끝에서 불티가 하나 튀었다⁠. 이번에는 꺼지지 않고 장작 위에 내려앉아 작은 불꽃이 되었다⁠.

“⁠켜졌다⁠! 길드장님⁠, 켜졌어요⁠! 사람이 많으니까 켜졌어요⁠!⁠”

「⁠마법사 불 붙음 ㅋㅋㅋ 방송이 마나임⁠?⁠」

「⁠만 원 후원⁠. 마법사님 채널 따로 파세요⁠」

엘무가 방금 뭐라고 했느냐고 졸라서 채후가 후원 글을 그대로 전했다⁠. 엘무는 채널이 뭔지 물었고⁠, 채후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에 벌써 스스로 결론을 냈다⁠.

“⁠채널이 생기면 저도 귀에 사람이 사는 거죠⁠?⁠”

*

반석주는 열한 시 사십 분에 동시 접속 그래프 앞에서 보리차를 쏟았다⁠. 판교 사무실 운영팀 칸의 큰 화면에서 「⁠잿빛 왕관⁠」의 접속자 선이 지난 두 달 동안 바닥을 기다가 어젯밤부터 수직으로 서 있었다⁠. 누리가 물티슈를 뽑아 석주의 책상을 닦았다⁠.

“⁠팀장님⁠, 「⁠NPC가 채팅이랑 싸움⁠」 영상이 숏폼 순위 일 위예요⁠. 조회수가 이백만이에요⁠. 휴면 계정이 사만 개 넘게 돌아왔고요⁠. 다들 바람언덕으로 가요⁠. 마을 앞 길이 꽉 막혔어요⁠.⁠”

“⁠결제는요⁠?⁠”

“⁠꾸미기 상점이 어제 하루에만 지난달 절반을 찍었어요⁠. 길드장 망토 색 바꾸는 상품이 제일 많이 팔렸어요⁠. 채후 망토랑 같은 붉은색이요⁠.⁠”

석주는 젖은 물티슈를 쥔 채 그래프를 보았다⁠. 누리는 석주의 얼굴을 보았다⁠. 기쁜 얼굴인지 아닌지 가를 수가 없었다⁠.

책상 위 전화가 울렸다⁠. 대표실 번호였다⁠. 석주가 받자 대표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 칸막이 너머까지 울렸다⁠.

“⁠반 팀장⁠, 실사 중이야⁠. 거목 사람들이 지금 우리 사무실에서 서류 보고 있어⁠. 저 방송 뭐야⁠? 저거 종료 연기하라는 여론 만들면 계약서 다시 써야 돼⁠.⁠”

“⁠사흘이면 가라앉습니다⁠.⁠”

“⁠사흘 안에 안 가라앉으면⁠?⁠”

“⁠가라앉게 하겠습니다⁠.⁠”

석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운영자 도구를 열었다⁠. 누리는 석주의 손가락이 「⁠계정 정지⁠」 단추 위에서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은 단추를 누르지 않고 옆의 「⁠길드 정보⁠」를 눌렀다⁠. 화면에 바람언덕의 길드원 목록이 떴다⁠. 용병 일곱⁠, 길드장 하나⁠. 길드 정원은 쉰⁠.

“⁠누리 씨⁠, 길드 성 규칙 문서 찾아 줘요⁠. 2019년에 내가 쓴 거⁠.⁠”

누리가 공유 폴더 맨 아래에서 먼지 쌓인 문서를 찾아 띄웠다⁠. 「⁠길드 성 기획 초안 · 반석주⁠」 첫 줄에 여덟 해 전의 석주가 쓴 문장이 있었다⁠. 「⁠성은 플레이어의 집이다⁠. 집 안에는 운영자도 노크하고 들어간다⁠」 석주는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단⁠, 길드전 선포 시 성문 방어 판정 해제⁠」 석주는 마지막 줄에 마우스 커서를 올려 두었다⁠.

“⁠팀장님⁠, 거기 왜요⁠?⁠”

“⁠성 밖 사람들이 들어갈 방법이 하나 있었어요⁠. 내가 넣어 놓고 잊었네⁠.⁠”

*

구보슬은 관악의 한 대학병원 육 층 다인실에서 보호자 의자를 펴다가 손가락을 끼었다⁠. 의자 이음새가 손가락을 물고 놓지 않았다⁠. 보슬이 소리 없이 발을 구르는 동안 침대 위의 나채후는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팔에는 수액 줄이 꽂혀 있었고⁠, 머리맡 모니터의 초록 선은 고르게 오르내렸다⁠.

“⁠보호자분이세요⁠?⁠”

간호사가 수액 주머니를 갈며 물었다⁠. 보슬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였다⁠.

“⁠옆방 사람인데요⁠, 보호자 할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 어머니 혼자 제주에서 귤 농사 지으세요⁠. 연락은 드렸는데 귤철이라 주말에나 오신대요⁠.⁠”

“⁠검사로는 다 정상이에요⁠. 깊이 주무시는 것 말고는요⁠. 깨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간호사가 나가자 보슬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채후의 방송은 만 명을 넘어 있었다⁠. 보슬은 매니저 화면에서 방송 위에 띄우는 목표 막대를 새로 만들었다⁠. 「⁠서버비 모금 · 목표 사억 원⁠」 막대는 손톱만큼 차 있었다⁠. 보슬은 막대 아래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 달았다⁠. 「⁠스트리머는 지금 병원에서 자고 있습니다⁠. 게임 속 채후는 안 잡니다⁠」

채팅이 「⁠ㅋㅋㅋ⁠」와 「⁠ㅠㅠ⁠」로 반반씩 흘렀다⁠. 보슬은 장난 글을 지우고⁠, 욕을 지우고⁠, 채후 몸 사진을 올려 달라는 글을 지웠다⁠. 세 해 동안 하던 일이었다⁠. 세 해 동안 채후가 고맙다는 말 말고 아무것도 준 적이 없던 일이기도 했다⁠. 보슬은 잠든 채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너 깨면 매니저 월급 줘⁠. 사억 모이면 일 퍼센트만⁠.⁠”

모니터의 초록 선이 한 번 크게 튀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보슬은 손가락을 떼고 한참 선을 노려보았다⁠. 선은 이후로 얌전했다⁠.

*

세르바는 성문 앞 소리가 시장 바닥 같다고 생각했다⁠. 철창 밖 언덕에 모험가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갑옷을 입은 사람⁠, 로브를 입은 사람⁠, 토끼 귀 장식을 단 사람⁠. 다들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채후 형⁠, 마법사 불러 줘요⁠. 부길드장 누나⁠, 여기 좀 봐요⁠. 누군가 철창 사이로 꽃을 던졌고 누군가는 감자를 던졌다⁠.

엘무는 철창 바로 앞에서 모험가들과 손바닥을 마주치고 있었다⁠. 채후는 성벽 위에 서서 헤드셋을 누른 채 웃고 있었다⁠. 세르바는 성벽 계단을 올라가 채후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지금 몇이에요⁠?⁠”

“⁠만 이천이요⁠. 세르바 씨⁠, 만 이천⁠. 회사 접속자도 막 올라간대요⁠. 채팅에서 기사를 읽어 줬어요⁠. 「⁠잿빛 왕관 접속자 하루 새 열 배⁠」⁠”

“⁠어제 아침에 빵집 아저씨가 지워졌어요⁠.⁠”

채후의 웃음이 멈췄다⁠. 성벽 아래에서 엘무가 감자를 주워 들고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알아요⁠.⁠”

“⁠알면서 숫자를 세요⁠?⁠”

“⁠숫자가 없으면 다 지워져요⁠. 팀장님이 숫자로 오라고 했어요⁠. 동시 접속⁠, 매출⁠. 지금 그게 올라가고 있어요⁠. 이대로 서른 날 가면⁠…⁠”

“⁠이대로 가면 저 사람들이 다 우리를 알아요⁠. 우리 얼굴⁠, 우리 목소리⁠, 우리가 어디서 자는지⁠. 길드장님⁠, 성 밖에 한 발짝만 나가면 다음 점검에 지워진다면서요⁠. 저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다 알아요⁠. 방송으로 다 들었으니까⁠.⁠”

세르바는 손을 뻗어 채후의 목에 걸린 헤드셋을 잡았다⁠. 채후가 반사적으로 세르바의 손목을 잡았다⁠. 갑옷 장갑과 굳은살 박인 손목이 맞부딪쳤다⁠.

“⁠이거 끄는 법 있죠⁠?⁠”

“⁠있어요⁠. 제가 눈 감고 입 다물면 돼요⁠. 근데 그러면 돈이 안 들어와요⁠. 서버비가 한 달에 사억이에요⁠.⁠”

“⁠사억이 뭔지 몰라요⁠. 할멈 국자가 몇 개예요⁠?⁠”

“⁠국자로는 안 세져요⁠!⁠”

「⁠ㅋㅋㅋㅋㅋ 국자 단위⁠」

「⁠부부 싸움 ON⁠」

「⁠부길드장 말이 맞는 듯⁠. 끄라고 하면 꺼야지⁠」

「⁠끄면 서버 망함⁠. 켜야 됨⁠」

헤드셋 안에서 채팅이 둘로 갈려 싸웠다⁠. 채후는 세르바의 손목을 놓지 않았고⁠, 세르바는 헤드셋을 놓지 않았다⁠. 성벽 아래에서 모험가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세르바 씨⁠. 저 여덟 해 동안 길드원이 하나씩 떠날 때마다 아무 말 안 했어요⁠. 붙잡으면 구차해 보일까 봐요⁠. 빈자리는 용병으로 채우고 방송에서는 우리 길드 아직 살아 있다고 했어요⁠. 거짓말이었어요⁠. 지금은 거짓말 아니에요⁠. 다 살아 있어요⁠. 이번엔 붙잡을 거예요⁠. 보여 주면서요⁠.⁠”

세르바의 손가락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조금만 빠졌다⁠.

“⁠보여 주는 거랑 붙잡는 거랑 같아요⁠?⁠”

채후가 대답하기 전에 알림 목소리가 한 줄을 또박또박 읽었다⁠.

「⁠잠깐 근데 부길드장 얼굴 히든 퀘스트 ‘⁠탈영 기사⁠’ 표적이랑 똑같은데⁠? 공략 사이트에 몽타주 있음⁠」

「⁠헐 ㄹㅇ임⁠. 보상 전설 장검 ‘⁠재의 맹세⁠’ 확률 아이템 아니고 확정 지급⁠」

「⁠이거 퀘스트 받으면 표적 위치가 지도에 뜬대⁠」

세르바의 손이 헤드셋에서 떨어졌다⁠. 채후는 채팅을 들은 그대로 세르바의 얼굴을 보았다⁠. 세르바는 채후를 보지 않았다⁠. 성벽 아래 언덕을 보고 있었다⁠.

모험가들 사이가 조용해지고 있었다⁠. 감자를 던지던 사람이 팔을 내렸다⁠. 토끼 귀 장식을 단 사람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누군가의 퀘스트 창이 열리는 효과음이 철창 너머에서 짤랑 울렸다⁠. 이어서 하나⁠, 또 하나⁠. 짤랑⁠, 짤랑⁠. 효과음이 언덕 아래로 번져 갔다⁠.

세르바는 채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너무 차분했다⁠.

“⁠제 머리 위에 뭐가 있어요⁠?⁠”

채후는 세르바의 머리 위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붉은 해골 무늬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모험가들의 눈에만 보이던 표식이 이제 채후의 눈에도⁠, 만 이천 명의 화면에도 떠 있었다⁠.

“⁠엘무 씨⁠, 문에서 떨어져요⁠.⁠”

채후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엘무가 철창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철창 앞으로 모험가 하나가 걸어 나왔다⁠. 검은 판금 갑옷에 등에는 대검⁠, 머리 위에는 길드 이름 「⁠칼바람⁠」 구독자 삼만 명짜리 사냥 방송 스트리머였다⁠. 채후도 이름은 알았다⁠. 칼바람은 철창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세르바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자기 방송 카메라 쪽으로 브이를 그렸다⁠.

“⁠채후 님 방송 보고 왔어요⁠. 반가워요⁠. 저기⁠, 부길드장님 잠깐 빌려 가도 될까요⁠? 보상이 좀 좋아서⁠.⁠”

칼바람 뒤로 서른 명쯤 되는 모험가들이 무기를 뽑았다⁠. 뽑는 소리가 한꺼번에 나서 하나의 쇳소리처럼 들렸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만 명 ·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