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64자)
첫 퀘스트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한빛결
반석주는 새벽 한 시에 바람언덕 마을 빵집 앞 돌계단 위에서 눈을 떴다. 화면 속이 아니었다. 석주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고, 반달곰은 화면 속 돌계단 위에 있었다. 석주는 키보드로 반달곰을 일으켰다. 여덟 해 만에 쥐는 키보드 감각이 낯설었다. 운영자 캐릭터는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날아갔다. 반달곰은 걸어야 했다.
빵집 문이 열리고 새로 찍힌 빵집 주인이 나왔다. 앞치마에 밀가루, 둥근 얼굴, 매끈한 손등.
“어서 오세요, 모험가님! 바람언덕 마을의 갓 구운 빵, 하나 맛보시겠어요?”
석주는 빵을 샀다. 금화 한 닢이었다. 반달곰의 가방에는 2019년에 모아 둔 금화가 서른두 닢 있었다. 석주는 빵집 주인의 대사를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2019년 봄, 석주가 사무실 구석에서 이 대사를 쓸 때 옆자리 동료가 「갓 구운」은 너무 흔하다고 했다. 석주는 고치지 않았다. 흔한 말이 좋았다.
반달곰은 언덕길을 올랐다. 반쯤 올랐을 때 풀숲에서 초록 슬라임 둘이 튀어나왔다. 레벨 3짜리였다. 반달곰은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빗나갔다. 슬라임이 반달곰을 깔고 뭉갰다. 화면이 회색이 되었다. 「사망했습니다 · 가까운 마을에서 부활합니다」
석주는 노트북 앞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소파에서 자던 아내가 눈을 떴다.
“뭐야, 게임해?”
“슬라임한테 죽었어.”
“당신이 만든 거 아니야?”
“만들었지. 이렇게 셀 줄 몰랐어.”
반달곰은 빵집 앞에서 다시 일어나 언덕을 올랐다. 이번에는 풀숲을 크게 돌았다. 돌다가 다른 슬라임 셋을 만나 또 죽었다. 세 번째에 석주는 빵을 먹고 체력을 채운 뒤 슬라임이 낮잠을 자는 시간을 기다렸다. 2019년에 자기가 정한 시간이었다. 새벽 다섯 시 반, 반달곰은 성문 앞에 닿았다.
「입장을 요청합니다 · 모험가 반달곰 · 레벨 12」
*
채후는 철창 너머 풀밭에 선 둥근 얼굴의 초보 모험가를 한참 보았다. 나무 몽둥이, 기운 초보 옷, 머리 위 이름표 「반달곰」 헤드셋에서 알림 목소리가 쉬지 않고 읽었다.
「반달곰 누구임」
「레벨 12 실화냐」
「마지막 접속 2019년이래. 전적 검색해 봄」
「이거 혹시」
채후는 철창을 붙잡았다.
“팀장님이에요?”
반달곰의 머리 위에 말풍선이 떴다. 모험가는 입 대신 손가락으로 말했다.
「네. 올라오다가 슬라임한테 두 번 죽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운영팀장 슬라임한테 사망」
「회색달 운영팀장 레벨 12 ㅋㅋㅋ 이게 맞냐」
채후는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했다. 허락 단추를 누르는 손이 웃음 때문에 떨렸다. 철창이 열리고 반달곰이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걷는 것이 서툴렀다. 짐 더미에 한 번 부딪히고, 전나무에 한 번 부딪혔다. 할멈이 솥 앞에서 반달곰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은 또 누구야.”
“운영팀장님이요. 흰 옷 입던 분.”
할멈은 국자를 내려놓았다. 반달곰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귀리죽 한 그릇을 퍼서 반달곰 앞에 내밀었다.
“이번엔 먹을 수 있는 몸으로 왔네. 먹어.”
반달곰이 그릇을 받았다. 모험가는 음식을 먹으면 체력이 찼다. 반달곰 머리 위에 초록 숫자가 떴다. 「+120」 말풍선이 이어졌다.
「맛은 안 나요. 모험가라서요. 그래도 체력이 차요」
“그럼 맛있다고 해. 그게 예의야.”
「맛있어요」
할멈은 고개를 끄덕이고 솥으로 돌아갔다. 엘무가 짐 더미에서 내려와 반달곰 둘레를 빙빙 돌았다. 대장장이는 모루 위에서 팔짱을 끼고 반달곰을 보았다. 왕도에서 온 마흔둘은 우물가에서 일어서서 지켜보았다.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아무도 내쫓지 않았다.
반달곰은 죽그릇을 비우고 우물가로 걸어갔다. 우물 돌테에 걸터앉았다. 채후가 옆에 앉았다. 말풍선이 한 줄씩 떴다. 석주의 손가락은 느렸다.
「제가 이 게임에서 처음 쓴 퀘스트가 뭔지 아세요?」
“탈영 기사요?”
「아니요. 빵 배달이요. 바람언덕 빵집 주인이 언덕 위 성에 빵을 갖다 달래요. 성은 그때 아무도 안 산 빈 성이었어요. 빵을 갖다 놓으면 끝나는 퀘스트예요. 보상은 금화 한 닢. 아무도 안 했어요. 너무 시시해서요」
채후는 숨을 들이쉬었다. 열여덟 살에 이 성을 샀을 때, 아침마다 빵집 주인이 철창 사이로 빵을 넣어 주었다. 채후는 빵이 성 주인에게 주는 꾸미기 효과인 줄 알았다.
“그 빵, 퀘스트를 아무도 안 해서 빵집 아저씨가 직접 갖다준 거예요?”
「여덟 해 동안이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요」
말풍선이 잠깐 멈췄다. 석주가 키보드에서 손을 뗀 것이었다. 다음 말풍선은 오래 걸려 떴다.
「성은 플레이어의 집이다. 제가 쓴 첫 문장이에요. 어제 이사회에서 그 문장을 다시 생각했어요. 회사가 거목에 파는 건 엔진과 학습 자료예요. 길드 성은 이용자의 집이에요. 이용자 계정에 붙은 이용자 자산이요. 회사 물건이 아니에요. 채후 님 거예요」
채후는 말풍선을 두 번 읽었다. 눈으로 읽었다. 귀로는 알림 목소리가 같은 말을 읽고 있었다. 채팅이 말풍선을 따라 옮겨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성을 옮기는 건…”
「이용자가 자기 집을 이사하는 거예요. 성 안 길드원은 성에 딸린 식구로 보겠습니다. 그건 법이 정해 준 게 아니고 제가 정하는 거예요. 제가 책임지고요」
“팀장님 책임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오후에 정해요」
반달곰이 우물가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다가 우물 돌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엘무가 반달곰의 팔을 잡았다. 엘무의 손끝에서 불티가 튀어 반달곰 초보 옷 소매를 그을렸다.
“죄송해요! 반가워서요!”
「괜찮아요. 그을린 게 더 좋아요」
*
반석주는 오후 두 시에 성수동 거목게임즈 본사 이십 층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도세혁이 있었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세혁은 커피를 두 잔 시켰다. 석주는 보온병을 꺼냈다.
“반 팀장님이 먼저 보자고 하신 건 처음이네요. 열두 명 건이면 걱정 마세요. 대표님하고 다 정리됐어요.”
“세르바 원본을 돌려주세요. 오늘 밤 안에요.”
세혁은 커피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웃음이 조금 얇아졌다.
“어제 이사회에서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조항 없어요.”
“알아요. 그래서 조항 말고 거래를 하러 왔어요.”
석주는 목에서 검은 열쇠 막대를 풀어 탁자 위에 놓았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막대가 탁자 유리에 닿아 딸깍 소리를 냈다.
“1월 10일 오전에 엔진과 학습 자료가 거목으로 넘어가요. 학습 자료 원본은 이 열쇠로 잠겨 있어요. 제가 2019년에 잠갔어요. 열쇠 없이 여시려면 석 달은 걸려요. 하이렐름 봄 출시는 못 하세요.”
“협박이시네요.”
“거래예요. 세르바 원본을 오늘 자정 전에 회색달 서버로 돌려주시면, 1월 10일에 이 열쇠로 학습 자료를 깨끗하게 열어 드려요. 안 돌려주시면 열쇠는 제 목에 그대로 있어요. 저는 1월 9일 자로 회색달을 그만두니까, 1월 10일에 거목이 저한테 시킬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세혁은 오래 말이 없었다. 창밖 한강 위로 유람선이 지나갔다. 세혁이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재미있어하는 얼굴이었다.
“반 팀장님, 그만두시면 열두 명은요?”
“열두 명은 계약서에 있어요. 본부장님이 대표님한테 약속하셨고요. 저 하나만 빼세요. 열두 명 명단에서 저를 빼고, 대신 세르바 원본을 주세요.”
“세르바 씨 한 사람하고 반 팀장님 한 사람을 바꾸시겠다?”
“네.”
세혁은 열쇠 막대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막대가 유리 위에서 반 바퀴 돌았다.
“좋아요. 대신 하나는 알아 두세요. 세르바 씨는 저희 시험 서버에 사흘 있었어요. 사흘 동안 세르바 계열 백 명이 세르바 씨 곁에서 배웠어요. 백 명은 저희 거예요. 출시도 해요. 원본이 가도 백 명은 바람을 그리워해요.”
석주는 보온병 뚜껑을 닫았다. 세르바 계열 백 명을 막을 방법은 석주에게 없었다. 석주는 알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 팀장님, 정말 아깝네요. 거목에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거목에는 제 첫 문장이 없어서요.”
석주는 열쇠 막대를 다시 목에 걸고 일어났다. 회의실 문을 나서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누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누리 씨, 저녁 여덟 시 반에 서버실. 열쇠 가져가요」
*
변누리는 저녁 여덟 시 반에 서버실 문 앞에서 석주를 만났다. 석주는 성수동에서 바로 왔다고 했다. 외투 깃에 한강 바람 냄새가 묻어 있었다. 석주는 서버실에 들어서자마자 목에서 열쇠 막대를 풀어 누리의 손바닥에 올렸다.
“거목 시험 서버에서 회색달로 오는 길은 아직 열려 있어요. 세르바 씨를 보낼 때 쓴 길이요. 거목이 반대편 문을 열어 줄 거예요. 이쪽 문은 이 열쇠로 열어요.”
누리는 열쇠를 쥐다가 떨어뜨렸다. 막대가 서버실 바닥을 굴러 기계 밑으로 들어갔다. 둘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기계 밑을 들여다보았다. 석주가 휴대전화 손전등을 켰다. 먼지 뭉치 사이에서 막대가 반짝였다.
“팀장님, 이거 왜 저 주세요?”
“내일부터 누리 씨 열쇠예요. 나는 내일 자로 그만둬요. 거목 명단에서 내 이름 뺐어요. 대신 세르바 씨 받았어요.”
누리는 기계 밑에 손을 넣은 채 굳었다. 석주는 웃었다. 오늘 하루에 세 번째 웃음이었다.
“울지 마요. 지금 울면 막대가 더 안쪽으로 들어가요.”
누리는 울면서 막대를 꺼냈다. 먼지가 손등에 잔뜩 묻었다. 노트북 입력 칸에 막대를 꽂자 화면에 글자가 떴다. 「관리자 확인 · 반석주」 누리는 소매로 눈을 닦고 자판을 두드렸다. 손가락이 처음으로 떨리지 않았다.
*
채후는 밤 아홉 시에 성 마당 한가운데에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 시계는 「D-1」 내일 이 시간이면 「D-0」이었다. 반달곰은 아직 성 안에 있었다. 석주가 회사에서 돌아와 다시 접속했다고 했다. 반달곰은 우물가에 앉아 엘무가 진행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자, 여러분! 다음 순서는 할멈의 귀리죽 먹방이에요! 먹방이 뭐냐면, 먹는 걸 보는 거래요! 왜 보는지는 저도 몰라요!”
「엘무 진행 실력 늘었네 ㅋㅋ」
「먹방 정의 정확함」
반달곰의 머리 위에 말풍선이 떴다. 「먹방은 저도 왜 보는지 모릅니다. 회사에서는 다들 봤습니다」 할멈이 반달곰의 빈 그릇에 죽을 한 국자 더 부었다. 반달곰의 머리 위에 초록 숫자가 또 떴다. 체력은 이미 다 차 있었다.
헤드셋에서 처음 듣는 알림이 울렸다. 귓속말이었다. 「귓속말 · GM누리 · 채후 님, 마당 가운데 비켜 주세요. 지금이요」
채후는 뒤로 물러났다. 마당 한가운데, 짐 더미와 전나무 사이에 흰 빛이 내려왔다. 세르바가 떠날 때와 같은 자리였다. 빛기둥은 땅에 닿자마자 흩어졌다. 흩어진 빛 속에서 사람 하나가 떨어졌다. 정말로 떨어졌다. 반 뼘 높이에서 엉덩이부터 서리 낀 흙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낡은 기사 외투, 뒤로 묶은 검은 머리, 눈썹 끝의 흉터. 세르바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사흘 동안 유리 다리 위에서 보던 눈도 아니었다. 채후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세르바가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빵 냄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