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36자)

이사회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한빛결

변누리는 서버실 바닥에 앉아 노트북 세 대를 나란히 켜 두었다⁠. 금요일 아침 일곱 시였다⁠. 왼쪽 노트북에는 보슬의 모금으로 빌린 작은 서버가 떠 있었다⁠. 이름은 누리가 지었다⁠. 「⁠바람언덕-2⁠」 가운데 노트북에는 바람언덕 성을 본뜬 시험 구역이 있었다⁠. 지난밤 네 번 옮겨 보았고⁠, 네 번 다 성공했다⁠. 시험 구역의 우물은 옮겨 간 뒤에도 도르래가 돌았다⁠. 오른쪽 노트북에는 관리자 열쇠를 넣으라는 칸 하나가 깜박이고 있었다⁠.

서버실 문이 열렸다⁠. 석주였다⁠. 이사회에 들어갈 정장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목에 사원증과 함께 검은 열쇠 막대가 매달려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막대였다⁠.

“⁠팀장님⁠, 다 됐어요⁠. 열쇠만 꽂으면 돼요⁠. 시험 구역 네 번 옮겼어요⁠. 네 번 다 우물이 돌았어요⁠.⁠”

“⁠시험 구역에 사람이 있었어요⁠?⁠”

누리는 입을 다물었다⁠. 석주는 노트북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정장 바지 무릎이 바닥 먼지를 쓸었다⁠.

“⁠바람언덕 성에는 쉰 명이 있어요⁠. 그리고 나채후 님이 있어요⁠. 성을 옮기면 채후 님도 같이 옮겨져요⁠. 채후 님 몸은 관악의 병원에 있고⁠, 채후 님 세션은 이 서버에 묶여 있어요⁠. 세션이 붙은 채로 구역이 다른 서버로 넘어가면 어떻게 돼요⁠?⁠”

“⁠모르겠어요⁠.⁠”

“⁠나도 몰라요⁠. 모르는 걸로 사람 하나를 걸 수는 없어요⁠.⁠”

“⁠그럼 채후 님 먼저 꺼내요⁠.⁠”

“⁠어떻게요⁠?⁠”

누리는 가운데 노트북을 석주에게 돌렸다⁠. 화면에 세션 기록이 떠 있었다⁠. 채후의 세션은 길드장 캐릭터 하나에 붙어 있었다⁠. 네 주 가까이 누리가 들여다본 기록이었다⁠.

“⁠세션이 캐릭터에 붙어 있어요⁠. 캐릭터가 없어지면 세션이 붙을 데가 없어요⁠. 길드장 캐릭터를 지우면 채후 님이 나와요⁠. 아마요⁠.⁠”

“⁠아마요⁠.⁠”

석주가 누리의 말을 되풀이했다⁠.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다⁠. 누리는 그게 더 아팠다⁠.

“⁠팀장님⁠. 여덟 해 동안 이 게임에 아마 아닌 게 있었어요⁠? 팀장님이 쓴 문서 다 봤어요⁠. 「⁠성 단위로 옮길 수 있게 한다⁠」 이것도 아마였잖아요⁠. 아마로 넣어 두신 거잖아요⁠. 언젠가 쓸지 몰라서요⁠.⁠”

석주는 몸을 일으켰다⁠. 넥타이 없는 셔츠 깃이 구겨져 있었다⁠. 목에 걸린 열쇠 막대가 흔들렸다⁠.

“⁠한 가지 더 있어요⁠. 성은 회사 자산이에요⁠. 이사회가 매각을 통과시키면 거목 자산이 돼요⁠. 거목 자산을 우리 둘이 개인 서버로 빼내면 그건 이사가 아니라 절도예요⁠. 누리 씨는 고소당하고⁠, 고용 승계 열두 명 명단은 휴지가 돼요⁠. 누리 씨 엄마 생신이 1월 3일이었죠⁠? 생신상 차려 드렸어요⁠?⁠”

누리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펜 글씨는 다 지워졌다⁠. 생신상은 차려 드리지 못했다⁠. 서버실에서 밤을 새웠다⁠.

“⁠그거 지금 왜 물어보세요⁠?⁠”

“⁠누리 씨가 잃을 게 그런 거라서요⁠.⁠”

석주는 서버실을 나갔다⁠. 열쇠 막대는 목에 걸린 채 따라 나갔다⁠. 오른쪽 노트북의 입력 칸에서 커서가 계속 깜박였다⁠.

*

반석주는 열 시 정각에 판교 대표실 옆 회의실 문을 열었다⁠. 긴 탁자에 이사 다섯이 앉아 있었고⁠, 벽 화면에 도세혁과 거목 법무팀 세 사람의 얼굴이 떠 있었다⁠. 대표가 서류를 넘겼다⁠. 회의는 사십 분 만에 끝났다⁠. 삼십 분은 숫자였다⁠. 인수가⁠, 부채⁠, 1월 매출⁠, 고용 승계 명단⁠.

“⁠운영팀 보고⁠.⁠”

대표가 석주를 보았다⁠. 석주는 일어났다⁠.

“⁠1월 9일 자정에 「⁠잿빛 왕관⁠」 서버를 종료합니다⁠. 종료 작업은 운영팀이 맡습니다⁠. 엔진과 학습 자료는 1월 10일 오전 거목게임즈로 넘어갑니다⁠. 종료 전에 이용자 한 분을 안전하게 접속 해제할 계획입니다⁠. 나채후 님입니다⁠.⁠”

“⁠그 방송하는 친구⁠?⁠”

“⁠네⁠. 지금 스무아흐레째 병원에 계십니다⁠.⁠”

이사 하나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회사 법무 담당 이사였다⁠.

“⁠접속 해제가 안 되면⁠?⁠”

“⁠되게 하겠습니다⁠.⁠”

석주는 대답하고 나서 벽 화면의 세혁을 보았다⁠. 세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는 앉기 전에 한마디를 보탰다⁠.

“⁠도세혁 본부장님께 하나 여쭙겠습니다⁠. 거목 시험 서버로 옮겨 간 세르바 원본을 1월 9일 전에 회색달 서버로 돌려받을 수 있는 조항이 계약서에 있습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대표가 석주를 보았다⁠. 세혁은 웃는 얼굴 그대로 짧게 대답했다⁠.

“⁠없어요⁠.⁠”

“⁠감사합니다⁠.⁠”

석주는 앉았다⁠. 대표가 펜을 들었다⁠. 이사 다섯이 차례로 서명했다⁠. 석주는 서명하는 펜 소리를 다섯 번 들었다⁠. 벽 화면 속 세혁도 서명했다⁠. 화면 너머에서 들리는 펜 소리는 조금 늦게 왔다⁠. 「⁠매각 승인 · 1월 9일 24시 ‘⁠잿빛 왕관⁠’ 서비스 종료⁠」

회의가 끝나고 복도에 나오자 대표가 석주의 어깨를 잡았다⁠.

“⁠반 팀장⁠, 고생했어⁠. 열두 명 다 거목 간다⁠. 애 있는 두 사람도⁠. 내가 세혁이한테 따로 부탁했어⁠.⁠”

“⁠감사합니다⁠.⁠”

“⁠아까 그 질문은 왜 했어⁠?⁠”

“⁠궁금해서요⁠.⁠”

대표는 석주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어깨를 놓았다⁠.

*

채후는 저녁 여섯 시에 성문 밖 풀밭으로 나갔다⁠. 성을 나선 것은 왕도에서 돌아온 뒤 처음이었다⁠. 표시가 없으니 나가도 상관없었다⁠. 철창 밖 풀밭에 흰 로브가 떠 있었다⁠. 석주가 부른 것이 아니었다⁠. 채후가 귓속말로 불렀다⁠. 누리가 석주의 운영자 캐릭터에 귓속말을 보내는 법을 알려 주었다⁠.

“⁠오셨네요⁠.⁠”

“⁠부르셨잖아요⁠.⁠”

둘은 삼 주 전 왕도 골목에서 한 말을 그대로 주고받았다⁠. 채후가 먼저 웃었다⁠. 석주는 웃지 않았다⁠. 대신 흰 로브의 발을 내려 풀밭에 디뎠다⁠. 운영자 캐릭터가 땅에 닿는 것을 채후는 두 번째로 보았다⁠.

“⁠누리 씨한테 들었어요⁠. 열쇠 안 주셨다고요⁠.⁠”

“⁠네⁠.⁠”

“⁠성 옮기다 제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네⁠.⁠”

“⁠팀장님⁠. 오늘은 숫자 얘기 하지 마요⁠. 저도 안 할게요⁠. 열둘이랑 쉰이랑⁠, 사억이랑 일억 사천이랑⁠, 십삼만이랑⁠, 다 내려놓고요⁠. 숫자 빼고 남는 거 있으면 그거로 얘기해요⁠.⁠”

석주는 한참 말이 없었다⁠. 바람이 풀밭을 쓸었다⁠. 석주의 흰 로브 자락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운영자 캐릭터에 바람이 닿고 있었다⁠. 땅에 발을 디딘 탓이었다⁠.

“⁠숫자 빼면 나는 겁이 많아요⁠.⁠”

“⁠뭐가요⁠?⁠”

“⁠사람을 하나 더 지우는 거요⁠. 빵집 주인⁠, 약초상⁠, 꼬치 노점⁠, 기사단장⁠. 다 내가 눌렀거나 누르게 했어요⁠. 채후 님은 진짜 몸이 있어요⁠. 채후 님 어머니 손이 채후 님 손톱을 깎아 줘요⁠. 어젯밤에 내가 봤어요⁠. 귤도 얻어먹었어요⁠. 셨어요⁠.⁠”

채후는 눈을 크게 떴다⁠.

“⁠병원에 가셨어요⁠?⁠”

“⁠갔어요⁠. 채후 님 맨얼굴 처음 봤어요⁠. 갈색 머리가 아니더라고요⁠.⁠”

“⁠염색할 돈이 없어서요⁠.⁠”

석주가 처음으로 짧게 웃었다⁠. 채후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금방 꺼졌다⁠.

“⁠1월 9일 밤 열한 시에 길드장 캐릭터를 지울 거예요⁠. 누리 씨 말로는 그러면 채후 님이 나와요⁠. 아마요⁠. 채후 님이 허락하든 안 하든 지워요⁠. 그게 내 마지막 일이에요⁠.⁠”

“⁠제가 나가는 건 제가 정해요⁠.⁠”

“⁠채후 님이 정하게 두면 안 나갈 거잖아요⁠. 성 안에 쉰 명 두고⁠.⁠”

“⁠그럼 그 쉰 명은요⁠? 열한 시에 제가 나가고⁠, 자정에 하늘 닫히면요⁠?⁠”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고 흰 로브의 발을 다시 띄웠다⁠. 바람이 더 이상 닿지 않았다⁠.

“⁠팀장님⁠. 하나만 물어볼게요⁠. 팀장님도 캐릭터 있어요⁠? 운영자 말고요⁠. 그냥 모험가요⁠.⁠”

석주는 사라지기 전에 대답했다⁠.

“⁠있어요⁠. 2019년에 만들었어요⁠. 그해 겨울 이후로 안 들어갔어요⁠.⁠”

*

채후는 밤 아홉 시에 성 마당 짐 더미 앞에 쉰 명을 모았다⁠. 할멈이 솥을 걸고⁠, 대장장이가 모루 위에 앉고⁠, 엘무가 짐 더미 꼭대기에 올라앉았다⁠. 왕도에서 온 마흔둘은 우물가에 둘러앉았다⁠. 채후는 장작더미 위에 올라갔다가 너무 높아서 내려왔다⁠.

“⁠여러분⁠. 모레 밤 열한 시에 운영팀장님이 제 캐릭터를 지운대요⁠. 그러면 저는 바깥으로 나가요⁠. 아마요⁠. 그리고 자정에 하늘이 닫혀요⁠.⁠”

마당이 조용해졌다⁠. 우물 도르래가 바람에 한 번 삐걱였다⁠.

“⁠성을 옮기는 방법은 있어요⁠. 누리 씨가 다 만들어 놨어요⁠. 열쇠가 없어요⁠. 팀장님 목에 걸려 있어요⁠. 저는 그 열쇠를 못 뺏어요⁠. 팀장님은 제가 다칠까 봐 안 준대요⁠. 제가 나간 다음에도 안 줄 거예요⁠. 회사 물건이라서요⁠.⁠”

“⁠그럼 우린⁠?⁠”

대장장이가 물었다⁠. 채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멈이 솥뚜껑을 탁 덮었다⁠.

“⁠먹고 생각해⁠. 생각은 배불러야 돼⁠.⁠”

엘무가 짐 더미 꼭대기에서 손을 들었다⁠.

“⁠길드장님⁠! 길드장님 나가면 방송도 꺼져요⁠?⁠”

“⁠네⁠. 헤드셋이 제 목에 있으니까요⁠.⁠”

“⁠그럼 마지막 방송은 제가 진행할래요⁠. 저 이제 잘해요⁠. 구독과 좋아요 뜻도 알아요⁠. 구독은 계속 보겠다는 거고 좋아요는 좋다는 거래요⁠.⁠”

「⁠엘무 진행 찬성⁠」

「⁠마지막 방송 MC 엘무 ㅋㅋㅋㅋ⁠」

「⁠만 원 후원⁠. 엘무가 진행하면 마지막까지 본다⁠」

채후가 채팅을 전해 주자 엘무는 짐 더미 위에서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손끝에서 불이 켜졌다⁠. 손바닥만 했다⁠. 마당의 쉰 명이 엘무의 불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하늘 시계를 보지 않았다⁠.

대장장이가 모루에서 일어나 채후 앞으로 왔다⁠. 외투 가슴께에 「⁠부길드장⁠」 칭호가 반짝였다⁠.

“⁠길드장⁠. 그 팀장이라는 사람⁠, 성문 앞에서 바람 맞던데⁠.⁠”

“⁠보셨어요⁠?⁠”

“⁠성벽 위에서 봤어⁠. 로브가 흔들렸어⁠. 처음이야⁠. 바람 맞는 사람은 겁이 있는 사람이야⁠. 겁 있는 사람은 열쇠를 아무 데나 안 둬⁠. 목에 걸지⁠.⁠”

“⁠그래서요⁠?⁠”

“⁠그래서 목에서 빼는 날이 오면⁠, 자기 손으로 빼⁠.⁠”

대장장이는 할 말만 하고 솥 앞으로 가서 죽을 펐다⁠. 이번에는 적당히 펐다⁠. 할멈이 국자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

반석주는 밤 열한 시에 판교가 아닌 자기 집 거실 책상에 앉았다⁠. 경기도 용인의 작은 아파트였다⁠. 딸 방에서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내는 소파에서 채후의 방송을 틀어 놓고 잠들어 있었다⁠. 언제부터 아내가 이 방송을 봤는지 석주는 몰랐다⁠. 석주는 아내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 화면 속에서 엘무가 짐 더미 위에 올라앉아 시청자들에게 구독과 좋아요의 뜻을 설명하고 있었다⁠. 틀린 설명이었는데 석주는 고쳐 주고 싶지 않았다⁠.

석주는 회사 노트북이 아니라 오래된 개인 노트북을 열었다⁠. 「⁠잿빛 왕관⁠」 바탕화면 아이콘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실행하자 업데이트가 한참 돌았다⁠. 여덟 해 치 업데이트였다⁠. 기다리는 동안 보리차가 식었다⁠.

로그인 화면이 떴다⁠. 로그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2019년에 석주가 작곡가에게 음악을 주문하면서 바람 소리를 꼭 넣어 달라고 적었다⁠. 노트북 스피커에서 바람 소리가 작게 났다⁠. 아이디를 넣고⁠, 2019년의 비밀번호를 넣었다⁠. 비밀번호는 딸 생일이었다⁠. 한 번에 맞았다⁠. 캐릭터 고르는 화면에 캐릭터 하나가 서 있었다⁠. 초보 옷에 나무 몽둥이⁠, 둥근 얼굴⁠. 머리 위 이름표에 석주가 여덟 해 전 장난으로 지은 이름이 떠 있었다⁠.

「⁠반달곰 · 레벨 12 · 마지막 접속 2019년 12월 31일 · 위치 바람언덕 마을⁠」

석주는 캐릭터 이름을 오래 보다가 시작 단추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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