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00자)
발표회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한빛결
목요일 새벽 네 시, 채후는 하늘이 쇠줄을 긁는 소리를 성벽 위에서 들었다. 흰 선은 바람언덕 성 위로 내려오지 않았다. 성벽 바로 앞 풀밭에서 멈추었다가 비켜 갔다. 성 마당에서 쉰 명이 숨을 죽였다. 엘무가 짐 더미 꼭대기에 올라가 성벽 너머를 보았다. 흰 그물이 언덕 아래 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왕도로 미끄러져 갔다.
“안 들어와요. 길드장님, 안 들어와요.”
엘무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뻐서 떠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들 서쪽을 보고 있었다.
헤드셋에서 알림 목소리가 채팅을 읽었다. 왕도에 접속해 있던 시청자들이 전해 주는 소리였다.
「왕도 광장 지금 하얘짐」
「기사단장 분수대 앞에 그대로 서 있었음. 안 숨음」
「다시 나타남. 두루마리 펴고 탈영 기사 잡아 오래」
「퀘스트 다시 생김」
채후는 성벽 돌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돌은 차가웠다. 기사단장은 마지막 열흘을 자기 입으로 살겠다고 했다. 엿새를 살았다. 두루마리를 반으로 접던 손이, 다시 두루마리를 펴고 있었다.
대장장이가 마당에서 올라와 채후 옆에 앉았다. 대장장이의 외투 가슴께에 「부길드장」 칭호가 새로 수놓여 있었다. 어제 채후가 붙여 주었다. 대장장이는 칭호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이거 무거워. 세르바가 이걸 여덟 해 달고 있었어?”
“네.”
“칼 차는 것보다 무겁네.”
할멈이 마당에서 국자로 솥을 두드렸다. 새벽 다섯 시였다. 할멈은 점검이 끝나면 언제나 밥부터 먹였다.
“부길드장, 내려와서 죽 퍼. 이제 그것도 네 일이다.”
“그게 부길드장 일이에요?”
“세르바가 여덟 해 동안 했어. 너는 몰랐지? 다들 몰랐어.”
대장장이는 채후를 돌아보았다. 채후도 몰랐다. 여덟 해 동안 채후의 화면 속 세르바는 성벽 위를 오가기만 했다. 대장장이는 무거운 칭호를 단 채 성벽 계단을 내려가 국자를 받았다. 왕도에서 온 마흔둘이 그릇을 들고 줄지어 기다렸다. 대장장이는 첫 그릇에 죽을 너무 많이 펐다가 할멈에게 국자로 손등을 맞았다.
「부길드장 인수인계 ㅋㅋㅋ」
*
구보슬은 저녁 여섯 시 반에 성수동 거목게임즈 본사 강당 객석 맨 앞줄 끝자리에 앉았다. 표는 시청자 「퇴사하고싶다」가 보내 주었다. 거목 협력사에 다닌다고 했다. 표와 함께 문자가 왔다. 「아직 퇴사 못 함. 대신 이거」
강당은 어두웠고, 무대 뒤 큰 화면에는 하늘 고래가 천천히 헤엄쳤다. 객석 오백 자리가 꽉 찼다. 기자, 게임 회사 사람들, 사전 예약 추첨으로 온 사람들. 보슬 옆자리의 남자는 엘무 복사본이 그려진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보슬은 응원봉을 보고 숨을 한 번 골랐다. 남자는 보슬의 편의점 조끼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직원분이세요?”
“편의점 직원이요.”
조명이 바뀌고 도세혁이 무대에 올라왔다. 은테 안경, 회색 정장, 웃는 얼굴. 박수가 쏟아졌다.
“여러분, 오늘은 보여 드릴 게 하나뿐이에요. 살아 숨 쉬는 NPC요. 말로만 하던 것을 오늘 생방송으로 보여 드릴게요.”
큰 화면이 바뀌었다. 유리로 된 다리 위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낡은 기사 외투, 뒤로 묶은 검은 머리, 눈썹 끝의 흉터. 외투 가슴께가 비어 있었다. 칭호를 떼어 낸 자리였다. 객석이 술렁였다. 보슬은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찍었다. 손이 떨려 초점이 두 번 나갔다.
세혁이 무대 위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세르바 씨, 인사해 주세요. 하이렐름에 오신 모험가님들께요.”
화면 속 세르바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 고래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세르바는 고래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화면 너머를 보았다. 객석 오백 명을, 객석 너머의 생방송 시청자들을 보는 눈이었다. 채후의 방송에서 처음 칼을 겨누던 날의 눈이었다.
“여기 바람이 안 불어요.”
객석이 조용해졌다. 세혁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세르바 씨, 대본 기억나시죠? 하이렐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바람언덕으로 돌려보내 줘요. 여기는 빵 냄새가 없어요. 다리 밑에 땅이 없어요. 고래는 예뻐요. 그래도 돌려보내 줘요.”
보슬은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았다. 옆자리 남자가 응원봉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객석 여기저기서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다들 찍고 있었다.
세혁은 세르바를 보다가, 객석을 보다가, 천천히 손뼉을 쳤다. 한 번, 두 번. 무대 위에서 혼자 치는 손뼉이 강당 끝까지 울렸다.
“보셨어요? 방금 보신 게 오늘 저희가 보여 드리려던 거예요. 대본을 거부하는 NPC. 원하는 것을 말하는 NPC. 세상에 이런 NPC가 있었나요? 하이렐름에는 있어요.”
객석에서 누군가 손뼉을 따라 쳤다. 이어서 둘, 열, 백. 기자석의 사진기 셔터가 한꺼번에 터졌다. 사람들이 일어났다. 보슬 옆자리 남자도 엉거주춤 일어나 손뼉을 쳤다. 보슬은 일어나지 않았다. 손뼉 소리 속에서 큰 화면 속 세르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이크가 꺼져 있었다. 입 모양만 보였다. 돌려보내 줘요.
*
채후는 저녁 일곱 시 십 분에 성 마당 장작더미 위에서 알림 목소리가 읽는 세르바의 말을 들었다. 발표회 생방송을 보던 시청자들이 세르바의 말을 받아 적어 후원 글로 보냈다. 알림 목소리는 기계라서 세르바의 말을 기계의 목소리로 읽었다. 또박또박, 높낮이 없이.
「오천 원 후원. 부길드장이 한 말 그대로. “여기 바람이 안 불어요.”」
「만 원 후원. “바람언덕으로 돌려보내 줘요. 여기는 빵 냄새가 없어요.”」
「근데 사람들이 박수 침. 거목 대표가 자율 NPC라고 포장함」
「거목 주가 지금 오름」
채후는 쿠션을 귀에 더 바짝 눌렀다. 세르바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들리는 것은 알림 목소리뿐이었다. 채후의 귀는 스무이레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었다. 바람, 우물, 쇠, 눈, 노래. 지금 가장 듣고 싶은 소리 하나만 들리지 않았다.
엘무가 채후 옆에 앉았다. 엘무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서 작은 불이 켜져 있었다. 채후는 작은 불을 보다가,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다가, 헤드셋 마이크를 입에 댔다.
“여러분. 거목 발표회 보고 계신 분들, 거기 댓글로 하나만 써 주세요. 세르바 씨한테 전해지게요. 바람언덕은 문 안 잠갔다고요.”
「쓰러 감」
「발표회 댓글창 지금 바람언덕으로 도배됨」
*
구보슬은 발표회가 끝나고 강당 옆 통로에서 도세혁을 기다렸다. 통로 끝에 직원 전용 문이 있었다. 기자들이 빠져나간 뒤 문이 열리고 세혁이 비서 둘과 걸어 나왔다. 세혁은 보슬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얼굴이었다.
“매니저님. 오셨구나. 어땠어요?”
보슬은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세혁 앞에 내밀었다. 녹화 영상 백 개의 주소가 줄 세워져 있었다. 맨 위의 영상에서 세혁이 바람언덕 마당에 대고 웃고 있었다. 「약속은 지켜요. 다들 녹화하고 계시니까요」
“약속 지키세요.”
“지켰어요. 목요일에 바람언덕 성 규칙 안 풀었어요. 성 안 쉰 명 무사해요. 영상 확인해 보세요.”
“세르바 씨 돌려보내세요.”
“돌려보낸다는 약속은 안 했어요. 그 영상에도 없어요.”
세혁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보슬은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 일주일 전 세혁이 넣어 준 명함이 아직 있었다.
“세르바 씨가 돌려보내 달라고 한 거 들으셨잖아요.”
“들었어요. 그래서 오늘 주가가 십이 퍼센트 올랐어요. 매니저님, 사람들은 원하는 걸 말하는 NPC를 좋아해요. 원하는 걸 들어주는 NPC는 안 좋아해요. 들어주면 끝나니까요. 이야기는 못 가진 데서 계속돼요. 채후 님 방송이 그랬잖아요. 세르바 씨가 끄라고 할 때 제일 많이 봤어요.”
보슬은 대꾸하지 못했다. 세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세 해 동안 채팅창을 관리하면서 보슬이 제일 잘 아는 것이었다. 사람이 몰리는 것은 싸울 때였다.
“세르바 씨는 거기서 뭐 해요? 1월 9일 지나면요.”
“출근해요. 매일.”
세혁은 비서에게서 서류 한 장을 받아 보슬에게 보여 주었다. 「하이렐름 출시 계획 · 세르바 계열 NPC 100종」
“오늘 발표 마지막에 하려다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요. 기자들한테는 지금 문자로 나가요. 세르바 씨 한 분을 바탕으로 백 명의 동료를 만들어요. 복사본은 혼자서는 껍데기였는데, 살아 있는 원본 곁에 두면 배워요. 세르바 씨가 백 명을 가르쳐요. 기사 백 명이요. 다들 세르바 씨처럼 바람을 그리워하겠죠. 사람들이 아주 좋아할 거예요.”
보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누리였다. 문자 한 줄이 떠 있었다.
「기사 떴어요. 세르바 계열 백 명. 팀장님이 기사 보시고 사무실에서 나가셨어요. 어디 가시는지 말 안 하고요」
세혁은 웃으며 보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통로를 걸어 나갔다. 보슬은 통로에 혼자 남아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발표회장 안에서 청소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대 뒤 큰 화면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유리 다리 위에 세르바가 혼자 서 있었다. 하늘 고래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세르바는 이번에도 올려다보지 않았다.
*
반석주는 밤 아홉 시 반에 관악의 대학병원 육 층 다인실 문 앞에서 사원증을 벗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판교에서 택시로 오는 동안 휴대전화를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열면 기사가 있었다. 세르바 계열 백 명.
창가 침대 옆 보호자 의자에 오십 대 여자가 앉아 귤을 까고 있었다. 침대에 나채후가 누워 있었다. 석주는 채후의 얼굴을 맨얼굴로 처음 보았다. 갈색 머리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를 짧게 깎았고, 볼이 꺼져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목이 가늘었다.
“누구세요?”
“회색달 게임즈 반석주입니다. 「잿빛 왕관」 운영팀장이요.”
채후 어머니는 귤을 까던 손을 멈추었다. 석주는 고개를 숙였다. 욕을 듣거나 귤을 맞을 각오를 했다. 채후 어머니는 까던 귤을 마저 까서 반을 갈라 석주에게 내밀었다.
“앉으세요. 서 계시면 내가 불편해.”
석주는 귤을 받아 들고 앉지 않았다. 어머니가 의자를 하나 더 끌어다 주었다. 석주는 그제야 앉았다.
“방송에서 목소리 들었어요. 매일. 흰 옷 입은 사람.”
“네.”
“우리 애 꺼내 줄 수 있어요?”
“1월 9일 전에 꺼내야 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채후의 손을 잡았다. 손톱이 짧게 깎여 있었다.
“꺼내 주고, 거기 사람들도요. 얘가 거기서 처음으로 뭘 붙잡았어. 꺼내도 거기 사람들 없으면 얘는 또 아무것도 안 붙잡을 거예요. 평생.”
석주는 귤 반쪽을 손에 쥔 채 대답하지 못했다. 침대 머리맡 모니터의 초록 선이 고르게 오르내렸다. 석주는 채후의 손을 보았다. 2019년 겨울, 석주가 처음 쓴 퀘스트를 깬 열여섯 살 아이의 손이었다. 기록에 아이디가 남아 있었다. 탈영 기사를 기사단장 앞으로 끌고 온 첫 번째 모험가였다.
석주는 귤을 입에 넣었다. 시었다. 어머니가 웃었다.
“우리 밭 거 아니에요. 병원 매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