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26자)
표본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한빛결
반석주는 화요일 오후 바람언덕 성문 밖 풀밭에 내렸다. 하늘 시계는 「D-5」 풀밭에 서리가 내려 있었다. 운영자 캐릭터의 발은 서리를 밟지 못했다. 철창 너머 마당에서는 짐 더미가 전나무만큼 높아져 있었다. 모루, 냄비, 장작, 담요, 왕도 사람들이 이고 온 보따리. 성째로 간다고 몇 번을 말해도 다들 짐을 쌌다.
채후가 철창 앞으로 나왔다. 며칠 사이 얼굴이 야위어 있었다. 게임 캐릭터의 얼굴이 야윌 리 없었는데, 석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목요일 새벽 네 시에 길드 성 규칙을 풉니다. 제가 풀어요. 이사회가 그렇게 정했어요.”
“알아요. 섣달그믐에 십삼만 명이 같이 들었어요. 팀장님 화상 회의 소리가 누리 씨 노트북에서 새어 나왔대요.”
석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누리였다.
“성 안 쉰 명은요?”
“이상 행동 표시가 있는 사람은 정리됩니다. 쉰 명 중 마흔셋이에요.”
“팀장님. 그 규칙 쓰실 때 뭐라고 쓰셨어요? 성은 플레이어의 집이다. 운영자도 노크하고 들어간다. 이번엔 노크 안 하시게요?”
“노크할게요. 새벽 네 시에요. 채후 님이 열어 주시든 안 열어 주시든 열려요.”
채후가 철창을 쥐었다. 쥔 손이 하얘졌다. 석주는 하얘진 손을 보지 않으려고 성벽 위를 보았다. 성벽 위 망루에서 세르바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은 허리에 있었다. 세르바는 석주가 사라질 때까지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
세르바는 새벽 세 시에 우물가로 나갔다. 바람언덕 사람들이 새벽 세 시마다 모이던 자리였다. 빵집 주인이 지은 노래를 부르던 자리였다. 빵집 주인이 새로 찍힌 뒤로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오늘은 왕도에서 온 사람들이 우물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빨래꾼이 첫 소절을 시작했다. 빵 냄새 나는 언덕에 바람이 분다. 다들 가사를 몰라서 첫 소절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성문 밖에서 종소리가 겹쳐 울렸다. 화음이었다. 세르바는 노래 사이로 일어나 성문으로 걸어갔다. 철창 너머 서리 내린 풀밭에 금빛 로브가 떠 있었다. 성탄 모자는 없었다.
“세르바 씨.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채후 님 주무실 때 뵙고 싶었어요.”
“길드장님이 눈 감으면 바깥 사람들이 못 보죠?”
“역시 빠르시네요.”
세혁은 웃으며 허공에 손을 저었다. 철창 앞에 작은 화면이 떴다. 엘무의 홍보 영상이었다. 하늘 고래, 유리 다리, 손을 흔드는 하얀 손끝의 엘무. 영상 아래로 댓글이 흘렀다. 「눈이 안 웃음」, 「녹음기 같다」, 「원조 엘무는 그을렸는데」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복사본은 실패했어요. 말은 똑같이 하는데 사람들이 알아봐요.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척하는 것은 바깥 사람들이 귀신같이 알아요. 채후 님 방송이 그걸 가르쳐 줬어요. 십삼만 명한테요.”
“그래서요?”
“세르바 씨가 필요해요. 복사본 말고 세르바 씨요. 지금 숨 쉬는 그대로요. 저희 시험 서버로 건너오시면, 내일 저녁 저희 신작 발표회 무대에 서시게 돼요. 생방송이에요. 살아 숨 쉬는 NPC를 세상에 보여 주는 거예요.”
“안 가요.”
“아직 조건을 안 들으셨어요.”
세혁은 철창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은테 안경에 서리가 끼지 않았다. 운영자 캐릭터라서 그랬다.
“이사회 조건 중에 성 안 정리, 그거 제가 넣은 거예요. 제가 뺄 수 있어요. 세르바 씨가 오시면 목요일에 바람언덕 성 규칙은 그대로 둬요. 성 안 쉰 명은 무사하고, 이사를 가든 말든 채후 님 마음대로 하시면 돼요. 세르바 씨 한 사람이 오시면 마흔둘이 살아요. 엘무 씨도요.”
우물가의 노래가 멈추었다. 세르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누군가 첫 소절을 다시 시작했다가 그만두었다.
“가면 저는 어떻게 돼요?”
“발표회 무대에 서시고, 저희 신작에서 사세요. 십 년이요.”
“돌아올 수는요?”
“1월 9일이 지나면 돌아올 데가 없잖아요.”
세혁은 다정하게 말했다. 다정함이 거짓이 아니어서 세르바는 더 싫었다. 세르바는 칼자루를 쥐었다가 놓았다.
“아침에 대답할게요. 길드장님 눈 뜨고 있을 때요.”
“다들 보는 데서요?”
“다들 보는 데서요.”
금빛 로브가 사라진 뒤 세르바는 우물가로 돌아갔다. 왕도 사람들이 자리를 내 주었다. 빨래꾼이 첫 소절을 다시 시작하려다가 세르바를 보고 멈췄다. 세르바는 우물 돌테에 걸터앉아 두레박 줄을 손에 감았다. 그리고 첫 소절 다음을 불렀다. 빵 냄새 나는 언덕에 바람이 분다, 내일도 분다. 문 닫은 성에도 분다, 칼 내린 손에도 분다.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빵집 주인이 여덟 해 동안 새벽마다 부르는 것을 성벽 위에서 듣기만 했던 노래였다. 한 번도 따라 부른 적이 없었다. 가사는 다 외우고 있었다.
빨래꾼이 둘째 줄을 따라 불렀다. 양치기의 딸이, 술집 견습생이 따라 불렀다. 세르바는 끝까지 세 번을 불렀다. 세 번째에는 우물가 사람들이 다 같이 불렀다.
*
채후는 수요일 아침 여섯 시에 세르바가 깨워서 일어났다. 세르바는 채후의 어깨를 흔들지 않았다. 헤드셋을 채후의 귀에 대고 쿠션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알림 목소리가 시청자 수를 읽었다. 「현재 시청자 이만 천 명」 새벽이라 적었다.
“눈 떴죠? 방송 켜 둬요.”
채후는 장작더미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르바가 외투를 입고 칼을 차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었다. 눈썹 흉터가 새벽빛에 하얗게 보였다.
“어디 가요?”
“거목 시험 서버요. 어젯밤 그 사람이 왔어요. 내가 가면 목요일에 성 규칙 안 풀어 준대요. 성 안 사람들 다 무사하대요. 복사본은 실패해서 원본이 필요하대요.”
채후는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휘청했다. 알림 목소리가 쉬지 않고 터졌다. 시청자 수가 숨 몇 번 사이에 오만으로, 칠만으로 뛰었다. 채팅 알림을 받은 사람들이 아침잠을 깨고 들어오고 있었다.
“안 돼요.”
“당신이 정할 일 아니에요.”
“세르바 씨가 늘 그랬잖아요. 끄라고. 보이지 말라고. 숨으라고. 그 사람 무대에 서면 세르바 씨가 제일 싫어하던 게 돼요. 구경거리요.”
“알아요.”
세르바는 마당을 둘러보았다. 짐 더미 옆에서 할멈이 아침 죽을 젓고 있었다. 젓던 국자가 멈춰 있었다. 대장장이는 모루 옆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왕도에서 온 마흔둘은 우물가에서 일어서 있었다. 엘무가 지하 창고 계단 위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길드장님. 처음 만난 날 기억나요? 당신 방송이 나를 팔았다고 했잖아요. 왕도에서요.”
“기억해요.”
“이번엔 내가 팔아요. 내 손으로요. 받을 걸 내가 정했어요. 마흔두 명이랑 일곱 명이요. 그러니까 이번엔 끄지 마요. 내가 가는 거 다들 보게 해요. 다들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약속을 못 바꿔요. 방송이 칼은 못 막아도 손은 막는다면서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채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 주 전, 왕도 골목 앞에서 자기가 한 말이었다. 자기 말을 믿고 골목에 남았고, 골목은 막혔다.
「부길드장 가지 마」
「가야 됨. 마흔두 명 살잖아」
「거목 약속 믿을 수 있음? 녹화해 둠」
「이 대화 전부 녹화 중. 다들 녹화해」
「일 원 후원 · 매니저구보슬 · 녹화 켰어. 백 개 켰어」
세르바가 손을 내밀었다. 채후는 손을 잡았다. 세르바의 손바닥 굳은살이 채후의 장갑을 지나 손가락뼈까지 닿았다. 세르바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다른 손으로 자기 외투 가슴께를 짚었다. 거기 「부길드장」 칭호가 수놓여 있었다. 여덟 해 전 채후가 장난으로 붙여 준 칭호였다.
“이거 떼 줘요.”
“안 떼요.”
“떼야 해요. 나 없는 동안 누가 성문을 지켜요?”
“제가요.”
“당신은 표시가 없어서 안 돼요. 표시 있는 사람이 표시 있는 사람을 지켜야 해요. 대장장이 아저씨한테 줘요.”
채후는 허공에 손을 들었다. 길드원 관리 창은 손을 들자 떴다. 메뉴는 뜨지 않으면서 길드장 창만 떴다. 길드장의 일은 남아 있었다. 채후는 「부길드장 · 세르바」를 눌렀다. 「칭호를 해제하시겠습니까?」 채후의 손가락이 오래 멈췄다. 세르바가 채후의 손가락 위에 자기 손가락을 얹었다. 둘이 같이 눌렀다.
「칭호가 해제되었습니다」
세르바의 외투 가슴께에서 수놓인 글씨가 실밥처럼 풀려 사라졌다. 세르바는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성문 밖에서 종소리가 겹쳐 울렸다. 철창 너머 서리 내린 풀밭에 금빛 로브가 떠 있었다. 세혁은 오늘 채후의 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칠만 명에게 하는 인사였다.
“여러분, 좋은 아침이에요. 약속은 지켜요. 다들 녹화하고 계시니까요.”
세혁이 손을 들었다. 마당 한가운데, 짐 더미와 전나무 사이에 흰 빛 기둥이 내려왔다. 빛기둥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땅에 닿은 채 멈추었다. 빛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르바는 채후의 손을 놓았다. 빛기둥 앞까지 걸어가서, 한 번 돌아보았다. 엘무가 계단에서 뛰어 내려오다가 할멈에게 붙들렸다. 엘무가 소리쳤다.
“누나! 가 보자고! 좋은 말이래요!”
“나쁜 말 같다니까.”
세르바는 웃었다. 채후는 세르바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스무엿새 동안 한 번도 못 보았다. 칠만 명도 처음 보았다.
세르바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빛기둥이 위로 거두어졌다. 마당에는 서리 위에 발자국 둘만 남았다. 채후는 발자국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헤드셋에서 알림 목소리가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칠만 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구보슬은 같은 시각 병원 다인실 창가에서 채후 어머니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휴대전화 화면을 보다가 소리 없이 일어나 침대로 갔다. 잠든 채후의 눈꼬리에서 물이 흘러 귓바퀴로 들어가고 있었다. 스무엿새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귓바퀴를 닦았다. 닦아도 또 흘렀다.
“얘가 꿈속에서 우나 봐.”
“꿈 아니에요, 어머님. 저기서 진짜로 울어요.”
보슬은 휴대전화 녹화 화면을 하나씩 확인했다. 시청자들이 보내 준 녹화 주소가 백 개를 넘었다. 세혁이 마당에서 한 말, 「약속은 지켜요」 백 개의 화면에 똑같이 남아 있었다. 보슬은 주소를 하나도 지우지 않고 고정 글 아래에 줄 세웠다.
*
반석주는 판교 사무실에서 아침 여섯 시 사십 분에 거목의 문서 한 장을 받았다. 「이사회 조건 변경 요청 · 바람언덕 길드 성 독립 구역 규칙 해제 항목 삭제 · 도세혁」 문서는 짧았다. 석주는 출력하지 않고 화면으로만 두 번 읽었다.
누리가 석주의 자리 옆으로 와서 멈췄다. 누리도 방송을 보았다. 둘 다 세르바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팀장님. 목요일에 성 규칙 안 푸셔도 되네요.”
“네.”
“기쁘세요?”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운영 도구의 하늘 시계 설정 화면을 열었다. 2019년에 석주가 처음 만든 화면이 아니었다. 작년 겨울 종료안을 쓰면서 석주가 새로 만든 화면이었다. 숫자 하나가 금빛으로 떠 있었다. 「D-4」 석주는 숫자를 오래 보았다. 고칠 수 있는 숫자였다. 손을 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