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295자)
이삿짐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한빛결
채후는 쉰이라는 숫자를 하루에 백 번쯤 입에 올렸다. 쉰. 길드 정원. 누리의 귓속말을 받은 뒤 나흘 동안 채후는 누리와 밤마다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누리의 말은 늘 짧고 빨랐고 기술 이야기만 나오면 길어졌다. 채후가 알아들은 것은 셋이었다. 성은 통째로 옮길 수 있다. 성 안에 든 길드원만 같이 간다. 옮겨 간 서버를 돌릴 돈과 관리자 열쇠가 있어야 한다.
“열쇠는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돈은 채후 님이 해 주세요.”
“얼마요?”
“작은 서버 한 대에 한 달 천이백이요. 일 년이면 일억 사천 조금 넘어요.”
“일 년 뒤엔요?”
“일 년 뒤엔 일 년 뒤에 생각해요. 지금은 열흘 뒤도 없어요.”
십이월 마지막 날 오후 다섯 시, 채후는 성 마당 한가운데로 나갔다. 성탄 전나무는 아직 그대로였다. 금색 공 몇 개가 비어 있었다. 할멈이 냄비 뚜껑으로 쓰고 있었다.
“여러분, 오늘은 섣달그믐이에요. 오늘 방송 제목 바꿨어요. 「바람언덕 이사비」 이 성을 통째로 다른 서버로 옮길 거예요.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같이 가요. 하늘 시계 없는 데로요. 복사가 아니고 이사예요. 일 년 서버비가 일억 사천이에요.”
알림 목소리가 쉬지 않고 터졌다.
「만 원 후원. 이사 축하. 짐은 귀리죽만 챙겨」
「오만 원 후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바람언덕」
「천 원 후원. 학생이라 천 원. 엘무 불 켜져라」
「십만 원 후원. 퇴사하고싶다. 아직 퇴사 못 함. 대신 이거」
보슬이 띄워 둔 목표 막대가 차오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채후에게는 알림 목소리만 들렸다. 쉬지 않는 목소리가 채후에게는 막대였다. 엘무가 전나무 아래에서 손을 내밀었다. 불티가 튀었다. 꺼지지 않았다. 아주 작게, 손톱만 하게 붙어 있었다.
“켜졌어요. 조금이요.”
「엘무 불 돌아옴ㅠㅠㅠ」
「복사본은 이거 못 함」
대장장이는 이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모루를 끌어안고 마당으로 나왔다. 사람 몸통만 한 쇳덩이였다. 대장장이가 모루를 마당 한가운데 내려놓자 땅이 쿵 울렸다.
“이거부터 싸. 이거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저씨, 성째로 가요. 성 안에 있는 건 다 같이 가요. 안 싸도 돼요.”
“성째로 가는 거면, 성은 누가 들고 가?”
채후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 할멈이 냄비를 세 개 겹쳐 들고 나와 모루 옆에 내려놓았다. 엘무는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나왔다. 셋이 마당 한가운데 짐을 쌓기 시작했다. 채후는 말리지 않았다. 짐 더미가 전나무 옆에서 조금씩 높아졌다.
「성째로 가는데 짐 싸는 거 ㅋㅋㅋㅋ」
「우리 할머니도 이사 때 저랬음」
*
세르바는 성문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로 사람들이 오는 것을 알았다. 저녁 일곱 시였다. 철창 너머 언덕길에 횃불이 하나둘 켜졌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새로 찍힌 빵집 주인 말고, 빵집 옆 방앗간 부부와 우물지기와 양치기. 뒤이어 왕도에서 이틀을 걸어온 사람들이 이어졌다. 빨래꾼, 종지기, 술집 주인. 다들 짐 보따리를 하나씩 이고 있었다. 줄은 언덕을 내려가 마을 어귀까지 이어졌다.
“바깥 사람들이 그러는데, 성에 들면 이사 간다면서요.”
맨 앞의 방앗간 아낙이 철창을 붙잡고 말했다. 세르바는 줄 끝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채후가 성벽에서 내려와 세르바 옆으로 왔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거칠었다.
“몇 명이에요?”
“삼백은 넘어요. 더 와요.”
“자리가 마흔둘이에요. 시청자분들이 들어와 있는 자리요.”
채후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당에는 새 길드원 마흔둘이 서 있었다. 바깥 사람들이었다. 칼바람과 싸운 사람들, 성문 경첩을 받쳐 준 사람들, 밤새 접속을 켜 두고 반투명하게 잠든 사람들. 채후가 입을 열기 전에 「국자는무기다」의 머리 위에 말풍선이 떴다.
「길드 탈퇴할게요. 자리 쓰세요」
빛기둥 하나가 마당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국자는무기다」가 사라졌다. 이어서 「엄마몰래접속」의 말풍선. 「저도요. 이사 잘 가요」 빛기둥. 「칼바람구독취소함」 「퇴사하고싶다」 빛기둥이 하나씩, 둘씩, 마당에서 하늘로 솟았다. 채후는 빛기둥을 셀 때마다 고개가 조금씩 들렸다. 마흔두 번째 빛기둥이 올라갔을 때 마당에는 용병 일곱과 채후만 남아 있었다.
「다들 나감 ㅠㅠ 멋있다」
「우린 밖에서 보면 됨」
마당이 넓어졌다. 세르바는 넓어진 마당을 보았다. 칼바람과 싸우던 날 이 마당이 좁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넓었다.
“자, 이제 고르세요.”
세르바가 말했다. 채후가 세르바를 보았다.
“제가요?”
“길드장이잖아요. 가입 허락 단추는 당신 손에만 있어요. 삼백 명 중에 마흔둘. 고르세요. 방송 켜 놓고. 다들 보는 데서.”
“세르바 씨가 같이 골라 주면…”
“싫어요. 여덟 해 동안 당신은 아무도 안 붙잡았다면서요. 이번엔 붙잡는다면서요. 붙잡으려면 손을 놔야 하는 사람도 생겨요. 그걸 내가 대신 해 줄 수는 없어요.”
채후는 철창 앞으로 걸어갔다. 방앗간 아낙이 채후의 장갑을 잡았다. 아낙의 손바닥에 밀가루 냄새가 났다. 아낙 뒤에서 종지기가 모자를 벗었다. 술집 주인이 맥주통을 굴려 왔다. 줄에 선 얼굴들이 전부 채후를 보았다. 십삼만 명의 화면도 같은 얼굴들을 보았다.
채후는 허락 단추를 누르지 못했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지금 채후 선수, 아무것도 못 합니다.”
채후의 목소리가 마당에 작게 울렸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
구보슬은 밤 여덟 시에 병원 휴게실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매니저 화면을 세 개 동시에 띄웠다. 하나는 채팅창, 하나는 후원 내역, 하나는 변누리와의 문자창이었다. 판교역 정류장에서 번호를 주고받은 뒤로 누리는 하루에 문자를 서른 통씩 보냈다. 절반은 기술 이야기였고 절반은 사과였다.
「서버는 제 이름으로 빌릴게요. 회사 거 아니고 개인 계약이요. 후원금이 보슬 님 통장으로 들어오면 제가 영수증 다 드릴게요」
「영수증은 됐고 누리 씨 그거 들키면 잘려요?」
「잘리기 전에 회사가 팔려요ㅎㅎ」
「ㅎㅎ 붙이지 마요 안 웃겨요」
보슬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자판기 율무차를 뽑았다. 이번에는 원래 율무차를 누르려고 했다. 편의점 사장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보슬아 우리 가게 이름으로 오만 원 넣었다. 컵라면 광고 좀 해 줘」 보슬은 후원 내역에서 「동네편의점사장」을 찾아 고정 글에 올렸다. 「후원 감사합니다. 신림동 골목 편의점 컵라면 맛있습니다」 채팅이 「ㅋㅋㅋ 광고 들어옴」으로 넘쳤다.
다인실로 돌아가자 채후 어머니가 채후의 손을 잡고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아들이 철창을 쥔 채 허공에 손가락을 들고 굳어 있었다. 어머니는 귤을 까지 않았다. 귤 껍질 봉지가 오늘은 비어 있었다.
“우리 애가 저렇게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처음 봐.”
“늘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방송만 하고.”
“안 하는 거랑 못 하는 거는 달라.”
어머니가 채후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었다. 굳어 있던 손가락이 어머니 손에서 하나씩 풀렸다. 보슬은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의 채후는 아직 굳어 있었다. 보슬은 일 원 후원 단추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이번에는 누르지 않았다.
*
기사단장은 밤 아홉 시에 줄 맨 끝에서 걸어 올라왔다. 검은 망토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줄에 선 사람들이 기사단장을 보고 길을 비켜 주었다. 기사단장은 줄 맨 앞까지 와서 철창 앞에 멈췄다.
“바람언덕 길드장.”
“단장님도 오셨어요?”
“나는 들어가지 않소.”
기사단장이 철창 너머 채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채후가 철창에 손을 얹었다.
“단장님은 이상 행동 표시가 떠 있어요. 사면하신 날부터요. 목요일에 성 밖에 있으면…”
“알고 있소. 여덟 해 동안 남의 입으로 살았소. 마지막 열흘은 내 입으로 살겠소. 그 입으로 하나 하리다.”
기사단장은 몸을 돌려 줄을 마주 보았다. 은빛 수염이 횃불에 붉게 물들었다.
“왕도와 마을 사람들. 길드장을 괴롭히지 마시오. 고르는 것은 우리가 하오. 저 사람은 바깥에서 온 사람이오. 우리를 다 모르오. 우리끼리는 다 아오. 누가 아프고, 누가 아직 노래를 부를 줄 알고, 누가 내일을 더 오래 보고 싶어 하는지.”
줄이 조용해졌다. 횃불 타는 소리만 들렸다. 방앗간 아낙이 철창에서 손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낙의 남편이 고개를 저었다. 아낙이 남편의 손을 잡았다. 둘은 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는 방앗간 두고 못 가요. 방아는 성에 안 들어가잖아.”
종지기가 모자를 다시 썼다.
“종탑 계단 이백 칸, 내가 안 오르면 누가 오르나.”
채후는 철창을 쥐고 서 있었다. 줄에서 한 사람씩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사람들이 줄에 남은 사람들 등을 밀었다. 젊은 빨래꾼 여자, 술집에서 일하던 견습생, 기침을 하는 양치기의 갓 스물 된 딸. 양치기는 딸의 보따리를 고쳐 매 주고 줄 밖으로 나왔다.
「아 진짜 눈물 남」
「채후 손 대신 단장이 고르네」
「삼천 원 후원. 이게 맞냐 채후야. 이게 맞냐」
채후는 마지막 후원 글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맞는지 몰랐다. 맞는지 모르는 채로 허락 단추를 눌렀다. 한 번, 두 번, 마흔두 번. 빛기둥이 마당에 떨어질 때마다 줄 밖의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세르바는 채후 옆에서 마흔두 번을 끝까지 다 보았다. 다 보고 나서야 채후의 등에 손을 얹었다.
“잘했어요.”
“단장님이 했어요.”
“단추는 당신이 눌렀어요.”
마지막 빛기둥이 걷혔을 때 기사단장은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줄 밖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뒤를 따랐다. 열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하늘 시계 옆에 새해 불꽃이 터졌다. 「2028」 이벤트 불꽃이었다. 성 안의 쉰 명이 불꽃을 올려다보았고, 성 밖의 이백몇십 명도 똑같이 올려다보았다.
「알림 · 바람언덕 이사비 목표 달성 · 일억 사천」
채후는 알림을 들으면서도 웃지 못했다.
*
반석주는 섣달그믐 밤 열한 시 오십 분에 회색달 대표실 화상 회의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이사 다섯과 거목 측 도세혁의 얼굴이 작은 네모 안에 떠 있었다. 회의는 십 분이면 끝난다고 했다. 정말로 십 분 만에 끝났다.
“1월 6일 목요일 마지막 정기 점검에서 이상 행동 표시 NPC 전부를 초기화한다. 길드 성 독립 구역 규칙은 운영자 권한으로 해제한다. 반대 있으십니까?”
대표가 물었다. 네모 안의 얼굴들이 고개를 저었다. 세혁은 웃고 있었다. 화면 구석에 석주의 얼굴이 작게 비쳤다. 석주는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았다.
“반 팀장, 운영팀 의견은?”
석주는 보온병을 쥐었다. 뚜껑을 열지 않았다. 창밖 판교 하늘에서 진짜 새해 불꽃이 하나 터졌다. 소리가 늦게 왔다.
“바람언덕 성 안에 쉰 명이 들어갔습니다. 방금요. 십삼만 명이 봤어요.”
“그러니까 하는 거예요. 반 팀장님.”
세혁이 다정하게 말했다. 대표가 서류에 펜을 대며 마지막 말을 했다.
“반 팀장이 직접 해. 규칙 쓴 사람이 푸는 게 깔끔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