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17자)
똑같은 말
천하제일 군사, 회귀해서 판을 다시 짠다 · 정이한
노옹은 비가 오는 날이면 창가 자리를 비워 두었다. 처마 끝 기와 하나가 깨져서 빗물이 그 자리 바둑판 한가운데로 떨어졌고, 손님들은 거기 앉았다가 젖은 돌을 집고 나서야 투덜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노옹은 그 기와를 서른 해 동안 고치지 않았다. 판 가운데 떨어지는 물소리가 자기 집 시계 같다고 여겼다.
사흘째 되는 날 오후,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가볍고 고른 발소리였다. 노옹은 그 소리만 듣고도 올라오는 사람이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알았다. 숨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은 계단을 오를 때 발뒤꿈치 소리를 내지 않는다.
문간에 하얀 장포를 입은 사내가 젖은 우산을 접으며 서 있었다. 허리에 청색 띠를 맸고, 띠 끝에 무림맹의 은 장식이 달려 있었다. 노옹은 그 띠를 서른 해 전에 매어 본 적이 있었다. 같은 은 장식이었다. 그때 그는 맹 군사부의 말단이었고, 어느 겨울 한 판의 작전으로 산 아래 마을 하나를 불태운 뒤 띠를 풀었다.
“위 공을 뵈러 왔습니다.”
“저기 있소.” 노옹이 턱으로 가리켰다.
위서는 안쪽 판 앞에 앉아 있었다. 옆구리에 붙인 고약 때문에 몸이 조금 기울어 있었고, 판 위에는 돌 대신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손님을 기다리던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노옹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자는 오늘 누가 올지 알고 있었다.
하후정이 맞은편에 앉으려 하자 위서가 말했다. “거기 말고 이쪽에 앉으시오.”
하후정은 웃으며 위서가 가리킨 창가 자리에 앉았다. 곧 빗물 한 방울이 그의 하얀 장포 어깨에 떨어졌다.
담우가 구석 판에서 고개를 들고 입을 틀어막았다. 노옹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제자의 심보가 고약해진 것은 확실했다.
*
“물이 떨어지는군요.” 하후정이 어깨를 보며 말했다.
“그 자리는 원래 그렇소. 판 가운데 물이 떨어지면 수를 서두르게 되지. 서두르는 사람이 이 자리에서 늘 집니다.”
“그럼 오늘은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하후정은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빗방울이 사이를 두고 그의 어깨와 판 위에 번갈아 떨어졌고, 그는 그때마다 소매로 판을 닦았다. 위서는 흑을 쥐었다.
지난 생의 이 대국을 위서는 한 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스물다섯의 위서는 하후정을 이기려고 처음부터 판을 크게 벌렸고, 하후정은 그 벌어진 판을 조용히 따라오다가 끝내기에서 세 집을 졌다. 그러고는 돌을 거두며 이렇게 말했다. 바둑판이 좁아 보이는 분은 처음 봅니다, 맹 군사부 시험에 추천하겠습니다. 위서는 그 말에 들떠서 무한으로 갔다. 하후정의 추천으로 들어간 사람은 끝까지 하후정의 사람으로 보였고, 정원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갔다.
이번에는 판을 벌리지 않았다. 위서는 귀부터 단단히 지키고, 변으로 천천히 기어 나갔다. 마흔다섯의 바둑이었다. 지지 않는 바둑,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먼저 보는 바둑이었다.
하후정의 손이 열다섯째 수에서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위서가 다음에 둘 자리를 먼저 막았다.
위서는 돌을 쥔 채 판을 보았다. 우연일 수 있었다. 좋은 수는 누구에게나 보인다. 그는 다른 쪽 귀로 손을 옮겨 지난 생에 마흔 줄에야 쓰던 수를 두었다. 상대의 돌을 일부러 살려 주고 그 바깥을 두껍게 감싸는 수였다. 젊은 사람들은 그 수를 보면 손해라고 웃었다.
하후정은 웃지 않았다. 그는 살려 준 돌을 움직이지 않고, 두껍게 감싼 바깥의 약한 이음매에 한 점을 놓았다. 마흔다섯의 위서가 그 수를 두었을 때, 스무 해 동안 그 이음매를 찌른 사람은 하후정 하나뿐이었다.
구석에서 담우가 속삭였다. “서야, 저 사람 너보다 잘 두는 거 아냐? 나 저 사람한테 국수 걸어도 돼?”
“조용히 하게.”
“걸었다. 노옹 어르신, 제가 저분한테 국수 한 그릇 걸었습니다.”
노옹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후정이 돌 하나를 손끝으로 굴리며 물었다. “그날 별원에서 소가주께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칼등을 맞으셨습니까? 소가주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칼을 뽑는 분은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혼례를 축하했소.”
“축하를 받고 칼을 뽑았다면 말씀이 꽤 독특하셨나 봅니다.”
“늙은이 말이 원래 귀에 거슬리지.”
“위 공께서 자꾸 늙었다고 하시니, 제가 다 머쓱합니다. 저는 서른여덟인데도 아직 젊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하후정이 웃으며 돌을 놓았다. 그 돌은 판 왼쪽 아래, 아무도 다투지 않던 빈 자리에 떨어졌다. 당장은 아무 뜻이 없어 보이는 수였다. 위서는 그 돌을 오래 보았다. 스무 수쯤 지나면 그 자리가 판의 허리를 끊는다. 지난 생의 하후정은 그 수를 쉰 살이 다 되어서야 두었다. 지금 앞에 앉은 서른여덟의 사내가 그것을 두고 있었다.
“남궁세가 혼례에는 맹에서도 축하 사절이 갑니다.” 하후정이 말했다. “혼례 날에는 저도 가게 되겠지요. 위 공도 오십니까?”
“초대를 못 받았소.”
“제가 자리를 하나 마련해 드리지요. 맹 군사부에 추천할 분이라면 그 정도는 해 드려야 합니다.”
위서는 대답 대신 판 왼쪽 아래, 하후정이 놓은 빈자리 돌 옆에 흑을 하나 붙였다. 하후정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빗물이 또 떨어졌고, 하후정이 또 소매로 닦았다. 판은 백이 조금 좋아졌다가, 흑이 조금 좋아졌다가, 끝내 한 집 차이로 흘러갔다. 위서는 마지막 끝내기에서 반 집을 더 받아 냈다.
“한 집 반, 흑이 이겼소.”
하후정이 돌을 통에 넣었다. 하나씩, 천천히, 판을 거꾸로 되짚듯이 넣었다. 마지막 백돌을 통에 넣고 나서 그는 위서를 보았다.
“바둑판이 좁아 보이는 분은 처음 봅니다.”
위서의 손등에 소름이 돋았다. 말투도, 끊는 자리도, 숨을 쉬는 곳도 같았다.
“맹 군사부 시험에 추천하겠습니다. 올가을에 정원을 한 자리 새로 뽑습니다.”
하후정이 소매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판 위에 놓았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푸른 옥에 군사부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추천받은 사람이 시험장 문을 지날 때 내보이는 패였다.
“지난번엔 세 집이었는데.” 위서가 말했다.
하후정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지난번이요?”
“말이 헛나왔소. 나이를 먹으니 말이 자꾸 새는구먼.”
“위 공은 저보다 열세 살이나 어리신데요.”
하후정은 웃으며 일어섰다. 어깨가 젖어 장포가 진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노옹에게 고개를 숙이고, 담우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담우가 엉거주춤 일어나 같이 숙였다.
“국수는 제가 사야 하겠지만, 오늘은 맹의 일이 있어서. 다음에 갚겠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는 올라올 때와 똑같이 가볍고 고르게 이어졌다.
*
노옹이 창가로 와서 하후정이 앉았던 자리를 보았다. 판 위에 빗물이 고여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그 물을 손바닥으로 닦지 않았다.
“저 사람은 판을 안 봤다.”
“보던데요.”
“판은 손이 봤지. 눈은 너를 봤어. 네가 다음에 뭘 할지가 아니라, 네가 뭘 아는지를 보더라.”
위서는 옥패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차가웠다. 노옹이 옆자리에 앉았다. 무릎이 소리를 내며 접혔다.
“나도 저 띠를 맸었다. 서른 해 전에.”
위서가 고개를 들었다. 지난 생에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지난 생의 스물다섯은 이 방에서 제 할 말만 하고 떠났다.
“군사부 말단이었다. 겨울에 마교 쪽 산 아래 마을 하나를 치는 판을 짰지. 그 마을에 마교 무사가 숨어 있다는 말이 있었다. 판은 잘 짜였고, 불은 잘 붙었다. 무사는 없었어. 재 속에서 나온 건 다 마을 사람이었다.”
노옹은 손가락으로 판 위의 물을 찍어 나무 테두리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그날 띠를 풀었다. 판을 잘 짜는 사람이 판 밖에서 제일 많이 죽인다. 너는 나보다 판을 잘 짠다.”
“그래서 가야 합니다. 저 사람이 짜는 판보다 먼저 짜려면.”
“먼저 짜면 먼저 죽인다.”
두 사람 사이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옹이 지난 생의 스무 해를 모르듯, 위서는 노옹이 태운 마을의 이름을 몰랐다. 두 사람이 아는 것은 서로 겹치지 않았고, 겹치지 않는 채로 둘 다 옳았다.
“짐 싸라.” 노옹이 일어섰다. “내일 아침에 나가.”
“스승님.”
“스승은 내일 아침까지다.”
*
그날 밤 위서는 이층 구석에서 보따리를 쌌다. 옷 두 벌, 바둑돌 주머니, 고약 남은 것, 그리고 하후정의 옥패였다. 짐이 너무 적어서 보따리가 자꾸 풀렸다. 담우가 옆에서 거들다가 자기 옷 한 벌을 슬쩍 넣었다.
“그건 뭔가?”
“내 거. 나도 갈 거야.”
“자네는 빚이 있잖나.”
“그러니까 가지. 빚쟁이는 소주에 있고, 나는 무한에 있으면 빚이 없는 거랑 같잖아.”
“그런 셈법은 어디서 배웠나?”
“너한테.”
위서는 웃다가 옆구리를 붙잡았다. 그때 아래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 주러 내려간 담우가 계단 중간에서 굳은 채 올라오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뒤로 남궁린이 올라왔다. 밤길을 서둘러 왔는지 장포 자락에 진흙이 튀어 있었고, 손에는 검 대신 작은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술병을 판 위에 내려놓았다. 병 입구를 막은 붉은 밀랍에 「취선방」이라는 세 글자가 찍혀 있었다.
“왔다. 오늘 해 질 무렵에.”
“왼손 새끼손가락은?”
“없더라. 값은 시세의 반이었고. 처음엔 우리 집사가 반겼지. 나는 그놈 손을 봤다.” 남궁린은 위서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알았냐?”
“그 사람은 어디 있소?”
“돌려보냈다. 잡아 둘 명분이 없었어. 싼 술 판 게 죄는 아니니까.” 남궁린은 술병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집사가 맛보겠다는 걸 내가 말렸다. 이건 가져왔다. 열어 보지 않았다.”
위서는 술병을 들어 등잔에 비춰 보았다. 병은 두꺼운 흙 병이라 안이 보이지 않았다. 손에 닿는 무게는 보통 술 한 병과 같았다. 지난 생에 이 병과 같은 병이 혼례상에 스무 개 올랐다. 그는 술병을 내려놓았다.
“혼례는?”
남궁린이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화가 난 사람이 아니라 지친 사람의 숨이었다.
“미룬다. 아버지께는 길일을 다시 받았다고 말씀드릴 거다. 장인 될 분께도, 소혜에게도.”
“잘하셨소.”
“칭찬 듣자고 온 거 아니다.” 남궁린이 판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노옹이 하후정을 앉혔던 그 창가 자리였다. 비는 그쳐 있었다. “네 말대로 미뤘으니, 이제 네가 끝까지 대라. 그 술에 뭐가 들었고, 누가 넣었고, 왜 우리 집이냐. 하나라도 틀리면 손가락이 아니라 그 혀를 받는다.”
위서는 하후정의 옥패를 보따리에서 꺼내 판 위, 술병 옆에 나란히 놓았다. 푸른 옥과 붉은 밀랍이 등잔불 아래 나란히 빛났다.
“그럼 무한 가는 길은 조금 미뤄야겠구먼.”
계단 아래에서 노옹의 기침 소리가 났다.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