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679자)

끝집러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1월 29일 일요일 밤⁠, 지혜가 끝집러 쪽지함으로 하늘하늘에게 쪽지를 보냈다⁠. 「⁠6월 27일 목격담 쓰신 분께⁠. 법률 상담 중인 일 때문에 사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변호사 안지혜⁠」⁠. 답은 사십 분 만에 왔다⁠. 지혜가 캡처해서 나에게 보냈다⁠.

「⁠변호사님은 안 만나요⁠. 무서워요⁠」

「⁠근데 배경 언니가 나오면 만날게요⁠」

「⁠언니가 그린 빨래방 유리문 반사 진짜 좋아해요⁠」

「⁠합정 2층 카페 화요일 4시⁠. 언니 혼자요⁠」

지혜는 캡처 밑에 한 줄을 붙였다⁠. 「⁠혼자 가⁠. 녹음은 해도 돼⁠. 네가 대화하는 사람이면 불법 아니야⁠. 대신 시작할 때 녹음한다고 말해⁠. 그리고 아무것도 약속하지 마⁠.⁠」

12월 1일 화요일 오후 세 시 오십 분⁠, 합정역 7번 출구 앞 2층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작업실 건물이 길 건너에 보였다⁠. 10층 창에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휴재 나흘째였다⁠. 은비는 오늘도 출근해서 지난 회 컷 수정을 한다고 했다⁠. 수정할 회차가 마흔한 컷만큼 있었다⁠.

네 시 이 분⁠, 계단을 올라온 여자아이가 카페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내 앞으로 왔다⁠. 노란 니트 비니⁠, 커다란 안경⁠, 손톱 열 개에 빨간 수박 네일⁠. 백팩에 「⁠골목 끝 집⁠」 공식 굿즈 열쇠고리가 세 개 달려 있었다⁠. 감나무⁠, 빨래방⁠, 가로등⁠.

“⁠배경 언니 맞죠⁠? 후드 보고 알았어요⁠. 저 이하늘이에요⁠. 스무 살이에요⁠. 하늘하늘이요⁠.⁠”

“⁠윤예원이야⁠. 시작하기 전에 말할게⁠. 녹음해도 돼⁠? 변호사가 말하고 하라고 했어⁠.⁠”

하늘은 의자에 앉지 않고 내 휴대전화를 오래 보았다⁠.

“⁠녹음하면 저 경찰서 가요⁠?⁠”

“⁠아니⁠. 네가 싫다고 하면 안 해⁠.⁠”

“⁠그럼 하지 마세요⁠.⁠”

나는 녹음 앱을 닫고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하늘은 녹음 앱이 닫힌 것을 보고 나서야 앉아서 메뉴판을 펴지도 않고 수박주스를 시켰다⁠. 12월에 수박주스를 파는 카페는 합정에서 여기 하나뿐이라고 했다⁠. 하늘이 비니를 벗자 정전기로 머리가 부풀었다⁠.

*

“⁠언니가 그린 1회 첫 컷 있잖아요⁠. 감나무 두 그루⁠. 그거 보고 이 웹툰 처음부터 다 봤어요⁠. 배경이 진짜 있는 골목 같았어요⁠. 소실점이 하나로 딱 모이고⁠, 전봇대가 박자 맞춰 서 있고⁠. 저 시각디자인과 1학년인데요⁠, 과제로 언니 골목 따라 그려서 에이 받았어요⁠.⁠”

“⁠고마워⁠.⁠”

“⁠출근남도 좋았어요⁠. 걸음이요⁠. 오른발이 이렇게⁠.⁠”

하늘은 테이블 밑에서 운동화 신은 오른발을 바깥으로 돌려 보였다⁠. 십오 도였다⁠. 나는 하늘의 발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6월 27일 사진 얘기 해 줄래⁠?⁠”

하늘은 빨대로 수박주스를 젓기만 했다⁠. 얼음이 컵 벽에 부딪쳤다⁠.

“⁠그거보다 먼저 말할 게 있어요⁠. 3월에요⁠.⁠”

하늘은 휴대전화 사진첩을 열어 테이블 위로 밀었다⁠. 2026년 3월 12일 오전 여덟 시 십삼 분⁠. 감나무 담장 앞⁠, 남색 정장⁠, 짧은 검은 머리⁠, 어깨에 멘 검은 서류 가방⁠. 놀라서 돌아본 얼굴이 정면으로 찍혀 있었다⁠. 회사 게시판 한마디에 「⁠실물 박제⁠」라는 제목으로 올라갔던 사진이었다⁠. 지혜가 기록 복사본에서 보여 준 적이 있었다⁠.

“⁠이거 제가 찍었어요⁠. 친구 둘이랑 성지순례 간 날이요⁠. 아침 여덟 시에 감나무 담장 앞에서 기다렸어요⁠. 웹툰이랑 똑같이 여덟 시 십이 분에 지나가서 소리 질렀어요⁠. 출근남이다⁠. 근데 그 아저씨가 돌아봤어요⁠. 얼굴이 하얬어요⁠. 그래서 찍었어요⁠. 찍으면 안 되는 얼굴이었는데⁠.⁠”

하늘은 사진을 다시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따라갔어요⁠. 망원역까지요⁠. 지하철도 같이 탔어요⁠. 같은 칸에⁠. 두 정거장이요⁠. 상수역에서 아저씨가 내리더니 플랫폼에서 우리를 돌아봤어요⁠. 회사 가는 길도 아니었을 텐데 거기서 내려서 우리가 탄 열차가 떠날 때까지 서 있었어요⁠. 우리가 따라 내릴까 봐요⁠. 친구들은 웃었어요⁠. 저는 그때 처음 무서웠어요⁠. 사람 얼굴이 그렇게 하얘지는 거 처음 봤어요⁠.⁠”

“⁠사진은 네가 올렸어⁠?⁠”

“⁠끝집러에만요⁠. 그게 퍼져서 회사 게시판까지 간 거예요⁠. 그 회사 다니는 끝집러가 있었대요⁠. 저 그거 알고 일주일 동안 잠 못 잤어요⁠.⁠”

카페 스피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하늘의 수박 네일이 빨대를 꽉 쥐었다⁠.

“⁠그래서 6월에 밤에 간 거예요⁠. 미안해서요⁠. 출근남이 웹툰에서 없어졌으니까 진짜로 이사 갔나 보려고요⁠. 근데 가로등 밑에 사람이 서 있었어요⁠. 언니 창을 보고 있었어요⁠. 웹툰이랑 똑같았어요⁠. 편의점 앞에서 한 장 찍고 도망갔어요⁠.⁠”

“⁠발 봤어⁠?⁠”

“⁠네⁠. 그래서 댓글에 출근남 아니냐고 답했어요⁠. 저는 그 걸음을 알아요⁠. 두 정거장 동안 계속 봤으니까요⁠.⁠”

“⁠하늘아⁠. 그 사진이랑 네가 본 거⁠, 경찰서에서 말해 줄 수 있어⁠? 나중에 법정에서도⁠.⁠”

하늘은 빨대를 놓았다⁠. 안경 너머 눈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싫어요⁠.⁠”

“⁠왜⁠?⁠”

“⁠저도 따라간 사람이잖아요⁠. 언니처럼요⁠. 법정 가서 가로등남 봤다고 말하면 판사님이 물어볼 거잖아요⁠. 거기 왜 갔냐고⁠. 그럼 3월 얘기 해야 하잖아요⁠. 사진 찍고 지하철 같이 탄 거⁠. 그럼 저도 스토커예요⁠. 우리 엄마는 제가 끝집러 하는 것도 몰라요⁠.⁠”

“⁠한 번이면 스토킹 아니야⁠. 지혜가 그랬어⁠. 되풀이돼야 한다고⁠.⁠”

“⁠한 번이라도 그 아저씨 얼굴은 하얬어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하늘의 말은 지혜보다 정확했다⁠. 테이블 밑에서 하늘이 운동화 끝을 안으로 모았다⁠.

“⁠언니⁠. 저 언니 그림 때문에 간 거예요⁠. 언니가 출근남을 너무 잘 그려서요⁠. 진짜 있는 사람 같아서⁠. 진짜 있는 사람이었잖아요⁠.⁠”

캐럴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기까지 이 초쯤 조용했다⁠. 나는 컵을 쥐었다⁠. 내 아메리카노는 처음부터 손대지 않아 식어 있었다⁠. 마흔한 컷⁠. 성지순례⁠. 상수역 승강장⁠. 하얀 얼굴⁠. 내가 창가에서 아침마다 그린 선이 3월에 스무 살 셋을 감나무 담장 앞으로 데려갔다⁠.

“⁠사진은 지우지 마⁠. 부탁이야⁠. 증언 안 해도 돼⁠. 지우지만 마⁠.⁠”

하늘은 비니를 다시 썼다⁠. 일어나면서 휴대전화를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았다⁠.

“⁠원본은 안 지울게요⁠. 게시판 글은 오늘 밤에 내려요⁠. 엄마가 볼까 봐요⁠. 그리고 언니⁠.⁠”

“⁠응⁠.⁠”

“⁠가로등남 무서웠죠⁠? 웹툰으로 볼 때는 멋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무서웠어요⁠. 언니는 그걸 매일 창에서 봤잖아요⁠.⁠”

하늘은 계단을 내려갔다⁠. 열쇠고리 세 개가 백팩에서 짤랑거렸다⁠. 감나무⁠, 빨래방⁠, 가로등⁠.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하늘은 합정역 7번 출구 앞에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계산을 마치고 카페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길을 건너 작업실로 올라갔다⁠. 오후 다섯 시 십오 분⁠, 수박밭에는 은비 혼자였다⁠. 작가님은 툰다락 본사에 불려 갔다고 했다⁠. 은비의 모니터에 1회 첫 컷이 떠 있었다⁠. 감나무 두 그루⁠, 전봇대⁠, 그리고 골목 끝의 남색 정장⁠. 은비는 스포이트로 아스팔트 색을 찍어 남색 정장 위에 덧칠하고 있었다⁠.

“⁠툰다락이 지난 회차 수정하래요⁠. 출근남 마흔한 컷 전부 지우래요⁠. 지우고 골목만 남기래요⁠. 저 지금 열아홉 번째예요⁠.⁠”

“⁠내가 할게⁠.⁠”

“⁠언니가요⁠? 언니가 그린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지워야지⁠.⁠”

은비는 의자를 비켜 주었다⁠. 나는 스무 번째 컷을 열었다⁠. 8회⁠, 처음으로 원근 격자 없이 그린 아침이었다⁠. 남색 정장이 감나무 담장 앞을 지나고 있었다⁠. 오른발 끝이 바깥으로 벌어져 있었다⁠. 스포이트로 보도블록 색을 찍었다⁠. 브러시 크기를 남자의 발만큼 줄였다⁠. 발부터 지웠다⁠. 그다음 다리⁠, 서류 가방⁠, 등⁠, 짧은 검은 머리⁠. 사람이 지워진 자리에 보도블록 줄눈을 이어 그렸다⁠. 줄눈이 끊긴 데 없이 이어지자 컷은 처음부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아침이 되었다⁠.

“⁠언니⁠, 사람 빠지니까 골목이 더 무서워요⁠.⁠”

은비 말이 맞았다⁠. 빈 골목은 누가 들어올 것처럼 보였다⁠. 나는 스물한 번째 컷을 열었다⁠. 마흔한 번째까지 지우는 데 세 시간 사십 분이 들었다⁠. 다 지우고 나서 저장 버튼을 누르기 전에 원본 파일을 한 번 더 열어 보았다⁠. 원본 속 남자는 아직 걷고 있었다⁠. 원본은 지우지 않았다⁠. 하늘에게 사진을 지우지 말라고 부탁한 날이었다⁠.

*

12월 2일 수요일 오전 열한 시⁠, 등기가 또 왔다⁠. 봉투가 공소장보다 두꺼웠다⁠. 「⁠서울서부지방법원 · 소장 부본 · 손해배상(⁠기⁠)⁠」⁠. 원고 김도훈⁠, 피고 윤예원⁠. 청구 금액 삼천만 원⁠. 청구 원인은 여섯 장이었다⁠. 초상권 침해⁠, 사생활 침해⁠, 스토킹으로 인한 정신적 손해⁠. 맨 뒤에 증거 목록이 있었다⁠. 갑 제1호증 「⁠골목 끝 집⁠」 캡처 마흔한 장⁠, 갑 제2호증 진단서⁠, 갑 제5호증 한마디 게시글⁠. 나는 목록을 손가락으로 따라 내려가다가 아홉 번째 줄에서 멈췄다⁠.

「⁠갑 제9호증 원고 작성 메모(⁠2026⁠. 4⁠. 20⁠.⁠) · 피고 신원 확인 및 소송 준비 경위⁠」

메모는 A4 한 장을 스캔한 것이었다⁠. 손글씨였다⁠. 오른쪽으로 살짝 기운 글씨⁠, 길게 내려온 세로획⁠. 지혜 사무실 상자 옆면에 있던 「⁠담당 김도훈 대리⁠」의 글씨였다⁠.

「⁠4/20 확인⁠. 3층 302호 창 = 「⁠골목 끝 집⁠」 배경 담당⁠. 윤예원(⁠26⁠)⁠. 작업실 수박밭(⁠합정⁠)⁠. 근거⁠: 작가 SNS 작업실 사진 창밖 간판⁠, 1⁠~12회 아침 컷 시점 = 302호 창 높이⁠. 손해배상 소장 초안 작성 완료⁠. 제출 보류⁠. 사유⁠: 확인 더 필요⁠」

나는 메모를 들고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었다⁠. 종이를 블라인드 날개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대 보았다⁠. 볼펜이 종이를 눌러 생긴 자국이 비쳤다⁠. 맨 끝 「⁠확인⁠」 두 글자가 다른 글씨보다 깊게 눌려 있었다⁠.

전화를 거는 손가락이 번호를 두 번 틀렸다⁠.

“⁠지혜야⁠. 소장 왔어⁠. 김도훈이 민사를 걸었어⁠. 삼천만 원⁠.⁠”

“⁠알아⁠. 나도 지금 보고 있어⁠. 법원에서 사건 연락이 왔어⁠. 갑 제9호증 봤어⁠?⁠”

“⁠지금 보고 있어⁠.⁠”

“⁠예원아⁠. 4월 20일이야⁠.⁠”

지혜의 목소리 너머로 복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지혜는 기록을 넘기며 하나씩 짚었다⁠.

“⁠김도훈이 가로등 밑에 처음 온 건 4월 9일⁠. 그리고 열하루 뒤인 4월 20일에 네 이름⁠, 나이⁠, 작업실⁠, 302호를 다 알았어⁠. 소장 초안까지 썼어⁠. 법으로 할 준비가 다 돼 있었어⁠. 근데 안 냈어⁠. 확인이 더 필요하다고 써 놓고⁠. 빨래방 결제 일흔 번 중에 4월 20일 뒤가 예순여섯 번이야⁠. 4월 20일부터 9월 29일까지 다섯 달 넘게⁠, 누군지 다 아는 사람 창 밑에 예순여섯 번 갔어⁠.⁠”

“⁠왜 이걸 냈어⁠? 자기한테 불리한 걸⁠.⁠”

“⁠소송을 오래 준비했다는 걸 보여 주려고 낸 거야⁠. 4월부터 법으로 하려고 했다는 거⁠. 그러니까 손해가 4월부터 컸다는 거⁠. 김도훈 대리는 법으로 읽히는 건 다 읽는 사람이야⁠. 근데 이건 못 읽었어⁠. 사람으로 읽히는 건⁠.⁠”

나는 메모의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제출 보류⁠. 확인 더 필요⁠. 김도훈은 4월 20일에 법으로 가는 문 앞까지 갔다⁠. 문을 열지 않고 확인하러 가로등 밑으로 갔다⁠. 다섯 달 동안 예순여섯 번⁠. 10월 23일 밤 가로등 밑에서 들은 말이 메모 글씨 위에 겹쳤다⁠. 결정문이 지켜지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지혜야⁠. 이거 경찰에 내도 돼⁠?⁠”

“⁠내 고소 사건 증거로 낼 거야⁠. 오늘⁠. 김도훈이 자기 손으로 쓴 거라서 아무도 지어냈다고 못 해⁠.⁠”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 날개 하나를 눌렀다⁠. 낮 열한 시 사십 분의 가로등은 불이 꺼져 있었다⁠. 빨래방 3번 건조기는 멈춰 있었다⁠. 4월 20일 밤에도 남자는 왔다⁠. 둘째 권 스케치북 4월 20일 장에 내 글씨가 있었다⁠. 「⁠4/20 23⁠:10⁠~23⁠:50⁠. 오늘도 위⁠. 오른발 바깥으로⁠」⁠. 같은 날 낮에 김도훈은 내 이름을 종이에 썼고⁠, 같은 날 밤에 나는 김도훈의 발을 종이에 그렸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끝집러 ·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나오늘 책방